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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속 인쇄풍선>의 줄거리:
무엇인가를 위해 마음 먹으면 그 마음 속에는 인쇄풍선이 하나 생겨납니다. 이제 현실 삶에서 마음 먹은 일이 잘 되면 그 풍선이 부풀어 오르면서 마음이 포만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만족이지요.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모으고 행한 고별 설교에서 그리스도인 됨의 극치가 드러납니다. 마음 속 인쇄풍선이 최대한으로 부풀어 오른 상태에서만 가능한 거지요.
마음속 인쇄풍선
(행20:13~38)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마음속 인쇄풍선>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여러분, 인쇄풍선이 뭔지 다 짐작이 가시지요?
풍선에다가 글씨나 이미지를 인쇄해 넣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람을 불어넣으면 풍선이 커지면서 아주 작게 인쇄된 그 글씨나 이미지가 커지고 선명하게 보이게 되는 것을 인쇄풍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광고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또 파티 같은 데서 ‘아무개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이런 글씨를 인쇄해서 풍선을 띠우기도 하고, 가수들이 콘서트 할 때 가수의 얼굴을 캐리커쳐 해서 인쇄를 해 넣으면 그 풍선이 부풀어질 때 가수의 얼굴이 빵빵한 풍선에 나타나게 돼서 콘서트 장식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대체 이런 인쇄풍선이 마음속에 들어있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좀 비유적인 표현이 되겠습니다만,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음속에 인쇄된 풍선이 들어있다고 비유적으로 생각해야만 풀리는 심리의 움직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만족함이에요, 만족함.
만족함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마음에서 이루어질 때를 가만히 관찰해보면, 마음속에 인쇄풍선이 부풀려지는 것과 같다, 이 뜻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더 쉽겠지요?
‘내가 사업을 해서 돈을 좀 많이 벌어서 좋은 집도 사고, 좋은 차도 사고, 가족들도 호강을 시켜주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돈을 벌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돈이라는 글자가 인쇄된 풍선이 하나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만족하다는 것은 마음의 배가 부른 것인데, 돈을 벌었다고 해서 우리 마음이 우리 몸이 음식을 먹어서 배가 부른 것처럼 그렇게 먹는 건 아니에요, 돈 자체를.
그런데 현실적으로 돈을 벌게 되면 마음이 포만감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처럼 마음속에 풍선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돈을 많이 벌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마음속에 돈이라고 인쇄된 풍선이 하나 딱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현실에서 돈을 벌면 그 풍선에 바람이 들어가서 부풀어지면서 마음에 포만감이 생기고, 현실에서 돈을 못 벌면 바람이 안 들어간 풍선처럼 납작해 있어서 만족이란 게 없는 겁니다.
또, 꼭 돈이 아니더라도 내가 인기를 많이 얻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인기라고 쓰여 져 있는 인쇄풍선이 하나 생기는 거예요, 현실에서 인기를 얻으면 그 마음에 인쇄풍선이 부풀려지면서 마음이 포만감을 느끼고 만족을 느끼게 되고, 현실에서 인기를 못 얻으면 그 마음의 풍선이 납작한 상태로 있어서 만족감을 못 느끼게 된다, 이겁니다.
이게 바로 ‘마음속 인쇄풍선’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 이유죠.
자, 이걸 알고 오늘 본문을 한번 들여다봅니다.
바울에게도 마음속에 인쇄풍선이 작용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에요.
어떻게 우리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읽은 부분에서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마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라고 하는 도시로 불렀습니다, 밀레도는 에베소에서 남쪽으로 4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에요.
그곳에서 바울과 그 일행이 머물면서 에베소에는 들르지 않고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부른 거예요.
지금 상황이 어떤가 하면, 유라시아 대륙의 남쪽, 팔레스틴 위로 터키의 모양을 보면, 터키의 북쪽으로 흑해가 있고, 터키의 서쪽으로 에게 해가 있어서 에게 해를 건너면 그리스 반도에 마케도니아가 있고, 남쪽에 지중해가 있어요.
