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3.사순 제1주간 화요일 이사55,10-11 마태16,7-15
주님의 기도
- 본질적 삶의 깊이를 위한 기도 -
‘진짜 위기는 시작도 안했다?’기사에 이어 ‘<뉴노멀-미래>인간의 책임, 과학자의 책무’(한겨레) 일부 내용이 충격적입니다. 현재가 정말 얼마나 위기의 시대인지 실감케 합니다. 코로나 역시 그의 반영입니다.
‘그러는 동안 인구는 50년 새 두배가 됐다. 재화-서비스 생산량은 70년새 13배가 됐다. 편리한 화석연료에 중독돼 재생 능력을 뛰어넘는 수요가 만들어졌다. 인간의 생태발자국은 지구 1.7개가 있어야 감당할 수 있다. 미래의 것을 앞당겨 썼다는 얘기다. 인간이 생태를 대상으로 ’돌려막기식 사기’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덴마크 연구진이 계산해보니 내일 당장 인류가 사라져도 자연이 원상태를 회복하는 데는 500만년이 걸린다고 한다.‘
하나뿐인 하느님의 참 아름다운 선물, 공동의 집인 지구의 병이 너무 깊다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인류 모두의 탐욕이 원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게 모르게 지구에 공범입니다. 지구에 선물이 아니라 크나큰 짐이, 암적 존재가 된 불치의 병같은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즘은 먹는 것이, 사는 것이 죄라는 생각도 듭니다. 무수히 양산되는 쓰레기 때문입니다. 정말 쓰레기를 적게 내고 무공해의 삶을 사는 이가 잘 사는 삶이라는 생각이 절실합니다. 1900년 이후 인공물은 20년마다 두배로 늘었고, 한해에 플라스틱 500만-1300만톤이 바다로 흘러가고 농약 400만톤이 땅에 뿌려집니다. 지구 표면이 참 많이 오염되어 더럽혀 졌습니다.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물음이 절박해 집니다. 답은 단하나 우리 인간의 근원적 내적혁명뿐입니다. 참으로 기도와 회개뿐입니다. 사순시기 정말, 기도와 회개, 정화의 시기, 내적혁명의 시기가 되어 깨어 살아야 되겠습니다. 쓰레기 천지 세상이 되니 쓰레기 같은 삶이 되었고 쓰레기 같은 글도 말도 넘치는 공해의 시대입니다.
하여 기도중의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지구위기, 코로나19에 대한 근원적 답은 주님의 기도의 공부와 실천 하나뿐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단순하게, 겸손하게 하고,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하는 유일한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전생애를 요약한 주님의 노하우가 담긴 주님의 기도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기도의 핵심 원리가 담긴 말씀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성령에 영감 받은 경우가 아니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우리를 회개하는, 겸손케 하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되나?’에 대한 근원적 답이 담긴 기도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와 삶이 압축된 주님의 기도입니다. 참으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대로만 살았다면 지구가 이토록 망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하느님 중심이 아닌 너무 인간 중심으로, 눈먼 무지의 탐욕 중심으로 살아온 자업자득의 업보입니다. 이사야서의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비와 눈을 닮은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요 말씀중의 말씀이 오늘 주님의 기도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우리 마음 땅에 뿌려지는 하느님 말씀의 위력을, 주님의 기도의 위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참으로 기도와 말씀이 우리 영적 삶에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기도 전반부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을 잊어 방황이요 혼란이요 길잃은, 눈먼 문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냥 막연하고 추상적인 종교의 하느님이 아니라 기도의 인격적 대상인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입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 모두가 아버지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라는 것입니다.
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알아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기위해, ‘아버지 하느님 사랑’, ‘아버지 하느님 공부’는 평생과제입니다. 교회뿐 아니라 인류 공동체의 일치도 아버지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가능합니다.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고 모두는 서로 형제자매가 되는 하느님의 한가정, 한식구가 되는 한가족 인류 공동체입니다.
하느님께 돌아가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 분수대로 사는 것이 회개와 겸손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잊고 인간 탐욕을 중심으로 살았기에 너무 망가진 하나뿐인 지구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이름이 빛나도록, 하느님의 나라가 오도록, 하느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우리 또한 아버지 하느님께 최대의 협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모든 삶의 잣대가 되어야 할 하느님의 이름,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입니다. 과연 ‘하느님이 원하시는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가.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가’가 궁극의 분별 잣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우리에게 필요한 본질적 청원 넷입니다. 우리 모든 삶이 이 넷안에 압축 요약됩니다. 참으로 단순소박한, 간소한 본질적 삶의 요소입니다. 먼저 일용할 양식입니다. 전반적으로 신뢰와 겸손으로 자기에게 꼭 필요한 일상의 전반에 걸친 최소한의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최대한 협조 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잘못한 이는 지체없이 용서함으로 하느님께 용서해주십사 간청하는 것이며, 무지와 탐욕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간청과 더불어 온갖 주의를 다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며, 무지의 악에서 구해달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난한 자의 기도입니다. 정말 하느님의 은총없이는 일용할 양식도, 용서도,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도, 악에서 구원도 불가능하다는 인간의 한계를 직시한 겸손과 신뢰의 고백이자 기도입니다.
새삼 기도와 노력의 원리는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진인사대천명의 자세입니다. 어제 읽은 ‘지극至極’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다육 한 점이 꽃을 피웠다.
아무도 몰래 살며시 이틀 잎을 열었다
다시 닫아버렸다.
어디에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천년 비바람과 일억 광년 빛이 섞였던 것.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갔는지
알 수 없다.
누구에게나 ‘그대’는 지울 수 없는 상흔
이 넓은 우주에서 이 짧은 찰나에
우리 이렇게 만났다 다시 처음처럼 헤어진 것만으로
기적이고 황홀이다.”-정한용(1958-)
기적같이 황홀한 우리의 하나뿐인 삶입니다. 참으로 평생 깨어 지극정성으로 주님의 기도를 공부하고 살 때 매순간 기적이고 황홀한 삶이겠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의 기도와 더불어 모시는 성체의 은총이 우리 모두 본질적 깊이의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