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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은혜로운 향기 원문보기 글쓴이: Gideon
대심방 설교자료 모음(4)
내 안에 사신 그리스도
갈 2:19-21
강동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은 죽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
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 삶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다 하는 것입니
다.
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사도 바울을 끝까지 괴롭힌 것은 율법과의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바울에게 아무
평화도 주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것
이 바울이 내린 율법에 대한 최후의 결론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처럼 여러분의 전 생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결국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삶의 목적을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2.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있는 것을 신령한 연합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상 예수님께서
떠나가지 않으셨다면 주님은 어느 한 공간, 어느 한 부류의 사람들과만 함께 계실 수 있
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이 떠나심으로 이제는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그 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고 동
거하십니다.
3. 이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마땅히 드려야할 섬김은 생각
하지 않고 내 유익만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지금도 우리 가
운데 살아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말씀
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한 연합체가 되어 성령의 거룩한 열
매를 맺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동신교회목사
하나님을 기쁘시게
시 20:1-9
김삼환
성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을 특별
히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과 사명을
가지고 살 때 우리의 삶이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오는 일입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
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성소에서 우리를 만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성전에 나오는 자
를 기뻐하십니다. 거룩한 교회를 통하여 인간을 축복하십니다. 성전을 귀히 여기고, 사
랑하고, 가까이 하고, 성전에 가는 것을 기뻐하는 개인이나 가정, 민족은 인류 역사에
큰 일들을 하였습니다.
어디에 축복이 있습니까? 어느 곳에 기쁨이 있습니까? 성전에 있습니다. 마음에 일어나
는 그 허무함과 갈등을 토해 놓을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에 나오면
죄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유혹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
나는 곳이며 평안을 얻는 곳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강건하여지며 위로를 받는 곳이 교회
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샘물이 솟아나 목마르지 않게 하는 곳,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
아가게 하는 곳, 우리를 담대하게 하며 건강한 인격을 형성시켜 주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착하고 의로운 사람만 나오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더 사
랑하십니다. 부족하고 허물 많은 사람을 더욱 사랑하십니다. 교회는 깨끗한 것만 걸러내
는 곳이 아닙니다. 잘 사는 사람이나 의로운 사람만 모이는 성역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들어오는 곳입니다. 온갖 죄와 허물을 가진 사람들이 와서 주의 보혈로 씻음 받는 곳이
며 용기 없는 사람과 죽고 싶은 사람이 와서 살게 되는 곳입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그 얼굴에 기쁨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죄 사함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얼굴에 천국이 없는 분들을 있습니다. 교회는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는 곳입니다. 교회는 다 토해 놓고, 주님 앞에 맡기고, 은혜를 받는 곳입니
다. 주님 앞에 못 내어놓을 것이 없습니다. 다 내어놓으면 은혜 받고 용서함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
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전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어머니 같은 주의
품안에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명성교회목사
단비가 내리는 땅을 만듭시다
삼하 21:1-14
김재남
인생의 삶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육적인 삶과 혼적인 삶과 영적인 삶이 그것입니다.
혼적인 삶은 인간의 이성에 따른 삶이긴 하지마는 그 이상은 아닙니다. 나의 판단이 바
르다고 생각하면, 그 정도는 반드시 박으려고 몸부림치게 됩니다. 영적인 삶은 하나님
이 바라고 기뻐하시는 삶으로서, 비록 양보하고 주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속에는 항상 하
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머물게 됩니다.
첫째, 육적인 삶으로 사울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서 남을 죽이기도 합니다. 사울
은 항상 잔인할 만큼 본능적입니다. 놉 땅의 제사장 85명을 처형할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브온 백성들을 집단으로 살해합니다. 바로 그 일이 훗날 다윗 때에 하
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사울은 자기의 몸에서 난 아들들과 외손자들을 7
명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내어 줍니다. 피를 부른 자는 피의 댓가를 지불하고 맙니다. 그
리하여 성경은 말씀하기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고 하십
니다.
