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게(臨終偈)
光陰七十載(광음칠십재)平平仄仄仄
脫却三千業(탈각삼천업)仄仄平平仄
忘我歸眞處(망아귀진처)平仄平平仄
從容一理平(종용일리평)仄平仄仄仄
<龍岳慧堅>
칠십 년의 세월동안
삼천업 쌓인것 오늘 벗으려 하네
내가 없는 참된 곳으로 돌아가니
일리 평등한 적적요요의 세계일세.
이 게송(偈頌)는 근래(近來) 선지식(善知識)인 용악혜견(龍岳慧堅1830~1908)스님의 임종게(臨終偈)다. 임종게는 스님들이 입적(入寂)하려고 할 때 남긴 시(詩)다. 오언절구(五言絶句) 평기식(平起式) 게송(偈頌)이다. 압운(押韻)은 업(業)은 입성(入聲) 엽통(葉統)의 운족(韻族)과 평(平)은 거성(去聲) 경통(敬統) 운족(韻族)으로 작게(作偈)하였으나 평측(平仄) 운(韻)은 맞지는 않다. 용악혜견(龍岳慧堅)스님은 이씨조선(李氏朝鮮) 건국당시(建國當時) 창건(創建)된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에 살면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유포(流布) 원력(願力)을 세우고 남방(南方)으로 거처를 옮겨 금강경(金剛經) 십만송(十萬誦)을 암송(暗誦)하며 정진(精進)하는 중에 치아(齒牙) 사리(舍利) 일과(一顆)가 나왔다. 용악혜견(龍岳慧堅)스님의 나이 18살 되는 해부터 꿈에 오산(梧山) 수암사(水巖寺)에서 맑은 차(茶)를 마시는 꿈을 해마다 똑같은 날짜에 꾸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오산(梧山) 수암사(水巖寺)에서 객승(客僧) 한분이 방부(房付)를 드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간 반복해서 꿈꾼 내용을 묻게 되었다. 오산에 수암사(水巖寺)라는 절이 있습니까? 객스님이 제가 있던 그곳이 바로 오산 수암사 절입니다. 꿈에 봤던 수암사 경내를 자세하게 말을 하니, 스님께서도 수암사에 사셨습니까? 꿈에 봤던 내용을 듣고 막 방부 드린 객스님과 놀란 표정이다. 스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상세하게 수암사에 대해서 아십니까? 혹시 수암사에 사셨습니까? 아니요, 산적은 없고 꿈에 본 절입니다. 내가 꿈꾼 모월모일(某月某日)은 수암사에서는 무슨 일이 있습니까? 객스님이 그날은 수암사(水巖寺)를 중창(重創)하신 스님의 기제사(祈祭祀) 날입니다. 그러면 그 스님이 살아생전에 무슨 원력(願力)을 갖고 수행했나요? 그 스님께서는 해인사(海印寺)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목판(木板)을 찍어 책(冊)을 만들어 유포하는 것이 소원(所願)이었다고 합니다. 용악(龍岳) 스님의 원력(願力)도 팔만대장(八萬大藏經) 인경불사(印經佛事)인데 전생(前生)의 원력(願力)이 금생(今生)에서도 이어짐을 알게 되었고, 평생 소원을 위해서 66세가 되던 해에 석왕사(釋王寺)에서 나와 남방(南方) 통도사(通度寺)로 거처(居處)를 옮겨 인경불사(印經佛事) 원만성취(圓滿成就) 기도를 했다. 100일 기도를 마친 용악스님은 걸어서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로 18일이 걸려서 해인사에 도착해서 100일 기도를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드렸다. 원력기도(願力祈禱)의 정성으로 원력(願力)이 원만하게 성취(成就)가 되어서 1898년 5월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인출(印出)을 허가(許可)하는 고종(高宗)의 윤지(允旨)가 내려왔다. 용악스님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4질(帙)을 인출(印出)해서 3질은 삼보(三寶)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사찰(寺刹)에 나누어 주고 나머지 1질은 당시 강사(講師)스님들이 나누어서 독송(讀誦)하도록 했다고 한다.
