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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28장 10-22절
벧엘의 하나님
야곱에 대한 에서의 생각은 창세기 27장 36절에서 잘 나타납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것을 속여서 빼앗은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장자의 명분도 속임수를 써서 빼앗았고, 아버지 이삭이 축복하려고 하는 그 복도 속임수를 써서 빼앗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야곱이 미워 어떤 결심까지 하게 되느냐? 아버지가 죽은 뒤 야곱을 죽일 결심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그분의 섭리는 에서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그가 빼앗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사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야곱에게 주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미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는 야곱이 실제로 형을 속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따라 실행이 되는 역사로 있지만, 그 속에서 인간은 수없이 많은 점과 흠과 죄악을 내놓는다는 것입니다. 작정하신 바대로 실행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속성과 다른 방법으로 내놓는 것을 괜찮다고 할 수 없습니다. 더불어 이런 인간의 점과 흠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이 뜻하신 바대로 실행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만약 우리에게 있는 어떤 원인을 따라 복을 주거나 주지 않는 것이 있다면 누구도 복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은 결코 인간에게 있는 어떤 원인을 따라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고자 하는 자에게 주시고, 또 주신다고 할 때 그에게 점과 흠과 죄악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주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이런 내용이 어떤 사람에게는 불의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점과 흠과 죄조차 용납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점과 흠과 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용납하실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고 완전한 분으로서 점과 흠과 죄를 용납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점과 흠과 죄가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백성을 삼으실 때 점과 흠과 죄악을 없이 하시고, 나아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방향으로서의 목적을 가지십니다. 또 그런 이유 때문에 때로 점과 흠과 죄악에 대하여 때로는 징계하시기도 하시는 겁니다.
야곱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떠나게 되는 일, 그리고 이후 고생하는 모든 일은 이런 측면에서 징계의 성격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을 속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을 기다렸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시는 바가 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짧은 지혜를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기다리기보다는 속이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속임이 형으로 하여금 분노하게 하고 죽이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점과 흠과 죄악에 대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모든 역사 이면에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지난 시간 형을 피해 도망하려고 할 때 리브가는 이삭이 근심할까 하여 형이 동생을 죽이고자 한다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오히려 가나안 여인이 아닌 이삭의 경우처럼 아브라함의 고향에 있는 친척 중에서 야곱의 아내를 고를 목적으로 야곱을 보내어 피신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 리브가의 뜻을 이삭은 좋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야곱을 보내면서 다시금 축복하였는데, 이것은 그동안 하나님의 뜻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야곱 입장에서는 얼마나 큰 위로의 내용이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형이 받을 수 있었던 복을 속여서 빼앗았다고 할 때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좀 찝찝할 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축복은 받았지만 속여서 빼앗은 것처럼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내리지 않을까 염려될 수 있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의 축복은 그런 염려를 내려놓게 만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 주시는 분으로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삭이 축복한 동일한 축복을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도망하고 있는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축복을 하고 계십니다. 도망하기 때문에 불안할 수 있지만, 뿐만 아니라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가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전혀 모르는 불안함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면서 복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위로요, 분명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내용인 겁니다.
이제 본문을 보시면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앞서도 말했지만 지금 야곱은 형을 피해 도망하는 자로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다시금 오늘 본문의 장소인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기도 하는 부분입니다(창35:1 참조). 아버지로부터 재차 축복을 받으며 여행길에 올랐지만 형을 피해 도망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한 사실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처량한 상태에 있는 겁니다.
