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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행 숭정대부 행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홍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귀암 이공 신도비명〔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行崇政大夫行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弘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歸巖李公神道碑銘〕
나는 고(故) 총재(冢宰) 귀암(歸巖) 이공(李公)의 행장을 읽고는 누차 한숨 쉬고 오래도록 탄식하면서, 편당(偏黨)은 국가에 재앙을 미치고야 만다는 사실을 더욱 알게 되었다. 숙종은 명철한 군주였으며 공은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명철한 군주를 만났으므로 의당 백성에게는 이익과 은택이 베풀어지고 그 자신에게는 예우가 종신토록 이어졌어야 했는데, 어찌하여 척신(戚臣)이 몰래 권력을 훔치고는 재앙의 그물을 한가득 펼쳐 해를 가하여,곤륜산의 맹렬한 화염이 우리 고운 옥마저 불태워 버리고 말았는가.이렇게 만든 것은 하늘인가, 귀신인가? 아아, 이는 당화(黨禍)인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란 끝내 속일 수 없고 이치도 끝내 기만할 수는 없는 법인지라, 12년도 되지 않아 성상께서 크게 뉘우치고 각성하여 측은해하는 전교를 조정에서 거듭 내리면서 그 죄안(罪案)을 탕척하고 상상(上相영의정)으로 추증해 주셨다. 이로써하늘이 또한 사람을 이기게 되어군자는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소인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니, 비록 당인(黨人)일지라도 하늘에 대해서야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공의 휘는 원정(元禎), 자는 사징(士徵)이며 귀암은 그의 호이다. 그 선대는 광릉(廣陵) 사람으로, 고려 말기에 전교시 판사(典校寺判事)를 지내고 호가 둔촌(遁村)이며 문학과 기개와 절조로 저명한 분은 집(集)이고, 국조(國朝)에 들어와 형조 참의를 지내고 수상(首相)으로 추증된 분은 지직(之直)이다. 그로부터 3대를 내려와 영남 성산(星山)으로 장가들어 그곳에 거처를 정한 분은 지(摯)인데, 이로써 자손들이 마침내 영남 사람이 되었다. 또 그 후 2대를 내려와 희복(熙復)이란 분은 좌승지에 증직되었고, 윤우(潤雨)란 분은 호가 석담(石潭)으로 화현직(華顯職)을 두루 거치고서 참의로 벼슬을 마쳤으며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는데, 이 두 분은 공의 증조부와 조부가 된다. 석담은정한강(鄭寒岡)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졸한 뒤에는 한강을 모신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그의 아들은 도장(道長)으로, 호는 낙촌(洛村)이며 한원(翰苑)과 천조랑(天曹郞)을 역임하고 홍문관 응교로 벼슬을 마쳤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는데, 군자감 주부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당숙부 영우(榮雨)의 후사가 되었다. 이분의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된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판중추부사 하담(荷潭) 김공 시양(金公時讓)의 따님이다. 이상 두 분은 공의 선고(先考)와 선비(先妣)가 된다.
공은 총명하고 영특하기가 보통 사람을 뛰어넘어 어릴 적에는 하루에 수만 글자를 외웠고 장성해서는 글을 볼 적에 여덟 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갔다. 이에 화려한 명성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인조 무자년(1648, 인조26)에 성균관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효종 신묘년(1651, 효종2)에 한성시(漢城試)의 대책(對策)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임진년(1652)에 증광시 문과(增廣試文科)에 급제하고 전시(殿試)에서 2등을 차지하여 규례에 따라 상의원 직장에 부직(付職)되었다.
정유년(1657)에 세자시강원 설서에 제수되었다가 천거로 사국(史局)에 들어가 한림(翰林)이 되었는데, 석담과 낙촌으로부터 공에 이르기까지, 조자손(祖子孫) 3대를 이어 한원에서 사관(史官)을 맡은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이듬해 봉교를 거쳐 전적에 오른 후 병조의 좌랑과 정랑,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전임되었다. 그러고 얼마 뒤 전주 판관(全州判官)에 제수되었다가 1년 만에 자리를 옮겨 장성 부사(長城府使)로 승진하였다.이는 치적이 가장 뛰어나므로 마땅히 승진시켜야 한다고 한, 전장(銓長)을 맡은 자의 표면적 주장에 따른 조치였지만, 그 이면의 의도는 실상 천조(天曹)의 명선(名選)을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기해년(1659, 현종 즉위년)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청나라에 갔다. 이때는 현종이 막 즉위한 시기로, 공은주연(冑筵)의 강관(講官)으로 있을 당시부터 현종으로부터 가장 깊은 지우를 입었는바, 이 사행을 맡은 것은 상의 간택에 따른 결과였던 것이다.
이듬해 여름 복명(復命)한 뒤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말미를 청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뵈었다. 겨울에 강릉 부사(江陵府使)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강릉부의 관아는 귀신에 의한 괴변이 일어난다고 하여 수리도 하지 않고 방치한 지가 벌써 몇 년인 상태였다. 이에 공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물 뿌리고 쓸게 한 뒤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머물렀는데, 아전과 향임(鄕任)이 모두 만류하였지만 마치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것처럼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얼마 뒤 뜰에 서 있던 오래된 나무의 곁가지 모양이 심히 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명을 내려 그물로 둘러친 뒤에 나무뿌리에 숯을 피우게 하자, 푸른 여우 두 마리가 뛰쳐나와 불에 타 죽어 버리니 이로 인해 관아는 마침내 평온을 되찾았다.
신축년(1661)에 묘당의 천거로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공은 앞서 장성(長城)에 있을 때 굶주린 백성을 지성을 다해 진휼하였고, 그 결과 백성들은 그에 힘입어 목숨을 부지했었다. 그러다 이때에 이르러 동래의 백성들 역시 여러 해 동안 굶주림에 시달리자 장성에서 했듯이 방편을 써서 널리 구제하면서 특히 지역의 경계에 따라 백성의 제한을 두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인접한 지역의 백성들 중 다수가 그 혜택을 입었다. 어사(御史) 남공 구만(南公九萬)이 이 일을 조정에 아뢰자, 상이 몹시 가상히 여기며 감탄하고는 말을 내려 줌으로써 총애하였다. 겨울에 왜인(倭人)이 왜관 이전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탈직(奪職)을 당하였으나 사실은 공이 간여하지 않은 일이었다.
계묘년(1663)에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서용(敍用)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갑진년(1664)에 판결사(判決事)에 제수되고 승지로 이배되었다. 얼마 안 있다가 외직으로 나가 전주 부윤에 보임되었는데,관찰사와 체례(體例)를 가지고 다투면서 굽히지 않고 맞섰다.이에 관찰사가 그 일을 조정에 아뢰어 파면에 이르게 하였으나 공은 개의치 않았다. 2년이 지난 뒤에 서용되어 승지에 제수되었는데, 당시청나라의 사사(査使)가 도착하자조정의 신하들은 장차 화가 일어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다 상이 사신을 접대할 때 공이 은밀히 사령(辭令)을 도와 모든 것이 사리에 들어맞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횡포를 가라앉게 만들었는데, 이로 인해 일이 순조롭게 처리되어 좌우의 사람들이 칭찬하고 감탄하였고 상도 한층 더 의지하고 신임하였다. 호서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정미년(1667)에 승지로서 왕세자의 책봉례(冊封禮) 때 예방(禮房)을 맡았던 공로를 인정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자급이 올랐다. 광주 부윤(廣州府尹)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있다가모종의 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이 이후로 우윤, 총관(摠管), 공조 참판에 연이어 제수되었다.
