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프로야구가 시작되었다. 야구는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신식 스포츠인 '베이스볼'이 개화 문물 보따리와 함께 들어왔다.
인천영어야학교(인천고의 전신) 1학년생이었던 일본인 학생 후지야마후지사는 1899년 2월 3일자 일기에 ‘4시경부터 중상(中上) 군을 불러내어 일연종(一蓮宗ㆍ옛 신흥초등학교 옆의 절) 앞 공터에서 함께 '베이스 볼'이라는 서양식 공치기를 하고 5시경에 돌아와 목욕탕에 갔다’고 기록했다.
과거의 통설은 1905년 서울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총무였던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P.Gillett)가 회원들에게 가르친 것이 우리나라 야구의 효시였다. 하지만 이 일기로 인해 인천에서 이미 1899년에 '베이스볼' 경기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질레트보다 무려 6년을 앞선 것이다. 이후 인천에는 순수한 한국인들로 구성한 최초의 인천 야구팀 ‘한용단(韓湧團)’이 조직됐다. 1920년을 전후해서 당시 인천에서 배재·중앙·휘문 등 서울의 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고등 과정)로 통학하던 기차통학생 친목회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야구팀이었다. 인천야구의 근원이었던 한용단은 스포츠를 통해 일제에 맞서며 애국심을 불태웠다. 청년야구의 활약은 1920년대 후반에 들어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와 영화보통학교(현 영화초등학교) 등 학교 야구부로 전승된다. 1936년과 1939년 두 차례에 걸쳐 인천상업학교 야구부는 당시 전(全) 조선을 제패하고 일본 갑자원(甲子園) 대회에 출전하는 쾌거를 이룩할 정도로 조선 야구의 근간이 된다.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제는 야구를 '영미귀축(英美鬼畜, 영국과 미국은 귀신과 짐승이라는 뜻)의 운동이라며 갑자기 중지시켰다. 심지어 식량을 증산한다며 소화고녀(昭和高女·지금의 박문여고) 학생들을 동원시켜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에 콩과 고구마를 심는 등 광기를 부렸다. 50년대 들어서자 인천 야구의 전성시대가 다시 화려하게 열렸다. 인천고와 동산고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야구대회인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등 전국 고교야구 대회를 번갈아 가며 휩쓸었다. 특히 동산고는 3년간 내리 청룡기를 품에 안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2013년 4월 2일 저녁 6시, LA다저스구장. 등 번호 99를 단 동양인이 마운드에 섰다. 창영초-동산중-동산고를 졸업한 투수 류현진이다. 제물포항을 통해 이 땅에 야구가 도입된 지 110여 년. 인천인 류현진은 ‘베이스 볼’의 본고장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연일 강속구를 던졌다. 원고출처 : <시대의 길목 개항장>(유동현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