둘째, 혼적인 삶으로 기브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이 등극했지만, 당장 신원이 이뤄
지지는 않습니다. 3년 가뭄과 기근으로 고통받던 중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사울의 죄
를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이를 듣고 기브온 백성들을 불러 한을 풀어 주려고 합니다. 그
러자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이 당한 만큼, 복수하겠다고 합니다.
결국 사울의 집안 식구들 7명을 넘겨받아 사울의 고향에서 처형합니다만, 비는 내리지
않고 가뭄만이 계속됩니다. 마음의 한은 풀었지만, 사정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혼적인 삶의 한계입니다.
셋째, 영적인 삶의 다윗의 경우입니다. 다윗은 3년 기근의 난관 앞에서 기도합니다. 병
력을 이끌고 무자비한 약탈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남은 자들인
기브온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사울의 첩 리스바 여인이 6개월
동안 처형된 아들과 조카들의 시신을 눈물겹게 지키는 일에 감동됩니다. 자신이 오래 방
치한 사울,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수습해 후장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제야 기
도를 들으시고 그 땅에 비를 부어 주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은혜를 입기 때문입니다. 사랑
하는 성도 여러분, 이 가문 땅에 하늘의 비가 내리도록 우리 모두 다윗의 마음을 갖도
록 합시다!
아름다운교회목사
예수그리스도의 계시
계 1:4-7
김창인
1. 복의 근원 예수 (4-5중)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은 후에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다
윗은 나단의 깨우쳐 주심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려 통회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는 부귀영화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고 건강장수를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나
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시51:11).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성령을 가장 귀한 복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5중) “땅의 임금들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축복의 전부입니다. 그 복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만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2. 해방자 예수 (5하-)
이사야 선지자는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사59:2). 즉 죄가 하나
님과 인간의 관계를 단절시켰다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그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롬4:25).
오늘의 본문을 보면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전부 담당하시고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시
고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해방자이십니다.
3. 재림 주 예수 (6-7)
우리는 과거에 이미 받은 구원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으로서 구원이 시작됩니
다. 그리고 현재 받고 있는 구원이 있는데 영혼의 구원입니다(벧전1:9). 그 다음에는 앞
으로 받을 구원이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 때에 몸이 부활하므로 받는 육신의 구
원입니다(벧전1:5). 여기에서 구원이 완성되어 영화롭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
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재림을 철석같이 약속하셨고(요
14:3) 또 승천하실 때에 재확인하셨습니다(행1:11). 오늘의 본문을 보면 “볼지어다 구
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말씀 끝에 누구든지 재림 주를 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재림 때 성도들은 부활하여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약속하신 예수님은 재림하시는 재림
주이십니다.
광성교회목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수 24:14-18, 마 16:13-24
이성희
모호성은 현대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분야에 경계가 무너지고 구분이 없어
지는 시대입니다. 모호성은 신앙에 있어서는 경계해야 할 태도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
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1. “너희는”
우리는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많이 압니다. 성
경도 많이 알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관심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갖고 있고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이라고 물으십니다. 너의 생각을 듣고 싶다. 너의 마음을 알고 싶다. 너는 나를 어떻게
고백하는지 알고 싶다고 하십니다. 신앙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지 다른 어느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대신 믿어 줄 수도 고백 해 줄 수
도 없는 문제입니다. 에스겔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14:14) 분명
한 자기 고백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나를 누구라 하느냐”
가이사랴 빌립보는 우상숭배가 성행했던 곳입니다. 바알신, 태양신, 황제신을 섬기는 중
심지였다. 유력한 신들의 이름이 불려지고 웅장한 신전이 즐비한 그 곳에서 “너희는 나
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많은 신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물음입
니다.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주님만을 믿고 주님만을 사랑하
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소중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는 하나님만
큼 사랑하고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의 물음을 기억합니다
“나를 누구라 하느냐”
3.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고백된 이 신앙고백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 되었
습니다. 황제숭배로 서슬이 시퍼런 로마치하에서도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지하 예배처소
인 카타코움에 숨어 예배하면서 이 신앙을 고백 했습니다. 소수 종교인에 지나지 않았
던 그들이었으나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
고 이 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모두 이 위대한 영적 비전을 회
복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복음을 위해 헌신된 사람을 찾으십니다.