경술년(1670)에 도위(都尉)정재륜(鄭載崙)이 상사(上使)의 신분으로 청나라에 가려 할 때, 상국(相國)정태화(鄭太和)가 조정에 있으면서 전부(銓部)에 “내 아들이 나이가 어려 아직 사리에 밝지 못하니, 부사(副使)를 뽑을 때 매우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나랏일을 그르칠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전부에서 그에 맞는 인물을 대는 데 어려움을 겪자 상국이 “이모(李某)가 아니면 안 됩니다.”라고 하므로 이로 말미암아 공이 부사가 되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별시(別試) 전시(殿試)의 고관(考官)으로 차임되었다. 당시 공의 아들부학공(副學公)이 제생(諸生)의 신분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대책문(對策文)을 지었는데, 공은 입을 꾹 다문 채 평가에 참여하지 않고 시험을 주관한 대신(大臣)이 이따금 질문하면 마지못해 응대해 주기만 하였다. 그런데 급제자의 명단을 호명할 때가 되자 부학공이 2등을 차지하였다. 공은 벼슬하지 않았을 때부터 영남 지역 사림들에게 신망을 받았던바,유직(柳㮨)이 소장을 통해 두 신하의 배향(配享)을 논척할 당시공이 실상 그 일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그 일로 당시 논자들 가운데 공을 시기하고 질투한 자들이 많았으나 공에 대한 임금의 지우가 깊은 까닭에 공에 대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이때가 되자 대간(臺諫)들이 들고일어나 삭과(削科)를 청하였고 이어 공까지 언급하였다. 그러자 명관(命官)과 고관(考官) 들이 소장을 통해 실상을 드러내어 그것이 모함임을 밝혔고, 이에 상이 대관(臺官)을 엄히 꾸짖으면서 “입론에 근거가 없다.”라고 유시하였는데, 그로부터 거의 반년이 지나서야 대관의 저지가 멈추었다. 이후 양주 목사(楊州牧使)에 제수되었다.
계축년(1673)에 우윤으로 소환되었다. 얼마 안 있어 특별히 도승지에 제수되었는데, 대관이 관력(官歷)이 일천하다는 이유로 체개(遞改)할 것을 청하자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현재는 당론(黨論)이 우선이 되고 공도(公道)가 그다음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당론을 따른다고 한다면 이원정은 뜻에 차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나, 공도로 논해 본다면 이러한 말은 몹시 바르지 않다.”
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공은 재차 상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이로부터 형조 참판, 도승지, 예조 참판에 누차 제수되었다.
갑인년(1674)에 현종이 승하하자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에 차임되었다. 이에 앞서 왕대비의 환후에 약 처방을 논의하였던 공로로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자급이 올랐다.
을묘년(1675, 숙종1)에 대부인(大夫人)의 상을 당하여 관을 모시고 영남으로 돌아가자 상이 삼도(三道)에 유시하여 호송(護送)해 주도록 하였는데, 이는 특별한 은혜였다. 복제(服制)를 마치고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곧 대사간으로 이배되어 조정에 복귀하였다. 공은 고향집에 머물러 있을 당시, 조정에서 만과(萬科)를 설치한 뒤 그 시행 과정에서 인심에 맞지 않은 부분이 많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범 문정(范文正)의 고사를 원용하여 재상에게 편지를 보냈는데,그 대략에,
“지난날저들이 권력을 행사하던 때, 아첨을 일삼는 무리들이 돌연 높은 자리로 발탁되어 조정의명기(名器)를 자기의 사유물로 간주하였습니다.이왕 이것을 저들의 죄라고 하였다면이제 응당 한결같이 저들이 한 것과는 반대로 해야 하거늘 반대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따라해 버리니, 이렇다면 고인이 어찌하여‘자기에게 허물이 없고서야 남의 허물을 비난한다.’라고 하였겠습니까. 마치 전관(銓官)에게 청탁을 거는 사람처럼 제각기 어린 주상 앞에서 가까운 사람을 추천하는 일의 경우는 더욱 한심스럽습니다.만과를 설치한 것은 광해 말기의 정사이니,혼조(昏朝) 말기의 정사를 끌어와 성세(聖世) 초기의 정사로 삼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상신은 이 말을 채택해 쓰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공은1000여 자에 이르는 응지소(應旨疏)를 올려 먼저,
“의리를 밝히고 공사(公私)를 분별하고 어진 선비를 가까이하고 교묘한 말로 아첨하는 이를 멀리함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조급히 권세를 다투는 버릇을 억제하고 구습을 따라 시간만 보내는 풍조를 경계하고 요행히 벼슬하는 길을 막고 명기를 중히 여김으로써 조정을 바로잡으며, 생민(生民)들이 도탄에 빠져 원성이 날로 더하는 상황에서 구원과 구제를 행함으로써 나라의 근본을 굳건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이어 마땅히 혁파해야 할 것을 5조목으로 서술하였는데 체부청(體府廳)을 혁파하는 것이 그중 하나이고, 마땅히 설립해야 할 것을 5조목으로 서술하였는데 영남에 대동법(大同法)을 설립하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소장이 상주(上奏)되자 상이 후한 비답을 내리고 가상히 여겨 장려해 주었다.
당시숙종이 선왕의 유지를 받들고 방례(邦禮)를 개정하여 종통(宗統)이 바로잡히자미수(眉叟) 허 선생(許先生허목(許穆))이 앞장서서 건의하여 태묘(太廟)에 고하기를 청하고, 태학과 팔도의 유생들도 그 뒤를 이었다.그러던 중 공은 자신의 비난에 대해 변론하는 상소를 올렸는데,그 대략에,
“종통이 바로잡힌 사실을 고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인심의 미혹된 점을 깨우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갑(甲)의 주장이며, 논의가 비록 바르다 해도 대립이 격화되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절목이 비록 갖추어졌어도 어그러짐이 격심해지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을(乙)의 주장으로, 이 두 주장은 똑같이 저마다 견지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단 생각건대 이 논의를 때가 지났다는 이유로 제기하지 않는다면 물론 좋기야 하겠지만, 이미 제기된 뒤에 꺾고 배척하기를 마치 횡의(橫議)를 차단하는 것처럼 한다면 의리로 헤아려 볼 때 실로 부당한 점이 있습니다.
천지의 상도(常道)가 남김없이 깨지고 사라졌으니 온 나라의 생령들이 누군들 이를 비통해하지 않겠습니까마는, 혹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금고(禁錮)하고 찬축(竄逐)하고 심지어는 죽이기를 청하여 사람의 입을 틀어막기까지 하며, 그러고도 부족하여 재차 예로써 금지하여 이를 팔도에 두루 알리고 형구(刑具)를 벌여 놓고서 언관(言官)을 대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왕께서 속임을 당한 것을 통분하게 여기신 이유이자 전하께서 절치부심하는 전교를 내리신 까닭입니다만,살리기 좋아하는 덕을 우러러 본받고 죽이지 않는 인(仁)을 받들어 따르면서, 정통(正統)을 마땅히 고해야 한다고만 하고 죄를 더하지 말아야 한다고 청한다면 이는 실로 균형 있고 공정한 의론일 것입니다.”
