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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부흥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이 되라!/룻 2:1-13
권오서목사
성도 여러분, 부흥의 참된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장일까요? 아니면, 변화일까요? 저는 부흥의 참된 목적이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한다 할지라도 성도가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하면, 그런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교회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교인 수 늘리기에 급급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변화하는 곳입니다. 변화된 공동체가 아니라, 변화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럼으로 교회가 변화를 하지 않고 멈춰 있다면,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사람이 계속해서 들어와서 주님 앞에서 깨어지고 용서함 받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거룩해지고자 힘쓰는 곳입니다. 그럼으로 교회는 완벽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가끔 성도들간에 문제가 생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미성숙해졌기 때문입니다. 목사라고 완전할 수 없고, 장로라고 완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부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부흥을 다른 말로 하면, 변화 혹은 성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로 이 "변화"에 대한 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변화가 왜 필요합니까?
먼저, 변화의 필요성을 말하기 전에, 변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자 합니다. 변화가 무엇입니까? 변화는 성숙케 되는 것(maturation)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자질 등이 완전히 발현(發顯)되는 것, 충분히 성장하는 것, 결실을 맺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적인 표현으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가 자신의 의지적인 노력으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가면서 자신의 뜻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자 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때로 어려운 순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는 그러한 어려운 순간이 놓여진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할 때 일어나며, 결국 이러한 과정을 거쳐 보다 견고한 신앙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그럼으로, 변화가 필요한 이유는 보다 견고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의 인생을 잘 보세요.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과의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완전한 신앙에 이른 사람은 없습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으라는 음성을 듣기 전에도 수없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기적을 수없이 보면서도 예수님이 누군지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변화의 필요성을 알고 그 변화를 수용함으로 해서, 그 누구보다도 굳건한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현실에 만족하여 안주하려고 하는 사람은 변화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변화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크게 쓰시고자 할 때,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변화의 필요성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변화될 수 있는 사람,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사람 -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크신 뜻을 보이십니다.
2. 어떤 사람이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룻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죠? "룻"하면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아들을 두신 분이시라면, 우리 "맏며느리로 삼았으면"하는 그런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또, 뭐가 생각나십니까? 그렇죠!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간 이방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룻은 모압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간 세 여인 중에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룻은 메시야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성경에서 룻과 같은 역전 인생을 산 사람은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생각해 보세요. 룻이 얼마나 비극적인 인생을 살아야만 했습니까?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을 잃었습니다. 자신이 살던 고향 땅이 모압을 떠나 이방인들을 개 취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살아야 했습니다. 이삭이나 줍고 하루 하루 연명하면서 살아야 할 운명을 가진 여인이 룻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그녀가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이 룻이라는 이방 여인을 택하셔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는 준비를 하신 것일까요? 룻이 도대체 어떠한 사람이었기에 그런 놀라운 축복이 일어난 것일까요?
⑴ (먼저), 룻은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친절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요즘 TV 프로그램 중에 이용식 씨와 이다도시가 나와 대한민국 친절 시민을 선정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그들의 배려가 일반인보다는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특별하다"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들의 친절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방 가게 주인인 어떤 사람은 노숙자같이 생긴 사람이 빵을 몰래 먹자, 그를 내쫓기보다, 오히려, 빵을 챙겨줘서 보내더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 것을 몰래 훔치면 아무리 그가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친절하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편안할 때, 내가 기분 좋을 때 친절한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힘들 때, 기분이 나쁠 때, 괜히 짜증이 날 때에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힘들 때, 내가 어려울 때 남을 배려할 수 있는 것 - 그것이 참된 친절입니다. 그런데, 룻이 바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물론 룻과 나오미는 남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룻은 얼마든지 나오미와 남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요? 나오미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까? 나오미는 아들이 죽자 며느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먹여 살릴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여자 셋이 산다는 것 -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니, 돌려보내려는 것-이해가 되지요. 그런데, 그때 룻이 뭐라고 말합니까? "어머니, 나로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의 되십니다"라고 고백하며, 끝까지 나오미를 쫓아 베들레헴으로 가겠다고 나서지 않습니까? 그뿐입니까? 베들레헴에 와서는 어떻게 합니까? 그녀는 "어머니, 내가 이 곳까지 같이 좇아 왔으니, 어머니가 저를 먹여 살려야 합니다. 제가 이곳까지 어머니와 함께 온 것에 대해 고마워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시키기도 전에 먼저 "밭에 나가 일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룻이 왜 밭에 나가려고 한 것입니까? 단순히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밭에 나가려는 룻의 모습으로부터 그가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어머니는 모셨는지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친절입니다.
성도 여러분,
친절하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내 상황이 비극적이라 할지라도, 견뎌내기 힘든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힘들면 다른 사람도 힘듭니다. 내가 쉬고 싶으면 다른 사람도 쉬고 싶은 것입니다. 서로 서로 배려하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춘천중앙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⑵ 룻은 근면한 사람이었습니다.
