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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 때 만들었다는 토성
▶ 토성 보호대
검도파신군원 골목을 따라 계속가니 외곽지역인 동쪽 끝 길이 나온다. 그래서 그 길을 길을 따라 걷는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걷고 싶어 걷는다. 동쪽으론 강이 흐르고 강 건너에는 봉령산이 있어 자연히 가맹성의 외곽 방어가 이루어진 곳이다. 이런 지형이기에 여기 가맹관이 오래전부터 성을 쌓아 사람이 모여 살게 되었다. 아주 오래된 토성이 보이는데 그냥 방치되어 있다. 이 토성은 놀랍게도 한나라 때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믿기는 어렵지만, 그렇게 쓰여 있다. 한나라 때라면 이 토성이 2천 년도 넘게 버티고 있다는 말인데 이런 역사적인 토성을 보호한다고 막대기 몇 개로 막아놓은 모습이 안쓰럽다. 지금은 대부분 무너지고 사라졌지만, 그 형태는 여기저기 아직 남아있다. 돌로 쌓은 성벽도 아니고 흙으로 쌓은 토성이 2천년 이상 버틴다는 게 의심스럽지만, 당시 중국의 최첨단 공법으로 만들었다면 앞으로도 2천 년 정도는 더 버틸 것 같다. 그래도 바깥쪽은 콘크리트로 목책처럼 만든 보호대를 만들어 놓아 다행이다.
▶ 한수단
▶ 한수단 내 장비와 마초의 일기토 부조
▶ 우두산에 오른 유비의 부조
▶ 한수단 바닥에 새겨진 촉한 지도
그 토성이 있는 곳에는 한수단(漢壽檀)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광장 있다. 광장 바닥에는 촉한의 강성한 시기의 지도를 만들어 놓았다. 한수단은 매년 소화고성의 주민이 모여 조상에게 제를 올리는 장소라고 한다.
▶ 금우고역도 안내판
이 부근으로는 금우천궐(金牛天闕)이라고 부르는 길이 있는데 바로 여기 소화고성을 출발해 금우도 명품 코스로 가면 검소고역도라는 곳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 종착지가 바로 검문관 입구로 여기서 거기까지 가는 길이 아주 멋지다고 한다. 그 검문관 입구를 황백어문이라 부르는데 가는 길에 우두산, 천웅관, 대조역, 토비채, 운대산, 귀비담, 신녀좌와, 고묘포, 망촉대, 석순봉 그리고 검문관 등이 있어 무척 아름다운 길이라 한다. 삼국시기에 중요한 곳이라든가 천하제일 태극이라는 말로 강물이고성을 감싸 안고 돌아나가는 곳이기에 이런 표현을 했나 보다.
▶ 용문서원 입구
▶ 용문서원 입구에 전시된 장원급제자의 글
▶ 용문서원 내 전시된 가맹관에서 출토된 한나라 유물
다시 발걸음을 옮겨 서쪽으로 걷는다. 용문서원이라는 건물이 보이는데 소화 한성박물관을 겸하고
있다. 청나라 건륭 때 만든 서원으로 등용문에서 이름을 빌려 왔다고 한다. 세상에 아무나 용이 되는 나라가 중국이라 하지만, 사실 용이 되지 못하고 이무기가 된 사람도 무척 많을 것이다.
▶ 임청문
▶ 임청문 성벽 위의 모습
용문서원을 지나 좀 더 서쪽으로 걸어가니 임청문이라는 유명한 문이 보이는데 임청문은 소화고성의 서문에 해당한다. 일단 임청문 성루 위로 올라간다. 여기 올라가려면 통표가 있어야 한다. 정말 중국은 장사 하나만큼은 잘한다. 고성에 당연히 있는 성벽을 올라가는데 따로 돈을 받지만 사람은 이상하게도 이런 곳에 오면 올라가고 싶은 게 사람들의 상정이다. 성벽을 따라 걸어볼 수 있지만 성벽 위는 그리 넓지 못하다. 한나라 깃발, 촉나라 깃발이 아직도 휘날리고 있다.