하였다. 공은 도량이 넓고 커서 비록 국인(國人)의 비방하는 말이 떼 지어 일어나는 상황에도 그 입론이 이처럼 굳세면서 자애롭고 엄격하면서 관대하였으나 만과와 체부를 설치하는 일에는 날카롭게 정색하고 반대하면서 조금의 용납도 허용하지 않았다.
병조 참판과 주사 유사(籌司有司)에 제수되고 또 진청 당상(賑廳堂上)을 겸관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대사간에 제수되었는데, 사간원의 한 동료가 사헌부와 함께 고묘(告廟)를 청하는 계사를 올리려고 하자 공은 “일이란 소상히 따져 보는 것이 중요하니 일단 기다려 봅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혹 이에 대해 망설이고 주저하는 것이라고 하므로 공이 인피(引避)하였는데 체차되지 못하여 마침내 발계(發啓)하였다. 그 뒤윤헌경(尹憲卿)이란 자가 소장을 통해 공을 몹시도 끔찍하게 무함하자공이 상소하여 변론하기를,
“고묘를 논하는 자들의 말에 ‘때가 지났다고 하는 혐의는 작고 마땅히 고해야 한다는 의리는 크니, 작은 혐의를 가지고 큰 의리를 폐할 수는 없다.’라고 하는데, 신은 이에 대해 ‘이 논의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만이거니와, 일어난 이상 또한 막기 어려운 일이다.’라고 하였고, 예를 그르쳤던 자들에게 가죄(加罪)하지 않으려는 것은 실로 여러 사람과의 논의를 거쳐 얻은 합치된 의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윤헌경은 의심하고 저해하는 것이 한층 더 심하여 속임과 과장으로 현혹하였으니, 원한이 쌓이고 분노가 깊어진 까닭에 이런 발언을 한 것입니다. 저자들이손으로는 왕작(王爵)을 쥐고 입으로는 천헌(天憲)을 머금으며지낸 50여 년 동안, 신은 시류에 영합하는 데 능하지 못한 까닭으로 모두 몇 번이나 실패하였는데, 머리를 숙이고 기세를 낮추면서 아첨하고 순종하는 일은 도저히광견(狂狷)한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서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예조 참판을 거쳐 대사성으로 이배되었고, 이후 발탁되어 형조 판서에 오르고 대사성을 겸관하였는데, 정경(正卿)이 국자감(國子監)을 겸관한 것은 국조에 드문 일이었다.
무오년(1678)에 의주(義州)에서 북사(北使)를 접대하였고, 반송(伴送)하는 일도 그와 마찬가지로 하였다. 복명한 뒤에는 판윤에 제수되어 처음으로 영남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였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 대동법이 양호(兩湖)에서 시행되었으나 유독 영남만큼은 이전에 해 왔던 대로 계속 토질에 맞추어 공물을 내었던 까닭에 백성들이 상사(上司)의 강제적 징수를 견디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이에 공은 일찍이응지소(應旨疏)에서 그 일에 관하여 힘주어 말한 바 있었다. 그러다 이때에 와서 조정에서 공으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하게 하자, 마침내 백성의 토지에서 산출되는 곡식을 헤아려 왕실에 바칠 것과 관에서 쓰일 것을 계산한 뒤에 거리를 헤아리고 그 품삯을 적절히 조절하였으니, 요컨대 나라에 마땅하고 백성에게 이롭도록 한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이 완성된 뒤 반포해 시행하자 백성들이 대단히 기뻐하면서 비석에 글을 새겨 그 은덕을 기렸다.
이 당시 진향사(進香使)가 급히 장계하여중국이 큰 혼란에 빠졌다고 아뢰자조정에서는 금군(禁軍)을 증원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척신(戚臣) 김석주(金錫胄)가 실제 그 논의를 주도하였는데 공이 안 된다고 버틸까 봐 걱정하다 마침 반궁(泮宮)에서 공을 만나고는 변방의 일에 대해 말하는 한편, 또 말하기를,
“서쪽 변방에 경계할 일이 많으니 체부(體府)를 반드시 다시 설치해야 하며, 체부를 설치하고자 한다면 금군은 형편상 마땅히 늘려야 하니, 이는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에 공은 말하기를,
“체부는 무익한 것으로 그저 나라를 동요시키기만 할 뿐이니, 금군을 증원하는 일이 그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렇지만 병권을 주관하는 자가 직분상 마땅히 걱정하는 것일 뿐이니, 자기 견해가 있으면 제 스스로 곧장 아뢰는 것이 무에 불가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러고 난 후 어전에 나아갈 무렵 공 역시 ‘방비가 허술한 데다, 권병을 쥔 신하가 그 일을 전담하는 것이므로 굳이 이전의 견해를 고집할 것은 없다.’라고 생각하여 신하들을 따라서 우러러 대답만 아뢸 뿐이었다. 얼마 뒤 체부를 다시 설치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대사헌으로서 호조 판서에 이배되었다.이때에 북사(北使)가 왔는데,상이 건강이 편치 않아 교외로 나가 영접할 수가 없어 중신(重臣)이 달려가 그 사정을 설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신이 굳은 태도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에, 공이 명을 받들고 길에서 그들을 맞이하면서 반복해서 설명하고 타일렀는데 그 말의 이치가 분명하고 확실하였다. 이에 사신은 존경하고 감복하여 오직 공의 말이라면 따라 주었다.
우참찬으로 이배되어 지의금부사를 겸관하였다. 이때 강도(江都)에서투서(投書)의 변고가 발생하여 흉역(凶逆) 이유정(李有湞)을 붙잡아 국문하였는데, 조정의 논의는도적을 다스리는 형벌을 통하여 그 죄상을 캐물으려 하였다. 이에 공이 “국옥(鞫獄)에는 본래부터 정해진 형벌이 있는데, 한 상당 명회(韓上黨明澮)가 낙형(烙刑)을 처음 시행하여 그 폐해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옛 법이 아닌데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자 모두들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이로 인하여 주동자는 복주(伏誅)되었으나 그 나머지는평번(平反)되어 내보내진 자들이 많았다.
대사헌으로 이배되었다가 곧 이조 판서에 제수되고 홍문관 제학을 겸관하게 되었는데, 그 직에 대한 사양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공도(公道)를 견지하고 편파적 입장을 끊어 내는 일에 한층 더 힘써, 비록 자기와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도 의연하게 섞어서 등용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대각의 탄핵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상은 공에게 딴마음이 없다는 것을 살피고 더욱더 신임하였다.
숭정대부(崇政大夫)로 뽑혀 판의금부사를 겸관하였다. 비국, 경연(經筵), 제학, 성균관, 춘추관, 내국(內局), 괴원(槐院), 종부시(宗簿寺), 역원(譯院), 찬획사(贊畫使), 진청(賑廳), 선공감(繕工監) 등의 직임은 전형(銓衡)을 맡았을 때 겸관한 것인데 공은 이에 더욱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 김석주가 호시탐탐 한쪽 사람들을 노리고 있다가 궁중과 통하여유언비어를 만들어 내어 상의 마음을 두렵고 요동치도록 하는 데 갖은 수단을 다하였는데, 이에상은 직위를 교체하고 공을 삭출하였다.그러고 얼마 있다가 정원로(鄭元老), 강만철(姜萬鐵) 등이 급변(急變)을 고해 올렸는데, 그 내용은 대개 수상 허적(許積)의 서자(庶子) 허견(許堅)이 간악무도하여 역종(逆宗)인 이정(李楨), 이남(李柟)과 결탁하여 반역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김석주가 이 일을 매개로 일망타진할 계획을 수립하여 옥사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는데, 이것이 곧 이른바경신옥사(庚申獄事)이다.
