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공철(南公轍) 1760년(영조 36)∼1840년(헌종 6). 조선 후기 문신 시호: 문헌(文獻) 勤學好問曰文。嚮忠內德曰獻。헌종 6년(1840) 증시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하고. 충성을 다하고 안으로 덕이 있는 것을 헌(獻)이라한다. 시장 없이 증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思穎)·금릉(金陵). 아버지는 대제학 유용(有容)이다. 1780년(정조 4) 초시에 합격하고, 1784년에 아버지가 정조의 사부였던 관계로 음보로 세마를 제수받았고, 이어 산청과 임실의 현감을 지냈다. 1792년에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이어 홍문관부교리‧규장각직각에 임명되어 《규장전운(奎章全韻)》의 편찬에 참여하면서 정조의 지극한 우대를 받았다. 초계문신에 선임되었으며, 친우이자 후일의 정치적 동지인 김조순(金祖淳)‧심상규(沈象奎)와 함께 패관문체를 일신하려는 정조의 문체반정운동에 지목되어 그뒤 순정한 육경고문(六經古文)을 깊이 연찬함으로써 정조치세에 나온 인재라는 평을 받았다. 정조 때에는 주로 대사성으로서 후진교육문제에 전념하였다. 순조 즉위 뒤 《정종실록》 편찬에 참가하였으며, 아홉번씩 이조판서를 제수받고,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807년(순조 7)에는 동지정사로서 연경에 다녀왔고, 1817년에 우의정에 임명된 뒤 14년간이나 재상을 역임하였으며, 1833년에 영의정으로 치사하여 봉조하가 되었다. 평소에 김상임(金相任)‧성대중(成大中)‧이덕무(李德懋)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독서를 좋아하였고, 경전의 뜻에 통달하였다. 구양수(歐陽修)의 문장을 순정(淳正)한 법도라 하여 가장 존중하였고, 많은 금석문‧비갈을 남긴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다. 순조‧익종의 《열성어제(列聖御製)》를 편수하였고, 저서로는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 자편의 시문집으로 《귀은당집(歸恩堂集)》‧《금릉집》‧《영옹속고(穎翁續藁)》‧《영옹재속고(穎翁再續藁)》‧《영은문집(瀛隱文集)》 등이 있다
승상 태학사 규장각학사 치사금릉 남공자 갈명, 이양빙의 전자를 모방하다. 유명조선국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치사 봉조하 금릉 남공 자갈명 당나라 광록대부 행 이부상서 상주국 노군개국공 안진경의 글씨를 집자하다.
공의 이름은 공철이고 자는 원평이니, 의령남씨는 신라 때 영의백을 지낸 남민을 시조로 한다. 아조에 들어와 재는 개국공신에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충정이다. 고조부는 용익인데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고 시호는 문헌이니, 문장과 충절이 있어서 네 조정에 걸쳐 명신이 되었다. 증조부는 정중인데 경상도관찰사를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한기인데 동지돈녕부사를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유용인데 형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고 시호는 문청이니, 문장과 명덕은 조야에서 태산북두처럼 우러러보았다.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정경부인에 봉해졌는데, 통덕랑을 지낸 석태의 딸이다. 공은 경진년(영조 36, 1760년)11월 16일 자시에 태어났다. 모부인께서 막 회임하였을 때 밤에 자면서 상제께 절을 하는 꿈을 꾸었다.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능히 스스로 책을 읽을 줄 알았다. 16세에 처음으로 고문 짓는 방법을 배웠는데, 창애 유한준은 그 책에 ‘소한유’라고 적었고, 문정공인 순암 오재순은 공의 글을 보고 평하기를, “한유의 문법에 구양수의 취지를 가진 문장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약관에 글을 지어가지고 태학사인 강한 황경원을 찾아가 뵈니, 황공이 말하기를, “고문이 세상에 끊어진 지 오래이니, 자네는 고문에 힘을 쓰게.”라고 하였다. 공은 국자시에 응시해서 합격하였고, 갑진년(정조 8, 1784년)에 문음으로 세자세마에 보임되었다가 6품으로 승진하여 산청군수와 임실현감으로 나갔다. 임자년(정조 16, 1792년)에는 인일제 대책에서 장원을 하고 전시에서 병과로 뽑히니, 임금께서는 내고취의 음악을 하사하는 동시에 일산을 펴고서 말을 타고 거리를 돌도록 명하였다. 그리고서 병조정랑에 제수하고 특별히 별겸춘추를 부여해서 상화조어연에 참석시켰다. 또한 임금께서는 공을 지목하기를, “이 사람은 풍의가 난새나 봉황 같으니 참으로 태평성세의 상서로운 인물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을 규장각직각과 지제교에 제수하였는데, 옥당을 거치지 않고 곧장 내각에 들어가는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임금께서는 공을 편전으로 불러보고 아홀과 조복 한 벌을 하사하였는데, 공은 이때부터 조석으로 임금을 모시고 국가 기밀을 의논하는 자리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홍문관 부교리 겸 중학한학교수에 제수되었으며, 사간원의 정언과 헌납으로 옮겼다가 응교로 승진하였고, 금위영에서 공을 불러다가 종사관으로 삼았다. 