그러다 날이 저물어 유숙하게 되는데, 11절을 보시면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여기서 우리는 야곱에게 약속하신 바와 그의 현재 상태가 매우 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늘에 속한 신령의 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외적인 것에 담아 말씀하실 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시는 내용으로 있습니다. 창세기 28장 4절에 보시면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본문에 의하면 약속과 현실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히려 약속과 가깝게 느껴질 수 있는 쪽은 어디냐? 에서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가나안을 떠나고 있지만 에서는 여전히 거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이 하나님의 약속을 폐하거나 성취되지 않는 쪽으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간혹 우리의 현실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폐해진 것처럼 반응하는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입니다. 신명기 1장 2절에 의하면 호렙 산에서 부터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가 열 하룻길이라고 말씀합니다. 출애굽 이후 정상적으로라면 한 달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방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즉 광야 40년은 한편으로 볼 때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신명기 8장 2절에 의하면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어 나오는 3절에서는 이것을 통하여 너희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 알게 하기 위해서 광야 길을 허락하신 것으로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 8장 16절에서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다고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광야 40년은 한편으로는 징계의 성격이 있지만, 그것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마침내 복을 주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광야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마침내 복을 주기 위한 과정으로 있는데, 그런 과정이 힘들다 보니 복으로 가는 과정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복으로 가는 과정이 아니라고 생각하다 보니 하나님의 약속과 멀어진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서 멀어진 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외적으로는 멀어진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 힘든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약속과 멀어진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기분, 내 느낌, 내 생각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내가 기준이 될 때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결코 내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의 외적인 모습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우리의 현실 문제가 아무리 암담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말씀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반드시 약속하신 바를 성취할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무엇을 붙드는 자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침내 복을 주시기로 하셨다면 광야 40년도 그 복을 위한 과정인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징계의 성격도 있습니다. 우리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징계하시는 성격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지 않습니다. 왜 징계하시느냐? 우리로 하여금 마침내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의 환경이나 어떤 현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복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지금 야곱은 외적으로 볼 때 약속의 땅인 가나안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이 하나님과 멀어진 것은 아닙니다. 약속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여전히 야곱과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을 그의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는데, 12절 이하 15절이 그 내용입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여기서 꿈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던 방법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민수기 12장 6절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환상으로 알리기도 하시고 꿈을 통해 말씀하시고 하신다고 하시는데, 지금 야곱은 꿈이라는 계시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우선 12절에 의하면 꿈을 통해 본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사다리가 땅 위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꼭대기가 하늘에까지 닿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를 하나님의 사자, 즉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 사다리 맨 위쪽에 하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칼빈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분은 그리스도뿐이라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만이 하늘에서 땅까지 이르시는 유일한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통해 본 하늘과 땅에 연결된 사다리는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것이라고 주석합니다. 특히 하늘 위에 있는 충만한 축복은 그를 통해 우리에게 흘러내리며, 우리는 그를 통해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사다리 위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천사들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 51절에서도 표현되는 내용입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창세기에서는 사닥다리로 표현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인자로 표현하고 있고, 동일하게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자기 백성과 교통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래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었지만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약 시대는 오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오실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방식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오실 그리스도와 오신 그리스를 믿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심지어 그런 차이는 죄 사함의 차이까지 있다고 말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믿음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에서는 믿음도 하나라고 말합니다(엡4:5). 구약의 믿음, 신약의 믿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믿음 안에서 구약 시대는 오실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것이고, 신약 시대는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인데, 당연히 죄 사함의 효력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가능한가?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금 야곱이 꿈을 통해 본 이상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케 되는 놀라운 일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시는데, 13절 이하 15절이 그 내용입니다. 우선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으로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너의 조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던 하나님이 자신임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조부인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너의 아버지 이삭과 언약은 맺었던 하나님이 자신임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제 야곱에게 동일한 약속을 주시고자 말씀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아버지 이삭을 통해 들려주셨던 약속의 말씀이 자신의 현재 상태로 보자면 멀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부터 멀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과는 멀어질지라도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하십니다. 즉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야곱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그와 함께 하심을 친히 나타내 보이심으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만드십니다.