이 일을 고한 자가 “허견이이태서(李台瑞)로 하여금 재상들을 충동질하여 체부청(體府廳)을 재설치하도록 하였다.”라고 하고 그 안에 공까지 언급하면서 끊임없이 거짓으로 아뢰었는데, 이에 공은 끝내 역적에게 속았다는 이유로 관서(關西)의 이주(理州)로 방축되었다. 그러고 얼마 뒤 명에 의해 조옥(詔獄)으로 잡혀오자 공은 김석주와 반궁(泮宮)에서 나누었던 말을 낱낱이 열거해 내면서 그 잘못이 이태서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밝혔다. 이에 국청에서 서면으로 김석주에게 그 사실에 대해 물었는데, 김석주는 공이 한 말 그대로 답서를 보내는 한편, 국청 승지(鞫廳承旨) 윤계(尹堦)에게 편지를 보내 그 억울한 사정을 안타까워하면서 상께 청대(請對)하여 그 실상을 밝히고 싶다고까지 하였다. 마침 상이 형을 면제하고 유배를 보냄으로써 결국 이 일이 마무리되었는데, 가을에 옥사가 다시 일어났을 때사형수의 난언(亂言)으로 인해 또다시 체포되었다. 그런데 끝내 실체가 없자 옥사를 맡은 자들은 분해하면서도 어쩔 방법이 없어 재차 체부에 관련된 일을 끄집어내면서 심히 모진 고문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공은 정신과 기운이 조금도 꺾이지 않아정상 지화(鄭相知和)를 올려다보며 말하기를 “공은문익공(文翼公)의 후손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이에 그 자리에서어떤 자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르면서 별안간 “감히 오늘 일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견주는가.”라고 하였는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 어떤 말도 감히 다시 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옥에서 생애를 마쳤는데, 바로 윤8월 21일의 일이었다. 이날엔 흙비가 내려 어둑하고 해는 컴컴하여 빛을 잃었는데, 도성 안의 선비들과 백성들 가운데 이를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기까지 하였다. 아아, 간사한 자가 선한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일이 예로부터 어찌 한량이 있었는가마는, 그래도 그들은 속일 수 있을 만한 그럴싸한 방법을 가지고 위로는 군주의 귀를 가리고 아래로는 초야의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공의 경우는 체부를 혁파해야 한다고 힘써 주장하던 분이었음에도 도리어 체부가 사안(死案)이 되어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저 당인들은 그 누구를 속인 것인가? 하늘을 속인 것일 터이다.
기사년(1689)에 상이지난날의 일을 후회하여 가장 먼저 공의 관작(官爵)을 회복하고 예부랑(禮部郎)을 영남으로 보내 특별히 제사를 지내 주었으며, 곧이어김상 덕원(金相德遠)이 아뢴 일을 계기로 명을 내려 영의정으로 추증하는 한편, 또 관원을 보내 제사 지내 주었다. 또 부학공(副學公이담명(李聃命))이 연석(筵席)에 나갔을 적에 상이 “너의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었으니, 나는 늘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라고 하면서 슬픔으로 말문이 막힌 것이 두세 차례나 되었고, 장지(葬地)를 다시 정할 때에는 방백(方伯)에게 하유(下諭)하여 그 일을 함께 돌보게 해 주었다. 이로써애도와 영예가 완전하게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그로부터 6년이 지난 뒤당인들이 기회를 틈타는 바람에다시 관작이 삭탈되었고, 그 뒤 또 19년이 지나서 공의 손자 세원(世瑗)이 북을 울리며 그 원통함을 아뢰자 상께서 그 일을 대신에게 내려 의논하도록 하였다. 이에 영중추부사윤지완(尹趾完)이 “김석주가 일찍이 그의 원통하고 억울한 사정을 말하면서 그가 귀양을 갈 때에 예물을 보내 주었다고 하였고 그가 신문(訊問)을 받고 있을 적에는 청대(請對)하여 사실을 밝히고 싶었으나 미처 그러지 못하였다고도 하였으니, 그 말이 믿을 만합니다.”라는 의견을 내놓자, 상은 “영부사의 의견이 옳다.”라고 이르고는 공의 벼슬을 회복해 주고 관직의 추증도 이전대로 해 주었다. 그러자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혹 그것을 저지하였는데 상이 “당초의 처분은 나의 잘못이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일을 나는 하지 않는다.”라고 이르자 언관(言官)들도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공은 집에서 머물 적에 내행(內行)이 순수하고 독실하여 태부인을 엄한 아버지처럼 섬겼고 그런 마음을 미루어 넓혀서 아우들을 보살펴주고 일족들과도 도탑게 지냈는데, 이는 모두 그의 어짊을 확인할 수 있는 점들이다. 이에 출사하여 임금을 섬길 적에 띠를 드리우고 홀을 바르게 잡고서 시비의 분별 없이 무턱대고 남을 따르지 않아, 풍모와 절조와 재주와 계책으로 찬란하게 한 시대의 명신이 되었던 것은 기실 가정에 실천하였던 것을 근본으로 삼아 그것을 나라에까지 확대 적용한 결과였던 것이다. 그런데 결국 당화(黨禍)가 자신에게 닥쳐오자 순순히 천명을 받아들일 따름이었으니, 그 시운(時運)에 대해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다행히 성명(聖明)한 숙종이 비록 조정의 형국이 변화하고 뒤바뀌는 상황에서도 공의 충정을 살피고 공의 억울함을 딱하게 여겨 준 덕분에 모함으로 더럽혀진 명예가 말끔히 탕척되고 은혜로운 말씀이 분명히 선포되었다. 그리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나라에 재앙을 끼치는 것은 한때의 악독함을 펼쳐 내보이는 것에 불과하며 공론(公論)이 100년도 가지 않아 정해지는 것은 비록 사람의 화복을 좌지우지하는 흉악한 기세로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알게 되었으니, 이를 통해 당시의 군신 관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공의 문장은 말이 순하고 이치가 통창하여 큰비가 쏟아지듯 분방(奔放)하였다.일찍이 공이 빈사(儐使)로서 의주를 왕래할 때 북사(北使)가 공의 시문을 아끼고 소중히 여겨 그것을 《조선채풍록(朝鮮採風錄)》에 수록하였고《화인문초(華人文抄)》에도 뽑혀 들어갔다고 한다. 저서로는 《성산지(星山志)》, 《증수향약(增修鄕約)》, 《귀암만록(歸巖漫錄)》 등이 있는데 집에 보관되어 있다. 공의 춘추는 59세이다. 장지(葬地)는 모두 세 번 옮겨졌는데, 기축년(1709)에 영천(永川) 개쌍동(蓋雙洞) 모향(某向)의 언덕에 부인과 합장되었다.
