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늘 형제회 가입과 축출>의 줄거리:
'형제단'이란 어떤 종교이든지. 기성 교단의 제도화된 형식주의와 영적인 생명력이 사라지고 조직이 부패할 때마다 이에 반발하여 순수성을 지키자는 의도로 생기는 단체들이라는 성격이 강합니다. 그런데 뿌리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추종자들 전체를 형제라고 지칭하셨습니다. 이 본래 형제회 가입과 축출의 기준을 알아봅니다.
하늘 형제회 가입과 축출
(마태복음 18:15~17)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늘 형제회 가입과 축출>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늘 형제회 가입과 축출’
형제단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는 모라비아 형제단, 보헤미아 형제단, 성령 형제단, 자유심령 형제단 등이 유명하였습니다. 형제단이란 기성 교단이 형식주의에 치우치거나 영적인 생명력을 잃고 조직이 부패할 때마다 이에 반발하여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의도로 생겨난 소규모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도에서 형제단이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됩니다만 오늘 우리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형제회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로 하겠습니다. 형제회는 기성 교단에 문제가 있을 때만 등장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형제단의 뿌리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추종자들 전체를 형제라고 지칭하셨습니다. 이들을 일반적인 의미의 형제단과는 구분되는 의미에서 형제회라 불러보기로 합니다. 이러한 형제회를 교인이라고 불러도 상관은 없으나 형제라는 말이 지니는 친밀하고도 감사한 느낌을 살려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형제회에 가입하고 머무를 수 있는 사람과 축출되는 사람을 가려내는 기준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최근에 있었던 일화를 하나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목사님과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언제부터인가 목사님들의 모임에서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십자가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대화의 분위기를 어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들이 모여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고 여쭈었더니 가족들과 여행을 가거나 여가를 보낸 것 등의 사사로운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물론 교회에 관련된 이야기도 합니다. 교인수를 늘리는 방법, 당회에서 장로님과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 교인들로부터 전해들은 덕담 같은 것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활발하게 이야기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로 어떻게 살았는가를 간증하고자 하는 분은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목사님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큰 교회에 출석하는 분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교회 내에 구역이나 목장이라고 불리는 여러 소규모 모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임들은 형식상 예배로 시작되게 됩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나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려고 하면 기피하고 오히려 이단이라도 된 듯이 쳐다본다고 합니다.
구역예배가 끝나고 하나님 이야기가 더 하고 싶어서 했을 뿐인데 이단처럼 여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어느 날 집사람과 함께 시장에 갔다가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걷다보니 말쑥하게 차려입으신 아주머니께서 “어머니 하나님에 대해 아십니까?”라고 물어왔습니다. 제가 그 분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고 소리를 치자 이분이 많이 놀랐던 것 같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시하고 지나칠 뿐이지 굳이 화를 내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면 이단 취급을 당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관심사를 가지고 시장을 걷던 사람에게 불쑥 나타나서 “어머니 하나님에 대해 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누구나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우리가 속한 교회모임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일들에 관심이 쏠려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이야기를 하자니 분위기가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단들은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길에서도 전도를 합니다. 한편 교회 모임에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는 모습 또한 그들에게는 마치 이단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어머니 하나님을 찾는 이단도 문제이지만 대형교회의 구역모임 속에도 이단은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박국서 3장 17~18절에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쌓여서 몸살이 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의 모임에서 하나님 이야기는 도외시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단이 아니면 무엇이 이단이겠습니까?
본문 15절을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우리는 개역개정 성경의 말씀을 사용하였습니다만 개역한글 성경에서도 같은 표현이 나타납니다. 한편 불가타(Vulgata) 라틴어 역본에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범하거든…”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한글 성경의 공동번역이나 새번역에서도 이와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앞뒤 맥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영적사상과 의미는 보다 명백해집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결코 철학적 표현의 단편이 아닙니다. 21절 이하를 보면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나에게 죄를 범하는 경우에 대해 재차 묻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15절에 나타난 범죄는 나에 대한 범죄가 아님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요 어휘는 “형제”입니다. 21절의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22절에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대답하십니다. 형제라는 신분에서 범한 잘못이라면 계속해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15~17절을 보면 세 번 권고해서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형제의 자격을 박탈하라는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본문 15~17절에 나타난 범죄는 나에게 손해를 끼친 범죄가 아닙니다. 내가 보는 앞에서 형제의 자격됨이 의심스러운 말이나 행동하는 것을 범죄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럴 때 권고를 받아 돌이킨다면 형제로 여길 것이나 그렇지 못하다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것입니다. 한편 21절부터 나타나는 형제가 나에게 손해를 입게 한 범죄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쳤다고 해서 그의 신앙을 의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형제가 범한 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앞서 예수님께서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죄는 곧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원인입니다.
형제는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다시 말해 돌이켜 어린 이이와 같이 된 사람들이 형제입니다. 그런데 형제인줄로 알았던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권고하여 돌이키게 하고 그래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남으로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형제가 범하는 죄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상태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세우신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음을 지난 시간에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요새 우리나라에서는 집안에서 어린 아이가 왕입니다. 최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는 인구를 계수를 할 때에 어린 아이는 여자와 함께 포함시키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어린 아이는 존재감이 없습니다.