연동교회목사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
렘 17:5-8
장성규
하나님은 사람들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의지하거나 의뢰하면서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의지하거나 의뢰하면서 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의뢰하면
서 산다는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
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을 믿는 다는 것은 사람의 지혜와 능력과 권력과 성실성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
면 그것이 왜 죄가 됩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죄입니다.
그래서 사막의 떨기나무 같은 저주를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삶 자체가 고통
스러운 비극일 수밖에 없고 그것 자체가 저주입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의지하고 의뢰하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7절에 보면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
면 여호와를 의지하고 의뢰한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믿지 않는 자를 의지하고 자기를 맡기겠습
니까? 믿는 자에게 자기를 맡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하나
님을 잘 믿습니다. 뜨거운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집이나 형제나 전도를 버릴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란 하나님께서 우주 만
물의 주인이시고 창조자이시고 섭리하시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
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사랑을 믿게 됩니
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사랑입니다. 하나
님의 그러한 사랑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는 바로 하나님의 그러한 마음을 믿는 자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왜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마치 “물가에 심기운 나무"같은 복을 주셔서 그 잎이 청청하며 가
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게 하시고 결실이 그치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사람이나 그 권력을 의지하는 자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고 의뢰하
는 삶을 살아서 그와 같은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면목교회목사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마 15:21-28
김재남
중국 “출요경”이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대월지국에서는 돼지를 살찌우
기 위해 덖은 보리를 먹이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를 본 망아지가 어미 말에게 말로 태어
난 것을 원망합니다. 그러자 어미 말이 말합니다.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올 터이니 건
초라도 잘 먹고서 다리에 힘을 길러라!” 명절이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살진 돼지를
잡는다고 동네가 시끄러웠습니다. 얼마 후에 대궐에서 관리들이 나와서 건강한 말을 궁
궐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궁마(宮馬)로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어떤 것이 문제입니까? 오늘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한숨짓고, 낙담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집을 세우는 여인을 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보면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3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사울과 요나단
의 경우입니다. 악한 아비 때문에 선하고 착한 아들 요나단이 빛을 보지 못합니다. 아비
가 자식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사울과 함께 전장에 나가 전사하게 됩니다. 둘째는 엘리
와 그 아들들의 경우입니다. 자식이 무슨 짓을 해도 그대로 방치합니다. 책임 없는 부
모, 버릇없는 자식만이 있을 뿐입니다. 결국은 이들도 망하고 맙니다. 셋째는 오벧에돔
의 경우입니다. 하나님 법궤를 잘 모신 아비 덕에 자식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오
늘 본문에 소개되는 가나안 여인의 딸은 그 어미 대문에 고침을 받습니다. 후에 이 딸
이 자라서 어떤 후일담을 말하게 될까요? 우리 어머님 때문에 우리 어머님 때문에 내가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다고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인이 무엇을 가졌기에 이 복을 받게 됩니까? 주님까지도 엄청나게 칭찬한
믿음입니다. 원어 성경에는 가나안 여인을 소개하는 곳에서 “보라” 말로 시작됩니다.
(22절) 얼마나 감격스러우면 이 말로 시작하여 여인을 소개하려 할까요? 그리고 주님께
서 칭찬하시는 말씀(28절)에도 “오! 여자여(최고의 극존칭, 마리아에게 부르신 용어)
네 믿음이 크도다” 도대체 이 여인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기에 주님께서도 이렇게 칭
찬하시며 기뻐하셨을까요? 원수의 땅에서 나온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수의
땅으로 여겼던 두로와 시돈에서 나온 믿음입니다. 인간을 생각을 뛰어넘고 나온 믿음이
주님을 감격케 합니다. 그 믿음은 주님의 시험을 능히 이기고 남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 힘을 우리도 우리 믿음에서 확인해 보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동산교회목사
둥지에 깃들이는 믿음
잠 20:3-7
김창인
1. 화평의 둥지 (3-4)
예수께서 회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
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화평케 하는 자이어야 한다는 뜻입니
다. 우리의 믿음은 화평케 함에 깃들어 번영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 생각하
면 불화케 하는 자는 화가 있나니 마귀의 자식이요 라는 뜻이 됩니다. 마귀의 자식은 언
제 어디서나 불화를 조성합니다. 불화 속에서는 믿음이 질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의 본문을 보면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마련한자마다 다툼을 일으키
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다툼을 멀리함"은 화평을 가리킵니다. 그 화평속에 믿음이 깃들
기 까닭에 자신에게도 영광이 됩니다.