정경부인 이씨(李氏)는 관향이 벽진(碧珍)으로, 승지 완정공(浣亭公) 이언영(李彦英)의 따님이다. 남편을 섬김에 화순(和順)하고 예법이 있었으며, 명부(命婦)란 귀한 신분이 되었음에도 입는 옷이, 청빈하고 검소했던 지난날과 다름없었고, 두 아들이 이미 현달한 뒤에도 겸손을 권면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보다 22년 늦은신해년(1731, 영조7)에 졸하니 향년 79세이다.
4남 4녀를 두었다. 아들 가운데 첫째는 바로 부제학을 지낸 담명(聃命)으로 마지막 벼슬이 이조 참판이고, 둘째는 한명(漢命)으로 홍문관 교리를 지냈는데, 둘 다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셋째는 준명(俊命)으로 일찍 죽었고, 넷째는 귀명(龜命)으로 찰방을 지냈다. 딸 가운데 첫째는 유명하(柳命河)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보덕을 지낸 최항제(崔恒齊), 셋째는 좌랑을 지낸 강상주(姜相周), 넷째는 김승국(金升國)에게 출가하였다.
참판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가운데 첫째는 생원 세침(世琛)이고 둘째는 세경(世璟)으로 일찍 죽었다. 두 사위는 참봉을 지낸 강해(姜楷)와 목성겸(睦聖謙)이다. 교리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가운데 첫째는 생원 세원(世瑗)으로 바로 북을 울려 공의 억울함을 아뢴 자이고, 둘째는 세보(世寶)이고, 셋째는 세황(世璜)이다. 사위는 심수간(沈壽幹)이다. 찰방은 아들이 없어 세보를 후사로 삼았다. 유명하의 아들은 유후겸(柳後謙)이고, 세 사위는 참봉을 지낸 이필(李泌)과 김석범(金錫範)과 정중항(鄭重恒)이다. 최항제는 3남을 두었는데 좌랑을 지낸 최수경(崔守慶), 최수온(崔守溫), 최수인(崔守仁)이며, 사위는 권세현(權世鉉)이다. 강상주의 아들은 강유(姜濡)이다. 김승국은 2남을 두었는데 좌랑을 지낸 김동준(金東俊), 김동걸(金東傑)이고, 사위는 김중려(金重呂)와 이인겸(李仁兼)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많은 관계로 다 기재하지 않는다.
5대손 만운(萬運)이 문과에 급제하여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나자, 금상(今上) 20년(1796, 정조20)에 교지를 내려 그를 불러서는 특별히 대각에 제수하니, 이는 그가 옛 신하의 자손이라는 점을 어여삐 여겨게려(揭厲)의 은택을 베푼 것이다. 천 리 먼 곳에서 명(銘)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와 한 해가 지나도록 가지 않고 있는 자는 6대손 이풍(以豐)이니, 그 정성이 또한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대령의 장대한 기운이 / 大嶺磅礴
큰 신하를 탄생시켰으니/ 曰生元臣
어려서 공부하고 커서 실천한 것에는 / 幼學壯行
집안의 깊은 연원이 있었네 / 家有淵源
왕이 이르기를, 훌륭하도다 / 王曰媺哉
나에겐 어진 신하가 있다 하였네 / 予有臣良
깊디깊은목천을 / 木天深深
삼대를 이어 드나들고 / 三世翺翔
지방관과 은대를 역임하며 / 銅竹銀臺
아름다운 명성을 드날리니 / 令聞載颺
저 붕당을 일삼는 자들이 / 彼朋家者
주변에서 눈을 흘겼네 / 睊睊在傍
숙종이 선왕의 뜻을 잘 계승하여 / 肅考善繼
태묘에 예를 고하니 / 于廟告禮
일월같이 환해진 종통에 / 日月宗統
누가 감히 또 요사를 부리랴 / 疇敢更螮
공이 영남에서 돌아왔을 땐 / 公來自嶺
거칠고 해진 베옷 차림이었네/ 布袍麁弊
어찌 준엄하지 않았으랴마는 / 曷不峻嚴
마음속엔 인자함이 있었네/ 所包者惠
나아가 성균관을 겸직하고 / 晉兼成均
여러 관서를 두루 총괄하였네 / 遍都諸省
천관의 총재가 되어서는 / 天官冢宰
문 앞에 청탁이 끊어졌네 / 門絶造請
누가 외척에 의지하여 / 誰據戚掖
피 묻은 이빨로 으르렁대었나/ 血牙狺如
화의 그물이 하늘 가득 펼쳐지니 / 罻羅彌天
공이 어찌 벗어날 수 있었으랴 / 公豈免諸
유배 처분 받자마자 이내 바로 붙잡히니 / 旣竄旋逮
귀신마저 탄식을 내뱉었네 / 鬼神其吁
작은 저 봉황새가 / 宛彼祥鳳
흉악한 올빼미에게 쪼이니 / 鷙鴞攸啄
흙이 비처럼 떨어지어 / 土以爲雨
하늘이 암흑으로 뒤덮였네 / 乾象黯黑
십 년 세월 거듭 흐르자 / 十年重回
왕의 마음 이에 슬퍼져 / 王心斯惻
오라 너 아비 잃은 이여 하고 / 來汝遺孤
앞자리로 가까이 나아오자 / 密邇前席
네 아비의 억울함에 / 汝父之冤
내 실로 후회되고 부끄럽다 하였네 / 予實悔怍
왕이 신하에게 명을 내려 / 王命王臣
천 리 너머에서 제사를 지내 주었네 / 千里酹酌
운수엔 길흉이 반복되는 법이라 / 運有平陂
잔혹한 계략이 다시 기승을 부리니 / 憯謀復逞
왕이 어찌 네놈들을 따르랴 / 王豈汝徇
따라 준 것도 잠시였을 뿐 / 所徇俄頃
손자가 북을 치며 호소하매 / 孫籲以鼓
조정에 널리 물어보니 / 廷詢之博
나라에 큰 신하 있어/ 國有大臣
명백한 의론을 올렸네 / 獻議明的
왕은 그러하도다 / 王曰有是
나는 잘못을 밀고 나가지 않겠다 하여 / 予不遂非
빛나는 은혜의 명이 / 煌煌恩誥
조정에 거듭 내려지니 / 申降天扉
캄캄했던 엎어진 동이 속에 / 幽哉覆盆
태양 빛이 내려와 비쳤네/ 太陽臨下
원수들은 기가 죽고 / 仇者氣沮
떠들어 댄 자들은 비로소 입을 닫았네 / 衆喙始啞
어느 임금인들 신하가 없겠으며 / 君誰無臣
어느 신하인들 임금이 없겠는가마는 / 臣孰無君
오직 이애도와 영예에서 / 惟玆哀榮
가히 군신의 관계를 보리로다 / 可觀君臣
개쌍이란 골짜기에 / 蓋雙之洞
날씨가 환히 밝으니 / 天氣昭朗
이 빗돌은 마멸되지 않고 / 龜頭不泐
천지와 함께 영원하리라 / 可弊天壤
나의 이 삼엄한 붓으로 / 我筆森嚴
네 그 편당을 벌하노라 / 誅爾偏黨
[주-D001] 곤륜산의 …… 말았는가:
거대한 환란으로 인해 선량하고 무고한 사람까지 피해를 입었다는 말로, 이원정(李元禎)이 선인임에도 악인들과 똑같이 취급받아 무차별적인 처벌을 당했음을 가리킨다. 《서경》 〈윤정(胤征)〉에 “곤륜산에 불이 나면 옥이나 돌이나 모두 타 버린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주-D002] 하늘이 …… 되어:
우선은 사람이 하늘의 이치를 전도시켜 악인이 복을 받고 선인이 화를 당하게 만들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복선화음(福善禍淫)이란 천도(天道)가 회복되어서 결국 하늘의 이치가 사람을 이긴다는 말로, 이원정이 신원(伸冤)되어 끝내 복선화음의 천도가 관철되었음을 가리킨 것이다. 《사기(史記)》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고, 하늘이 정해지면 역시 사람을 이기는 법이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라고 하였는데, 이를 송(宋)나라 학자 소식(蘇軾)이 원용하여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고, 하늘이 정해지면 또한 사람을 이긴다.[人衆者勝天, 天定亦勝人.]”라고 하였다. 《東坡全集 卷25 用前韻再和孫志擧》
[주-D003] 정한강(鄭寒岡) 선생:
정구(鄭逑, 1543~1620)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이다. 이황(李滉)과 조식의 문인으로 경학과 예학에 뛰어났으며 영남 남인의 영수로 활약하였다.
