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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을 질문들, 찾을 수 없을 답변들
김지윤
1. 디폴트값
우리는 한동안 재난의 시기를 건너왔다. 모든 존재가 사실 고독하다는 것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코로나 19는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외로움으로 몰아넣었다. 코로나에 걸리지 않아도, 코로나 시대는 수많은 사람들을 파멸로 몰아넣었고 전염병으로 인한 불안과 거리두기 정책은 사람들의 고립을 심화시켰다.
그러나 사실 코로나 이전에도 이미 우리는 단절되어 있었다. 노리나 허츠의 책 제목처럼 이 시대는 ‘고립의 시대’다. 허츠는 코로나 사태와 거리두기정책이 세계적 불황을 초래하기 이전에도 현대인은 이미 원자화되어 있었고, 주변인들에게 관심을 갖는 대신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에 몰두하며 공감적으로 의사소통하는 능력이 저하되었다고 평가한다. 초연결사회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더 깊은 고독에 점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난상황 그 이전에도 삶의 곳곳에는 늘 불행이 편재해있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위기상황 속에 함께 재난을 겪는다는 사실로 인해 싹틀 수 있는 연대감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개인이 삶에서 마주치는 개별적인 불운은 더욱 막막하고 외로운 상황으로 한 사람을 몰아넣는다. 쇼펜하우어는 회피 가능한 범위 안에서 삶이 우연히 고통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이 곧 고통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더 큰 문제는 삶이 고통이라는 사실보다, 그것을 극복할 의지가 소멸되고 있다는 것이다. 불행 속의 인간이 투지를 상실하고 그저 체념할 때, 불행의 조건들은 ‘디폴트값’이 되어버린다. ‘디폴트값’은 어떤 프로그램이 사용자에 의해 지정되어 있는 맞춤 설정이 존재하지 않을 때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사용하게 되는 '미리 지정되어 있는 기본값'을 의미한다. 차이와 변수를 반영하는 ‘사용자 지정 설정값’과는 달리 ‘디폴트값’은 획일적으로 적용되어 고정된 값이다.
정끝별의 「디폴트값」(문학사상 2022년 10월호)은 “심해에 빠져/ 산 채로 해저에 파고들어 저를 묻고 적을 묻”는 무거운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삶의 본질이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디폴트값’이라면, 삶을 나아지게 하려는 시도들이 좌절되어 운명에 패배하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는 순간마다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 기본값을 자동으로 사용하게 되며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만다. 체념함으로써 얻는 고요하고 무료한 일상이 평화라고 생각하면서.
시 「디폴트값」 속에는 여러 질문이 던져진다. “얼마나 오래 혼자인가요?/ 얼마나 오래 말을 해본 적이 없나요?/ 얼마나 오래 날짜와 날씨와 요일과 요즘을 잊고 있나요?/ 얼마나 오래 거울에서 자기 얼굴을 보지 않나요?/ 얼마나 오래 자기가 여기 있다는 걸 누구도 모르나요?/ 얼마나 자주 자기를 웃어넘기나요?/ 얼마나 자주 아무나의 말과 눈빛에 베이나요?/ 얼마나 자주 이가 상할 정도로 이를 악물고 있나요?/ 얼마나 자주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얼마나 자주 칼날에 혀를 대보나요?” 이러한 질문들은 숙고하거나 대답할 겨를도 없이 끝없이 빠르게 던져지고 우리는 끝나지 않을 재난과 빠져나갈 수 없는 수렁에 들어가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되어 결국 답을 찾기를 포기하게 되곤 한다. 그저 혼자이고, 그저 침묵하고, 그저 자기 얼굴을 보지 않고, 그저 자기를 웃어넘기고, 그저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칼날에 혀를 대보며 조금만 더 혀를 움직이면 칼에 베일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고 혀에 머금고 있던 언어들을 조용히 거두어들인다.
그러고 나면 심해처럼 깊은 저 아래로, 점점 더 빠져 들어간다. 헤엄치기를 멈추는 순간,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 이후로는 그저 끝없는 침잠만이 기다린다. 그러니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의 여정 속에서 비록 지치고 막막해지더라도,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침묵과 무기력에 순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디폴트값’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인데. 새로운 사용자 설정값을 지정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눈물에 부력이 생기고/ 가슴에 부레가 차올라” 다시 떠오르는 별도의 설정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언제나 그 바닥에서 떠오르는 네가 있”는 풍경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떠오를 수도 있게 될 것이다.