2. 충성의 둥지 (5-6)
믿음의 별명을 몇가지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첫째는 감사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감사
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랑입니다. 역시 믿음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
랑으로 표현이 되기 까닭입니다. 또 셋째는 진실입니다. 믿음과 거짓과 동거할 수 없는
이유 때문입니다. 넷째는 충성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아만"이라는 말을 우리 성경에서
믿다라고 번역하는가 하면 충성하다라고도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과 충성은 뿌리
가 같고 동질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충성의 둥지에 깃드는 것입니
다.
본문을 보면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라고 하였습니다. 충성된 사람은 찾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참된 믿음은 충성
의 둥지에 깃들게 됩니다.
3. 정직의 둥지 (7-)
유다왕들 중에 신앙이 독실하고 충성스러운 경우 반드시 “조상 다윗같이 여호와 보시기
에 정직하게 행하여"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였기 때문입니다(왕상15:5). 이 말씀에서 “여호와 보시기에"가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표준으로 살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보기
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 표준으로 사는 것을 정직이라고 합
니다. 이 정직의 둥지에 믿음은 깃드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
기에서 완전히 행함은 완벽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표준으로 사는 정직을 가
리킵니다. 정직의 둥지에 믿음이 깃들게 됩니다.
광성교회목사
예수의 선한 일꾼
딤전 4:6-10
류철랑
일 잘하는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할 일을 바로 파악하여 그 일을 하는 사
람입니다. 선한 일꾼이란 좋은 일꾼이요, 효과적인 일꾼입니다. 예수의 선한 일꾼은 어
떻게 길러질까요?
첫째,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선한 일꾼은 선한 교훈으로 길러집니다. 선한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디모데는 어
려서부터 성경을 배운 사람입니다. 신자는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되어야합니다. 성경말씀
을 믿음을 키워주는 양식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의 선한 일꾼으로 자랍니다.
둘째, 허탄한 신화를 버려야 합니다.
허탄한 신화란 “말도 안되게 실없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선한 일꾼은 거짓
된 가르침을 거부합니다.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을 기준으로 여기에 합당하지 않은 것
은 맛 잃은 소금처럼 밖에 버립니다.
이기적인 욕망이 허탄한 신화를 쫓게 합니다. 주님의 선한 일꾼은 하나님께 속하여 주님
을 따릅니다. 허탄한 신화의 귀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정도로 걸어가는
바른 신앙이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선수가 되려면 훈련이 필요하듯이 선한 일꾼이 되는데도 연습이 요구됩니다. 주님의 좋
은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경건의 연습을 통해 영적 순발력과 일꾼으로서의 능력을 길러
야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지금보다 더 잘하기 위해서 연습을 해야합니다. 새벽
에 기도하는 일도 찬송하는 것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들 모두 경건의 연습니다. 경
건의 연습을 통해 예수의 선한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넷째, 수고하고 진력해야 합니다.
수고란 힘을 다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힘에 지나도록 일하
고 그 많은 어려움과 박해를 견디면서 수고한 것을 염두에 두고 말했습니다. 나는 주님
께 어떤 일꾼이 될까를 설정해 봅시다. 예수의 선한 일꾼은 주님께 이익을 남겨 드리기
위해서 자신의 손해를 감수합니다. 수고하고 진력하여 주님께 공헌하기로 작정하시기 바
랍니다. 주님께 잘했다 칭찬 듣는 일꾼들이 될 것입니다.
