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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1일 주일 낮
딤후3:1~5
말세에 당하는 고통
사람이 태어나 일생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고통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인간 역사 이래 고통을 당하지 않고 평안의 삶만 살다가 인생을 마감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현대3대 종교의 하나인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네팔과 인도의 국경 부근의 한 지역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석가족의 우두머리인 정반왕(淨飯王)이었고, 어머니는 마야 부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났음에도 생로병사의 문제로 고민하던 중 29세에 출가 하여 보드가야 라는 곳의 보리수 나무아래서 샛별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됬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인생과 세상 이치에 대하여 깨닫기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큰 깨달음을 얻기 까지 석가모니는 그 누구보다 인생의 생사화복과 모든 세상 만물의 이치에 대한 갈등이 삼각 했을 것입니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 없이 생과 희만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경은 인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시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전3:19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욥5:7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사람은 꼭 말세가 아니라도 삶 자체는 별로 자랑할게 없고, 모두가 고통일 뿐입니다.
그래서 지혜의 왕 솔로몬은 전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또 전12:8절에도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인생의 모든 것이 고통뿐이라면 성경에서 말씀 하시는 대로 고통뿐일 것이며, 풀과 같고 잠시 뽐내다가 시들어 떨어지는 들풀과 같을 것이며, 짐승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통뿐인 인생이 평안과 기쁨으로 가득하여 만족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과 꿈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고통이 존재하고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고통을 치유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 그리고 만족한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말세에 당하는 고통이 있다고 하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첫째로: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을 두 계명으로 압축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 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이고, 오늘 본문에 말씀하시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의 말씀인가?
전자의 말씀은 사랑으로 섬기는 의미의 사랑이고, 후자는 자기만을 위한 욕심적인 이기주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다 같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웃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주의 적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볼 때, 전자의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삶이고 후자는 세상 사람들이 사는 삶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세상 사람들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안습니까?
그렇다면 말세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오늘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고통이 수반된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이기주의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미움과 공포 두려움이 그 사람의 마음에서 떠날 날이 없습니다.
나에게 손해를 보게 한 사람이 밉고, 나에게 손해보일 사람이 없을까 두렵고, 싸놓은 재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쁘고 평안한 것이 아니라 두렵습니다.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야 할 줄 믿습니다.
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이웃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러한 전주 순복음 전주 성령교회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말세에 고통당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돈을 사랑하십니까?
돈을 좋아 하십니까?
돈을 요구 하십니까?
돈을 필요로 하십니까?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에 매인 사람이고,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을 따라가는 사람이고, 돈을 요구하는 사람은 돈에 굴복하는 사람이고,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돈의 가치를 잘 발견한 사람입니다.
돈이 필요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여러분도 돈이 필요 합니다. 먹는 것도 돈이고, 입는 것도 돈이고, 잠을 자는 것도 돈입니다.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 합니다.
그럼 돈이 살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돈이 있어야 선교합니다. 돈이 있어야 봉사합니다. 돈이 있어야 구제합니다. 돈이 있어야 선한 하나님의 일을 많이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어야 자녀교육을 시킵니다. 돈이 있어야 손자손녀에게 할아버지 할머니 노릇도 합니다. 친구에게 밥한 그릇 이라도 살 수 있습니다.
맘만 있고 돈이 없으면 이런 일들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돈은 필요 한 것입니다.
돈이 있어야 건강도 지킵니다. 산업과 과학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자연 환경은 나빠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합니다. 병들었을 때 병원에 가면 그냥 치료해 주지 않습니다.
당장 이가 하나 잘못 되도 치과에 가려면 돈을 들고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치료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돈은 필요 한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돈이 필요한 곳은 많습니다.
단지 우리는 육신의 희락을 위해서 돈을 필요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역사 속에서도 돈 때문에 가문이 망신당하고 조상까지 망신당하는 일들이 수도 없었지만 오늘 현제 세월호 사건을 통해 뉴스에 나오는 것들을 보면 우라통이 치밀어옵니다.
