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글자의 시작
우리 문자는 신지(神誌) 때부터 시작되어 신화와 신정을 기록하였고 일반 정치와 종교를 다 문자로 기록하여 운행하였다. 삼부여와 삼한과 부여왕조에서도 역시 계속하였을 줄 믿는다. 그러나 그때 외국 사람들의 등쌀에 쪼들리어 여러 백 년 동안 무서운 전쟁 중에 글의 자취는 다 사라져 없어지고 또 상고 할 바도 없다. 그 후 고구려에서 유기 4백여 권이 있다고 기록이 있으나 무슨 글로 쓴 것을 알 수 없고 유기조차 찾아 볼 수 없다. 무슨 문자를 썼으며 무슨 글을 썼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열국시대에 지라사람들이 침입하였으니 혹 지라 사람의 글을 썼는지 혹은 우리의 지은 글이 따로 있는지 역시 알 수 없다. 지라에서는 창힐(蒼頡)이 글자를 지었고 복희(伏羲) 때에 글자를 썼고 요순(堯舜) 때에는 글자가 들어나게 쓰여 졌다. 우리 잔군 임금님이 요와 같이 섰으며 그 후 하우(夏禹)씨 도산(塗山) 만국회에 아드님 부루가 참여하였으니 그때에도 문자가 필요하여 무슨 기록이 있을 터인데 찾아 볼 수 없으니 참 답답한 일이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에 비로소 문자로 기록하였다 하여 글자의 창안자는 고흥(高興)박사이다. 짐작건대 백제에서도 조상적 쓰던 문자를 찾아 쓰게 하고 신하 중 고흥박사가 주장하였다 하니 참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조금 전에 고구려에서 이문진(李文眞)이란 선배가 있어 글을 쓰라하니 백제에서도 이문진의 글을 모본하였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 문진과 고흥이 다 무슨 글자를 썼다는 기록이 없고 그 글도 없으니 역시 알 길이 없다.
고흥박사가 비로소 국사를 기록하였으니 이제 고흥의 기록을 보지 못하였으나 이제 김부식의 기록한 삼국사는 무엇으로 기록 하였는가 만일 우리글이 전하여졌다면 김부식도 그 글을 알았으리라 생각이 되며 필경코 지라 사람들의 글을 쓴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백제 왕인(王仁)이 전하여 준 일본 문이 역시 한자를 모방하여 지었으니 우리글도 직접 한자 그대로 썼는지 음독 훈독을 합하여 무슨 글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하여튼 고흥박사 때 문자로 국사를 기록하였다는 그 사실만도 백제의 문화를 말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