아버지의 눈빛
--김재기의 시세계
반경환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본디 착하다는 성선설의 주창자이며, 남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자신의 옳지 못한 행실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한 행실을 미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겸손하여 타인에게 양보하는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 잘,잘못을 분별할 줄 아는 시비지심是非之心 등, 이 4가지 마음(사단四端)을 역설하기도 했었다. 측은지심은 인仁의 단에 해당되고, 수오지심은 의義의 단에 해당된다. 사양지심은 예禮의 단에 해당되고, 시비지심은 지智의 단에 해당된다.
김재기 시인의 신작시, [눈빛], [가늘고 길게], [중환자실], [낚시광], [다시, 오월] 등을 읽으면서 나는 왜, 이 맹자의 사단설을 떠올려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일까? 맹자의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 등은 도덕적 인간의 심성을 역설하고 이 세상에 대한 삶의 찬가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나는 김재기 시인의 신작시, [눈빛], [가늘고 길게], [중환자실], [낚시광], [다시, 오월] 등을 맹자의 반대방향에서 이 세상에 대한 ‘삶의 비가’로서 읽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월 땡볕
코를 땅에 대고 아슬랑거리는 강아지 세 마리
그늘에 엎드려 갓 눈을 뜬 새끼를 쳐다보는
어미 개의 눈빛이 그윽하다
저 잔잔하고 따듯한, 낯익은 눈빛
은발의 상고머리에
회색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입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울긋불긋 옷차림한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낯선 애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
나는 불그레한 얼굴에 수줍은 웃음을 띠고
고개를 수그렸다
다음날 혼자
학교에서 터덜터덜 돌아오던 나를
양지바른 골목 담벼락 아래 기다리던 아버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윽했다
골목에서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에도
담벼락의 그늘 밑에서 나를 지켜보는
눈빛에 은근히 등허리가 시큰거렸다
환갑이 눈앞인 날 얻은 늦둥이
얼마나 가슴이 무거웠을까
노을 속에서 어린 자식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빛
어미 개의 눈에 오롯이 묻혀 가고 있다.
----[눈빛] 전문
김재기 시인의 [눈빛]은 맹자의 사단설로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시이며, 그 측은지심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피어오르고 있는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때는 “오월 땡볕”이고, “강아지 세 마리” 곁의 “어미 개의 눈빛”을 바라보면서, 그는 이제 까마득한 지난 날을 떠올려보게 된다. 아니, 그는 “어미 개의 눈빛이 그윽하다/ 저 잔잔하고 따듯한, 낯익은 눈빛”이라는 시구에서처럼, 그 “어미 개의 눈빛”에 감전되었던 것이고, 따라서 그는 까마득한 지난날의 초등학생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옛날 시인은 “은발의 상고머리에/ 회색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입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었고, “울긋불긋 옷차림의 아주머니들”과 “낯선 애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에서, “나는 불그레한 얼굴에 수줍은 웃음을 띠고/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 시인은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과 환영 속에 초등학교를 입학하지 못했던 것이고, 왜, 그것이 수줍어서 그처럼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하게 되었던 것일까? 아버지가 젊으면 자랑스럽고 미래의 희망이 있지만, 아버지가 늙으면 부끄럽고 미래의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는 힘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고, 아버지는 젊고 건강하기 때문에 그 어린 아이가 홀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고, 이 자연스러운 삶 속에서 만인의 축복과 환영이 싹트게 된다.
하지만, 그러나 그 아버지는 “은발의 상고머리”에 “환갑이 눈앞인 날 얻은 늦둥이”의 아버지에 지나지 않았고, 이것이 수오지심의 씨앗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은 ‘인간 100세’의 장수의 시대이지만, 시인이 초등학교를 입학했던 1950년대에는 우리 한국인들의 평균 수명이 50세 전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수명은 평균 60세 전후가 가장 알맞은 것이고, 이 자연의 순리를 인위적, 혹은 생명공학적으로 거역한 것이 오늘날의 초고령인들의 삶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젊음은 싱싱하고 아름답지만, 늙음은 더럽고 추하다. 빨리 죽는 것은 애국愛國하는 것이고, 모든 자식들을 다 효자로 만드는 것이다. 1950년대의 환갑은 오늘날의 80세에 가깝고 대부분이 그 생식능력을 상실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어린 아이의 출생의 비밀이 “환갑이 눈앞인 날 얻은 늦둥이”라는 시구 속에는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어린 아이의 수오지심을 작용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왜, 측은지심이 아닌 수오지심이 되었던 것일까? 어린 아이는 자기 자신의 또래의 아이들에 반하여 늙은 아버지를 두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아버지를 부끄러워했던 것이고, 그 아버지는 또한 그 아들이 불륜의 씨앗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 아들의 훌륭한 보호자가 되어주지 못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자기 자신에 대한 미움이 앞서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늙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 보호자가 될 수 없는 아버지와 보호자가 필요한 아들, 비정상적인 아버지와 축복받지 못한 아들, 잘못된 삶과 잘못된 탄생----. 