14절에서는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동서남북 온 땅으로 퍼져 나가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맨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말씀하셨던 내용인데(창12:3, 창13:16), 창세기 22장에서는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땅의 모래 같게 할 것이라는 표현으로도 말씀하셨습니다(창22:17). 그러니까 가나안 땅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 나라와 온 민족으로 확대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는다고 할 때 이 영적인 복이 모든 사람, 소위 만인구원설이나 보편구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한 사람도 빠짐이 없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이미 성경이 그것을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모든’은 차별이 없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라엘 모든 사람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이방인의 하나님이시지만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모든 민족 가운데 있는 영적 이스라엘, 바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15절에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이끌어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은 형을 피해 도망하는 자로 있지만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너를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약속의 말씀 때문에 야곱은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는가? 당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평안한 삶만 사는 것이 아니라,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친히 고백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도 변함없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럼 이것이 야곱에게만 주어진 약속인가? 영적 이스라엘 모두에게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위로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약속하시는 하나님은 약속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반드시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때로는 그 성취가 더딘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볼 때 그런 것처럼 보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딜지라도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그리고 성취하기 위하여 약속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함께 하셔서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현실의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마침내 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관련하여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임마누엘로 증거가 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8장 32절에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가장 귀한 아들을 주셨는데, 무엇을 더 아까워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아들을 주셨다면 아들 안에서 주고자 하시는 모든 복들은 반드시 주신다는 겁니다. 다만 이 모든 것 안에는 우리가 욕심을 내는 세상의 복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이때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영원한 복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복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형을 피해 도망한다 할지라도, 외삼촌 집에 가서 수없이 수고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영원한 복락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위로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위로뿐 아니라 우리가 소망해야 할 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은 어려움일 수 있고, 현실은 험난한 세월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까지 주신다고 하셨다면 그것 외에 우리의 참된 위로와 소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지금 야곱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뵈옵고 잠에서 깨게 됩니다. 16절을 보시면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지금까지는 혼자인 줄 알았습니다. 밧단아람으로 가는 여정 가운데 부모가 야곱을 위하여 몇몇 사람을 붙여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래는 형을 피해 도망하는 것이지만 명분은 결혼을 위하여 밧단아람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많은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홀로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나타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지금 야곱은 그 사실을 알고는 놀라고 있는 겁니다. 혼자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나타내시니 놀라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동시에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인하여 경외함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경배를 올려드리게 되는데, 17절 이하 19절을 보시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여러분, 야곱의 두려움은 공포의 의미가 아닙니다. 경외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해 주신다는 것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두렵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행위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예배한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앞서 말했던 내용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할 때 거기에 반드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없는 예배란 하나님께서 결코 받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 행위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드릴 때만 가능합니다.
어쨌든 지금 야곱은 자신이 베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는데,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란 것이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나 주신 곳이란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베게 삼았던 돌을 기둥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우상화하려고 이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야곱은 서원하게 되는데, 20절 이하 22절입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우선 서원의 내용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신 것, 또한 야곱을 지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 뿐만 아니라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겠다는 것을 조건으로 서원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조건으로 말씀하신 바를 지키신다면 내가 이렇게 할 것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보면 서원이라고 할 때 단순히 내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이렇게 해 달라, 그러면 이렇게 하겠다는 형식으로서 서원하는 경우들이 많지만 지금 야곱은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철저히 하나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것을 근거로 서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도 그것을 바라는 자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람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서원은 결코 자기 욕심대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서원은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근거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원을 해야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서원해서는 안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2장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금지된 것, 말씀 안에서 명령된 의무를 방해하는 것, 자신의 능력 안에 없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가능하다는 약속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서원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7항).
뿐만 아니라 서원을 보면 조건문이 있고 조건이 이루어질 때 이렇게 하겠다는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미 약속의 말씀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하셨다면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약속에 근거하여 서원을 한다고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신다는 믿음과 소망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야곱의 서원은 이렇게 해 주면 이렇게 하겠다는 단순한 조건 형식이 아니라, 약속하신 바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성취해 주시기를 믿고 바라는 마음으로 서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조건문이라는 것 때문에 조건에 맞춰서면 생각해야 될 것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이 담겨져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이 말씀은 역으로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말씀을 이뤄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뤄주시기를 소망합니다.”는 그런 의미에서 고백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뤄주셔야지 만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좀 더 적극적으로 이뤄주시기를 믿고 바라는 마음으로 요구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서원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기 보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말 이후 자신이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표현이 있는데, 쉽게 말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내용으로서 예배와 봉헌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셔서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고 할 때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것 중 십분의 일을 드린다는 서원인 것입니다.
특히 십분의 일과 관련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사실입니다. 내게 있는 것이 누구로부터 왔느냐?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십분의 일을 드린다는 것은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셨다. 그분이 나를 인도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역대상 29장에서는 이런 표현도 있습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29:14)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리는 것, 이것이 봉헌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한 가지 더 말하는 내용이 있는데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것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들릴 수 있었는가? 그것조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신약의 표현처럼 억지로 하거나 인색함으로 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지 않습니다(고후9:7).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복을 따라 각각 정한 대로, 그리고 그것을 즐겨 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분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고, 또 드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때 드릴 때는 십분의 일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마음과 몸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분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야곱은 형을 피해 도망하는 자로 있습니다. 도망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의 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시고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임을 어떤 순간에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도망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편으로는 징계의 성격이 나타나고 있는 부분입니다. 징계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잘못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하여 진노할지라도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죄악보다, 그 죄에 대한 그분의 진노보다, 그분의 긍휼이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징계하시지만 징계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자녀답게 만들어 마침내 복을 받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바로 이 목적에 합당한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