[주-D004] 정유년:
《귀암집(歸巖集)》 권12 〈가장(家狀)〉과 〈시장(諡狀)〉 및 《승정원일기》 효종 7년 2월 18일, 8월 4일, 9월 7일 등의 기록을 참고해 볼 때, 이는 병신년(1656)의 착오라 생각된다.
[주-D005] 이는 …… 것이었다:
《귀암집》 권12 〈가장〉에 따르면 전장을 맡은 자는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키고 천조의 명선은 전랑(銓郎)을 말한다. 이 글에서는 1658년 겨울 당시 전병(銓柄)을 쥐고 있던 송시열이 이원정의 전랑 임명을 막기 위해 승진이란 명분을 내세워 이원정을 장성 부사로 이직시켰다는 좀 더 구체적인 기록이 실려 있다.
[주-D006] 주연(胄筵)의 강관(講官):
왕세자에게 학문을 강론하는 자리를 말한다. 이원정은 1656년 2월부터 세자시강원 설서로 임명되어 당시 왕세자였던 효종과 함께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를 강론하였다. 《承政院日記 孝宗 7年 2月 18日》
[주-D007] 관찰사와 …… 맞섰다:
1665년 봄에 이원정과 전라도 관찰사 민유중(閔維重)이 삼중석(三重席)을 사용하는 문제로 대립한 것을 말한다. 이원정은 전주 부윤에 임명된 이듬해 당시 신임 관찰사이던 민유중을 만나면서 삼중석을 사용하였는데, 이에 대해 민유중은 규례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면서 바꿀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원정은 전례임을 이유로 들어 끝내 그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 일로 이원정은 추고를 당하게 되는데, 그때 그는 〈전주부윤시추고함사(全州府尹時推考緘辭)〉란 글을 써서 해당 사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기도 하였다. 《歸巖集 卷4 全州府尹時推考緘辭, 卷12 家狀》
[주-D008] 청나라의 사사(査使)가 도착하자:
1664년 8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안추원(安秋元)이란 자가 탈출을 감행하여 조정에서 그를 본토로 받아 준 일이 있었고, 1666년에는 최선일(崔善一)이란 자가 청나라에서 수출을 금지한 유황을 몰래 매입하다 발각된 일이 있었는데, 이 두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 차원에서 1666년 7월 이일선(李一善)을 대표로 하는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온 것을 말한다. 《顯宗實錄 5年 8月 12日, 7年 1月 15日ㆍ5月 28日》
[주-D009] 모종의 일:
1667년 10월 김선립(金先立)이라는 도적이 강상죄(綱常罪)를 범해 참수된 일을 말한다. 김선립이 태어난 고을이 광주(廣州)였기 때문에 당시 광주 부윤으로 있던 이원정이 그에 연좌되어 파직을 당한 것이다. 《顯宗改修實錄 8年 10月 8日》
[주-D010] 정재륜(鄭載崙):
1648~1723. 당시 영의정이던 정태화의 아들로, 효종의 넷째 딸인 숙정공주(淑靜公主)의 남편이다. 동평위(東平尉)에 봉해졌다. 《孝宗實錄 7年 8月 29日》 《顯宗實錄 11年 6月 7日》
[주-D011] 정태화(鄭太和):
1602~1673. 본관은 동래, 자는 유춘(囿春), 호는 양파(陽坡)이다. 이원정은 그의 만시와 제문을 짓기도 하였다. 《歸巖集 卷1 挽鄭領相, 卷7 祭鄭領相文》
[주-D012] 부학공(副學公):
이담명(李聃命, 1646~1701)으로, 이때 그가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자는 이로(耳老), 호는 정재(靜齋)이다. 《定齋集 卷27 嘉義大夫吏曹參判李公墓碣銘》
[주-D013] 유직(柳㮨)이 …… 당시:
1649년(인조27) 태학생 홍위(洪威) 등이 상소하여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자 이듬해 2월 경상도 유생 유직 등 900여 명이 두 사람의 문묘 배향을 반대하는 소장을 올린 때를 말한다. 《孝宗實錄 1年 2月 22日》
[주-D014] 공이 …… 있었다:
이원정이 이때 올린 소장은 《귀암집》 권3에 〈영남유소(嶺南儒疏)〉로 실려 있다.
[주-D015] 범 …… 보냈는데:
1675년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허적(許積)에게 북송(北宋)의 명신(名臣)인 범중엄(范仲淹)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편지를 보낸 것이다. 문정(文正)은 범중엄의 시호이다. 이 편지는 《귀암집》 권5에 〈여허영상(與許領相)〉으로 실려 있다.
[주-D016] 저들:
남인인 이준과 반대 세력에 있던 서인의 두 영수인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가리킨다. 《歸巖集 卷5 與許領相》
[주-D017] 명기(名器):
작위(爵位)와 거복(車服)으로, 곧 벼슬을 가리킨다. 《춘추좌씨전》 성공(成公) 2년에 “오직 기(器)와 명(名)은 사람에게 빌려주어서는 안 되니, 이는 군주가 관장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두예(杜預)의 주(注)에 “기는 거복이고, 명은 작호이다.”라고 하였다.
[주-D018] 이왕 …… 하였다면:
1674년 현종이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을 복을 서인의 주장대로 대공복(大功服)으로 정하였다가 남인들이 그 부당성을 지적하자 이를 전면 재검토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현종이 도중에 사망하자 숙종이 즉위하여 현종의 유지대로 서인들에게 복제를 그르친 죄를 물어 송시열은 유배형에 처하고 이미 사망한 송준길은 관직을 삭탈한 것을 말한다. 《歸巖集 卷5 與許領相》
[주-D019] 자기에게 …… 비난한다:
《대학장구》 전 9장에 “군자는 자기에게 선한 점이 있고서야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자기에게 허물이 없고서야 다른 사람의 허물을 비난한다.”라고 하였다.