김재기 시인의 [눈빛] 속에는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얽혀 있고, 그 관계가 수오지심과 측은지심으로 넘나들게 된다. 어린 아들은 늙은 아버지를 미워하고, 늙은 아버지는 자기 자신의 행위를 미워하는 한편, 그 어린 아들을 가엾고 불쌍하게 여긴다. 다른 한편, 이제는 어느덧 아버지의 나이가 된 시인은 “강아지 세 마리를 바라보는 어미 개의 “저 잔잔하고 따듯한, 낯익은 눈빛” 속에서 그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측은지심, 즉, 어느덧 사랑으로 변모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환갑이 눈앞인 날 얻은 늦둥이/ 얼마나 가슴이 무거웠을까// 노을 속에서 어린 자식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빛/ 어미 개의 눈에 오롯이 묻혀 가고 있다”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만일 그렇다면 무엇이 축복받은 자의 삶이며, 무엇이 축복받지 못한 자의 삶이란 말인가?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서 축복받은 자의 삶을 살다가 간 자는 어느 누구도 없으며, 불행은 오딧세우스나 알렉산더 대왕과도 같은 문화적 영웅들에게도 그 구멍을 백 군 데도 더 뚫어놓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대왕이나 부자의 탐욕이 치명적인 흠집이 되고,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가 되는 지옥 속의 삶’이 그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었던 것일까? 그리스 신화 속의 실레노스의 말대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삶이고, 곧바로 죽어버리는 것이 차선의 삶일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그토록 미워하고 부끄러워했었지만, 이제는 나 역시도 그 아버지와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다람쥐는 다람쥐의 쳇바퀴를 벗어날 수가 없고, 아들(인간)은 인간(아버지)의 쳇바퀴를 벗어날 수가 없다. 시인이 “환갑이 눈앞인 날 얻은 늦둥이/ 얼마나 가슴이 무거웠을까”라는 시구에서처럼, 그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것은 그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을 때이고, 따라서 시인은 측은지심, 즉, 그 아버지를 더없이 가엾고 불쌍하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측은지심은 그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사양지심, 즉, 사후복종과도 같은 예의(존경)로 이어지고, 또한 이때의 사양지심은 이 세상의 삶의 이치를 분별할 줄 아는 시비지심, 즉, 더없이 깊고 깊은 삶의 지혜로 이어진다. 인생은 덧없고 쓸쓸하며, 이 불행한 삶은 그 전염력이 그 어떤 돌림병보다도 더 강하다.
불행은 비극의 진수이며, 불행한 삶만이 더없이 아름답고 장엄하다. 이 불행한 삶의 노래가 이 세상의 삶의 찬가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나는 아버지의 잘못된 삶을 저주하고 증오했지만, 그러나 나는 그 아버지의 삶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산다는 것은 불행에 빠졌다는 것이고, 불행에 빠졌다는 것은 [가늘고 길게]라는 시에서처럼,
무쇠처럼 살았던 P씨의 친구
서른도 넘기 전 회사를 그만둔 후
대박을 꿈꾸며 몸부림쳤다
몇 번의 창업이 물거품이 되자
좌절과 슬픔에 무릎을 꿇었다
는 것이다. “허리띠를 풀어 화장실 변기통에 드리우고” “낚시질”을 하는 K와 “고기 많이 잡았느냐고” 물었다가 오히려, 거꾸로 그 낚시바늘에 물려서 “감응정신병感應精神病”으로 입원을 하게 된 정신과의사 P([낚시광])도 마찬가지이고, “어둠침침한 중환자실 정강뼈를 뚫고 줄을 걸어/ 매달아 놓은 다리 한 짝에/ 몸의 중심을 빼앗겨버린 86세 김 할머니”([중환자실])와 “어두운 밤에 반뜻거리는 먼뎃불빛 따라/ 세월의 들판을 날아다니는/ 떠돌이새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다시, 오월]의 시적 화자도 마찬가지이다.
건강, 미모, 부는 인간적 행복의 덕목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다 갖춘 인간은 거의 없으며, 부자 역시도 그 탐욕 때문에 더욱더 마음이 가난한 거지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행복은 머나먼 저곳이나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마음 속의 행복을 향유하고 있는 인간은 없다. 인간의 의식은 불행한 의식이고, 이 불행한 사람들의 노래가 삶의 찬가가 아닌 ‘비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사망은 탄생의 결과이고, 죽음은 모든 불행의 만병통치약이다.
김재기 시인은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지낸 자연과학자이기도 했지만, 매우 뒤늦게 {서정문학}으로 등단한 늦깎이 시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나 어린 강아지와 어미 개를 통해서 자기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대비시키고, 그 아름답고 슬픈 ‘부성애의 미학’을 연출해낸 것은 최고급의 시의 제전의 산물에 가깝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린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불행에 빠트렸다는 것이고, 불행에 빠트렸다는 것은 변기통 속에서 고기를 낚게 하는 짓과도 같은 것이다.
모든 아버지는 죄인이며, 모든 불행의 사주자使嗾者일는지도 모른다.
눈빛, 눈빛, 어미 개의 눈빛,
눈빛, 눈빛, 우리 늙은 아버지의 눈빛----.
아아,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우리 늙은 아버지의 눈빛에는 얼마나 더없이 간절하고 자비로운 사랑이 담겨 있는 것일까?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쓰디 쓴 회한과 만고풍상의 삶을 견디어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