2. 하나의 잎
문학은 세상에 ‘없는 것’들을 ‘있는 것’들로 바꾸어놓기 위해 존재한다. 시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갱신하며 새롭게 쓰이고 다르게 읽혀진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어느 정도의 결핍과 결여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시인 나짐 히크메크의 「진정한 여행」의 한 구절이다. 약간의 부족함이 언제나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함을 달성하면 더 이상 채우거나 변화시킬 여지가 사라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당연함’이 되어버린다. 어떤 것이 ‘기본’이라고 여겨지면 쉽게 규범화된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을 불규칙, 비정상, 예외라고 규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시도, 노래도, 삶도 늘 ‘당연함’을 벗어나려고 하며, 그것은 곧 완전함에 저항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페르시아의 흠’이라는 것이 있다. 페르시안 카펫 장인들이 아름다운 카펫을 만들 때 반드시 의도적으로 작은 흠을 만들어 놓는다는 것은 예술의 중요한 특징- 부족함을 남김으로서 완성되는 아이러니- 을 잘 보여준다. 예술 작품이 예술이기 위해서는 무언가 빈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읽는 자가, 보는 자가, 듣는 자가 마저 채울 수 있도록 하는 여백. 예술은 진정한 의미에서 ‘완결’될 수 없다. 한 작품으로서의 완성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의미는 끝없이 생산되고 변형되는 것이어야 한다. 의미가 완결되어 단일한 의미로 고정되어버리는 순간, 예술성은 사라지곤 한다. ‘화룡정점’의 고사는 사전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끝내어 마무리 한다’는 뜻이라고 풀이되지만, 사실 예술의 진정한 완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술이 예술로서의 본질을 잃게 된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용의 눈동자를 그리자 용은 날아가 버렸다. 이것은 어쩌면 ‘부족함을 남겨놓지 않는 예술’, 즉 재현과 현실간의 거리가 존재하지 않고,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는 빈틈이 전혀 없는 예술이란 결국 예술로의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니의 시 「잎이 너를 찾아낼 때까지」(문학동네 2022년 가을호)는 나에게 시 쓰기에 대한 사유를 담은 시로 읽힌다.
어느 밤 나뭇가지 하나가 너의 책상 위에 놓인다. 너는 그것을 매일매일 바라본다. 그것은 죽은 것일까. 다만 잠들어 있는 것일까. 죽은 것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은 생애 내내 어떤 빛에 매달려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빚 없는 빛에 시달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어릴 적 너는 아무도 몰래 커튼 뒤에 숨어 있기를 좋아했다. 이제부터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맞은편 벽지 위에서 어른거리는 빛 그물도 너와 함께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세상에 없는 사람의 마음 구멍에도 때때로 빛과 공기가 드나들어서 너의 커튼은 활짝 열리곤 했다. 시절의 어느 날에는 작은 나뭇가지가 너의 손에 쥐어져 있기도 했는데. 너는 걷는다. 너는 너의 나뭇가지와 함께 걷는다.
나뭇가지는 가리킬 수 있다.
나뭇가지는 마주칠 수 있다.
나뭇가지는 넘어질 수 있다.
나뭇가지는 흔들릴 수 있다.
나뭇가지는 휘두를 수 있다.
나뭇가지는 기울일 수 있다.
나뭇가지는 바닥에 닿을 수 있다.
나뭇가지는 누군가의 손과 맞닿을 수 있다.
부러지기 쉬운 나뭇가지 하나가 그토록 큰 위안을 준다는 사실이 너는 놀랍고도 슬펐으므로. 너는 어린 날의 나뭇가지를 다시 불러들인다. 이제는 없는 나뭇가지의 잎을 쓰다듬는다. 녹색이었다가 갈색이었다가 담회색이었다가 회백색이었다가 계절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하나의 잎을.
-이제니, 「잎이 너를 찾아낼 때까지」(문학동네 2022년 가을호) 부분
나뭇가지는 부러지기 쉽다. 그러나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이 오히려 나뭇가지를 자유롭게 만든다. 나뭇가지가 나무에 강건하게 붙어 있는 것이라면 나뭇가지는 속박된 존재로서 하나의 위치와 하나의 기능을 부여받은 채 나무에 영구적으로 예속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뭇가지는 약하기 때문에 쉽게 파손되고, 부서지는 순간 자유를 얻는다.