그러니까 터키라고 하는 나라가 디귿자 형태로 돼 있습니다.
그 디귿자의 왼쪽 변인 수직으로 된 획 위쪽으로 드로아가 있어요, 어제 살펴본 드로아가.
지금 고린도로부터 해서 마케도니아 북부로 올라와서 에게 해를 건너서 드로아에 와가지고, 드로아에서 아래쪽으로 움직여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맨 아래 밀레도에 와있는데 밀레도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할 거예요.
그런데 에베소에는 들르지 않습니다, 에베소가 밀레도의 북쪽에 있는데.
그러면 왜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고 있느냐?
바울의 심리상태를 우리가 알아야 오늘 본문을 이해할 수 있는데, 바울의 심리상태를 잘 이해하고 본문을 끝까지 읽다보면, 여러분! 참 가슴이 뭉클한 감동이 물밀 듯이 밀려와요.
지금 바울의 심리상태가 보통 복잡한 게 아닙니다.
오순절 전까지 예루살렘교회에 가려고 해요, 왜 그렇게 시간을 정해놓고 급하게 서두르는가 하면, 지금 예루살렘교회는 팔레스틴 지역에 닥친 가뭄 때문에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반도에 있는 마케도니아와 아시아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구제헌금을 모았어요, 그래 그것을 빨리 전달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바울의 마음속에는 로마를 중심으로 했을 때 자기가 세 번에 걸쳐 선교여행을 한 게 다 로마의 동쪽지역이었습니다.
지금 마음이 간절한 거예요.
그래서 3차여행의 반환지점인 고린도에서 3개월 머물면서 로마교회에 편지를 쓰게 됩니다, 로마를 방문할 거라고.
그러니까 마음에는 지금 로마를 중심으로 서쪽지역을 선교해야 한다는 마음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 헌금을 빨리 예루살렘교회에 갖다 줘야 되죠, 그리고 또 로마의 서쪽을 전도를 해야 되지요.
그런데 또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예루살렘에 가게 될 경우에는 성령님께서 계시를 주시기를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다는 계시를 계속 주시는 겁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급하게 가야 되는데, 가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 아시아지역에 자기가 세웠던 교회들을 지나면서 에베소교회를 스쳐지나가서 마음이 아픈 거예요, 왜냐하면 이제 다시는 에베소라고 하는 지역에 발을 딛지 못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될 거예요, 그래서 로마로 가게 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계속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계시를 해주시니까, 이제 에베소교인들과 마지막인 거예요, 그래서 37절 38절에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라는 말이 나와요.
에베소 장로들이 밀레도 항구까지 나와서 엉엉 우는 겁니다, 이젠 다시는 못 볼 거니까.
이런 갖가지의 중압감 속에서, 우리가 읽은 본문 23절의 말씀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는 말이 나와요.
아, 마음에서 눈물이 나요.
그 많은 중압감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감으로 뚫고 관통해지나가고 있는 겁니다.
이 땅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 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내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아니하노라!’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뜻이 뭡니까?
다 쓴 볼펜 버리는 겁니다, 그게 아까워하지 않는 거예요.
자기 목숨을 그렇게 취급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자기 자신의 소원과 자신의 욕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까지 극심할 정도로 주 예수님과 하나님아버지께 빠져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바울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대단하지 않아요.
여러분, 이 감동 속에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뭡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는 일에는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는다’
어떻게 자기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을 만큼 자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라면.
자기 자신이 은혜의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바울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바울이 받아들인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대단한 거예요.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이면 누구나 다 이렇게 그리스도인 됨의 극치의 상황이 내 상황으로 주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의 메시지에요.
그렇다면 은혜의 복음이라는 게 뭐냐?
21절에 보면,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이게 바로 은혜의 복음이에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자, 이 내용이 무엇일까요?