또 사복시정에 제수되었고, 규장전운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계축년(정조 17, 1793년)에는 통정대부로 승진하고 승정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으며 뒤에 여러 조의 참의에 임명되었는데, 한때 징토하는 일로 인하여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서 성균관 대사성을 겸임하였다. 을묘년(정조 19, 1795년)에는 임금께서 여러 각신들에게 이르기를, “근일에 권세를 부리는 요망한 것들이 근열에서 나오기 때문에 조정 관원 중에는 그에 연루된 자가 많은데, 유독 남모만이 워낙 깨끗하므로 진흙에서도 더럽혀지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또 전교하기를, “옥처럼 깨끗한 사람이다.”라고 하고는 공을 비변사 부제조에 임명하였다. 또 공의 문고를 가져오게 해서 읽어보고는, 어찰을 내려서 “문장이 우아하고 고결하며 고법을 취하고 있다.”라고 하며 포상하였다. 무오년(정조 22, 1798년)에는 가선대부에 발탁되고 금대를 하사받았다. 공은 여러 조의 참판과 여러 시의 제조를 역임하고, 다시 주사당상에 차임되어 이내 유사들을 관리하였으며, 또한 외직으로 나아가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공이 부임길에 오르자, 시를 지어줌으로써 총애의 뜻을 표시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는데, 연거푸 맡도록 명하였다. 경신년(정조 24, 1800년)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각신 다섯 사람을 뽑아 궐내로 들여보내 임금을 모시고 권강을 하도록 명하였는데, 공이 거기에 끼었다. 이윽고 본직으로 돌아와서는 도승지와 동지경연사에 제수되었다. 다시 부제학 겸 규장각 직제학에 제수되고 정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금상 2년인 임술년(순조 2, 1802년)에는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며, 갑자년(순조 4, 1804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광릉으로 돌아갔다가 3년상이 끝나자 조정으로 돌아왔다. 정(순조 7, 1807년)묘년에는 자헌대부로 발탁되어 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연이은 노고에 대한 상으로 숭정대부로 승진하고 판의금부사와 지경연사에 제수되었다. 정사로 연경에 갔을 때 청나라의 옥수 조강과 옥방 진희조, 그리고 형부주사 이임송은 모두 문장으로 나라 안에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공의 글을 보고는 모두 서문을 지어서 주었다. 조강의 경우는 “그 문은 경술을 기본으로 해서 노련하게 지어 법도가 있으니, 그 광채는 은은하고, 그 의미는 유연하면서도 심장하다. 존숭하는 바는 구양공이나 구차하게 자구에 합치되는 것을 구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구양공을 제대로 배운 것이다.”라고 하였고, 진희조의 경우는 “청조의 가야금 소리처럼 한 번 노래하면 세 번 감탄한다”라고 하였으며, 이임송의 경우는 “시는 중당을 배우되 그 참뜻을 흐리지 않았다.”라고 칭하였는데, 그들의 칭찬이 매우 드높았다. 공은 도중에서 이조판서에 제수되었고 그 뒤 무려 아홉 번이나 제수받았는데, 혹은 출사하기도 하고 혹은 출사하지 않기도 하였다. 이어서 예문관 제학에 제수되었고,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 그리고 지성균관사에 제수되었으며, 또 병조판서 겸 규장각제학에 제수되었다. 또 외직을 자청해서 서경유수로 나갔는데 원자유선도 겸직하였다. 임금께서 공을 자정전으로 들어오게 해서 유시하기를, “경은 조정의 노사숙유이니, 세자를 보필하고 인도하는 책임에 대하여 모름지기 마음을 다하라.”라고 하였다. 이어 의정부 좌참찬을 역임하였고, 중국 사신이 왔을 때는 관반사로 뽑혔다가 호조판서로 전직되고 세자빈객 겸 선혜청 제조와 주교사 제조에 제수되었다. 병자년(순조 16, 1816년)에는 보국으로 승진되고,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었다. 정축년(순조 17, 1817년)에는 특명으로 의정부우의정에 제수되었는데 유시하기를, “경은 예의 바르고 온화하니 여러 관리들의 모범이 될 만하고, 지조가 있고 욕심이 적으니 무너지는 풍속을 바로잡을 수 있오.”라고 하였다. 공은 매번 늙기 전에 치사하고 싶었으나 주상의 은혜는 더욱 융숭하고 자신은 또 중책을 맡고 있는 지라, 갑자기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용산과 광릉 사이에 정자를 지은 다음 매화와 국화, 그리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많이 심어 놓고 수시로 복건에 평상복 차림을 하고서 그 곳에 가서 산책을 하였으며, 손님이 오면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서 경사를 토론하였다. 