일꾼은 일이 즐거워야하고 믿는 사람은 믿는 것이 행복해야 합니다. 일을 사랑하고 일
을 즐기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일이 우리를 내쫓을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선한 일꾼
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
지어다”
부천동광교회목사
감사의 이유
합 3:16-19
박은성
1. 본문 16절 말씀은 하박국 선지자가 미래의 구원을 소망하고 찬양하였지만 그 구원이
있기 전에 겪어야 할 환난을 기억하고 심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유다를 벌하시기 위
해 바벨론을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을 심히 두렵게 했습니다. 비록 그가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상기하며 구원을 확신하였다 해도 이미 예언
된 환난은 취소되지 않고 닥칠 것이며 그 결과로 인한 비참함을 생각할 때 두려움을 느
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고통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확실히 닥칠 실질적 재앙
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가 현실에만 사로잡혀 있었다면 그는 결코
구원의 하나님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매사에 하나님의 위대
하심과 영광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다는 확신이 있
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2. 하박국은 바벨론 침략으로 인해 심히 두려워했지만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사
실은 확신함으로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는 이제 그의 구원의 근거이며 기쁨의 근원이
무엇인지 확신에 찬 어조로 노래하였습니다.
본문은 인간의 실존이 위협 당할 만큼의 한계 상황에 대한 묘사입니다. 무화과나무, 포
도나무, 감람나무의 소출, 밭의 식물, 소와 양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터전의 전
부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수확을 걷을 수 없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 앞에서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겠노라고 고백한 사람은 하나
님의 선지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는 자의 자세입니다. 걱정, 근심, 두려움은 우리
의 마음을 약하게 하고, 심지어는 신앙까지 잃게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환난 중
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살기 어려울지라도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
을 믿고 실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은 항상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어려울 때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기 때
문입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지 아니하실지라도 기뻐하
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소출이 있기 때문에 감사하고 수고의 열매를 거두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
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심이 확실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중요하기 때문에 감사하
는 자가되어야 합니다.
다대중앙교회목사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
잠 2:6-8, 약 3:13-18
이성희
지혜는 아래에서 돈으로 살 수 있다거나 학습이나 수양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
다. 지혜는 신령한 것이며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지혜는 자라고 자라야
합니다. 어린이에게는 어린이다운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른에게는 어른다운 지혜
가 필요합니다. 어린이의 지혜는 어른의 지혜는 아닙니다. 지혜는 성장해야 바른 지혜
가 됩니다. 그리고 지혜란 아래에서 나면 안됩니다. 아래의 지혜는 참 지혜가 아니고 흔
히 꾀라고 합니다.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와야 참 지혜입니다.
1. 지혜는 행함을 보여야 합니다.
성경은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라고 합니다. 지혜는 행함으로 보여야 합니
다. 생활의 슬기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지혜가 없고 지혜는 있는데 생활에서 응
용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지혜는 생활에서 나타나야 하며 생활이 되어야 합니
다.
지혜란 라틴어로 ‘sapere’ 즉 ‘음미하다’ 또는 ‘맛보다’라는 뜻입니다. 지혜는 음
미하고 맛보아야 합니다. 지혜는 세상에서 그 맛이 나타나고 행함으로 보여야 하는 것입
니다. 아무리 지혜가 있다고 하지만 생활에서 나타나지 않으면 참 지혜가 아닙니다.
2. 아래에서 난 지혜가 있습니다.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아야 합
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누르고 내가 힘을 얻습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고 내가 이익을 얻습니다. 다
른 사람을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내가 일어섭니다. 성경은 이런 것을 세상적, 정욕적, 마
귀적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영과 육이 함께 존재하는데 육적인 것만 추구해서는 영의 사
람이 아닙니다.
3. 위에서 난 지혜가 있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 폅벽과 거짓이 없는 것
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위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가 위에
서 온 지혜입니다. 위로부터 온 지혜는 땅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위에
서부터 손을 펴시고(시 144:7),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사 32:15).