[주-D020] 만과를 …… 정사이니:
1620년(광해군12) 서북 지방의 방비를 강화할 목적으로 3000명이 넘는 무인을 선발한 것을 말한다. 《光海君日記 12年 7月 19日》
[주-D021] 1000여 …… 응지소(應旨疏):
이 소장은 1677년(숙종3) 5월 19일에 제출되었으며, 《귀암집》 권3에 〈대사간응지소(大司諫應旨疏)〉로 실려 있다.
[주-D022] 숙종이 …… 바로잡히자:
1674년 현종이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을 복을 서인의 주장대로 대공복(大功服)으로 정하였다가 남인들이 그 부당성을 지적하자 이를 전면 재검토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현종이 도중에 사망하자 숙종이 즉위하여 현종의 유지대로 서인들에게 복제를 그르친 죄를 물어 송시열은 유배형에 처하고 이미 사망한 송준길은 관직을 삭탈한 것을 말한다. 《歸巖集 卷5 與許領相》
[주-D023] 그러던 …… 올렸는데:
1677년 5월 25일에 이원정이, 선조 집권기에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의 위훈을 삭제하고 그 일을 태묘에 고하였을 때 윤원형(尹元衡)에게는 죄를 더 주지 않았던 일을 근거로 들면서, 복제(服制)를 개정한 사실을 태묘에 고한 일을 가지고 송시열을 토죄(討罪)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해 정지화(鄭知和), 이지익(李之翼) 등이 상소하여 태묘에 고하는 문제에 윤원형의 일을 예로 든 것은 잘못이라고 이원정을 비판하자, 마침내 이원정이 사직 상소를 올려 자신을 변호한 것을 말한다. 《肅宗實錄 3年 5月 25日, 6月 19日》 이 상소는 《귀암집》 권3에 〈도승지변방소(都承旨辨謗疏)〉로 실려 있다.
[주-D024] 살리기 좋아하는 덕:
사형에 처할 죄인을 특별히 살려 주는 제왕의 덕으로,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죄가 의심스러운 경우는 벌을 가볍게 하고 공이 의심스러운 경우는 상을 후하게 주셨으며, 죄 없는 자를 죽이느니 차라리 떳떳한 법대로 하지 않는 실수를 하시겠다고 하여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민심에 흡족합니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주-D025] 윤헌경(尹憲卿)이란 …… 무함하자:
복제를 그르친 송시열의 죄를 고묘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조정이 한창 시끄럽던 1677년 7월 26일 유학(幼學) 윤헌경 등 100여 명이 고묘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상소에서 이원정을 두고 주변 사람들을 동원하여 고묘의 실행을 막후에서 선동한다고 비난한 것을 말한다. 《肅宗實錄 3年 7月 26日》
[주-D026] 손으로는 …… 머금으며:
관직의 임명과 법에 의한 형벌의 적용을 좌지우지하는 실권을 지닌 것을 비유한 말이다. 왕작은 벼슬을 말하고 천헌은 법령을 말한다. 《後漢書集解 卷24 朱穆列傳》
[주-D027] 광견(狂狷):
광(狂)은 뜻은 높으나 실천이 말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견(狷)은 지혜는 모자라나 스스로의 단속을 잘하는 것을 이른다. 《논어》 〈자로(子路)〉에 “중도의 선비를 얻어 함께할 수 없다면 반드시 광자(狂者)나 견자(狷者)와 함께 할 것이다.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라고 하였다.
[주-D028] 응지소(應旨疏):
이 소장은 1677년(숙종3) 5월 19일에 제출되었으며, 《귀암집》 권3에 〈대사간응지소(大司諫應旨疏)〉로 실려 있다.
[주-D029] 중국이 …… 아뢰자:
청나라 장수 오삼계(吳三桂)가 1678년 5월 호남(湖南)의 형양(衡陽)에서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주(周)라고 하면서 난을 일으킨 것을 말한다.
[주-D030] 이때에 북사(北使)가 왔는데:
청나라 황후를 책봉한 데 대한 칙서를 반포하기 위해 청나라 사신이 온 것이다. 《肅宗實錄 4年 5月 20日》
[주-D031] 투서(投書)의 변고:
1679년 3월 양주(楊州)에 사는 이유정이란 인물이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손자인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을 추대하여 반정(反正)을 일으켜야 한다는 내용의 격문(檄文)을 당시 강도 축성장(江都築城將)으로 있던 이우(李藕)에게 전한 사건이다. 그 격문에는 서자에 불과한 효종이 적자인 소현세자를 제치고 왕위에 즉위함으로써 종통(宗統)이 질서를 잃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이 일로 이유정이 복주되자 곧 송시열이 그 내용의 빌미를 제공한 주동자로 지목되어 대간을 중심으로 송시열 및 그 주변인들을 향한 대대적인 탄핵이 이루어졌다. 《肅宗實錄 5年 3月 12日ㆍ16日, 4月 16日ㆍ26日, 5月 12日, 6月 8日》
[주-D032] 도적을 다스리는 형벌:
주뢰(周牢)를 가리킨다.
[주-D033] 평번(平反):
잘못 판결된 안건을 다시 조사하여 억울하게 죄를 입은 이를 무죄로 처리하거나 감형해 주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때 준불의(雋不疑)란 이가 경조윤(京兆尹)을 맡아 죄수들을 심리하고 돌아올 적마다 그 모친이 “오늘은 평번을 해서 몇 사람이나 살렸느냐?”라고 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漢書 雋不疑傳》
[주-D034] 유언비어:
허적과 윤휴 등이 허적의 조부 허잠(許潛)의 연시연(延諡宴)을 베푸는 자리에서 병조 판서 김석주와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 등을 독살하려는 한편, 허적의 서자인 허견(許堅)은 그 자리에서 몰래 무사를 숨겨 놓고 기회를 엿보려 한다는 말이다. 《燃藜室記述 卷34 庚申大黜陟許堅之獄》
[주-D035] 상은 …… 삭출하였다:
허적 등이 김석주, 김만기 등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숙종이 1680년 3월 28일 궁궐의 호위를 지친(至親)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다는 명목을 내세워 20년 가까이 병권을 맡고 있던 남인의 대표적인 무신 유혁연(柳赫然)을 훈련대장에서 해임한 뒤 그 자리에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김만기를 임명하고 신여철(申汝哲)을 총융사에 임명하는 한편, 관직 등용을 치우치게 하였다는 죄로 그다음 날 이원정의 이조 판서 직임을 삭탈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을 지시한 것을 말한다. 숙종의 이러한 조치는 남인이 정권에서 축출되고 서인이 재등장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肅宗實錄 6年 3月 28日, 29日》 《燃藜室記述 卷34 庚申大黜陟許堅之獄》
[주-D036] 경신옥사(庚申獄事):
1680년 남인이 정권에서 축출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사건으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
[주-D037] 이태서(李台瑞):
1614~1680. 자는 공현(公鉉)이다. 1680년 허견의 역모에 연루되어 장폐(杖斃)되었다. 《肅宗實錄 6年 4月 10日, 17日》 《燃藜室記述 卷34 庚申大黜陟許堅之獄》
[주-D038] 사형수의 난언(亂言):
오정창(吳挺昌)이 허견의 역모에 가담한 혐의로 추국을 받던 도중 이원정이 애초에 복선군 이남과 깊은 친분을 유지하였고 이남의 복심 노릇을 한 조성(趙䃏)에 대해서도 “쓸 만한 사람[可人]”이라고 말하였다고 진술한 것을 말한다. 《歸巖集 卷12 家狀》 《肅宗實錄 6年 閏8月 3日》
[주-D039] 정상 지화(鄭相知和):
정지화(1613~1688)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예경(禮卿), 호는 남곡(南谷)이다. 당시 경신환국으로 좌의정에 임명되어 허견의 옥사를 처리하는 일을 맡았다.
