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안동하회마을
먼저 풍산류씨 세계도(世系圖)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류종혜(柳從惠:? ~?) 풍산인(豊山人). 겸암과 서애 형제의 6대조로 풍산 류씨 하회 입향조이다. 전서공은 당초 풍산현 안에 살고 있었으나 하회로 이거하여 전토(田土)를 개간하고 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특히 함께 전서(典書) 벼슬을 하다가 향리로 은퇴한 배상공이란 분과 서로 교분이 두터웠는데 집과 전토를 마련하여 주고 함께 살았다. 하회마을 입구에 입향조인 공조전서공을 기리는 기적비가 최근 건립되어 있다. 묘소는 화산에 있는데, 최근 풍산 잘패에서 이장한 것이다. 상석과 묘비 그리고 망주를 새로 세웠는데 이전에 있던 묘전비도 함께 세워두고 있다.
배상공(裵尙恭: ? ~?) 흥해인(興海人). 백죽당(栢竹堂) 상지(尙志)의 아우로 문과에 급제한 뒤 고려시대에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했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형인 백죽당과 함께 안동으로 낙향, 하회에 터를 잡았다. 형인 백죽당은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인데, 아우 역시 같은 정신이었다 한다. 평소에 친분이 있던 풍산 류씨 하회 입향조인 공조전서 류종혜(柳從惠)와는 막역한 사이였다. 이들 두 분의 전서를 일컬어 ‘하회(河回) 이전서(二典書)’라고 불렀다 한다. 묘소는 풍산 쇠실(鐵谷, 一名 時雨)에 있는데 묘 앞 비의 양식은 고려시대의 규각비(圭角碑)이지만 각자(刻字)는 오랜 세월로 마모가 심해 판독 불능 상태로 남아 있다. 다만 비문은 안동 최고의 역사서인 『영가지』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배 소(裵 素: ? ~?) 흥해인(興海人). 조선초의 문신. 하회마을 입향조인 공조전서(工曹典書) 상공(尙恭)의 아들이며 평창군사를 지낸 권옹(權雍)의 장인이다. 1408년(태종8)에 식년문과(式年文科)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사재감 주부가 되었다. 1426년(세종8) 강원도 도사를 지냈고 이조정랑에 이르렀다. 부인 안동 권씨는 태종 때 좌의정을 지낸 권진(權軫)의 따님이었으나 추사(後嗣)가 없어 전서공(典書公)과 양대(兩代)의 묘소는 풍산 류씨 하회마을에서 외외손(外外孫) 봉사(奉祀)를 하고 있다. 풍산 쇠실[鐵谷]에 모셔진 묘소에는 최근 빗돌을 새로 다듬어 세웠다. 다만 부인 안동 권씨 위(位)에는 옛 양식 그대로의 작은 빗돌과 석인(石人)이 서 있어 그 당시의 묘제(墓制)를 상고할 수 있다.
안팽명(安彭命:1447, 세종29~1492, 성종23) 광주인(廣州人). 자는 덕보(德甫) 호는 빙애(氷厓). 사헌부 감찰 종생(從生)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조정랑 배소(裵素)의 딸이다. 1468(세조14) 진사가 된 뒤 1472년(성종3) 춘장(春場) 별시문과에 병과 16인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 장령, 집의, 사간원 사간을 역임했다. 1492년 8월 예빈시부정이 되어 왕명으로 평해(平海)에 다녀오다가 강릉 객사(客舍)에서 일생을 마쳤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였을 뿐 아니라 ‘쟁신의 풍도(諍臣之風)’가 있었다고 한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조카 윤덕(潤德)도 문과에 급제했다.
