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8월이 되면 본 교단에서는 교역자를 위시하여 각 기관의 하기수양회를 개최했다. 그때까지 우리 교단의 교세는 교회 205개, 교역자 196명 정도였다. 1957년 수양회는 충남 보령군 웅포면 무창포에 있는 해수욕장에서 개최되었다. 7월 28일-8월 1일(R.A.), 8월 2일-6일(G.A.), 8월 12일-15일(전국교역자 수양회)에 각각 열렸다. 그보다 한 해 전에는 한미실행위원 연석회의에서 현지 무창포에 수양관을 건립하기로 하고, 대지 5천평을 확보하여 시공하기로 결의한 바 있었다. 임시시설로 천막을 치고 숙소 및 식당과 강의실 등을 꾸몄다. 전국에서 운집한 교역자는 120여 명이었다.
수양회는 총회 전도부에서 주관했고, 매일 3회씩(오전, 오후, 밤) 집회를 가졌다. 주강사는 본 교단 목사와 주한 선교사 가운데서 결정되었다. 그런데 집회 중에 돌연 태풍이 불어 밤중에 모두 뛰어나와 천막줄을 붙드는 소동이 일어났다. 다들 이게 무슨 징조냐고 웅성거렸다.
이번 수양회는 주목할 만한 중요한 모임이었다. 총회분열이 일어나기 19개월 전이었고, 총회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누적되어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집회중 임원회가 열렸다(총회장 안대벽, 부총회장 노재천, 한기춘, 총무 김용해, 전도부장 신혁균, 교육부장 이원균, 사회부장 최성업, 출판부장 한태경 제 목사, 재무부장 김길남 집사). 이 회의에서 정면으로 의견이 충돌했다. 특히 장일수 목사(직전 총회장)는 집중 공격을 받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고 마치 흑운이 덮쳐 오는 느낌이었다. 이 장면을 지켜본 사람이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앞날에 교단에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쉽게 감지했을 것이다.
이 모임에서 장목사는 왜 임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며, 전체 분위기를 어렵게 만들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장목사는 평소 초지일관 교단의 혁신을 주장해왔던 인물이었다. 문제는 혁신의 범주가 어떠했는가 였다. 그가 주장한 것들은 본 교단의 역사나 교리 측면에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장목사의 주장은 번번이 제지를 당해왔다. 반면에 침례교단의 역사와 교리 등에 관심이 없는 목회자들은 오히려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장목사의 주장에 동조했고, 그를 중심으로 규합하여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원로목사들이 염려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교단분규가 시작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장목사는 굳이 교단을 갈라지게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장목사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입장이 달랐다. 그들은 매번 총회 임원을 특정 인물들만 하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교권을 장악해보려는 생각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