태양열 전기는 태양의 열을 전기로 만들어 저장하여 사용합니다. 나비의 날개는 전지 역
할을 하여 에너지를 모았다가 난다고 합니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를 모아서 저장하고 사
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갈되고 필요할 때 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난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세상을 아름답게 살게 됩니다. 연동교회목사
크리스챤과 애국
롬 9:1-5
장성규
1. 나라는 가족공동체입니다. 인간은 오랜 세월동안 가족단위의 공동체로 살아왔습니
다. 그러다가 가족이 많아지니까 씨족단위의 공동체로 발전되었고 이것이 또 커지니까
부족단위의 공동체로 발전되었고 그것도 커지니까 도시국가가 되었다가 드디어 현대국가
형태의 나라가 형성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나라를 조국이니 모국이니라고 하는 것
입니다. 가족이 무엇입니까? 혈연공동체입니다. 이것보다 더 가깝고 끈끈한 공동체가 없
습니다.
2. 나라는 나 자신입니다. ‘나라’는 국가의 순 우리나라 말입니다. 이 ‘나라’라는
말의 어원을 양주동 선생은 ‘나루’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나루’는 강이나 내의
포구인데 저쪽은 너의 쪽이고 이쪽은 내 땅이다. 내것이다 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석헌 선생은 나라란 말은 ‘나’는 ‘아(我)’라는 말이다. 그래
서 나라 라는 말은 我(나)다 라는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해석을 굉장히 좋아합
니다. 나라는 곧 ‘나’들의 공동체입니다. ‘나’들이 태어난 땅이고 나들의 할아버지
와 할머니가 사시다가 간 곳이고 나들의 아버지 어머니 형님 동생들이 살고 있는 땅이
곧 나라이고 내 조국인 것입니다. 이런 내 나라 내 조국을 어찌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사도바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의 우리도 물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
면 우리가 크리스챤으로서 우리나라 내 조국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1. 내 조국 내 나라를 좋아해야 합니다. 내 조국의 하늘과 땅, 강, 사람과 역사를 좋아
하고 아껴야 합니다. 이런 조국에 대한 사랑은 자기에게 유익과 즐거움을 줍니다.
2. 환경을 보전하고 기초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물 좋고 산이 좋다고 해서
‘금수강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강이 극도로 오염되었고 산이 더러워졌습니
다.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쓰레기를 줄이고 담배꽁초를 버리지 말고 화학세제 사용을
줄여야 합니다.
3. 무엇보다 전도를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본문에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한 말씀
은 그냥 그렇다는 말씀이 아니라 내 조국 내 형제들이 예수를 믿는다면 이라는 전제를
하고 하는 말씀입니다. 전도에 대한 열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
니까? 그리스도의 복음 만이 내 나라 내 민족을 참으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면목교회목사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
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
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
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그 땅이 태평
한지 사십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삿3:7-1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 쓰시
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에 기술이나 능력을 쓰시는 것도 아닙
다. 그러한 조건과는 상관없이 주님은 그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어 사용하십
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인도 무식한자도 천민도 실패자도 노장인 옷니엘도 사용하십니
다.
1.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 (9절)
“갈렙의 아우 옷니엘” 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사람의 소개 방
법이 아닙니다. 대체로는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는 왜 갈렙을 먼저 소개했을까요? 우리는 쉽게 갈렙이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
할 수 있겠으나, 여호수아 15:16-17에 보면 옷니엘이 기럇세벨을 점령한 공로로 갈렙의
딸을 아내로 취합니다. 이것은 순종의 사람 갈렙(신1:36)과 공유적인 특성을 가진 순종
의 사람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여호와의 신이 임하신 옷니엘 (10절)
성경에서 주님이 사람을 사용하실 때는 성령이 먼저 임하시고 능력을 받아 쓰임 받았음
을 볼 수 있습니다. 옷니엘도 역시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자 “구산 리사다임”을 점령
할 수 있었습니다. 구산 리사다임의 뜻은 “두배나 사악한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의 신이 임하시면 두배 뿐 아니라 몇십배로 강한 적이라 할찌라도 능히 물리칠 수 있습
니다.
3. 평화를 위해 희생한 옷니엘 (11절)
옷니엘이 사사로 부름 받았을 때는 이미 80세의 고령으로 이제는 쉴만한 나이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젊은 날의 공로를 가지고 편히 산다고 한들 무슨 비난의 대상이 될 수가 있
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평화가 없이는 자신이 평안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
입니다. 그래서 민족의 평화를 위해 구산 리사다임을 물리치는데 용감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희생으로 40년간 이스라엘은 태평하였던 것입니다.
