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해바라기」
나의 8번째 가곡은 「해바라기」 였다. 나는 워낙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진달래, 아카시아꽃, 달맞이꽃, 라일락꽃, 동백꽃 등 못지않게 해바라기를 좋아했다. 해바라기는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 있는 그 자태가 좋았고, 그 샛노란 색깔이 정열적이라서 좋았으며, 태양만을 바라보는 그 일편단심의 굳센 믿음이 좋았다.
그런가하면 나는 또 젊은 시절 저 유명한 함형수 시인의 시(詩) ‘「해바라기의 비명(碑銘)’을 외우며 투르게네프를 닮았다는 그 시인의 아픔을 생각했다.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함형수(咸亨洙, 1914~1946)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푸른 보리밭 사이로 날아오르고 싶었던 시인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이른 죽음을 생각하면 나는 늘 가슴 깊은 곳에서 슬픔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그녀는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성에게,
오늘 아침기온이 영상 6도 7분이라는데 무척이나 쌀쌀한 것 같아. 성이 추울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어. 오늘은 휴가라서 인천에 가려다가 그만두었어. 나 혼자는 가기 싫어서. 지금쯤 코스모스는 지고 들국화는 이를 것 같아. 카메라를 메고 연안부두로 자유공원으로 쏘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나봐. 그때가 정말 그리워.
오직 한 사람인 나의 성,
나의 자랑이 되어줘. 오직 그대 한 사람만이 나의 희망이며 나의 모든 것이니까. 편지 속에 깃든 성의 사랑과 의지가 나를 감사하게 하고 있어. 나는 성으로 해서 거듭 태어나는 성의 밝은 해바라기가 되고 싶어. 성을 바라보며, 성이 보는 것을 나도 보고 성이 느끼는 것을 나도 느끼고...
밝고 맑게만 살고 싶어. 티 없는 웃음을 지니고. 내 의지와는 별개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하여도 한 조각의 창공을 내 가슴에 지니고 살고 싶어.
차가운 대기로 인해 얼어붙은 나의 손을 그 자랑스러운 따스한 손으로 녹여줘. 그대의 가슴의 따스한 사랑이 그 두 손을 통해 내 가슴까지 훈훈해지도록.
요즘 나 타고르시집을 읽고 있는데 너무너무 좋아. 성에게 다음에 선물할게. 그 중 시 한 편을 옮기고 이만 펜을 놓을까 해. 편지를 쓰다 보니 저절로 말투가 이렇게 돼. 버릇없다고 꾸짖지 마시길...
기탄잘리 no.4
내 생명의 생명이시여, 이 봄을 티 없이 하고자 항상 애쓰는 까닭은 임의 생명의 촉감이 이 몸의 온 사지에 느껴오기 때문. 내 생각으로부터 온갖 거짓을 항상 쫓아내고자 애쓰는 까닭은 님께서 내 마음 속에 이성(理性)의 등불을 켜시는 진리인줄 아는 때문. 이 내 가슴에서 온갖 죄악을 몰아내고 이 내 사랑을 항상 꽃피게 하고자 애쓰는 까닭은 임의 옥좌가 이 내 가슴 한가운데 성전(聖典)에 있는 때문. 그리하여 임의 뜻을 이 내 행동에 나타내고자 함이 내 애쓰는 길이오니 이 몸에 활동할 힘을 주심은 임의 권능인 때문. 1977. 10. 15. 당신의 信
나의 성에게
지금쯤 어쩌면 성도 나를 생각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다 종이를 찾아들고 편지를 쓰려하니 ‘나의 성’이라고 쓰고 싶어졌어. 글은 말보다 쓰기 어렵고 또 진실한 것 같아. 나의 성이라고 쓰고 보니 좀 수줍어져. 그렇지만 성은 오직 나의 성이어야 하니까.