“어느 밤 나뭇가지 하나가 너의 책상 위에 놓인다. 너는 그것을 매일매일 바라본다.”는 문장에서 책상 위에 놓인 ‘나뭇가지’는 매일 마주하는 백지 위에 시인이 시적으로 구현해내야 하는 대상을 상징한다. 죽은 것처럼도, 잠들어 있는 것처럼도 보이는 나뭇가지는 실제의 대상에서 떨어져 나온 이미지에 대한 비유다. 대상의 속성을 가진 일부이면서도 전혀 다른 독립적 존재이기도 하다. 나뭇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을 때는 나무에 속해있는 하나의 줄기이지만 나무와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나무와 독립된 개별적 존재가 된다. 따라서 비유와 상징, 심상 등으로 표현된 대상은 원래의 대상과 멀어지거나, 그 대상을 벗어나기도 한다. 그러니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새로운 잠재성을 가지고 있기에 ‘잠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시에서 시인의 2인칭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너’는 나뭇가지를 세심히 관찰한다. “너는 너의 나뭇가지와 함께 걷는다”는 문장처럼 시인은 자신의 ‘나뭇가지’와 함께 한편의 시를 만드는 여정을 떠난다.
나무를 떠나는 순간부터 나뭇가지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시인의 표현에 따르면, “나뭇가지는 가리킬 수 있다./ 나뭇가지는 마주칠 수 있다./ 나뭇가지는 넘어질 수 있다./ 나뭇가지는 흔들릴 수 있다./ 나뭇가지는 휘두를 수 있다./ 나뭇가지는 기울일 수 있다./ 나뭇가지는 바닥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나뭇가지는 “누군가의 손과 맞닿을 수 있다.” 이 무수한 가능성들은 부서져 나무에서 떨어져 나왔기에 얻게 된 것들이다.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서진 나뭇가지는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에 위안을 준다. “부러지기 쉬운 나뭇가지 하나가 그토록 큰 위안을 준다는 사실이 너는 놀랍고도 슬펐으므로” 어린 날의 나뭇가지를 불러들여 “이제는 없는 나뭇가지의 잎을 쓰다듬는다.” 나뭇가지에는 더 이상 잎이 없지만, 물질성을 버린 순간 “녹색이었다가 갈색이었다가 담회색이었다가 회백색이었다가 계절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하나의 잎”이 상상될 수 있다. 이 나뭇가지는 함께 걷는 시인보다 더 걸음이 빠르기에 시인은 그것을 따라잡기 어렵다. 메를로-퐁티가 앙드레 마르샹을 인용하며 “나는 숲 속에서 숲을 바라보는 것이 내가 아니었다는 느낌을 여러 번 받고는 했다. 나는 나무들이 나를 바라보며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느꼈다.”고 한 것처럼 내가 대상을 바라보는 것인지 대상이 나를 바라보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시인은 그 혼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시를 쓴다. 모든 대상은 “보는 동시에 보여지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가시적인 객관적 진실이란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시는 이런 문장들을 남긴다. “나무의 중심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그것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어디로든 흘러갈 수 있다. 너는 걷는다. 너는 너의 진실과 함께 걷는다. 하나의 잎이 너를 찾아낼 때까지 너는 너를 걸어야 한다.” 시는 말한다. ‘없는 잎’이 ‘너’를 찾아낼 때까지 나뭇가지와 함께 걸어라. 그것은 결국 너의 진실과 함께 걷는 일이 될 터이니.
3. 상실의 자리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무지와 오해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그 사람을 다 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기에 늘 불안하다. 누군가의 생각을 다 읽을 수 있는 기술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수 없을지 모른다. 조금씩 잘못 읽기 때문에,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 모든 것이 낱낱이 밝혀지고 민낯을 다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면 신비와 아름다움은 상실되기 마련이다. 불안이 욕망을 지속하게 한다. 그러므로 욕망은 언제나 희열이면서 고통이다. 심지어 누군가를 상실한 이후에도 욕망은 계속되어 괴로움을 주기도 하는데, 결핍이 욕망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불안의 한 가운데서 계속되고, 상실한 이후 더욱 강렬해지는 욕망은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이면서도 또한 사랑을 궁극적으로 완성될 수 없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신철규 시 「파도와 민박」(현대문학 2022년 9월호)에서 욕망은 눈부신 한낮의 태양으로 비유된다. “한낮의 태양이 눈부시게 빛난다/ 새 한 마리가 태양 속으로 들어간다/ 부러진 칼날”이라는 표현처럼 눈부신 매혹은 그것에 매료된 존재를 끌어들여 그 불길에 태워버리곤 한다. “우리는 지지직거리며 팽창하”다가 “전자레인지 속에 든 번질거리는 고기처럼” 결국 본래의 색과 신선함을 잃어버리고 굳어져 버린다. “새하얀 백사장에 발을 담”그는 것처럼 사랑에 빠져들었을 때는 “쌀독에 손을 담글 때처럼/ 처음엔 쉽게 들어가다가 어느새 딱딱하게 굳은 벽과 만난”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들 사이에 더 이상 “틈이 없어진 것이다.” 여백과 비밀이 없어지면 사랑은 지속될 수 없게 된다. 한때 사랑했던 두 사람은 틈이 없어진 모래 속에 갇히고 만다. “모래에 갇힌 사람/ 모래는 무겁고 모래의 경사면은 완강하다/ 한 치의 오차가 없다/ 모래들끼리 결속되어 있다/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다// 모래 속에서는 허우적거리면 안 된다/ 계속 밑으로 가라앉는다”고 시적화자는 말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틈이 사라진 모래알들 사이에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사랑은 침몰한다.
