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장 : 솔로몬 왕국(왕상1-11장)
구약은 다윗과 솔로몬의 생애에 대하여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솔로몬의 역사를 다룬 책들이 더 있지만(솔로몬의 행장(왕상 11:41), 유다 왕 역대 지략(왕상 14:29)), 이러한 책들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솔로몬 시대에 일어났던 일들을 열왕기와 역대기를 통해 개략적으로 알 수 있다.
열왕기서의 기록을 중심으로 솔로몬의 행적을 살펴보자. 솔로몬은 각 분야에서 많은 업적들을 성취했다. 당시 예루살렘은 발전상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로 크게 붐볐다(왕상 10:1-10,24,25). 솔로몬의 웅장한 건축은 예루살렘에서 요란한 착공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많은 후궁들을 거느렸으며(왕상 11:3), 많은 부를 소유하였다(왕상 9:26-28, 10:11,12,22, 29). 예루살렘에는 은과 백향목이 돌과 뽕나무처럼 흔하게 볼 수 있었다(왕상 10:27). 군사용 말과 병거들을 애굽에서 수입했다(왕상 10:2).
1. 지혜자 솔로몬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지혜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잠언의 대부분과 전도서, 아가서, 솔로몬의 지혜서(외경)를 기록했다. 왕상 4:29-34은 잠언 3000, 노래 1005 곡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자들은 궁전 안의 지혜 문학의 본산지였던 지혜 학교를 지었다고 추정한다. 당시 애굽은 지혜자들이 왕의 궁전에서 살았다.
솔로몬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만한 궁전을 지으려고 했었다면, 분명히 다른 나라에서 시행하던 좋은 제도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솔로몬의 지혜 학교에서 기록된 책들은 왕에게 바쳐져서 그의 이름으로 온 지역에 반포되었을 것이다. 잠 25:1은 히스기야가 지혜 문학의 편집자들을 수하에 두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렘 50:35은 지혜 있는 자들을 방백들과 동일한 부류에 두었다.
2. 솔로몬 성전
솔로몬 성전은 왕상 6장에서, 성전의 내부 시설과 가구들은 왕상 7:15-50에서, 봉헌식은 왕상 8장에서 설명한다. 성전 건축기간은 7년(왕상 6:38), 궁전 건축기간은 13년이 걸렸다(왕상 7:1). 성전은 궁전 전체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다(왕상 7:1-13).
성전 규모는 오늘의 건축물에 비하면 대단한 건축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당시 측량 단위로 사용된 규빗의 길이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대략 1규빗은 약 44cm정도 되는 것으로, 솔로몬의 성전 길이는 약 27m, 폭 9m, 높이가 12m로 당시 페니키아신전과 비슷한 설계로 지어졌다.
현관은 폭 9m, 높이 3m로 양편에 각각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성소는 길이 18m, 폭 9m로 되어 있고, 지성소는 길이 9m, 폭 9m, 높이 9m로 되어 있다.
지성소안은 어둡고, 다른 부분과는 휘장으로 구분되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있는 속죄일에 속죄 행사를 거행하기 위해 들어갈 수 있었다. 지성소는 두 날개를 가진 그룹들로 장식되었는데, 높이 약 4.5m, 날개 길이 4.5m 정도의 크기였다. 그 날개들의 한쪽 끝은 언약궤가 놓인 지성소 중앙에서 마주하였고, 다른 날개는 성전 벽에 닿았다(왕상 6:23-28).
바깥뜰에는 바다(sea)라는 큰 물통으로 약 4만 5천 리터의 물을 담을 수 있었다. 그 밑은 소 모양으로 된 열 두 개의 받침이 놓여 있었다.
그 밖의 각종 성전의 도구들은 주로 바깥뜰에서 희생 제사에 필요한 예식을 드릴 때에 사용하기 위한 기구들이었다.
