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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박병욱 목사
송년 주일
오늘은 송년 주일입니다. 연말은 정기적으로 맞이 하는 작은 종말입니다. 작은 종말의 연습을 통해서 진짜 종말을 제대로 준비시키려는 하나님의 은총의 시간입니다.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생각해 봅시다. 내가 무의미하게 보내버린 오늘은 어제 죽은 자가 그토록 갈망했던 내일이었습니다. 연말에 우리는 돌이켜 봅니다. 내가 정신없이 보내버렸던 올해는 작년에 죽은 사람이 그토록 살고자 했던 미래였습니다.
아이작 싱어가 쓴 책 <행복한 바보들이 사는 마을>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루가 지나면 그 날은 더 이상 없는 거야. 그 날 뒤엔 무엇이 남는지 아니? 이야기가 남는단다. 만일 이야기들이 없고, 책들이 씌어지지 않는다면 사람은 그저 하루하루를 짐승처럼 살게 될 게다.” “우리가 오늘을 살고 있지만, 내일이 되면 오늘은 이야기로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의 생활은 하나의 긴 이야기란다.” 오늘의 삶은 내일의 이야기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내일의 역사가 되지요. 여러분, 하루가 지나면 그 날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리고 그 날의 이야기가 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야기를 어떻게 써 나가고 계십니까? 이제 모든 시간이 끝나고 이 세상에서의 여러분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어떤 이야기로 완성이 되어 있을까요?
죽은 자의 눈물
오늘 본문도 한 인생을 끝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더 이상 고칠수도 없고, 줄거리가 역전되는 반전도 전환도 불가능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비유의 내용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와 권력의 상징인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호화롭고 즐거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 대문 옆에는 나사로라고 부르는 한 거지가 날마다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부자의 집에서 나온 음식 쓰레기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심한 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개들이 와서 그의 아픈 곳을 핥았습니다.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그 부자도 죽어 장사되어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고통 중의 부자가 눈을 떠서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세요. 여기는 불이 너무 뜨거워서 괴로워 못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얘야, 너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다.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는단다.”
이 비유는 죽어서 눈물을 흘리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눈물은 보통 눈물은 아닙니다. 차라리 피눈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죽은 후의 성공과 실패의 역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나는 죽고 나서 무슨 후회를 할 수 있을까? 내 삶의 이야기에 마지막 점을 찍는 시간이 다가 오는데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하나?’를 생각나게 해 줍니다.
마지막 점 찍기 전에
우리가 살아온 길도 이야기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겁니다. ‘나의 금년 한 해의 삶이 이제 이야기로서 남게 된다. 이 이야기가 얼마 가지 않아서 끝날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점을 찍기 전에 조금 남아 있다. 내 삶의 이야기를 읽어보고 최후의 교정을 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 점을 찍기 전에 생각해 볼 점들은 무엇입니까?
쉽게 지나쳐 버린 것들
먼저 대부분 사람들은 삶을 마치 경주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빨리 목적지에 가려고만 합니다. 사람들이 목적지에 빨리 도달하려고 헉헉거리며 달리는 동안 그들의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는 모두 놓쳐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주가 끝날 때쯤엔 자기가 너무 늙었다는 것을 알고는 그제서야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길가에 주저않아서 행복의 조각들을 하나씩 주워 모으는 기쁨을 모릅니다. 행복은 먼 훗날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있습니다. 지나간 한 해에 있었고, 지금 연말의 이 순간에 있습니다. 그리고 다가올 다음 해에 있습니다.
꿈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꿈을 꾸는 순간도 중요합니다. 목적지에 빨리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복의 조각들을 놓치지 않고 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쉽게 지나쳐 버린 것들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고, 더 누리지 못하고, 더 즐기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사람들은 삶을 경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경쟁에서 이기는데 전력을 다합니다. 이솝 우화에 “두 친구와 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친구가 산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험한 길이지만 둘이 함께 가니 얼마나 서로 힘이 되었습니다. 손을 잡고 서로 의지하며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위 뒤로부터 크고 사나운 곰이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미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한 친구는 손을 놓고 재빨리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불행하게도 다른 한 친구는 나무를 탈 줄도 빨리 달릴 줄도 몰랐습니다. 영락없이 곰에게 잡히게 된 그 친구는 얼른 땅에 엎드려 숨을 멈추고 죽은 체했습니다. 곰은 죽은 것을 먹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곰은 엎드려 있는 친구에게 다가와 킁킁 냄새를 맡으며 살피다가 돌아갔습니다. 곰이 멀리 간 후에 나무에 올라갔던 친구가 내려와서 물었습니다. “아까 그 곰이 자네 귀에 대고 뭐라고 말하던가?” 그러자 엎드려 있던 친구가 화를 내며 대답했습니다. “위급한 때에 혼자 도망치는 친구는 믿지 말라고 했다네.”
진정한 친구는 위급한 일을 당할 때에 알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평소에는 더없이 친한 척하다가도, 간도 쓸개도 다 빼 줄 듯 호들갑을 떨다가도 정작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낯빛을 바꾸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 이야기의 21세기 판이 새로 나왔습니다.