이미 사랑을 잃은 빈 자리에서 그리움이 시작되고, 다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오른편에 누운 사람이 없는데도 나는/ 여전히 오른쪽으로 돌아누워 잔다/ 가끔 왼쪽으로 누워 몸을 웅크리면/ 내 오른쪽 어깨를 지그시 당기는 손바닥을 느낀다.” 시적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없는 곳으로 몸이 기울어지는.”
“더 깊이 가라앉을수록 쪼그라드는” 마음은 “결국엔 납작해져서 평평한 철판이 되겠지”만, 시적화자는 이미 잃어버린 사람의 빈 자리에서 희미하게 복원되는 사랑의 감각을 느낀다. “흔들림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상실은 질문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우리가 무언가를 묻는다는 것은 답을 얻고자 하는 욕망의 행위다. 김지녀의 시 「음」(청색종이 2022년 가을호)은 무언가가 상실된 빈 자리에 생기는 질문들에 관한 시다.
눈사태가 났고
조난당한 사람의 신호가 끊겼다
음, 다음 장소를 고민하는 동안
의자들은 버려졌고
계약 기간 만료를 알리는 서류가 도착했다
음,
하고 싶은 말들이 손바닥에 닿자마자 녹는 눈처럼
금세 잊어버려졌다
예열 없는 질문은 좋았다 음,
하고 있는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함박눈 속에 같이 서 있는 것처럼 설레게 했다
-「음」 부분
조난당한 사람과 장소가 바뀌어 버려진 의자들과 계약만료 서류들은 모두 우리를 고민하게 하는 것들이다. 조난당한 이는 어디에 있는가? 장소는 어디로 변경해야 하는가? 계약기간이 끝난 이후는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질문이 생겨나게 된다.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일 때 우리에게는 ‘음’이 필요해진다. ‘없는 곳’에 깃드는 이 질문들은 대답을 유예시키며 “하고 싶은 말들이 손바닥에 닿자마자 녹는 눈처럼/ 금세 잊어버려”지게 만든다. 오랜 시간 대답을 고민하고 언어를 고르는 동안 특정한 답변이 ‘정답’이 되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정답’은 다른 목소리들을 덮고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뜻을 세상에 가득 차게 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가득 찬 상태’가 되지 않도록 균열을 내며 자꾸만 어딘가에 ‘틈’을 만들어왔다. 어느 시대에나 생기곤 했던 확고한 ‘정답의 권력’은 다른 답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수많음 “음”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누군가가 자기만의 대답을 찾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게 된다. 누군가가 “예열 없는 질문”을 하고, “‘음’하고 있는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시적화자에게는 설레는 일이 된다. 대답을 유예하며 기다리는 동안 비록 “함박눈 속에 같이 서 있는 것처럼” 거센 눈발에 가려 비록 눈앞의 미래가 보이지는 않는다 해도. ‘음’하고 그 대답을 찾는 동안만이라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그러니까 이제 문학이란
사랑하기 위해 오해와 무지가 필요한 것처럼, 글을 읽는 행위를 사랑하기 위해서도 오독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아는 것들과 모르는 것이 공존할 때 새롭게 이해할 가능성들이 열리기 때문이다. 다 말하지 않은 무언가를 남겨 놓아야 계속된 대화가 가능해진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텍스트 그 자체보다 말과 말 사이에 남기는 질문의 깊이가 더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읽는 사람에게 해석의 여지를 열어주는 글쓰기, 수많은 오독들이, 다양한 오답들이 가능하게 하는 글쓰기여야 하는 것일 터이다.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일화에서, “말을 뒤섞어 놓고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고 신께서 말씀하신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정답도 오답도 없다면 ‘무수한 답’들이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다르게 읽고 다르게 쓸 수 있는 빈틈들, 재해석할 수 있는 행간과 빈 칸들이 있어야 변화는 가능하다. 해석은 그저 세상의 저 많은 텍스트들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끝나지 않을 욕망일 뿐이다.