[주-D040]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1462~1538)로,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시호는 문익이다. 이원정이 허견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을 당시 좌의정으로 있던 정지화의 5대조이다. 정광필은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 당시 영의정의 신분으로 조광조(趙光祖)의 사사(賜死)를 극력 반대하다가 영중추부사로 좌천되기도 하였는데, 이원정은 이 일을 염두에 두고 정지화에게 정광필을 거론한 것이다. 《鄭文翼公遺稿 有明朝鮮國……贈諡文翼鄭公神道碑銘》
[주-D041] 어떤 자:
정지화와 함께 경신환국으로 정계에 복귀하여 우의정으로 임명된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을 말한다. 《歸巖集 卷12 家狀》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이다.
[주-D042] 지난날의 일: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말한다.
[주-D043] 김상 덕원(金相德遠):
기사환국으로 우의정에 임명된 김덕원(1634~1704)으로,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장(子長), 호는 휴곡(休谷)이다.
[주-D044] 애도와 …… 것이다:
살았을 때엔 주위로부터 영예를 누리고 죽었을 때엔 사람들의 애도를 받았다는 말로, 이원정에 대한 숙종의 신원(伸冤) 조치로 인하여 이원정이 생전과 사후 모두 온전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을 말한다. 《논어》 〈자장(子張)〉에 자공(子貢)이 공자를 두고 “그분이 살아 계시면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기고, 그분이 돌아가시면 사람들이 슬퍼할 것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주-D045] 당인들이 …… 바람에:
1694년(숙종20) 폐비 민씨(閔氏)의 복위 운동과 관련된 갑술옥사(甲戌獄事)를 계기로 남인이 실각하고 노론이 재집권하자, 그해 8월 지평 최중태(崔重泰) 등이 이원정의 복구된 관직을 재차 삭탈해 줄 것을 논계(論啟)한 일을 말한다. 《肅宗實錄 20年 8月 19日》
[주-D046] 윤지완(尹趾完):
1635~1718. 이원정의 복관이 재차 논의되던 1712년 7월 당시 영중추부사로 있었다. 《肅宗實錄 38年 7月 8日》 자는 숙린(叔麟), 호는 동산(東山)이다.
[주-D047] 일찍이 …… 수록하였고:
이원정이 1678년 4월 원접사(遠接使)로서 의주에 갔을 때 청나라의 사신으로 온 손치미(孫致彌)가 이원정의 화섬(華贍)한 문장에 몹시 깊은 인상을 받아 본국으로 돌아간 뒤 《조선채풍록》에 이원정의 서문과 시를 수록한 일을 말한다. 《조선채풍록》은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켜 17세기 청대 문인들의 조선 시선집의 편찬에 가장 긴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는데, 현재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이원정은 〈송북사서(送北使序)〉란 글을 통해 당시 청나라 사신을 만나 시를 주고받던 전후 사정을 서술한 바 있다. 《歸巖集 卷6 送北使序, 卷12 家狀》 《이종묵, 17~18세기 中國에 전해진 朝鮮의 漢詩, 韓國文化 45집,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9, 20~22쪽》 《류정ㆍ김영진, 청인(淸人) 손치미(孫致彌)가 편집한 《조선채풍록(朝鮮採風錄)》에 대한 고찰, 溫知論叢 42집, 溫知學會, 2015, 364~366쪽》
[주-D048] 신해년:
대본에는 ‘辛巳’로 되어 있다. 문맥에 근거하여 ‘巳’를 ‘亥’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9] 게려(揭厲)의 은택:
두루 미치는 임금의 은택이란 말로, 임금이 신하의 공로를 표창하고 장려하는 것을 말한다. 게려는 《시경》 〈패풍(邶風) 포유고엽(匏有苦葉)〉에 “강물이 깊으면 옷을 벗고 건너고, 얕으면 옷을 걷고 건넌다.[深則厲, 淺則揭.]”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말로 물의 깊고 얕음을 가리키는데, 얕고 깊은 데 할 것 없이 은혜가 골고루 미쳤다는 말이다.
[주-D050] 대령(大嶺)의 …… 탄생시켰으니:
대령은 조령(鳥嶺)을 가리킨다. 조령의 장대한 기운을 받고 큰 신하가 태어났다는 말이다. 이원정이 조령의 남쪽인 영남에서 출생하여 훌륭한 신하가 된 것을 표현한 구절이다.
[주-D051] 목천(木天):
예문관의 별칭이다. 본래 당(唐)나라 비서각(秘書閣)의 드높고 장대한 모습을 형용한 말인데, 조선에서는 춘추관, 예문관, 홍문관 등 문한(文翰)을 담당하는 관청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는 이원정이 예문관 검열을 지냈던 것을 가리킨다.
[주-D052] 공이 …… 차림이었네:
영남의 고향 땅에서 3년간의 모친상을 마치고 1677년(숙종3) 조정에 복귀한 이원정의 행색을 말한 것이다.
[주-D053] 어찌 …… 있었네:
묵과할 수 없는 부당한 조치에 대해서는 준엄한 비판을 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를 포용하고 용서하려는 인자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이원정이 1675년 만과(萬科)와 체부청 설치를 치열하게 반대한 일 및 1677년 복제(服制) 개정의 문제로 고묘(告廟)의 논의가 제기될 때 송시열 등 반대편 세력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주장하며 고묘를 반대한 일을 말한다.
[주-D054] 누가 …… 으르렁대었나:
숙종의 오촌 외숙인 김석주가 남인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경신옥사를 일으킨 것을 가리킨다.
[주-D055] 나라에 …… 있어:
윤지완(尹趾完)을 가리킨다. 그는 경신대출척으로 죽음을 당한 이원정에 대해 복관이 재차 논의되던 1712년 7월 당시 숙종에게 이원정의 억울함을 주장하였다. 《肅宗實錄 38年 7月 8日》
[주-D056] 캄캄했던 …… 비쳤네:
원통한 일을 당하고서도 그 처지를 변명할 수 없어 답답하였다가 결국 임금의 은혜와 통촉을 입어 억울함이 해소되었다는 말이다. 엎어진 동이는 풀 길 없는 억울한 사정을 비유한 것으로, 《포박자(抱朴子)》 〈변문(辨問)〉에 “해와 달도 비추지 못하는 곳이 있고, 성인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어찌 이 때문에 성인이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천하에 신선이 없다고 하겠는가. 이것은 바로 삼광(三光)이 엎어진 동이 안을 비추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는 격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주-D057] 애도와 영예:
살았을 때엔 주위로부터 영예를 누리고 죽었을 때엔 사람들의 애도를 받았다는 말로, 이원정에 대한 숙종의 신원(伸冤) 조치로 인하여 이원정이 생전과 사후 모두 온전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을 말한다. 《논어》 〈자장(子張)〉에 자공(子貢)이 공자를 두고 “그분이 살아 계시면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기고, 그분이 돌아가시면 사람들이 슬퍼할 것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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