이때에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는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누가 더 하나님 앞에서 존재감이 큰지 비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를 세우시고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크고 작음을 따지기 전에 어린 아이처럼 되지 못하면 천국에는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사회적인 존재감이나 자기 존재감이 없습니다. 오직 부모만 있으면 기쁘고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존재입니다. 고대광실에서 태어난 아기든 달동네에서 태어난 아기든 자신이 처한 환경을 바라보며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오직 부모만이 기쁨과 만족과 행복의 대상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바로 돌이켜 어린 아이처럼 되라는 말씀의 의미였습니다. 마음의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 이외의 대상에 대해서는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어 갈수록 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함을 통해 존재감을 찾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마음을 채워 기뻐하고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삶으로부터 돌이켜야만 합니다. 마치 부모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는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는 상태를 향해 의도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린 아이로 돌아가려는 자들이 본문에서 언급된 형제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형제들은 천국에서 거목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반면 예수님의 형제가 될 수 없다면 잔챙이로 여겨지고 천국에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나사로는 세상에서는 거지였으나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았기에 천국에 들어가 아브라함 품에 안기는 거목으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나사로는 비유 속의 인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신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는 것 외에는 다른 기쁨이 없으셨습니다.
파파보이 혹은 마마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성하였어도 어린 아이처럼 부모의 지시에만 따르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파파보이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을 예수님은 형제라 일컬으셨습니다.
다만 그 형제로 여겼던 자가 초심을 잃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때에 돌이키기를 권고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돌이킨다면 그 형제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 됩니다. 15절 하반부에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와 같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 범죄는 나에 대해 개인적인 손해를 입힌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쳤다고 형제를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취급하여 천국에 못 갈 자로 여긴다면 이것이야 말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어린 아이와 같지 않고 어른 같아지는 죄를 지었다면 권고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가치를 통해 존재감을 얻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돈, 권력, 건강, 학벌, 외모, 명품, 인기 등의 가치를 통해서 존재감을 찾고 그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얻고자 합니다. 설령 부모가 자녀를 통해 존재감을 찾고, 부부가 배우자를 통해 존재감을 찾고자 하는 것조차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와 같이 되기를 버린 범죄입니다.
형제로 여겼던 사람에게서 이러한 범죄를 발견하였다면 세 번을 권고하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15절에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곧 “지금 당신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 길에서 벗어났습니다. 다시 어른이 되는 길로 가고 있으니 돌이키십시오.”라고 가르쳐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권고할 수 있는 내용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만 있으면 기뻐할 수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만으로 기뻐해야만 합니다. 하늘 아버지와 예수님께 거목으로 여겨질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가치를 버린 사람입니다. 세상의 가치로 기뻐하고 만족하려 한다면 천국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이를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6절을 보면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확증하게 하라는 표현이 다소 난해합니다. 예를 통해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형제가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제대로 된 신앙의 소유자라면 우울해 할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 뿐입니다. 세상의 일들에 가려서 하나님을 뚜렷하게 느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두세 사람이 가서 권고함으로 그의 마음에서 신앙을 되살려 줄 수 있습니다. 돈 문제를 비롯한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마음이 기뻐질 수 있다면 그것은 천국을 갈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혼자서는 안 되더라도 두 세 사람이 함께 믿음을 보여준다면 돌이키기도 쉬워집니다. 다들 돈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하나님 한 분 계심을 믿음으로써 마음이 기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음을 간증하고 확증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예배당에서 모임을 이루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즘 모임에서 이러한 모습은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배우자 때문에 걱정이 있는 형제가 있다면 모임에서 권고를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배우자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임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기쁨과 만족이 생겨날 때에 배우자를 긍휼히 여길 수도 있음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배우자 또한 하나님을 믿는 형제로써 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세 사람이 믿음으로 권고할 때에 다시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두 세 사람이 권고하여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7절을 보면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말 즉 언어는 가치가 부여된 소리입니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성공이라는 말은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다.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성공인 학생에게는 곧 입학입니다. 마피아에게 성공이라는 말은 경찰에 걸리지 않고 마약을 수입해서 파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에 따라 같은 말이라도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할 수 있는 말이란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상태에서 나오는 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쁨과 만족과 행복의 유일한 조건으로 인정하고 믿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권고는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교회에 남을 것인지 세상으로 돌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라는 내용이 됩니다.
그러나 교회의 권고를 듣고도 마음은 여전히 돈 문제가 해결되어야 기쁠 것 같습니다. 명품을 사야 할 것 같고,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할 것 같고 노후가 보장되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끝내 버리지 못한다면 형제라 부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으로 가기로 결정되어버린 상태입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나에게서도 형제에게서도 이러한 범죄는 다반사로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대신 세상으로 기쁨과 만족을 얻고자 하는 시도는 우리의 삶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납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는 것조차 범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배우자를 더 사랑했으나 애초에 배우자는 온전한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결국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끼며 이혼을 하게 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결혼이란 서로에 대해 마음을 죽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권고 또한 이러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서로가 없어도 전혀 상관이 없을 만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로 만족할 때까지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주어지고 온전한 가정의 모습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회사에서는 승진이 우리의 마음을 잡아 끌어당깁니다. 그러나 승진을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여기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가 아닌 어른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승진이 되어야 기쁘고 만족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서는 결코 천국에 갈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이라면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만으로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도록 승진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기를 반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이 형제의 삶이고 이것을 권고해 줄 수 있는 것이 형제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될 때에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덕이 되고 은혜가 되고 천국의 빛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예배당에서는 이러한 형제의 권고 자체를 들어본 적도 없고 권고할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삶을 알았다면 실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형제회를 일으켜 세우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땅에 있는 동안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으로 기쁘고 만족하는 형제회에 가입하여 다른 형제들과 더불어 기쁘고 행복하게 지내게 해주시되, 범죄 하는 형제가 있다면 진심어린 권고를 통해 탈락하지 않고 같이 천국으로 가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