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 문제는 자신이 전륜성왕이라고 선포하였다.
국찰 대흥선사에 고승들을 초청하여 다섯개의 불경스터디그룹을 만들었다.
불학연찬을 통한 불교중흥을 염원했던 것이다.
수문제 양견이 불교 중흥정책을 펼친 이야기
수나라 양제는 113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큰 참패를 당하고 수나라 멸망을 자초하였다.그러나 그의 아버지 수문제 양견은 오호십육국 시대의 혼돈을 끝내고 통일제국을 수립한 성군이며 전륜성왕이 되기를 발원했던 호불왕이었다.
수문제 양견은 서기 541년 북주 동주땅 반야사에서 태어났다.13살까지 비구니 지선스님 손에서 자랐다.황제가 된후에도 지선스님을 생각하였다.북주 무제의 무자비한 불교말살정책으로 수문제가 즉위할때 불교계는 참담한 폐허밖에 없었다.
수문제는 유교중심의 정치사상 대신에 불교를 국가통치의 지도원리로 선포하였다.‥
전륜성왕의 무장된 힘으로 우리는 궁극적인 깨우침을 얻은 보살의 이상을 펼친다.또한 이세상 구석구석을 영원히 불국토로 장엄하기 위해서 십선을 실천한다.
그는 즉위하자 마자 오악에 불교사찰을 건립하고 북주 무제때 파괴된 모든 사찰을 다시 복원시켰다.
다음은 수문제가 20년 동안 이룩한 불사이다.승려 23만명 득도.신축사원 3천8백개.사경 13만권.경전수리 3천8백권.파괴된 불상 재건및 수리 150만구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이다.
모든 고을의 사찰에서 삼장육재일을 지키게 하고 이기간에는 살생을 금하였다.스스로 법경법사에게 보살계를 받고 죄수 2만9천명을 사면하고 사형수 3천 7백명을 감형하는등 자비실천의 모범을 보였다.
국찰 대흥선사를 창건하고 1천명의 승려들이 거주하며 국태민안을 기원하고 국가정책을 구상하는 역할을 하였다.대흥선사는 수나라.당나라를 통해서 최대규모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지금 서태후 만두집으로 유명한 덕발장 인근지역이 모두 수문제가 세운 대흥선사 부지이다.
문제는 전국 30개주에 불사리탑 건립을 지시하였다.인수의 사리탑으로 불린 사리탑 건립에는 국가재정을 사용하지 않고 국민들의 불심을 이용 자발적인 보시로 충당하였다.
부자나 세도가들이 일정금액 이상을 내지 못하게 했다.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지을 기회를 준다는 뜻이었다.양무제나 전진왕 부견이 대형불사로 국가재정을 파탄내 멸망을 자초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잇달아 조칙을 내려 국찰 대흥선사에 담천.혜원.예장.승휴.보진.홍예등 여섯명의 고승을 새로 모시고 십지경.열반경.대지도론을 강설하는 다섯개의 불경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불학연찬을 통한 불교중흥을 시도하였다.이것이 수문제의 5중제도로 뒷날 중국불교 종파성립을 선도하였다.
불교교단은 급속히 발전하여 천태종의 지의.삼론종의 길장.정토종의 도작.율종의 도선.선종의 승찬이 불교계를 주도하였다.수문제에 이르러 중국불교는 전국에 장대한 불교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종파불교와 선불교의 모태가 이루어졌다.
수나라 황궁 대흥궁의 대흥전앞에서 손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사리탑 낙성의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문제는 소식재계하고 360명의 고승대덕들을 초대하였다.
불상과 번개 당번등을 내걸고 범패를 연주하며 장안성의 주작대로를 가득매운 행렬은 백만에 이르는 장안백성이 거의 참여하여 화려하고 장엄한 불국세계를 연출하였다.
문제는 숭불치국의 확고한 의지와 바른 견해를 갖고 있었지만 정치와 종교를 엄격히 분리하였다.불교와 사원이 제국속의 또다른 권력으로 커지는 것을 경계하였다.사원건립은 허가를 받아야 했고 사원의 경제활동은 금지시켰다.통치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되는 교단은 철저히 탄압하였다.
수문제는 자신이 바로 부처님의 유촉을 받은 전륜성왕임을 강조하였다.
부처님이 지혜로써 중생을 제도하듯이 국왕도 자비로써 인민들을 복되게 한다는 왕즉불의 믿음을 심어 주고자하였다.
수문제에 의해 이루어진 불교도시 장안은 당나라로 이어지면서 불법장안(佛法長安)의 큰 열매를 맺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