▶ 임청문 누각 안에 걸린 장비와 마초의 전투도
성문 위의 누각 안에는 장비와 마초가 여기에서 수백 합을 다투던 그림이 걸려 있다. 그런데 과연 옛날 그때의 전투에 이렇게 일기토로 싸울 수 있었을까? 모략과 속이는 전쟁 통에 대군이 양쪽에 지켜보는 가운데 장수 두 사람이 각각 출전해 정정당당하게 겨루다니 기적과도 같은 일이 여기서 벌어진다.
▶ "가맹장비전마초(葭萌張飛戰馬超)"의 현장인 임청문 앞 광장
임청문 성문 앞 광장은 삼국지연의에서 나오는 "가맹장비전마초(葭萌張飛戰馬超)"의 현장이다. 그때 유비가 낙성을 함락하고 면죽까지 차지하고 익주까지 위협하자 유장은 한중의 장로에게 서천 일부를 준다는 조건으로 유비의 뒤를 공격해 달라고 부탁하자 장로는 마초에게 2만의 병사를 주어 가맹관을 공격하게 하니 장비와 낮에 20여 합을 겨루어도 승부가 나지 않자 마초의 제안에 따라 야간전투에 돌입한다. 이를 야전마초라 한다. 장비와 마초는 3일 밤낮을 겨뤘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결국 제갈량의 반간계(反間計)에 넘어간 마초가 항복을 하면서 촉군의 승리로 끝났다. 마초와 장비의 무예를 한층 고조시켜 빛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제갈량은 마초의 무예를 높이 평가하고는 싸움을 말리고, 그 신출귀몰하는 계략으로 마초가 유비 쪽으로 귀순하게 만든다.
▶ 임청문 현판
임청문을 가맹관문이라고도 하는데 명나라 때 새롭게 복원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임청문은 소화고성의 육대경관 중 하나라 하지만, 나에게 가장 인상에 남는 곳이다. 임청(臨淸)이란 "관리는 맑아야 하며 그래야 민초를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다."라는 의미로 정해 놓았겠지만, 사실 당시의 관리 대부분은 부정, 부패, 혼탁, 뇌물 등으로 얼마나 민초를 더 쥐어짜야 유능한 관리였는가 일지도 모른다. 임청(臨淸)이란 글을 쓰는 자체가 관리는 깨끗하지 않다는 말이다.
▶ 전승파라 새겨진 돌
광장내에는 전승파(戰勝壩)라는 돌덩어리가 있는데 그때 장비와 마초가 싸웠던 곳을 입증한다고 만든 돌덩어리다. 있지도 않았던 소설 속의 이야기를 사실인 것처럼 이렇게 돌덩어리로 표지석까지 만든 이들의 속셈은 무엇일까? 마오쩌둥이 거짓말을 천 번이나 하면 사실처럼 된다고 해서 그랬을까? 역사의 왜곡과는 조금 다른 것 같고 멋진 이야기를 기정사실화해 그 이야기에 심취하는 거? 잘 모르겠지만 중국의 문화적 현상으로 한번 깊게 짚어볼 가치가 있는 것도 같다.