3. 봉헌식
왕상 8장은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언약궤와 성전 기물들이 제 위치에 놓이고 성소에는 여호와의 임재를 나타내는 구름이 가득 차 있었다(왕상 8:1-11). 이때에 솔로몬은 총회에서(왕상 8:12-21) 말씀을 마치고 성전을 봉헌하는 기도를 드렸다.
이 기도의 내용은 상세하고 감동적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서두로 기도를 끝내고 난 뒤에 다윗 왕조에 대해 언급하였으며(왕상 8:22-26. 참조 삼하 7:18-29), 하나님을 향해 자신이 지은 전에 거하시기를 간구하고 있다(왕상 8:27-30). 그러고 나서 장래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특별한 간구를 드리고 있다.
이 기도는 전쟁에서 패했을 때(왕상 8:33,34), 가뭄이 들었을 때(왕상 8:35,36), 기근이나 온역, 포위, 질병이 있을 때(왕상 8:37-40), 이방인의 기도들(왕상 8:41-43), 전투에서의 승리(왕상 8:44,45), 포로생활(왕상 8:46-53) 때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다. 그 후에 엄청난 수의 동물들, 즉 2만2천 마리의 소와 12만 마리의 양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왕상 8:63).
4. 솔로몬의 강제 착취
솔로몬이 통치하던 때의 상황들을 보면 당시 백성들은 매우 행복하게 태평성대를 누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왕상 4:22-25). 그러나 다른 구절을 보면 사정이 다르다. 실제로 솔로몬은 건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물자들과 인력을 백성들로부터 착취했던 것 같다(왕상 4:6, 5:13, 9:15, 11:28).
그는 그 당시까지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었던 옛 지파 동맹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전 지역을 행정 구역단위로 재편성하였다. 북쪽 지역(이스라엘)에는 12명의 관장과(왕상 4:7) 유다 지역은 1명의 관장을 두어(왕상 4:19) 구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들의 임무는 왕의 식사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솔로몬이 소비한 하루 음식에 사용된 재료들은 실로 엄청난 양이었다(왕상 4:22,23).
솔로몬의 건축공사가 완공되었을 때, 그는 두로 왕 히람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갈릴리에 있는 20개의 성읍을 내어 주었다(왕상 9:10-14). 솔로몬은 그 성읍들을 내어주는 문제를 가지고(그들이 페니키아의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될 일) 지역 주민들과 상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히람은 이 성읍들에 대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왕상 9:13). 왕상 4:22,25, 9:22에 기록된 설명들과 왕상 12:4, 15에 기록된 내용들을 서로 잘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솔로몬이 그의 백성들을 다스렸던 방침과 태도는 그리 훌륭하지 못했다. 그의 개인 생활은 도가 지나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가 거느렸던 후궁들만 해도 천명에 이르는 엄청난 수에 달하였다.
그의 종교적인 확신은 정통적인 것에 근거하지 않았다(왕상 11:1-13). 그의 많은 후궁들 가운데서 특별히 한 사람의 처, 애굽 왕 바로의 딸에 대해서만 언급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왕상 3:1, 7:8, 9:24). 이 결혼은 애굽과 무역을 하는 일에 있어서 큰 유익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왕상 10:28,29). 그녀에 대한 솔로몬의 지나칠 정도의 배려와는 달리 그는 연약한 백성들에게는 막대한 희생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의 군대는 실로 막강하였지만(왕상 10:26)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잃었으며, 따라서 전 지역을 완전히 통치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결국 북쪽 지역의 아람인들(왕상 11:23-25)과, 남쪽 지역의 에돔인들(왕상 11:14-22)이 그의 지배권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성경은 솔로몬의 통치에 대해 몇 가지 평가를 내리고 있다(신 17:14-20, 삼상 8:10-18, 왕하 23:13). 이런 구절들을 자세히 보면(왕상 12:4,14,15) 이 사실에 더욱 가까운 진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성들에 대한 솔로몬의 강제 착취는 이사야가 민족의 역사 중에 가장 큰 재난이었다고 말한(사 7:17) 왕국의 분열을 초래하는 결과를 맞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