돈을 더 벌기 위해 안전을 무시 한체 배를 증축하고, 사업을 더 크게 벌리기 위해 세금 포탈을 하고, 더 나아가 자기 희락을 위해 고급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며 사진을 찍어 작품사진이라고 이름 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수 백만원씩 각매 하여 돈을 받는 등 이런 일들이 어디서 오는 것일 까요?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요 또 자기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돈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돈을 좋아합니까? 돈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가정의 평안과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며 그들을 구제하고 섬기기 위해 돈을 필요로 하는 믿음의 사람들 인줄 믿습니다.
다음은: 교만하고 비방하는 사람들 입니다.
교만은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까지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하나의 소설이나, 역사서로 인식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믿습니가.
잠시 있다가 없어질 안개와 같은 존재가 진리 일 수 없습니다.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풀과 같고 들꽃과 같은 존재가 진리 일 수 없습니다.
진리는 오직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오늘도 존재케 하시며, 인간 중심으로 모든 만물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한 분이심을 믿고 그분에게 인생을 의지하며 겸손히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 인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미 겸손한 자들 인줄 믿습니다.
그리고 비방할 줄 모르는 사람들 인줄 믿습니다.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 꿇은 사람이 어찌 사람들을 비방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의 사심을 인정하는 믿음의 자녀들은 절대 다른 사람들을 비방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남을 비방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하는 짓입니다.
순복음 전주 성령교회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절대 교만하지 않습니다. 비방하지도 않습니다.
아멘~~
다음은: 부모를 거역하고 감사가 없고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이 말세의 고통을 당하며 살고 있습니다.
여하튼 나야 어떠하든지 많은 삶들이 요즘 일어나는 시대를 보고 말세라고 일구 동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기근과 지진 그리고 인제와 사고, 달도 별도 우리가 어려서 보던 그때의 모습니 아닙니다.
어려서 아버지가 마당에 멍석을 펴 놓고 옆에 모닥불을 피워가며 옛날 예기를 해 줄때 누워 하늘을 처다 보면 하늘의 별들이 빼곡 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별들이 가득한 하늘을 볼 수 없습니다.
정월 대보름에 달을 보며 토끼가 방아를 찟고 있는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모습도 볼 수 없습니다.
자연 환경을 봐서도 말세인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것저것 말씀하시는데 그중에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닫습니다.
다른 말씀도 말세의 시대를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더더욱 그런 것이 바로 부모에게 거역하는 시대가 됬다는 것입니다.
저의가 어려서만 해도 부모에게 말대꾸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아니 말대꾸 하면 말대꾸 한다고 오히려 꾸중을 듣던가 혼났습니다.
지금 세대에게 그런 말을 하면 오히려 자녀에게 부모가 혼납니다. 잘못하면 자녀에게 꾸중 들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상전이 아니라 자녀가 상전이 됬습니다.
그런 세대가 부모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곰보이건 째보이건 불구자이건. 부자이건 가난이건, 아름답건 밉던 간에, 나를 낳아주신 것으로 부모님께 감사하는 세대가 얼마나 될까?
아마 하나도 없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세대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런 세대가 마지막에 고통을 받는 세대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이라고 하는 이런 세대에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난 감사와 기쁨과 평안의 삶을 살기 위해서 부모의 말씀에 거역하지 말아야 할 줄 믿습니다.
다음은: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사는 사람은 마지막 때에 고통당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무정한 사람의 고통은 불 보듯 뻔합니다.
정이 없는 사람이 순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무정한 사람은 사납습니다. 사나운 사람은 첫째 자기 자신에게 가장 빨리 많이 상처를 주고 살아갑니다.
정이 많은 사람은 거의 모든 일에 온순하고 이해하며, 수용성이 충분합니다.
그래서 남에게 별로 원통한 일을 가지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관대 합니다. 그래서 원통한 일이 있어도 자신의 아픔을 알기에 넓게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평안을 찾아 누리고 살아갑니다.
무정한 사람은 상대방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상대방의 언행이 불편하면 원망을 가집니다.
그리고 원망을 풀지 않으려 합니다. 오히려 모함하려 듭니다.