통도사(通度寺) 구하(九河) 스님께서는 용악당사고집(龍岳堂私藁集) 만들고 서문을 쓰셨는데, 용악스님은 석왕사(釋王寺)가 출가(出家) 본사(本寺)이고 금강경(金剛經) 독송(讀誦)으로 수행 정진(精進)하신 지혜(智慧)가 출중(出衆)하고 원력(願力)이 장대하여 조정(朝政)으로부터 물자(物資) 지원(支援)을 받아 숙원(宿願) 불사(佛事)인 대장경(大藏經) 인출(印出) 원력(願力)을 다 마치셨다. 1908년 2월15일 이날은 부처님 열반재일(涅槃齋日) 날 용악스님께서는 목욕제계(沐浴齊戒)하고 위의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入寂)하셨다. 용악스님의 행장은 함경도(咸鏡道) 함산(咸山) 출생(出生)이고, 속성(俗姓)은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13세에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로 출가하고 석왕사(釋王寺) 총섭직(總攝職) 지금의 주지(住持)를 했다. 인경불사(印經佛事)를 할 때 왕실(王室)의 지원(支援)과 함께 남도관찰사(南道觀察使), 언양군수(彦陽郡守), 양산군수(梁山郡守) 등 지방관료(地方官療)까지 후원금(後援金)을 내는 등 국가적(國家的)인 사업(事業)으로 진행됐다. 동원(動員)된 인력(人力)만 인경승(印經僧) 1000명과 인부(人夫) 1만명 이었다고 한다. “용악스님은 이후에는 양산 통도사 장경전(藏經殿) 옆에 주석처(主席處)를 정하고 금강경(金剛經) 독송을 하며 지냈다. 통도사 황화각(皇華閣) 상량문도 용악스님이 직접 작성한 것이다. 스님은 100년 전인 1908년 2월15일 양산 통도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79세. 법납 65세. 1901년 구하(九河) 스님이 용악스님의 글을 모아 <용악당사고집(龍岳堂私藁集)>을 펴냈고, 1993년에는 연관(然觀)스님이 번역하고, 석정(石鼎)스님이 발행한 <용악집>이 나왔다. 동국대학교 도서관에는 용악스님의 간찰(簡札, 편지)이 보관되어 있다.”
용악스님 자료 행장으로 보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인경불사(印經佛事)는 환생(還生)을 통(通)하여 완성(完成)하는 것으로 나온다. 화옹이 몇 년전에 출판한 돌 계집이 애를 낳는구나! 책에서 이 고승(高僧) 환생설화(還生說話)를 칠언시구(七言詩句)로 찬탄(讚嘆) 시(詩)가 있다. 석왕사 스님 용악스님 해마다 같은 날 꿈을 꾸는데, 수암사 절에가서 대중공양을 받고 오네, 깨달고 보니, 전생에 그 절을 중창한 공이라네.<釋王寺僧龍岳師 每年同日夜作夢 水巖寺應供養了後前生重創功> 자료를 찾아보니, 탄우음(歎偶吟)이란 칠언율시(七言律詩) 팔행(八行) 게송(偈頌)도 보인다. 머리도 얼굴도 바꾸어 버린 한없는 세월 두레박처럼 오르고 내리며 타향에 떠돌았네, 앞에서 보면 금 생도 많은 겁 흘러왔고, 뒤로 보면 지금 산 사람도 역시 죽은 사람일세, 부자 집은 천 입으로 잘살아도 불만이고, 가난한 집은 한 몸이어도 긴 가난 한탄이네, 전생의 일을 깜깜하게 기억 못 하고 막연하게 어쩔 수 없이 떠돌 뿐이네<改頭換面無窮日 飄往他鄕似水輪 從前今劫來多劫 視後今人亦故人 富宅猶嫌千口富 貧家長恨一身貧 冥然不記前生事 杳杳茫茫奈也巡> 용악집에는 자경(自警)이란 게송(偈頌)도 있다. 내 지금 주인에게 묻노니, 겁우 남풍이 얼마나 부침했던가? 부처님 경전 글 누가 다 보았는가? 화장세계에서 내가 다분히 노닐었네, 삼천의 한 세계는 살아온 길이요, 칠십구년은 죽어갈 때인데 그 가운데 불멸의 성을 알고자 하면 진여의 적멸 도량에 머물러야 하네, 뜻과 원력이 산과 바다 같아 크나큰 깨달음의 성을 넘어야 하네<吾今借問主人者 劫雨藍風幾沒浮 貝葉經文誰盡覽 華藏刹海我多游 三千一界生來路 七十九年死去秋 欲識箇中常住性 眞如寂滅道場留 志願如山海 期超大覺城> 용악스님의 자경문(自警文)은 평생을 경책하고 다지고 다진 원력(願力)의 당금질 같다. 오늘은 근래 선지식 중에 석왕사(釋王寺)스님인 용악스님의 팔만대장경 인경불사 환생 설화를 반추해보았다. 여여법당 화옹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