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관한 단상/똥꼬의사
내가 진료실 의자에 앉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지금, 누군가는 고통과 힘겨운 싸움을 치르고 있다. 어금니를 깨물기도 하고, 배를 움켜쥐기도 하고, 식은땀을 흘려가며 방바닥을 뒹굴기까지 하면서.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내가 일하고 있는 병원만 하더라도 고통과 신음소리는 넘쳐난다. 해맑은 미소와 호기심 가득한 눈을 가진 초등학교 여학생이 간암에 걸려서는 느닷없이 세상을 뜨고 만다. 탐스런 꽃은커녕 채 꽃망울을 터뜨려보지도 못하고. 아이의 부모는 시커먼 고통 속에 내동댕이쳐진 채 절망적으로 울부짖는다.
몸도
마음도
아프다, 인간은!
흔히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름의 존재이유가 있다고들 한다. 언뜻 들으면 그럴듯하고, 심지어는 철학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고통이라는 문제 하나만 들이대고 생각해보더라도 이내 허황된 말임을 알게 되는 것이고, 하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한 미소를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고통은
무슨 이유로
존재하는 것인가!
“통증 없애는 뭐 좋은 방법 없냐?”
환자의 항문에 매스를 들이대는 외과의사들끼리 모일라치면 답답한 마음에 너나없이 터뜨리는 질문이다. 그만큼 환자의 고통이 크다는 얘기가 될 터. 나름대로 터득한 비법 아닌 비법들을 조심스레 꺼내놓는 것인데 언제나 뾰족한 수는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나기 일쑤고, 종국에는 본시 항문이란 데가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겠냐는 식으로 위안을 삼고는 부랴부랴 대화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다반사다. 고통, 그건 환자뿐만 아니라 의사에게 있어서도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달갑잖은 존재임에 틀림없다.
조앤 롤링.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해리포터’ 시리즈의 저자. 생후 4개월 된 딸과 초라한 단칸방이 전부였던 여자. 나는 그녀의 극적인 인생을 보며 세상에는 여전히 마법이 존재함을 희미하게나마 믿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마법다운 마법을 직접 체험하진 못했지만. 그녀만큼 짜릿한 마법을 체험한 건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마법이라면 마법이라 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에 어쭙잖게 자랑해볼까 한다. 어느 날 마법처럼 책 한권이 내 눈에 들어왔다. 한센병(문둥병)에 관한 기록을 적어둔 책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한센병은 이렇게 해서 발견되었다. 옆방에서 깔깔대며 마냥 즐겁게 놀고 있는 아이를 보기 위해 방문을 연 엄마는 기겁을 하고 놀랐다. 자신 앞에 펼쳐진 소름끼치는 광경에 아이의 엄마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가 날카로운 칼로 자신의 손가락을 그어가며, 흘러나오는 피로 방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아파하는 기색 하나 없이 즐겁기만 한 표정으로. 한센병에 관한 기록을 읽어 내려가던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해 불행한 사람도 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되었든 고통 없이 살았으면 하는 것인데 고통이 소원인 사람들이 있는 것이라니! 우연한 기회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에 사고(思考)가 닿는다면, 그것 또한 마법이라 여길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면 그건 마법이라기보다는 나의 불찰이자 어리석음이라 해두는 편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인 나는 얼마나 많은 암을 보아왔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느닷없이 날아든 암이라는 작살에 꽂혀 버둥대며 숨이 멎어가는 것을 보아왔던가. 의사로부터 암이라는 진단결과를 전해 듣는 대부분의 환자들 입에서 터져 나오는 첫마디는 “그동안 아픈데 하나 없었는데………?”라는 자조 섞인 한숨소리인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환자는 암에게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자신의 몸뚱이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인간을 무병장수의 안전지대로 이끌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현대의학이건만, 이렇듯 암 앞에선 속수무책인 이유가 도대체 뭘까? 