▶ 마초
여기가 마초가 장비와 싸우며 무공을 뽐내던 곳이니 잠시 마초를 만나본다. 천하제패의 위업을 이루겠다는 유비가 동가식서가숙 하며 빈대 신세로 살아가고 있을 때였다. 오나라와 연합하여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후 형주에서 머물고 있었을 때였다. 한중 사군이라는 장로가 한중 땅을 도교적인 방법으로 다스리는 도중, 서량의 마등은 임지로 떠나기 전 원래 유비와 함께 조조를 제거하려는 혈판장에 도장을 찍은 사람으로 조조가 마등을 제거하려고 한수에 밀명을 내리자 조조를 토벌하려고 군사를 움직이지만 실패로 돌아가 죽음을 맞는다. 이 사실을 함께 따라간 조카 마대가 서량에 남아 성을 지키던 마등의 아들인 마초에게 알리자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고 복수를 꿈꾸며 군사를 일으켜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치고 내려와 장안까지 넘보게 된다. 조조와 마초가 마주친 동관전투는 마초의 용맹을 알려주는 이야기다. 조조가 말을 타고 나오며 마초에게 "너는 조정의 녹을 먹는 장수의 아들로 어찌 황제의 명령을 집행하는 나를 배반하려 하느냐?"고 하자 마초는 "천하의 개 같은 조조야! 천하를 속이고 황제를 속이고 내 아버지와 형제를 죽인 철천지원수인 조조 너를 생포해 산채로 네 생살을 씹어 먹으리라!"라는 말을 끝내며 마초는 창을 비켜 잡고 조조를 향해 말을 달리니 조조 뒤에 있던 맹장인 우금이 뛰어나오며 마초를 맞이해 싸우지만 채 10합도 겨루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도망하고, 장합이 달려 나오지만 이 또한 패퇴하자 이통이라는 자가 나왔으나 나오자마자 바로 마초의 창에 꼬꾸라진다. 이를 본 마초의 병사들이 사기가 충천해 조조군을 향해 진격하니 일거에 조조와 조조군은 우왕좌왕 모두 뒤로 도망가기 바쁘다. 이렇게 동관전투에서 패하며 도망가던 조조는 살아남기 위해 붉은 비단 전포도 벗어버리고 수염도 자르며 깃발로 얼굴을 감싸고 도망가게 되는데 후일 조조가 이야기하길 일생일대 최고로 혼났던 순간이라 한다. 마초가 조조를 발견하고 창을 높이 들어 조조를 향해 던졌으나 조조는 나무 뒤로 돌아 숨어버리고 창이 나무에 깊이 박혀 빠지지 않는 사이에 조조는 멀리 달아나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다. 이런 마초가 결국, 조조의 책사였던 가후가 일부러 군데군데 글자를 지워버린 편지를 한수에게 보내, 마초를 의심하게 하는 이간계를 써 마초와 한수사이를 벌려놓고 통제가 안 되는 곳을 습격하는 계략에 빠져 마지막에는 전투에 패퇴하며 물러난다.
▶ 경후사 정문
▶ 제갈량 사후 승상의 자리에 오른 비위
임청문 광장을 나서 성 밖으로 조금 더 나가니 경후사라는 건물이 보이는데 경후사는 촉한의 대장군이었던 비위의 사당이라고 한다. 비위는 제갈량이 죽은 후 가맹관에 승상부를 설치한 인물이다. 경후사는 언제 처음 세운 것인지는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지만 문화대혁명시기에 완전히 파괴되어 2008년 다시 옛 모습대로 지었다고 한다. 명나라 때에는 사당의 규모가 무척 커 사당으로 들어가는 신도(神道)가 있었고 패방, 비정, 초당 등의 건축물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지 정사에는 비의(費禕)로 기록되었는데 나관중은 이 사람의 이름을 비위(費偉)로 썼다고 한다. 이는 나관중이 ‘의(禕)’를 ‘위(偉)’로 잘못 봐 사람 이름마저 바뀐 것 같다. 원래 한자는 쉬운 글이 아니기에 국어로 사용하는 중국 사람도 어려울 것이다.