백운제일교회목사
권능이 있을지어다
행 4:32-37
김삼환
오늘 이 시대는 권위를 부정하며 그 권위 앞에 무릎 꿇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힘
은 낮아지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약한 자의 삶을 사셨고 섬기는 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 그리
스도는 정말 힘있는 자이시고 능력 있는 자이시며 온 인류를 다스릴 권세를 가지신 분이
십니다. 인간의 권력은 잠간이지만 주님은 영원한 왕이 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느
누구도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가장 약한 자가 되셨고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그의 손
에는 총이나 칼이 없었고 군대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귀하고 높으신 분이지만 그 주변
에 힘있는 자를 두지도 않았고 오히려 창녀와 거지와 병든 자와 세리와 약하고 천하고
무능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셨습니다. 세상 나라는 오래가지 못하지만 주님의
나라는 영원하여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겠습니다”, “모
든 것 다 바쳐 주님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결단합니다. 끊임없이 이어져 가는 이 힘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휘두르는 칼과 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데서 낮아지시고 섬
김의 본을 보여 주신 주님의 사랑의 힘인 줄 믿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힘이 있는데 하나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힘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
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힘은 우리를 살리고 거룩하게 합니다. “오직 성
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성령의 힘이 나라
를 살리고 가정도 살립니다. 이 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고 기쁨을 줍니다.
교도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결국 다시 교도소로 붙들려 옵니다.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혈
서를 쓰기도 하지만 헛되고 맙니다. 누가 우리를 이 사망과 저주와 불의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까? 이 죄악의 도성에서 이 민족을 새롭게 하고 이 모든 범죄에서 우리를 구원하
여 주실 이가 누구이십니까? 이런 죄악과 불의한 삶을 끊을 능력이 사람에게는 없습니
다. 성령이 와야 죄에 얽힌 몸과 병든 마음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에
음욕이 지배하지 못하고 믿음이 지배하게 됩니다. 죄에서 우리를 자유케 할 이는 성령입
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여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과 같
이 위로부터 은혜를 받고 사도 바울과 같이 위로부터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
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만대에 축복 받는 여러분이 되시
기를 바랍니다.
명성교회목사
생활 속에 있는 믿음
시 39:1-7
김창인
1. 절제의 생활 (1-2)
바울사도는 신앙생활을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라고 덧붙였습니다(고9:24-25). 그러
므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절제를 해야 합니다. 무절제한 생활은 파탄에 이르는 것
처럼 무절제한 신앙은 실패하는 법입니다. 말과 행동과 생활의 절제로 성도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야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
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고 하였습니다. 즉 행위와 말의 절제를 의미합
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절제의 생활 속에 믿음은 꽃피고 열매를 맺습
니다.
2. 묵상의 생활 (3-5)
어느 시인은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
리로다”라고 읊었습니다(시104:34). 즉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고 새겼더니 그 하나님 까
닭에 마음이 즐거워지더라는 것입니다. 묵상에서 마음이 즐거워지고 그 즐거움 속에 믿
음은 지라고 생기를 얻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할 뿐 아니라 하나님 자
신을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교만할 수 없는 인생임을 묵상합니
다. 하나님을 마음속에 깊이 생각하고 새겨보는 사람만이 인생이 무엇임을 바로 깨닫습
니다. 이사야가 묵상 중에 하나님을 뵈옵고 자신의 존재를 깊이 생각하게 된 것과 같습
니다. 묵상의 생활 속에서 믿음은 꽃이 핍니다.
3. 소망의 생활(6-7)
바울사도는 에베소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부자에 대하여 바로 가르칠 것을 명
하고 있습니다.
즉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
시는 하나님께 두도록 하라는 것입니다(딤전6:17). 재물은 돌고 도는 것이기 까닭에 정
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재물에 두는 소망은 죽은 소망입니다. 죽음과 함께 끝나기 때
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그림자같이 짧은 인생을 살뿐임으로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즉 재물에 소망을 둘 바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의 소망은 주께 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두는 소망의 생활 속에 믿음은 뿌리
를 내릴 수 있습니다.
광성교회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