류공작(柳公綽:1481, 성종12~1559, 명종14) 자는 유재(裕哉), 이조판서에 증직된 자온(子溫)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음직으로 예빈시주부, 사헌부감찰, 군자감주부, 포천현감 등 직을 거쳐 80 가까운 나이에간성군수에 부임했다. 강원도 간성은 바다에 접한 고을로 전임 군수들은 어민들을 수탈해 그 피해가 극심했으나, 공은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그 어려움을 하나하나 해결해 칭송을 받았다. 퇴계는 공의 묘갈명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관원들이 모두 공과 같이 성실하다면 국왕의 은택이 막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니 나라를 다스림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기리고 있다.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장례를 치루기에도 어려움이 있을 정도였다 한다. 사후에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군위읍 외량리 송현(松峴, 솔티)에 있는데 (卯坐酉向) 오지탄금형(五指彈琴形)의 명당이라 한다. 명종10년(1555)에 14살 때 서애가 간성고을로 조부를 찾아가 향교에서 글을 읽었다. 2년 뒤 겸암이 서울에서 간성 임지로 조부를 찾아 뵌 기록도 보인다. 겸암은 그 기회에 금강산을 유람한 뒤 10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서애의 조부인 간성군수공은 명종14년(1559) 5월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고 8월에 공의 처가[延安 李氏] 고을인 군위로 운구되어 11월에 장사를 지냈다. 부친의 명으로 손자인 겸암이 퇴계에게 묘갈명을 청했다. 옛 묘전비는 퇴락해 다시 세운 묘비가 묘소 오른쪽에 서 있다.
류공권(柳公權:1485, 성종16~1539, 중종34) 자는 평경(平卿). 자온(子溫)의 둘째 아들이며 입암 중영의 숙부요 귀촌 경심의 부친이다. 중종14년(1519) 생원이 되고 중종23년(1528) 식년문과에 병과 22인으로 급제한 뒤 공조정랑, 사헌부 지평을 거쳐 중종34년(1539)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세상을 떠나니 향년 55세였다. 명(明) 황제(皇帝)가 닷냥을 하사(下賜)하여 관곽(棺槨)을 구입(購入) 염빈(斂殯)하고 무사(無事)히 귀장(歸葬)하게 되었다. 사후에 예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외조부는 보백당 김계행이고 장인은 대전 남팔준이다. 묘소는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능동에 있다.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1515, 중종10~1573, 선조6) 자는 언우(彦遇) 호는 입암(立巖), 간성군수를 지낸 공작(公綽)의 아들로 군위현 양곡리(良谷里) 외가에서 태어났다. 중종35년(1540) 26세 때에 식년문과에 병과 23인으로 급제하여 전적, 사헌부 감찰, 형조정랑, 평안도 감군어사, 장악원정, 사헌부 장령, 사복시정, 의주목사, 형조참의, 황해도 관찰사, 정주목사, 청주목사, 동부승지, 예조참의 좌부승지 등 직을 지냈다. 입암은 명석한 사리판단과 탁월한 행정처리능력을 견지했다. 이러한 점은 지방관리로서의 치적을 올릴 수 있게 만들었다. 일찍부터 공보(公輔)의 큰 그릇으로 기대되었으나 평생 공적인 일을 제외하고는 권귀(權貴)들과의 접촉이 없었다. 따라서 굴종과 타협을 애초부터 모르는 원칙주의자였다. 이러한 정인군자(正人君子) 적인 입장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큰 포부를 펴지 못하게 만드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향년 58세를 일기로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들의 귀로 의정부 영의정, 풍산부원군(豊山府院君)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외선조 평창군사 권옹(權雍)의 묘 아래에 있으며, 묘소 앞에는 공의 아들 서애가 홍문관 수찬 때 지은 비가 서 있고, 묘소 아래에는 소재 노수신이 지은 신도비가 서 있다. 입암 묘소는 안산(案山)의 사(砂)가 영상을 배출되는 명당(明堂)이기 때문에 서애가 정승이 되었다 한다.