대체 이 내용이 무엇인데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우리가 받아들였을 때, 사도바울과 같은 이런 그리스도인의 극치됨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겁니다, 여기에 바로 마음속 풍선이 나타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께 대한 회개가 뭡니까?
내가 이제부터 돈을 벌어야 되겠다, 내가 이제부터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학박사가 돼서 학자로 성공해야 되겠다, 마음을 먹습니다.
그러면 마음속에 인쇄풍선이 생긴다고 했어요, 학박사라고 인쇄된 풍선, 돈이라고 인쇄된 풍선이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알기 전 이제까지는 돈을 벌겠다 마음먹었고, 학자가 되겠다, 인기를 얻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이게 다 잘못되었구나! 내 마음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들어와 계셔야 되는구나!’ 라는 걸 깨닫는 게 회개입니다.
이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라는 거예요.
내가 다른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고, 다른 것으로 기뻐하려 한 것이 죄라는 거예요.
마치 애인을 놔두고 다른 남자를 보고 기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이겁니다, 다른 여자를 보고 기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돈이 다른 여자이고, 인기가 다른 여자이고, 권력이 다른 여자입니다.
자식으로 기뻐하는 것, 자식이 다른 여자가 되는 거예요, 애인인 하나님 놔두고.
이게 회개인데, 하나님으로 기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인쇄되어진 풍선이 우리 마음속에 생기는 겁니다.
이제는 어떻게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인쇄된 이 마음속 풍선이 부풀어지게 되는가가 우리의 과제가 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거예요.
돈 인쇄풍선이 부풀어지려면 현실에서 돈을 많이 벌어야 돼요.
아주 이건 반 죽어야 됩니다, 돈 많이 벌려면, 반 죽는다고 돈 많이 번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우리가 인기를 많이 얻어서 성공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먹으면, 인기 인쇄풍선이 마음속에 생기는데, 인기 얻기가 어디 쉽습니까? 아주 뼈골이 녹아나도록 노력을 해야 얻을까 말까 한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 모든 것을 쥐어서 성공하겠다고 마음먹어서 생긴 인쇄풍선들은 아주 육체가 녹아내릴 정도로 노력해도 될까 말까 한데, 이 하나님으로 배부르겠다고 마음먹어서 하나님 이름이 인쇄된 인쇄풍선이 마음속에 생길 때, 그 인쇄풍선을 부풀리게 하는 것은 너무 간단한 거예요, 예수 믿으면 되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게 뭐에요?
십자가에 달린 주님과 내가 연합해서 같이 죽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죄만 짓고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으면 또다시 나는 돈으로 인기로 자식으로 만족하려고 인쇄풍선을 마음속에 넣고 부풀리려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야만 된다는 걸 알고 주님과 함께 내가 죽었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단, 어디에서? 시장에서.
어디서? 가정에서.
어디서? 직장에서.
어디서? 동호회 모임에서.
언제 어디서나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고백을 잊지 않고 마음을 거기에 두기만 하면 내 마음속에 하나님 이름이 인쇄된 풍선이 부풀려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만족해진다는 거예요.
마치 그런 것과 같아요, 자동차 타이어에 바람 넣어보신 적 있지요?
정비소에 가면 공짜로 바람을 다 넣습니다.
벽에 바람이 나오는 호스가 둘둘 말려있고, 그 옆에는 압력숫자를 표시하는 게이지가 있어요.
그러면 예를 들어 35psi(압력의 단위)에 숫자를 고정시켜놓고 호스를 쭈욱 빼서 타이어 공기주입구에 꽂기만 하면 바람이 저절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숫자에 해당되는 압력이 다 채워지면 소리가 나면서 바람이 멈추게 됩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으로 만족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하나님 이름이 새겨진 풍선이 하나 생기게 되는데, 그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에요.
은혜의 복음 중에 전반부입니다.