"룻이 근면한 사람이었다"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2장 7절입니다.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성도 여러분,
룻이 어떻게 일했다구요? 아침부터 와서 잠시 쉰 이후에 계속해서 일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점심 먹는 시간 빼고는 아침 일찍부터 나와 계속해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간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지금 룻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그의 일생일대에 가장 비극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남편을 잃었습니다. 고향이 아닌 타향살이를 해야 합니다. 그것도 이방인을 싫어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생활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룻의 처지가 되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룻과 같은 비극적인 상황이 되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IMF 체제 당시 많은 아버지들이 집을 나가고 심지어 목숨을 끊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극도의 비극적인 상황을 만나게 되면, 자신이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삶을 포기한다거나 체념해 버리고 맙니다. 룻도 충분히 그럴만한 소지가 있었습니다. 룻의 처지는 IMF 체제를 살았던 아버지들의 상황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가 열심히 근면하게 살았다는 것-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위기를 만나더라도, 인생의 고비를 만나더라도 일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결코 멈춰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세상 살면서 힘든 일 한 번도 안 겪고 살 수 있겠습니까? 한두 번쯤은 인생의 위기를 만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닙니까? 인생의 위기 때마다 포기하고 체념한다면 어떻게 자신의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근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게으른 사람을 쓰지 않습니다. 성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해내는 사람을 쓰십니다. 힘들다고 꾀를 부려서는 안 됩니다. 성실하게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의 우리에게 최상의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⑶ 룻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룻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아스가 보게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일꾼에게 그녀가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일꾼은 그녀가 어느 집 사람이여,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모른다며 그녀를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그녀에게 엄청난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다른 밭에는 가지 말고 자신의 밭에서만 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고정 수입이 보장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 아닙니까? 안정된 직장을 얻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뿐이 아닙니다. 보아스는 일꾼들로 하여금 룻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목이 마르면 일꾼들이 먹는 물도 같이 마실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한 마디로 특별대우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룻이 어떻게 합니까? 10절 말씀입니다.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성도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당신은 유대인이요, 나는 이방 여인입니다. 당신들이 멸시하는 이방 여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배려해주다니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나는 그만한 혜택을 누릴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룻은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옳거니, 잘 됐다. 이 얼마나 잘 된 일인가?"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까? 겸손한지 그렇지 않은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친절을 베풀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호의를 받을 때 어떻게 합니까? 룻과 같이 자신은 그만한 호의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반면,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상대방의 호의를 이용해 자신의 형편을 개선시키려는데 이용합니다.
성도 여러분,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신다(시149:4)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사람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을 것이라(습 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하세요. 겸손해야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⑷ 룻은 감사할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참으로 선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칭찬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그러자, 룻이 뭐라고 반응합니까? 13절입니다. "룻이 가로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지금 우리가 읽은 성경은 마치 룻이 보아스에게 뭔가를 구걸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표준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표준 새번역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룻이 대답하였다. '어른께서 이토록 잘 보살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른께서 거느리고 계신 여종들 축에도 끼지 못할 이 종을 이처럼 위로하여 주시니, 보잘것없는 이 몸이 큰 용기를 얻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룻이 지금 자신의 처한 상황, 특별히 베들레헴에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감사할 수 없었더라면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보시오. 나도 모압 땅에서 살 때에는 그럭저럭 살았던 사람이오. 당신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아도 나는 잘 살 수 있소. 그러니, 내 걱정 말고 당신 할 일이나 하시오."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룻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자신이 지금은 천한 하녀 정도로 취급받으며 살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받아드릴 수 있었고 감사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환경의 좋고 나쁨이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정말, 감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어느 때나, 어떠한 상황에서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친절, 근면, 겸손, 감사는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부흥을 경험하고도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성도가 있습니까? 게으른 성도가 있습니까? 겸손한 삶을 살지 못하는 성도가 있습니까? 감사할 줄 모르는 성도가 있습니까? 부흥을 경험하고서는 변해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친절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근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변화된 사람들의 삶을 잘 보세요. 공통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은 결코 변화를 추구할 수 없습니다. "변화"라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오른 세 명의 제자-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산에 올라갔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졌습니까?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았어요.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로 하여금 여기 초막 셋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성도 여러분,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현실이 좋으니까, 거기에 안주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하십니까?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도들 중에는 부흥을 경험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오해인지 아십니까? 부흥을 경험하게 되면, 속된 말로 너무 지나치게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러다보면, 세상에서 비웃음거리가 되고, 결국에는 외톨이가 되고 왕따가 되어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럼으로, 부흥의 시기에 어떤 사람이 변화된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히 크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변화된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룻이 가장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변화를 추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확신이 어디에 나와 있습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렸는데, 다시 한번 성경을 찾아봅니다.
룻기 1장 16절입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무슨 뜻입니까? "어머니, 하나님께서 이제껏 지켜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 아닙니까? 룻은 신앙생활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불과 10여 년 정도 밖에 안 되었습니다. 어머니 나오미에 비하면 얼마 안 되는 짧은 신앙생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철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만이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상황을 만나더라도 그 비극적인 상황을 완전히 새로운 상황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사람으로 쓰임받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⑵ 불행을 사명으로 바꿀 줄 압니다.
참된 부흥을 경험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자신의 불행을 사명으로 전환시켜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경험이 없기까지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어려운 순간과 맞닥뜨려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해결해가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의 방식에 따라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기도만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불행이 닥치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방법을 앞세워 해결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똑같은 불행이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려야 합니다. 나오미를 보세요. 나오미가 두 아들을 잃자 며느리를 자신들의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나오미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룻을 통해서 어떻게 역사하십니까? 보아스를 만나게 합니다. 보아스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뿐입니까? 보아스와 룻에게서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이 태어나게 하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불행의 순간, 비극적인 순간에 사명을 깨닫고자 할 때, 나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 당신의 방법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이루어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정 리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부흥의 참된 목적은 변화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변화될 수 있습니까? 친절한 사람, 근면한 사람, 겸손한 사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서 변화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도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또한 변화할 수 있는 사람만이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사명을 발견하고, 사명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춘천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부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변화하는 삶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처한 삶의 자리에서 변화를 이끌어 냄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보다 확장시키는데 쓰임받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