▶ 비위의 묘
▶ 비위 묘 앞 비석
경후사 안에는 비위의 무덤이 있고 무덤 반대편엔 제갈량이 출사표에 쓴 지려충순(志慮忠純)이라는 비석이 서 있는데 "마음이 충성스럽고 참되다." 라는 의미이니 비위를 칭송하기 위해 출사표에서 글을 따온 것 같다. 다른 영웅에 묻혀 비위 이야기는 그리 많은 사람에 사랑받지 못했지만, 비위도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 비위의 죽음을 나타내는 비석
심모탁식(深謀卓識)이라 했다. 정월 초하루에 대연회가 개최되었는데 위나라에서 거짓 항복한 곽순이란 자가 그 자리에 나타나 비의가 만취했을 때, 너무 잘난 비위를 질투해 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사람도 너무 똑똑하면 제명에 가지 못하는 모양이다. 세상은 좀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이 살아가며 채워가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범인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비위가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평소 해학을 좋아하고 비웃기를 즐겼던 손권이 그의 신하들과 함께 비위를 몰아붙여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모두 당당히 답변함으로 마지막까지 비위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손권은 당당함에 반해 비위를 보고 하는 말이 "그대는 천하의 미덕을 갖춘 사람이다. 분명 촉에서 제일 신임하는 신하가 될 것이나 너무 중요한 자리에 등용되기에 오나라를 자주 오지 못할까 걱정이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여기도 남은 게 무덤뿐으로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자연으로 돌아간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하고 싶은 일도 하며 즐겁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 비위가 가맹관에서 승상부를 열고 집무하는 모습의 부조
경후사에는 비의가 승상부를 열고 집무하는 모습의 그림이 있다. 왜 후주 유선이 있는 익주에 가지 않고 승상부를 여기에다 열고 나라를 다스렸을까? 촉한은 이곳 가맹관에서 일어나 검문관에서 끝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촉한이 가맹에서 흥했다는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 보인다. 유비가 촉한을 세우며 이곳을 가맹이라고 이름 지었고 방통이 성도를 취하는 계책을 주었던 곳이며 장비가 마초와 밤낮으로 다투었고 유비가 유장을 습격할 때 유장의 장수 부금과 상존 등이 만여 명의 군사를 끌고 가맹관을 공략했지만, 곽준은 겨우 수백 명의 군사로 가맹관을 1년 이상 완벽히 지켰다.
▶ 가맹관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부조
그 후 촉의 근거지 익주로 진군할 때도 이곳만은 군사를 남겨 꼭 지켜두었다. 그게 유비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라 생각해서일까? 여기서 그 꿈을 구체적으로 다듬어 서천 침공을 하기 위해 출발한 곳이라 그랬을까? 황충이 지략과 용맹성으로 장합을 패퇴시켰고 비의는 여기에 승상부를 두고 촉한을 경영했다. 강유는 이곳 부근의 우두산에서 병을 얻었다. 이러니 촉으로선 이곳을 중요한 곳이라 여겼기에 파촉제일현(巴蜀第一縣), 또는 촉국제이도(蜀國第二都)라 했나 보다.
▶ 성 밖 길에서 본 수로
▶ 돌 방아
경후사를 나와 임청문 성벽을 따라 성문 밖 길을 걷는데, 무척 한적한 길이다. 나무에 홈을 파 수로를 만들어 놓았는데 무엇에 쓰는 것인지 모르겠고 소를 몰아 곡식을 찧던 돌방아도 보여 시골 분위기가 나는 것이 기분이 좋아진다.
▶ 성황묘 입구
▶ 성황묘 산문 내 부처상(?)
▶ 성황묘 정전
▶ 성황묘 정전 내 신상
잠시 길을 걷다 보니 성황묘라는 곳이 있다. 옛날부터 이 성안에 살다 죽은 망자의 혼을 달래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 고성에 사는 사람은 꼭 성황묘를 만들어야 했단다. 즉, 마을 공동으로 조상신을 모시는 곳이라는 의미로 먼저 살았던 조상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죽은 자를 위해 산 자가 예의를 다 했다는 말이다. 이곳 소화고성의 성황묘는 당나라 때 제대로 만들었으며 청나라 때 강희, 건륭, 가경, 도광 연간에 걸쳐 수차례 보수했으며 문화혁명 때 역시나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 고붕 입구
또다시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니 카오펑이라 부르는 고붕(考棚)이라는 곳에 다다른다. 고붕은 과거 유생들이 시험을 치르던 장소다. 그런데, 들어가는 문 양쪽으로 보이는 붉은 글씨가 내 눈을 어지럽히며 화나게 한다. 신중국이 태어나며 홍위병이란 무리가 떼지어 다니며 문화유산을 모조리 파괴할 때의 구호가 적혀 있다. 선조의 유산에 저런 천박한 짓을 한 자들은 그게 천박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 고붕 내 유생들의 숙소
고붕 안으로 들어가 본다. 여기가 당시는 입신양명의 첫걸음인 셈이었다. 청나라 때만 해도 이곳은 322칸에 달하던 방은 현재 12칸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방의 숫자가 바로 소화고성은 이 근방에서는 가장 중요한 마을이었다는 의미다. 1970년대 중국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문화대혁명 당시 반봉건 기치를 내건 붉은 무리가 여기도 모두 훼손했다고 한다. 있는 자, 배운 자, 잘난 자는 그들의 적이라 생각하고 무식하니까 이런 곳부터 먼저 죽창 들고 덤볐을 것이다. 소화고성은 이런 사실을 당당하게 안내문에 적어두었으니 세상 정말 많이 변했다. 과거 유생들이 시험을 치르던 장소인 고붕(考棚)에서는 국가의 통치이념이자 입신양명의 수단이었던 유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곳으로 마치 감옥처럼 생긴 방이 기숙사였던 모양이다. 공부를 입신양명의 기회로 삼는 학동들이 저 안에 들어가 세월 가는지 모르고 기계처럼 외우기에 전념했을 것이다. 방안은 마치 여행지에서 저렴한 숙소인 도미토리 룸을 보는 것 같다.