당신이 그랬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했지 라고 불평을 쏫아 놓고 모함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의 삶이 하루인들 평안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정이 없는 무정한 사람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원통함을 풀지 않고 오히려 모함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아니면 자녀와 부모가 무정함과 원통함으로 묶여서 서로가 서로를 모함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이렇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함으로 돌이켜 정으로 살고 소통으로 살고, 이해와 화해로 사는 순복음 전주 성령교회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은: 배신하고 조급해하고 자만하고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 사람이 말세에 고통을 당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배신하는 사람보다 미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특히 권력 투쟁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또 줄을 잘서야 성공한다는 말을 무슨 지론이나 자기 철학으로 생각하고 사는 사람의 속에는 다분히 배신의 싹이 보여집니다.
동업을 하던 가까웠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배신을 하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어 힘든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이 상당 수 있습니다.
배신할 사람의 행동거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전과는 달리 그의 마음이 조급해 보입니다.
뭔가에 쫓기는 듯이 분주 합니다.
그런 사람의 말은 자만에 꽉 차 있습니다. 자기 능력에 도취돼 있든지 아니면 배신한 후에 나타날 자신의 넉넉한 환경을 생각하며 조급해 하는 마음과 동시에 자만에 말을 합니다.
그 사람의 속마음의 배경을 보면 결코 선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 쾌락에 빠질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인간이 자기 쾌락을 사랑하게 되면 이 사람은 반드시 고통이 음식이 되고 마시는 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남에 눈물내면 내 눈에는 피눈물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배신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 중 배신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도 배신이고, 하나님의 관심 받기를 싫어하는 것도 배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을 배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사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사람이 사람을 배신해도 고통이 찾아오는데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배신하면 그 고통이 어떠하겠습니까?
쾌락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해서는 안 될 줄 믿습니다.
순복음 전주 성령교회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은 절대 하나님을 배신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 마지막 세대에 고통을 안고 사는 사람입니다.
경건이란? 헬라어로 유세베오 라고 하는데, 이 말은 신앙생활을 하다. 경건 생활을 하다. 존경하다. 예배드리다. 라는 말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신앙생활은 하고 있는데 신앙인에게 나타나야할 예수님의 능력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세상 냄새만 풍기며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경건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삶으로 하나님이 언약하신 대로 삶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이 보이면 바로 그것이 능력인 것입니다.
그런 나타나는 신앙의 결정체가 없다면 이는 바로 경건의 모양만 있지 실제는 없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형식적인 신앙, 그저 교회만 왔다갔다 하는 마당만 밟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생활로는 말세 지말에, 이 시대가 받는 고통에서 피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전주 성령교회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까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말세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끝이라는 말이지요,
세상이 끝날 날이 오늘일지 내일 일지 아니면 천년 후가 될지, 언제일지는 이 세상 사람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언 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한사람 한 사람 개개인의 마지막인 종말은 반드시 일백년 안에는 올 것입니다.
세상 종말이건 나 개인의 종말이건 종말의 때가 가까운 이 시점에 행여 고통을 당하는 삶을 살고계신 성도님이 계시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깨닫고 회개하여 돌이켜 경건의 모양만 갖춘 형식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는 축복된 삶을 사시고,
무정한 사람이 되지말고 정이 많은 사람으로 사시고, 사람도 하나님도 배신하지 말고 늘 화목하게 화합하며 사시고, 자기 자랑에 빠지지 마시고, 돈을 사랑하지 마시고, 좋아 하지도 말고, 요구하지도 말며, 필요로 하시는 삶을 사시고, 부모를 거역하지 말고, 나아 주신 것을 감사하며 삶으로
세상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자녀들까지, 지금 세상 벼랑 끝이 왔다고 큰소리로 이곳저곳에서 떠들어도 마음에 평안과 평강으로 나를 지키고 좌충우돌 하지 않으며 든든히 서서 주님을 맞이할 신부로 다가가서 주님의 구원의 손을 붙들게 될 것입니다.
순복음 전주 성령교회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말세 지 말에 고통당하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축복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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