두 친구가 길을 가는데 느닷없이 곰이 나타났습니다. 역시 사납고 큰 데다가 아주 잽싼 곰입니다. 두 친구는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달려도 곰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게 아닙니까? 그러자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저 곰보다 더 빠를 수는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다른 친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지금 내 문제는 내가 어떻게 저 곰보다 더 빨리 달리느냐 하는 게 아니네. 문제는 내가 어떻게 자네보다 더 빨리 뛸 수 있느냐 하는 걸세.”
21세기 판 이야기에서는 사납고 거대한 곰보다는 같이 뛰는 친구가 문제입니다. 그러니 이제 친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닙니다. 죽음을 피할 길도 막을 길도 없으니, 어떻게든 친구를 이겨서 먼저 죽게 하고 내가 더 살아남느냐, 그것이 관건이라는 말입니다. 공동의 적, 공동의 과제는 없고, 오직 무한한 사적 경쟁만 남았다는 말입니다.
용서하며 살지 못한 것
다음으로 우리는 용서 받아야 할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남을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은 자주 갖는데, 내가 용서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갖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은 별로 잘못한 것이 없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필요를 많이 느끼는 사람이 남을 용서할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용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뒤틀린 관계를 풀어주는 가장 중요한 첫걸음입니다. 그러나 그 용서는, 남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자기 용서는 자기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더러운 흙에서도 연꽃은 피고
다음으로 우리는 고난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 라는 책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마 위에 깊은 주름살이 갈 때 마음 속에 깊은 지혜가 생기고, 살을 뚫는 상처가 깊을 때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향기가 높다.”
그렇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고, 상처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과거의 아픈 경험, 실패와 고난의 경험도 의미가 있습니다. 아픈 경험이 도리어 내 인생을 완숙하게 해 줍니다. 연꽃은 더러운 흙 속에서 올라오는데 그 꽃은 너무나도 순결하고 깨끗합니다. 진흙이 더럽다고요? 그 속에는 갖가지 영양분이 가득하답니다. 갯벌이 더럽다고요? 그 곳은 생태계의 보물창고랍니다. 우리는 나쁜 환경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로는 나쁜 환경을 이기고, 어려움 속에서 일어선 사람의 성공이 오히려 더 아름답습니다. 그만큼 실패는 귀중한 것입니다. 실패는 보석과 같습니다. 실패가 주는 교훈은 성공이 주는 교훈보다 더 깊습니다.
넘어지는 법부터 배우자
우리는 실패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지나가는 한 해의 실패는 큰 교훈이 될 것입니다. 유도를 배우면서 계속하는 것은 낙법입니다. 아이를 유도 체육관에 보낸 아버지가 아이에게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빠, 저는 이태 동안 넘어지는 것만 배웠어요. 낙법만 배웠어요.”
이 말을 들은 아버지가 깨달을 바가 있었습니다. “넘어지는 것을 배우다니! 네가 넘어지는 것을 배우는 이태 동안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살았다. 한 번 넘어지면 그뿐 일어설 수 없다고 세상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넘어지는 법을 배운 사람은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넘어지곤 합니다. 그때마다 연습을 마친 사람처럼 툭툭 털고 일어나 새로이 시작하는 사람이 크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실패때문에 괴로워하는 분이 계십니까?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실패 했더라도 훌훌 털고 일어나서 다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지나간 삶의 자리
우리는 지나간 삶의 자국들을 하나 하나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모든 나무에는 나이테가 있습니다. 나무를 절단해 보면 그 나무가 성장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나이테 안에 자료로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는 설명합니다.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아주 가물었을때 나타난 표시이고,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번개를 맞았을때 나타난 나이테고,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아주 비가 많이 왔을때 나타난 나이테고,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병충해가 심할때 나타난 나이테고,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불이 났을때 나타난 나이테’라고 말합니다.
한 나무의 상처는 대부분 나무의 외형에 나타나 있지 않고 나무의 가장 깊은 심층부에 흔적으로 남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온갖 위선으로 가면 쓴 희극배우처럼 살아가지만, 그의 가슴 속은 굵직한 상처와 풀리지 않고 굳게 맺힌 응어리들이 나이테처럼 남아서 자신만의 자서전으로 남게 됩니다.
어떤 것은 버림받고 거절당한 상처로, 어떤 것은 억울한 피해를 당한 상처로, 어떤 것은 한이 되도록 참아야 했던 답답한 상황의 상처로, 어떤 것은 극심한 외로움의 상처로, 때로는 극심한 열등감의 상처로, 어떤 것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부러움의 상처로, 어떤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의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사랑 받은 흔적들
사람들은 자신의 고난이 그저 자신을 해치는 상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난은 상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각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구약 본문 이사야 63장 7절은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9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죄를 지어서 당한 역사의 고통 속에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상처로 인한 어두운 흔적들을 은혜로 말미암은 영광의 흔적들로 바꾸어 나갑시다. 우리는 고난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생의 갖가지 흔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상처받고 괴로운 흔적만을 기억합니까? 하나님께서 배풀어주신 은혜의 흔적, 사랑의 흔적, 자비의 흔적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의 흔적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