▶ 향시를 치뤘던 옥공당
▶ 옥공당 내 전시된 시대별 과거제도
옥공당(玉公堂)은 부근의 학동이 모여 과거 시험을 치르던 장소라 한다. 청나라 동치 연간에 세워진 고시장으로 오랜 기간 손보지 않아 많이 훼손되었는데 이곳에서 시험을 치고 우수한 성적을 올린 사람은 중앙무대로 진출해 다시 시험을 쳤다고 한다. 그러니 이곳은 향시(鄕試) 고시장이다.
▶ 명나라 때 전시에서 장원한 조병충의 답안지
과거전청(科擧展廳)이라는 곳엔 과거와 관련된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때 이곳에 보관했던 과거시험과 관련된 많은 유물과 자료는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시험을 치지도 못할 실력으로 살던 자들의 후안무치한 행동이 이런 곳부터 부수려고 들었을 것이다. 이곳에 전시된 답안지는 1598년 명나라 만력 25년 산동 청주부의 조병충이란 사람이 황제 앞에서 치른 전시에서 쓴 답안지다. 당시 나이 25세였으며 답안으로 쓴 글자 수가 모두 2,460자라고 한다. 제일갑 제일명이라는 말은 바로 황제 앞에서 치른 시험에서 장원급제했다는 의미로 당시 조병충은 천하를 얻은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유물을 몽땅 훼손했으면 이런 것조차 산동성에서 가져왔을까?
▶ 문묘 입구
고붕을 나와 문묘로 간다. 문묘는 관제묘만큼 중국에선 흔한 곳이다. 文으로는 공자요, 武로는 관우다. 워낙 작은 고성이라 어디에 어떤 곳이 있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냥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차례대로 다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고성에는 공자 사당은 있어도 관제묘는 없나 보다. 유비가 촉으로 들어올 때 관우는 형주에 남아 있어 그랬을 것이다. 소화고성의 문묘는 송나라 때 세워졌으며 그동안 일곱 차례나 보수했지만, 건축물 대부분이 너무 많이 훼손되어 얼마 전까지는 청나라 가경 22년에 세운 대성전만 남고 모두 폐허로 변해 2008년에 복원해가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 문묘 내 석패방
▶ 문묘 조벽
▶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
▶ 대성전 내 공자 좌상
입구로 들어서니 석패방이 무척 많다. 반원의 연못도 앞에 만들어 놓았다. 영성문이라는 패방 안에는 문묘가 있고 공자를 모신 곳이다. 입구에 있던 여직원이 따라오며 설명을 해 주겠다 고 하는데 중국어를 알아야 설명을 들을 게 아니겠나? 그녀도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고 머쓱해한다. 대성문 안에는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가 있는데 문묘 안의 공자 조상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한다. 공자의 고향 취푸의 공묘에서는 사진을 찍어도 되는 데 왜 여기는 안 된다 할까? 도관고금(道冠古今)이라 쓴 패방이 보인다. 도관고금(道冠古今)이란 말의 의미는 현자의 말은 세월과 관계없이 위대하다는 칭송이 아닐까? 덕배천지(德配天地)라는 패방도 보이는데 이 말은 공자의 덕이 하늘과 땅에 두루 미친다는 의미다. 중국이나 동양에서 공자의 위치는 신과 동격인 듯하다.
