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위 고개 숙인 그리스도… 달리의 작품 앞에 머물다
‘켈빙그로브 미술관과 박물관’ 전경.
한때는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영국에는 곳곳에 유적지나 기념관,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다. 작은 도시나 마을에도 그곳의 흔적과 역사를 엿볼 수 있는 문화 공간이 있어서 사람들은 지난날을 살펴보며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가꾼다.
스코틀랜드에 속한 글래스고(Glasgow)는 영국 북부 상공업과 예술의 중심지로서 번성했던 곳이다. 이 도시는 여러 사람들이 문화를 접하며 정신적으로도 풍요로운 삶을 가꿀 수 있도록 시민들과 함께 박물관을 건립했는데, 그곳이 바로 ‘켈빙그로브 미술관과 박물관’(Kelvingrove Art Gallery and Museum)’이다. 이 문화 기관은 켈빙그로브 공원에 자리해 사람들에게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도 제공해 준다. 빅토리아 말기 건축물인 박물관은 1901년에 붉은 사암으로 지어졌다. 박물관 외관은 여러 첨탑이 장식돼 거대한 성처럼 견고하면서도 아름답게 보인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는 대대적인 박물관 보수 공사를 진행해 사람들이 더욱 편리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개선 작업은 문화 기관과 관계자뿐만 아니라 온갖 열의와 정성을 모은 글래스고 시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후원에 힘입어 이곳은 런던 이외의 지역에서는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박물관의 명성을 안게 되었다.
전시 공간은 22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곳에 전시된 작품만 약 8000점에 이른다. 자연사나 고고학, 민속학과 서적, 조각과 회화에 이르기까지 소장품의 폭은 매우 넓다. 특히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방의 회화, 프랑스 인상주의 작품,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작품이 잘 전시돼 있다.
관람객들이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십자가 성 요한의 그리스도’를 감상하고 있다.
켈빙그로브 미술관은 그리스도교 미술과 관련된 작품도 많이 소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1904-1989년)가 그린 ‘십자가 성 요한의 그리스도’(1951년)이다. 이 작품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습작으로 그린 예수님의 모습을 토대로 제작됐다. 요한은 자신의 방에서 내려올 때 수도원 벽에 걸린 십자고상을 보고 그 형상을 데생했다. 달리는 우연히 요한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유화 작품을 그렸다. 달리의 작품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을 위에서 내려 보시는 것처럼 표현돼 있다. 원래 이 작품은 글래스고의 ‘성 멍고 종교 박물관’(졸고 26회 참고)에 소장됐으나 후에 글래스고 박물관으로 이전하게 됐다.
사람들은 과거의 유물이나 예술품을 바라보고 대화하면서 자신의 삶을 더욱 성숙시킬 수 있다. 박물관은 모든 사람이 즐겁게 배우고 익힐 수 있는 ‘평생학교’라고 말할 수 있다. 예전에는 교회가 모든 사람의 삶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면 오늘날에는 박물관이 사람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유럽의 대성당은 대부분 부속 박물관이나 자료관을 갖고 있다. 그곳에는 교회와 관련된 유물이나 예술품이 전시돼 사람들에게 교회의 오랜 역사를 알려준다. 사람들은 먼저 성당을 방문하고 이어서 문화 기관을 방문하며 신앙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그 삶은 풍요로워진다.
‘켈빙그로브 미술관과 박물관’ 내부 로비 모습.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문화와 예술에 대해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와 예술이 서울이나 대도시 중심으로 집중돼 있지만 다행히 우리 교회에서는 지방에서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지방 교구에서 어려운 재정 여건에도 불구하고 작은 기념관이나 자료관, 갤러리나 미술관, 나아가 박물관 건립에 대해 자주 논의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글래스고 시민들은 켈빙그로브 미술관과 박물관을 건립하기 위해 적극적인 관심과 정성을 모으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소장한 작품을 박물관에 기증하거나 재정적인 후원, 재능 기부나 자원 봉사 활동을 통해 박물관을 더욱 빛내고 있다. 그 결과 이 도시는 영국 북부에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거듭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 문화와 예술의 부흥을 위해서는 글래스고의 시민들이 보여준 것처럼 성직자나 수도자뿐만 아니라 신자 개개인의 관심과 참여가 절실히 필요하다. 단순히 교회의 유물이나 성물과 같은 예술품을 소중히 여기고, 교회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자주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교회 문화는 발전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의 각종 문화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후원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교회 문화는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정웅모 신부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 유물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