그러면 후반부는 뭡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 진 내 마음속의 풍선이 부풀려져서 진짜로 내 마음이 배불러질 수 있고, 그래서 그리스도인 됨의 극치가 표현될 수 있느냐?
그리스도 십자가에 내 마음을 갖다가 꽂으면 마음의 하나님 이름의 풍선이 부풀러진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풍선이 부풀러질 때 마음이 만족을 느끼고 배부르게 될 때, 내 목숨조차도 아까워하지 않는 일이 생길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인쇄풍선들은 우리 입김으로 풍선을 분 것과 같아서 하늘로 뜨지 못하고 다 가라앉습니다.
가라앉는다는 얘기는 내 목숨의 귀중함, 이 세상의 귀중한 것들에 눌려버린다는 거예요.
그 무게를 못 이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마음을 꽂았을 때 들어오는 바람은 하늘의 바람이고 성령의 바람입니다.
하나님 이름이 쓰여 있는 그 풍선이 부풀려지는 바람은 하늘의 바람이에요.
마치 수소나 헬륨가스가 풍선에 들어갈 때 공기보다 가벼워서 공중에 뜨는 것처럼 하늘의 바람이 우리 마음속 인쇄풍선에 들어와서 부풀려질 때는 이 세상의 죽음도 나를 막지 못하는 거예요,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그 예수님의 영이 그 인쇄풍선 안으로 들어오는 거니까.
그러므로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 됨의 극치가 나타날 수 있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예를 들어서 심화시켜서 생각한다고 하면, ‘하나님으로 만족한다, 하나님으로 배부르다,’
이 말도 저한테 많이들 물으시는 거예요, 어떻게 구체적으로 하나님으로 배부를까? 하고.
이 배부름의 상태가 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걸려있는 여러 가지 수식어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시다.
그게 다 우리 마음속 풍선에 인쇄되어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아버지에요.
그런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데도 내 마음에 만족이 없어요.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이건희 씨 같은 재벌이 내 아버지라고 생각할 때 어떻겠어요?
그거 아니더라도 100억 정도만 갖고 있는 자산가가 내 아버지래도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박근혜 대통령이 내 언니라면 어떻겠어요?
다르잖아요?
근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버지에요, 그런데 내 마음에 아무런 느낌이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아버지라고 하는 이름의 풍선이 있기는 한데, 바람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게 부풀려지지를 않는 거예요.
가수 얼굴이 그려진 풍선이 부풀려질 때 가수의 얼굴이 입체적으로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이름이 인쇄된 풍선이 부풀려져야 마음이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걸 느끼는 거예요, 근데 부풀려지지를 않는 겁니다.
왜 부풀려지지 않습니까?
마음이 십자가에 고정돼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의 바람이 하늘의 바람이 들어와서 부풀려지지를 않는 거예요.
그 하늘의 바람이 들어와서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인쇄된 그 마음속의 풍선이 부풀려져야 내 마음에 포만감이 생기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으로 배부른 거예요.
돈이라고 인쇄된 풍선이 배불러지는 건 며칠 못가요.
아들이 서울대학에 들어가서 자식이라고 하는 인쇄풍선이 부풀려진 것, 3개월 못가요, 다시 다른 것으로 만족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이름이 인쇄된 풍선이 부풀려져서 만족이 느껴질 때, 주님의 십자가에서 마음을 떼지 않는 한, 영원히 지속되는 겁니다.
그리고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그리스도인 됨의 극치의 삶이 무지렁이 같은 우리에게도 바울에게서처럼 나타날 수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마음을 고정시키므로 하나님아버지라고 인쇄된 마음속 인쇄풍선이 부풀려지면서, 진짜 하나님이 입체감 있게 나의 아버지로 느껴짐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됨의 극치가 여러분의 하루하루 속에 나타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내 마음속의 인쇄풍선이 주님의 십자가에 내 마음을 고정시킴을 통하여 성령의 바람으로 부풀려져서 온전한 만족함 가운데, 그리스도인 됨의 극치적 삶이 이루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