귀촌(龜村) 류경심(柳景深:1516, 중종11~1571, 선조4) 자는 태호(太浩) 호는 귀촌(龜村). 하회에 입향한 공조전서 종혜(從惠)의 현손이고 공조정랑을 지낸 공권(公權)의 아들이며 입암의 종제(從弟)다. 중종32년(1537)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한 뒤 중종 39년(1544) 별시문과에 을과 2인으로 급제하였다. 이어서 명종1년(1546)에는 주서(注書) 직에 있으면서 중시(重試)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중종34년(1539) 부친인 정랑공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인 남씨부인은 애도 비통하며 삼년상을 나고도 탈상을 하지 않고 여러 자녀들의 양육을 아들인 귀촌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오늘까지 죽지 못한 것은 너희들의 성장을 기다렸기 때문이다”하고는 식음을 전폐하여 세상을 떠났다(1542년, 중종37).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의 명이 내렸다. 현재 하회마을로 들어서는 고개목에 열녀비와 비각이 이건되어 있다. 공조정랑, 사간원 정언, 예조정랑, 홍문관 수찬 등 직을 지내고 양재역 벽서사건 에 연루되어 파직 당했다. 1551년 재기용되어 회인현감, 정주목사, 나주목사, 회령부사, 호조참판, 대사헌, 병조참판 등 직을 지내고 평안감사의 명을 받았다. 공은 폐병으로 병세가 위중하였으나 왕명을 어길 수 없어 억지로 부임길에 오른뒤 5월에 병세가 극심하여 체임을 상소하고 다시 지충주부사가 되어 돌아오던 도중 장단(長湍) 초현리(招賢里) 민가에서 세상을 떠났다. 국왕은 관곽을 하사하고 귀장(歸葬)케 했다. 향년 56세. 관리로서 매사를 물 흐르듯 처리했고 수령들의 횡포를 적발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휼해 가는곳 마다 칭송을 받았다. 미암(眉巖) 류희춘(柳希春)은 그의 『일기(日記)』에서 “이사람은 지향하는 바가 정당하고 재기가 빼어났으며, 항상 백성들을 아끼고 구제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했다. 공은 여러 남매의 맏이로서 어린 동생들을 잘 보살피는 등 우애도 독실했다. 묘소는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능동(陵洞)에 있다. 공은 9녀를 낳은 뒤 1남을 두었으나 21세에 세상을 떠났고, 손자도 35세에 사망하여 대가 끊기자 겸암의 후예로 후사를 이어 제사를 받들고 있다. 종질(從侄)인 서애가 지은 비문을 써서 1985년에 세운 묘비가 묘소 앞에 서 있다. 문장도 뛰어나 변영청(邊永淸) 장문보(張文輔) 등과 함께 ‘영가삼걸(永嘉三傑)’이란 칭이 있었다.
파산(巴山) 류중엄(柳仲淹:1538, 중종33~1571, 선조4) 자는 경문(景文) 뒤에 희범(希范)으로 고쳤다. 호는 파산(巴山). 참봉 공석(公奭)의 아들로 숙부인 공계(公季)에게 출계하였는데 겸암과 서애의 종숙부(從叔父)가 된다.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손자인 이원승의 사위이며 퇴계의 처이질서(妻姨姪壻)다. 단아하고 청순한 인품이 향리에 널리 알려졌다. 일찍부터 명리에 초연하여 위기 실천 공부에 전념하였는데, 퇴계 문하에 나아가 더욱 그 뜻을 굳혔다. 1564년 종형(從兄)인 입암(立巖)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겸암과 서애 형제와 함께 해주의 신광사(神光寺)에서 몇 달동안 공부하기도 했다. 학문과 도덕으로 세상에 크게 쓰일 인물이었으나 애석하게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신 이듬 해인 선조4년에 12월 25일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동문수학한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와 함께 공자(孔子) 문하의 안자(顔子)에 견주어 ‘계문(溪門)의 안자(顔子)’라고 칭하며 애석해 했다. 분강서원(汾江書院, 농암 이현보 선생을 배향한 서원)과 타양서원에 제향되었고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남긴 글은 거의 난리에 유실되었고 몇 편의 글이 『파산일고(巴山逸稿)』에 남아 있다.
의병장 류종개(柳宗介:1558, 명종13~1592, 선조25) 자는 계유(季裕) 권옹 빈(贇, 입암 류중영의 從兄)의 아들. 1579년(선조12) 진사에 합격하고 선조18년(1585) 훈도(訓導)로서 식년문과 병과 18인으로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가 된 뒤 전적을 역임하고 처가 봉화(奉化) 금씨(琴氏) 고을인 봉화 문촌리[奉化 琴氏]에 내려와 있던중 임진왜란을 당하였다. 의병을 규합하여 고을을 보전하다가 함경도 지역에서 태백산맥을 타고 퇴각하던 왜적들과 화장산 일대에서 싸우다 봉화 땅 소천(小川)의 전피현(箭皮峴)에서 전사하였다. 현재 그 장소에는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조정에서는 광해군8년(1616) 그의 충의(忠義)를 높여 예조참의에 증직하고 충신 정려각을 내렸다. 충신각은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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