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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天主實義 하권下卷
제 편(1-2)
인간 본성의 본래적 선을 논하고 천주교인의 올바른 배움을 서술함
최소자 역
* 7-1 중국 선비가 말한다:
(선생께서는) 수고스럽기도 첫째, 천주는 만민들의 높으신 아버지임을 가르쳐 주셨으니 (그분을) 마땅히 앙모하고 사랑해야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 사람의 영혼은 사후에도 불멸함을 가르쳐 주셨으니 현세에는 잠시 머무는 것이니 중시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렇게 들었습니다. “천당에는 또한 착한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곳에 살면서 이미 덕성을 닦는 데에 마음을 정했기 때문에, 하느님 (상제上帝)를 섬기면서 천사들(神)과 (착한) 사람들(人)과 더불어 동무들이 된다.
또한 지옥이 있어서, 그곳에 살면서 이미 악행을 고치지 않기로 마음을 작정하였기 때문에 형벌과 재앙을 받으면서 영원토록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제 천주를 섬기는 올바른 도리를 묻고자 합니다.
우리 유학에서는 (하늘로부터 받은) (완전한) 본성(성性)에 따름을 수도修道로 보고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본성을 (다) 선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따르는 것에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냥 누구나 다 ‘좋은 본성(선성善性)’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좋은 본성’ 또한) 진실로 의지할 만한 것이 못되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 서양 선비가 말한다:
제가 유가儒家의 서적을 보니, “*성性과 정情을 논한 적은 있으나, (그것들에 대한) 정론定論의 묘책妙策은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 학파라도 언제나 다른 주장들이 나왔습니다.(*중용中庸 첫 구절 인용)
(이는) 사물(의 이치는) 알지만 (인간) 자신의 근본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다고 하여도 역시 (진실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人性의 근본이 선하다는 것을 알려면 무엇이 성性이며, 무엇이 선악인지 먼저 논해야 합니다.
‘본성(성性 Nature)’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각 사물의 ‘부류部類species’의 ‘본체本體’일 뿐입니다. 개개의 사물들을 ‘부류部類’로 말하자면, 부류가 같으면 본성本性이 같고’ 부류를 달리하면 본성도 달라집니다.
‘근본(본本)’이란, “무릇 다른 부류의 ‘관념(理, ousia)’ 에 속해 있으면, 그 부류의 ‘근본적 성질(본성本性)’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체體’란, ”무릇 그 ‘개체의 범위 (extension 즉 ,외연外延) 안에 있지 않으면, 또한 (그 개체)의 ‘본성本性’이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단지 그 개체(물物)가 ‘실체(자존자自存者)’로 존재하면 그 ‘본성’ 역시 ‘실체’이고, ‘속성(의뢰자依賴者)’으로존재하면 그것의‘본성本性’ 모두가 ‘속성’이 됩니다.
(우리 인간들이) 사랑해야 하고 소망해야 하는 것이 선善이요, 싫어해야 하고 미워해야 하는 것이 악惡입니다. 이런 뜻을 이해하신다면 인간 본성이 ‘선’한지 ‘아닌지’를 논의할 수 있겠습니다.
서양의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살아 있으면서 지각하는 존재이며, 이치를 추론할 수 있다, 살아 있기 때문에 금석金石과 다르다고 합니다. 지각하기 때문에 초옥草木과 다르다고 합니다. (이치를) 추론할 수 있기 때문에 짐승들과 다르다고 합니다.
‘추론한다’고 말하지, ‘명백히 이해하고 있음(명달明達)’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음으로써 또한 귀신들과 구분됩니다. 귀신들은 사물의 이치들을 철저히 다 터득하고 있음이 마치 (거울로) 비추어 보고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같으니 (사람들처럼) 추론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은 이전의 것을 미루어서 이후의 것을 이해하며, 그 드러난 것으로서 그 숨겨진 것을 증명해냅니다. 이미 알아낸 것으로서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까지 미칩니다.
그러므로 ‘이치를 추론할 수 있음(능추론리자能推論理者)’이 인간을 (자기) 본래의 부류로 만들어 주고’ (사람이라는) 개체를 다른 개체들과 구별해 주니’ 바로 ‘인간의 본성(人性)’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사람들이) 도리를 추론하고 난 다음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理)’는 바로 (사물에 속한) 속성이므로 ‘사람의 본성(人性)’이 될 수 없습니다. 옛날에 인성이 선한지 아닌지 (의견이 분분하게)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이(理)’’에 불선不善함이 있다고 의심한 적이 있습니까?
『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소나 개의 본성과는 같지 않다”
어떤 해석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본성의 ‘바름’을 얻었지만, 짐승들은 본성의 ‘편벽偏僻됨’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이理’ 라면 (오직 하나뿐이 완전함 그 자체이기 때문에) 둘일 수가 없고 ‘편벽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옛날에 현인들은 ‘본성’을 진실로 ‘이理와는 같지 않다(부동不同)’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이理’와 ‘본성本性’을 다르게) 풀이했으니 “인간 본성은 선합니까, 아닙니까?” 하고 선비께서 물으신 것에 대한 대답은 거의 되었다고 봅니다.
