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김규진
나는 7남매 중에 막내아들이다. 65년 1월 아버지, 엄마가 45세, 40세 되는 해 온 동네 떠날 갈 듯 울어 젖혔다. 내 위로 누나들이 세 명이나 있어 또 딸일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대문 위에 고추를 달게 된 것이다. 엄마 말에 의하면 동네 아가씨, 아줌마들이 나를 포대기에서 빼내어 온갖 성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쁘고 잘 생긴 아기를 그냥 놔두지 않은 거 같은데 오래된 일이니 너그럽게 용서하련다.
아버지는 6.25 전쟁통에 이북 장단에서 피난 내려와 그저 막노동과 온갖 굿은 일로 7남매의 생계를 책임지셨다. 게다가 큰 형은 포탄 파편 조각이 눈에 들어와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우리집은 가난해도 너무 가난했다. 보리밥도, 수제비도 없어서 못 먹었다. 집성촌 종중 땅을 부쳐먹는 임대농사는 7남매를 먹여 살리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나는 막내아들이라 행운아였다. 막내만큼은 끝까지 교육시키겠다는 아버지 신념덕분에 나는 중단없는 학교를 다녔지만, 형들과 누나들은 국졸, 중졸이 전부다.
아버지는 자신의 폐를 망가트리는 불결한 장소에는 꼭 있었다. 낡은 초가집 지붕을 걷어내는 이엉작업, 먼지 풀풀 나는 가을 추수 탈곡기 앞, 묵는 재가 가득한 재래식 구들을 걷어내는 부엌, 최종 시신을 받아서 안치하는 묘지 구덩이 등 남들이 하지 못하고, 하기 싫은 막노동 장소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노후된 초가집을 떠나 양옥집 창고를 짓는 일을 돕는데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기침이 아주 잠깐 멈출 때 기왓장을 올려줘야 했다. 아버지는 끝내 창고를 짓는 작업을 다 마치지 못했다. 다음 날 큰 매형하고 병원을 찾았는데 폐암 말기로 생명줄이 다하고 있음에도, 가족생계를 위해 아버지는 감기약만 지어 드신 거였다. 결국 아버지는 환갑잔치를 겨우 마친 이듬해에 돌아가셨다. 너무 일찍 운명하셨고, 나는 열아홉 살 고3 때부터 아버지 없는 인생을 살았다.
아버지는 내 인생을 미리 설계하셨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 생각대로 살아왔다. 중학교 3학년 말에 고등학교 진학문제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다툼을 심하게 하셨다. 아버지는 인문고, 엄마는 공고를 보내고자 했다. 공고 등록금이 아주 저렴하기 때문에 엄마 의견이 이기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버럭 소리 지르셨다. "인문고 가서 대학 못 가면 면서기라도 하면 되지, 아무 소리 말아요" 그 순간 나는 소리 없는 물개 박수를 쳤다.
며칠 뒤 담임 선생님한테 아버지가 다녀 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막내아들의 앞 날을 선생님을 통해 확신의 도장을 받으신 것이다. 일제시대를 살아 온 시골 농부 아버지에게는 면서기라는 직업이 대단한 권력으로 보였을 것이다. 결국 아버지 소신처럼 막내아들은 고양군 원당읍 서기를 거쳐 고양시청 사무관으로 퇴직했다.
일찍 사별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아주 단편적이고 추억도 부족하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작은 기억속에 잊지 못할 따뜻한 냄새는 넘쳐난다. 8살 때는 귀가 아파서 서울병원을 다녀올 때 아버지는 일부러 앞으로 달려가 골목에 숨었다가 나타난 사건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 아버지가 안 보여서 엉엉 우는 내 모습이 그렇게 재밌고 귀여웠나요?"
흙투성이가 된 검정고무신을 우물가에서 깨끗이 닦아주고, 비 개인 다음 날이면 산에서 풍성하게 따온 꾀꼬리, 송이버섯 매운탕은 최고의 보양식으로 기억한다. 화장실 청소를 한 후 숨겨 놓은 담배를 자리에 그대로 놓고 아무 말 안 하신 아버지(그래서 골초 됐어요), 장날에는 시장에서 순댓국이나 보신탕을 먹을 때 왕건이 고기는 내 그릇에 옮겨 주신거 잊지 못한다. 15살에 시집온 엄마가 아무것도 몰라서 마루에서 강제로 큰 누나를 만들었다는 소곤거림은 아버지와 나만의 19금 비밀이다.
그래도 다행히 엄마가 아버지가 못다 한 인생까지 사시다 99세에 돌아가신 거 같아 조금은 마음 편하다. 26년간 엄마와 함께 살면서 고부간 다툼은 평행선을 달렸어도 아버지에게는 자랑스럽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면서기를 거쳐 34년간 공직을 마무리 한 지금, 너무 보고 싶고 감사한 마음뿐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곧 나의 해방일지가 되어 간다. 사랑하는 두 딸의 기억 속에 푸근하고 든든한 아빠로 남고자 한다. 이어지는 시는 6년 전 지은 우리 아버지다.
우리 아버지
아버지가 망설이신다.
‘집에 가서 편히 먹고 싶은 음식 다 드세요’
의사 선생님 말씀에
우리 아버지
침대 모서리를 움켜쥐신다.
‘이제 집에 가요 아버지’
앙상한 손 마디마디
어디서 나온 힘일까
충격과 슬픔에 거머쥔 손아귀가 떨린다.
아버지를 업는다.
열 걸음도 못 가서 멈추고 만다.
아버지의 고된 삶이었던 나
가벼운 몸을 업고 울고 말았다.
주저앉고 말았다.
첫댓글 사랑받고 선택받아서 더 부담스러운 삶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이 느껴지는 부러운 글입니다. 그 믿음이 김규진 선생님께서 단단하고 올곧은 길을 걷게 하셨겠지요? 유머 코드까지 실려서 유쾌하고 즐거우면서도 뭉클한 감동이 전해집니다.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그때 아버지 나이가 되었네 하면서 놀라는 일이 종종 생깁니다.
아버지랑 그닥 친하지 못했던 건 아버지 탓이었을까요 내 탓이었을까요.
아버지의 인생이, 사랑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그 분의 노고와 삶의 무게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김규진 선생님의 삶도 아버지의 기대에 맞갖게 잘 사셨네요. 아버지께서 뿌듯해 하시며 잘했다고 칭찬하실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