김건영 시「짐Gym, 그리고 짐」(애지 2022년 가을호)은 부정성으로 가득한 세상과 그 한 복판에서 묻는 문학의 존재 이유에 대한 시다.
“도시란 무엇이냐/ 발악을 기르고 마른 사람은 비만이 된다/ 땅을 접어 건물을 올리고/ 날카로운 검은 권력에 휘둘려 상하를 가르고……/전무후무 후안무치 하수도지/ 무릇 선생은 대가리부터 썩는 법/ 내가 독으로 깃들겠소/ 도대체 시란 무엇이냐”
“도대체 시란 무엇이냐”는 통렬한 질문은 타락해가는 도시문명 속에서 “날카로운 검은 권력에 휘둘려 상하를 가르고” 권위적이고 부패한 지식으로 가득한 “선생은 대가리부터 썩는” “전무후무 후안무치”의 세상의 위계를 비웃는다. 시인은 “내가 독으로 깃들겠소”라고 선언한다.
상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정답이라 우기는 것들을 ‘정답’으로 인정하고 읽어야만 한다면, 그래서 하나의 문명, 하나의 독점적인 생각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다면 더 이상 다름을 용납하지 않기에 모든 가능성은 소멸될 수밖에 없다.
“이미지옥Image獄”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이미 지옥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문학도 존재 이유를 잃어가고 있다. 이미지들은 감옥에 갇힌 것처럼 도식화되곤 하고 세상을 자신의 언어로 번역해내려고 하는 시인의 시도도 “ 이 번역은 오류, 오류입니다”라는 구절처럼 계속 실패에 부딪친다. 그러나 그는 이미지를 해방시키고, 세상을 자기 식대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그치지 않는다. 말장난처럼 계속되는 문장들도 그러한 시도의 편린들이다. 그는 계속 질문한다. “뼈다귀 같은 물음표 대신 불음표를/ 물음표 대신 울음표를/ 귀신은 질문을 한다/ 질문하는 자는 모두 귀신이다”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우회전愚回轉 만세 우회전愚回轉 만만세” 라는 말처럼 계속해서 ‘어리석은 회전’을 거듭하며 자꾸만 더 먼 길로 돌아가려는 것은 정해진 최적의 행로로 안내하는 삶의 모든 이정표들을 무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문학이란 무엇인가/ 무당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하면 귀신에게 편지를 받는다” 라는 부분에서처럼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질문은 “무당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병렬로 놓이며 등가관계가 된다. 문학은 곧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며 그것이 귀신에게 편지를 받는‘ 것 같은 과정이라면 글을 쓰는 사람은 마치 무당과 같다는 것이다. 무당이 귀신과 상통하듯이 문학은 삶의 신비들과 소통하는 통로가 되어주며 미지의 것들과 교감할 수 있게 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질문과 무수한 대답들이 이어지거나 중첩된다. “시가 좀 시끄럽죠 이게 시냐 식초냐”라면서도 이 시는 그 ’시끄러움‘이 문학의 본질이라는 생각을 내보이고 있다. 이 시 속의 구절처럼 “그러나 누구나 가슴속에 삼도천 하나쯤은 있는 거잖아요”라는 것을 인정하면 모두의 목소리가 뒤섞이는 이 뜨거운 질문들의 도가니는 곤혹스러우면서 매혹적인 “그저 아름다운 샤먼초가”가 될 수 있다.
기쁨을 섬기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하게 만난다. 황금과 쾌락과 즐거움을 섬기기는 쉽다. 즐거움은 다들 기꺼이 나누려하며 빛나고 북적거리는 곳은 눈에 잘 띄어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인은 보이지 않는 곳, 외롭고 고적한 곳에서 알아들을 수 없게 뒤섞여 나오는 신음소리 같은 질문들에 더 관심을 갖는다. 슬픔이란 대개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가 난해하고 낯선 방식으로 터져 나오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둡고 그늘지고 숨겨진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질문이 멈춘 곳에는 침묵과 순응만이 남는다. 욕망이 멈춘 상태는 삶보다는 죽음에 가깝다. 그러니 결핍이 인간의 꿈과 열망을 지속하게 만드는 계기이자 원동력이 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수난과 절망은 희망을 필요로 한다. 완전한 만족, 흠 없는 성취, 불만이 없는 행복의 상태에서 희망이 생겨날 필요는 없다. 시인은 “질문하는 귀신”이 되어 계속해서 희망의 가능성을 묻는다. 또한 그는 날카로운 청력으로 세상의 무수한 질문들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수많은 답변들을 상상한 후, 다시 묻고 또 물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문학이란 무엇인가. 훌륭한 질문이란, 아직 답변되지 않은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