▶ 정절이란 석패방
문묘를 나와 또 걷는데 길 가운데 멋진 석패방 하나가 보인다. 정절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잠시 글을 읽어보니 오 서방네 집에 시집온 여인을 칭송하여 세운 패방으로 보인다. 32살에 서방이 죽자 그 후 서방이 없어도 부모공양 잘하며 살았다는 여인을 칭찬하기 위해 만든 패방이란다. 그래서 행복했을까? 아니면 불행했을까? 먼저 죽은 서방이 밉진 않았을까? 그녀만이 알 것 같다. 여성에 대한 생각도 나라마다 다르고 또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게 아닌가? 이렇게 패방 하나 세웠다고 그녀의 삶이 행복하고 고결했을까? 이런 패방이 다른 여인에게 무언의 압박이 되지는 않았을까?
▶ 과거 관청이던 소화현서 입구
▶ 소화현서 내 친민당
계속 길을 가다보니 성내에서 제일 높은 곳에 소화현의 관청인 소화현서가 있다. 건물 위치가 벌써 민초가 사는 곳과 차별화했는데 현민을 섬기려는 자세인지, 군림하려는 자세인지 궁금하다. 요즈음 우리나라도 관공서를 보면 시민은 생각은 하지 않고 주리를 틀어 걷은 세금으로 빚을 내 어마어마한 건물로 무슨 유리의 성을 지었는데 그런 건물에서 근무하면 시민을 더 잘 섬긴다 생각하는 건가? 월소답오십(越訴答五十:고소를 남발하면 답으로 50대의 곤장), 무고가삼등(誣告加三等:무고이면 삼등을 더한다.)이란 글을 쓴 팻말이 관청 입구에 서 있어 등골이 오싹하다. 옛날에도 무고가 많았나 보다. 그런데 현판에는 친민당(親民堂)이라고 썼다. 당나라 때 처음 지었지만, 여기도 모든 내용물은 문화대혁명 때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다고 한다.
▶ 태수가
이제 성내를 거의 둘러보았다. 소화고성의 동서를 관통하는 제일 번화가가 태수가(太守街)라고 한다. 그 길에는 바닥에 깔린 돌길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가운데 길은 관리들이 다니던 길이고, 그 옆길은 가마꾼들이 지나던 길, 제일 가장자리로 난 길은 일반 백성들이 오가던 길이라고 한다. 당시에 민초는 길도 마음대로 걸을 수 없었나 보다.
▶ 태수가 끝에 있는 가맹정
고성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골목길만 걸어도 좋다. 길 가운데에는 가맹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비록 소화고성으로 이름을 바꾼지 오래되었지만, 가맹이라는 이름이 이곳 사람들에게는 자긍심으로 남아있나 보다. 중국의 고성이라는 곳을 걸어보면 모두 장사하는 사람이 사는 평범한 길이다. 다만, 그 길의 모습이 옛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도 마을 큰길은 장사하는 사람이 살았을 것이고 작은 골목길로 들어가면 민초가 사는 집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 소화고성을 떠나야겠다. 2시20분에 고성으로 들어가 6시까지 구경했으니 3시간30분정도 걸린 것 같다. 광위엔으로 돌아가기 위해 소화고성 입구 버스정류장으로 갔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광위엔 가는 버스가 오지 않는다.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니 오후 6시가 막차란다. 할 수 없이 인근 빠오륜(宝轮,보륜)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1人/1.5元) 빠오륜으로 가 다시 광위엔으로 돌아오는 시내버스를 탄다.(1人/6.5元)
추녀 끝에 걸린 풍경은 바람이 불지 않으면 아름다운 소리를 내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야만 맑은 소리를 낸다. 인생에 있어서 무사평온하다면, 삶의 즐거움이 뭔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기에 인생의 참맛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여행지로 직접 뛰어들어 골목마다 기웃거리며 구경하다 보면 여행의 참맛을 느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