여러 가지 이유나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확실한 대답은 암에 걸려도 고통이나 아픔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인간은 암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고통이 비단 한센병 환자에게뿐 만 아니라 우리 모두, 누구에게나 소중한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이런 이유로 뒤늦은 깨달음은 마법이 아니라 나의 어리석고 세심하지 못함에 다름 아니었음을 고백하는 편이 옳다는 것이다. 암과 고통의 기이한 상관관계에 대해 약간의 추가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 몸을 침입한 대부분의 바이러스나 세균은 어수룩하게도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물론 이들의 이런 미숙함 덕에 우리 몸의 방위체계는 이들을 조기에 찾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통이나 열과 같은 경보음을 인간에게 들려줌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게끔 해준다. 감기 바이러스나 대장균이 침입할 경우 우리 몸이 이를 즉각 알아채고 기침이나 열, 복통, 설사와 같은 경보음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 좋은 예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반해 암은 감쪽같은 위장술로 자신의 존재를 전혀 드러내지 않을뿐더러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다보니 우리 몸은 감쪽같이 속은 채 고통이라는 경보음조차 울려보지 못하고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복통이니 두통이니 열이니 하는 경보음이 있어야 피하든지 싸울 게 아닌가? 암이 어느 날 위장막을 벗어던지고 보란 듯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경우, 이미 상황은 끝난 거다. 뒤늦게 고통이니 열이니 하는 경보음을 울려봐야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이러스나 세균과 같이 암이 침입할 경우에도 우리 몸이 즉각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그때는 암 역시 우리의 적수가 될 수 없다. 이런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고통은 생명체를 존재케 하는 절대조건임에 틀림없다. 즉각 고통을 느낄 수만 있다면 암은 암도 아니다. 암 앞에서 벌벌 떨 이유도, 암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이유도 없다.
간혹 글을 쓰는 사람들 틈에 끼어 술자리를 가질 때가 있다. 취기가 오르면 으레 누군가가 던지는 질문 중 하나가 왜 글을 쓰느냐는 것인데, 답변도 가지가지다. 가기가지 사람들이 모였으니 답변도 가지가지일밖에. 누군가는 좋아서 쓴다고도 하는 것인데, 그런 말을 들을라치면 나는 풀린 눈으로 피식 웃고는 소주잔을 비운다. 아무리 취중이라지만 뻔뻔함이 지나치다는 생각에 속이 씁쓸해진다. 내가 아는 한 좋아서 쓰는 이는 없고, 아파서 쓰는 거다. 아프고, 외롭고, 지치고, 지긋지긋하고, 분노가 치밀고…… 그래서 발버둥치는 것이고 글을 끼적이며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아프지도 않은 놈이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책상 앞에 앉아서는 떠오르지도 않는 생각을 짜내느라 끙끙대며 궁상을 떨 이유가 무에 있겠는가. 아파서 몸부림치는 게 글쓰기만은 아닐 것이다. 붓을 드는 것도, 건반을 두드리는 것도, 대리석에 망치를 들이대는 것도, 다 아프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고통이야말로 생명뿐만 아니라 창작이니 발명이니 하는 인간 특유의 숭고한 가치를 잉태하는 자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목마름의 고통이 없는데 우물이 존재할 이유라곤 없는 게 아닌가.
‘고통’과 ‘존재’는 다르게 발음될 뿐 같은 뜻을 가진 단어다. 고통이 없으면 생명 또한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고통은 피했으면 싶은 게 인간의 대책 없는 본성이지 싶은데,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고통과 생명이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이자 숙명이라면? 끌어안고 품을밖에. 사랑할밖에. 세상 구석구석, 도처에 널려있는 고통을 지켜보기에 나는 충분히 지쳤고, 고통 속에 신음하며 살아가는 내 자신에게도 치를 떨 정도로 넌덜머리가 난다. 하지만 고통이 사라지는 순간 죽을 수밖에 없는 기막힌 인간조건에 대해 안 이상 앞으로는 굳이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련다. 고통을 느끼기에, 아프기에 살아있는 거라는 섬뜩한 진실에 굳이 등을 돌리지 않으련다. 아프기에 살아 있듯, 고통이 있기에 희망 또한 존재하는 거라는 믿음 하나만큼은 꼭 움켜쥔 채 살아가련다.
복수심에 불타는 벤허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이는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한센병을 앓고 있던 그의 어머니와 연인이었다. 그 옛날 파멸로 치닫던 벤허에게 손을 내민 한센병 환자가 오늘에 와서는 고통이라는 믿음직한 벗을 문전박대하기 바쁜 우리 모두에게 깨우침의 손을 내미는 것이니, 그들의 희생이 보상을 받을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