사랑해 진정. 내 서투른 정성과 진정으로. 성에게 주고 싶은 것도 많고 성에게서 받고 싶은 것도 왜 그리 많은지... 성은 이 마음을 알아줄까, 이 서럽도록 외로운 마음을. 성이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을 나도 듣고 싶고, 성이 가고 싶어 하는 바다로 나도 가고 싶다. 처절하도록 우울한 노래도 듣고 싶고 축복인양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눈물이 나도록 커다랗게 웃고 팔딱거리며 뛰어보고도 싶어. 연약한 의지를 비웃어도 보며 또한 내일을 나의 노력으로 엮고도 싶어. 이 세상에 던져진 홀로인 나를 스스로의 존재를 사랑하며 지혜롭게 가꾸고도 싶어. 그리하여 제물처럼 성 앞에 바치고 싶어.
다만 주고 싶은 마음으로 보상이나 제약을 받으려는 어리석음 없이. 그 무엇도 성에게 원하지 않아. 이대로 사랑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해. 성의 건강과 밝은 미소와 환한 내일이 있다면 나는 그 무엇이라도 대가를 치를 수 있을 것 같아. 혹 나의 내일이 어두워진다 해도(1979. 1. 14.).
나는 그녀의 이 편지를 읽고 그녀가 이 편지 속에서 시(詩)를 쓰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의 편지를 인용하여 이 시를 완성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는 어쩌면 내가 그녀와 협의 없이(?) 그녀와 함께 쓴 시가 되었다.
해바라기
한 뼘의 푸른 하늘이라도
내 가슴에 지니고 살고 싶어
이렇게 꼭대기에 서서
날마다 그대를 우러를 수 있다면
노랗게
노랗게 입술이 타도 좋아
그대 눈을 통하여
나도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싶어
그대가 보는 것을 나도 보고
그대가 느끼는 것을 나도 느끼고 싶어
빛을 향한 소망이
나에게도 허락된다면
무한한 정점을 향해
반짝이는 의지로
언제까지나 꼿꼿하게 서 있고 싶어
어둠이 찾아와 지친 밤에도
눈시울에 감기는 슬픔을 찍어낼 수만 있다면
아, 아침이면 거듭 태어나는 맑은 얼굴로
내 젖은 육신을 가다듬고
제물처럼 그대 앞에 바치고 싶어
나는 이 시를 바탕으로 가곡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시는 원시(原詩)를 거의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살려서 나의 여덟 번째 가곡 「해바라기」가 되었다. 다만 이 시에 멜로디를 붙이는 과정에서 최종적인 가사는 조금 수정되었다.
해바라기
한 뼘의 푸른 하늘이라도
가슴에 지니고 살고 싶어
이렇게 꼭대기에 서서
날마다 그대를 우러를 수 있다면
노랗게 노랗게 입술이 타도 좋아
그대의 눈으로 나도 온 세상을 보고 싶어
그대의 빛으로 나도 온 세상을 사랑하고파
빛을 향한 소망이 나에게도 허락된다면
무한한 정점을 향해 반짝이는 의지로
언제까지나 꼿꼿하게 서 있고 싶어
(간주)
어둠이 찾아와 지친 밤에도
눈시울에 감기는 슬픔을 찍어낼 수만 있다면
아침이면 거듭 태어나는 맑은 얼굴로
내 젖은 육신을 곱게 가다듬고
제물처럼 그대 앞에 바치고 싶어
제물처럼 그대 앞에 바치고 싶어
그리하여 가곡 「해바라기」는 비교적 쉽게 2023. 12. 6. 멜로디가 완성되었고, 2024. 1. 16. 구광일작곡가와 채보를 하였으며, 2024. 6. 12. 피아노3단악보가 완성되었고, 2024. 7. 10. 장충신세계레코딩스튜디오에서 소프라노 임청화의 가창으로 녹음되었다.
https://youtu.be/gl6tU-vk7hc?si=v1CFB2mMW0B0WVnK
첫댓글
가곡의 작품으로
일생을 그리시는
작가님의 진정 소중한 한 페이지에
마중을 드립니다
강추 드립니다
양떼 선생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