만약 (모든 존재를) 그 ‘본성’을 가진 ‘개체(체體)’들과 그것들의 실정(情)들로 논의한다면, 모두가 천주에 의하여 창생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理’로써 주재해 나간다면, 모두가 다 사랑할 만하고 소망할 만한 것이니, 근본은 선한 것이요, 악한 것은 있을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그 (본성)의 쓰임새로 말하면 그 동인動因)는 또한 ‘우리 자신(아雅)’ 들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저는 혹 사랑받을 만하게, 혹 믿음을 받을 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와같이 행동한 바(결과)가 다르다면, (본성의 ‘쓰임새(용用)’에는 선학과 악함이 원래부터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마음의)의 정情에 의해서 그렇게 결졍되는 것입니다.
무릇 ‘본성(性)’의 발동에 ‘문제점(질병疾病)’들이 없다면 (그것은) 반드시 ‘이理’의 명령에 따를 것입니다. 절도에 어그러짐이 없었다면 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情’은 ‘본성’에 (붙어 있는) 사족蛇足 (과 같은 것)이기에, 때때로 치우쳐서 ‘문젯거리’를 드러내기 때문에, 한결같이 정욕情欲을 따라가서 ‘이理’가 지시하는 바를 (지키는지 아닌지를) 살피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몸에 병이 없을 때에 입으로 맛을 보면 단 것은 달다고 여기고 쓴 것은 쓰다고 여깁니다. 가자기 병들어 (몸이) 변하게 되면 단 것을 쓰다고 하고 쓴 것을 달다고 하는 경우도 있게 됩니다.
‘본성性’과 ;정욕情‘이 이미 병들어서, 사물을 접할 때에 감응이 착오를 일으켜서 도리에 어긋나게 되면, 그것들 (즉 성性과 정情)의 좋아함과 싫어함, 그것들이 옳다거나 그르다고 여기는 것에는 ‘올바름’을 얻은 것도 적고, ‘진리’와 합치하는 것도 매우 적게 됩니다.
그러나 본성은 그 자체로 선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또한 그것은 선하다고 말해도 무방합니다. 대개 사람들이 도리를 추론할 수 있으면 ‘양능良能’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근본이 병들었음을 인정한다면, 그것을 다시 치료할 수 있습니다.
* 7-2 중국 선비가 말한다:
귀국 (서양)에서는 선의 도리는 “사랑할 만하다.” “악의 도리는 미워할 만하다.”고 정의하셨습니다. 그것은 진실로 선악善惡의 실정實情을 다 말한 하나의 학설입니다.
저희 나라 (중국) 선비 중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에서 나왔으면 선이고, 악에서 나왔으면 악이다.”
이것 역시 (또) 하나의 도리입니다. 만약 우리 인간들의 본성이 이미 선하다고 한다면, 이 악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저는 (사람의) ‘본성’이란 선도 악도 (다) 행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로 (사람의) ‘본성’ 자체에 본래 악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악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선의 부재(無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죽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생명이 없음을 말하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마치 재판관처럼 죄인에게 사형죄를 줄 수 있다고 한들, (그 재판관은) 어찌 죽음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세상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누구든지 반드시) 선을 행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무엇에 근거하여 “선을 이루어 낸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 (즉 자유의지 free will)가 없었는데도 선을 실천할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억지로 우리 (자신)에게 선을 행하라고 하지 않아도, 우리들 스스로 나아가서 그것을 행할 수 있으면, 비로소 선을 행하는 군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주께서 이런 본성을 (우리) 인간들에게 부여하여 두 가지 (즉 선과 악 모두)를 행할 수 있게 한 것은 인류를 두텁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선을 선택할 수도, 그만둘 수도 있게 하신 것은, 단지 선을 실천하는 (인간의) 공로를 늘려 줄 뿐만 아니라, 더욱이 그 공로를 우리 (인간)의 공로로 만들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주께서 우리 (인간)을 창생蒼生한 까닭은 우리 인간을 쓰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선하게 만들려는 이유 때문에, 바로 우리 인간을 쓰시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이것을 말함입니다.
만약 활쏘기(시합)에 과녁(정곡正鵠)을 설치 하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활을 쏘는 사람으로 하여금 빗맞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악의 정서가 세상에 있는 것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 쇠붙이나 돌멩이, 짐승들의 본성은 악도 선도 저지를 수 없으나, 사람의 본성을 그렇게 할 수 있어서 자기의 공로를 세울 수 있는 것만 못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로는 (기능적인) 공명功名의 공로가 아니라, 덕행德行의 진실한 공덕입니다.
인간의 성정性情은 비록 근본은 선하지만, 그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인善人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덕이 있는 사람이 바로 선한 사람입니다. 선의 덕성을 보태는 일은, (인간 본성)의 쓰임으로 (인하여), 본래 선한 본성의 바탕 위에 (덕성을 쌓아) 놓는 일입니다.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60813/PM 16:20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