또 곁에는 고금의 법서와 명화 그리고 동 · 옥 · 이 · 정들을 죽 나열해두고서 품평하고 구경하였으니, 영달이나 이익을 흠모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은 자주 시가에 나타났으니, 후세의 군자 중에 그 글을 읽고 그 마음을 알아줄 자가 있을 것이다. 공은 60세 때부터 여러 번 치사를 요구했으나 임금께서 “내가 경에게 의지하는 것은 마치 천곡의 곡식을 실은 배의 부관과 같은 격이니, 경은 대궐에 누워 도를 논해도 좋다.”라고 전교하고는 윤허하지 않았다. 신사년(순조 21, 1821년)에는 좌상으로 승진하고 세자부를 겸임하였으며, 임오년(순조 22, 1822년)에야 비로소 정승의 직위에서 해면되었다. 계미년에는 영의정 겸 세자사에 제수되었다가 그 이듬해에 체직되었다. 정해년(순조 27, 1827년)에 왕세자가 대리청정하면서 다시 정승에 제수하고 연달아서 아경과 정경을 공에게 보내, “경은 나의 사부이기 때문에 교도할 때에는 반드시 바른 도리로써 교도할 것이요, 협찬할 때에는 반드시 방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국가의 형세가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고 민생이 위급한 상태에 빠졌으니, 경은 모름지기 어려움을 구제할 방도를 생각하여 견여를 타고 조정에 나오라.”라는 내용을 가지고 회유하였는데, 친히 써서 내린 것이었다. 공은 왕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초기에 이런 분부로 몰아붙였기 때문에 나가서 명을 받들고 묘궁 · 약원 · 사역원 · 금위영의 도제조를 겸직하였다. 기축년(순조 29, 1829년)에 기로사에 들어가면서 정승의 직위에서 체직되었다가, 경인년에 복직되었다. 그리고 세손이 책봉될 적에는 정사로 뽑혔다가 이듬해에 갈렸다. 임진년(순조 32, 1832년)에 다시 영상이 되었는데, 여러 번 상소를 올려서 굳이 사직하였더니, 임금께서는 연달아 정경을 보내서 “경은 한 나라의 안위를 쥔 원로이다. 시사에 어려움이 많은데 경을 놓아두고 누구와 더불어 국사를 의논하겠소?”라는 내용으로 회유하고, 게다가 ‘몸소 가서 맞이하겠다.’는 명을 내리고는 행차에 따르는 노부와 위의를 모두 갖추게 하였다. 그러자 공은 황공하여 부득이 나아가서 숙배를 하였더니, 호위대장을 제수하였다. 계사년(순조 33, 1833년)에 공이 또 여러 번 상소를 올려서 치사를 빌었더니, 임금께서는 “옛날 선왕께서 경을 뽑아서 나에게 물려주셨는데, 경은 내가 어릴 적부터 도와주고 인도하여 나로 하여금 큰 허물을 모면하고 나라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져서 태산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게 하였으니, 경의 충성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여기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지금 만일 잘 다스려 만년에 선대의 아름다운 기업을 계승하고 세상을 바르게 교화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신하와 임금이 다 영광일 것이오.”라고 비답하고는, 특별히 사직을 허락하였다. 임금께서는 친히 납시어 조서를 쓰신 뒤 공을 편전으로 불러보고 어탑 위로 올라오게 하여 법주를 따라주며 마시도록 권하고 또 안주를 하사하였다. 공이 물러가면서 성덕을 힘써 닦도록 권하는 말을 많이 하니 임금께서는 “경이 40여 년 동안 조정에 있으면서 보여준 충성스럽고 곧은 지조는 일찍이 존경하여 찬탄해 마지않았고, 진언한 바는 관직에 있건 없건 간에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들이니, 마땅히 명심하고 가슴에 간직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때에 조정의 제공들이 많이들 시와 서를 지어서 경하하기를 마치 한나라의 소광과 소수의 고사처럼 하였다. 이때에 공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산림에서 한가롭게 노닐 생각 일찍부터 가졌었건만, 십년을 경영해온 뒤에야 비로소 실천할 수 있게 되었네. 급류에서 용퇴를 하지 못한 건 부끄러운 일이지만, 백두에 산림으로 돌아와 눕는 것도 임금의 은혜일세.
그리고 공은 드디어 ‘귀은’이란 두 글자를 가지고 그 당의 편액을 하였다. 또한 공은 노년이 되자 스스로 묘지와 묘갈을 짓고, 화려한 비를 세우지 말도록 명하였다. 공은 청주한씨에게 장가들었는데, 정경부인에 봉해졌으니 감사를 지낸 용화의 딸이다. 공은 아들을 두지 못해서 조카인 지구를 데려다가 후사를 삼았다. 저술에는『금릉집』12권과 『영옹속고』,『귀은당집』,『고려명신전』각각 몇 권씩이 있다. 다음과 같이 명을 한다.
양조에서 성은 받고, 관직이 정승의 자리까지 올랐으니, 시대를 잘 만났다고 해도 역시 옳은 말이다. 재주는 약하고 활약이 적어서, 쌓은 지식 다 펼치지 못했으니, 시대를 잘 만나지 못했다고 해도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일찍부터 영미에 토지를 구하여, 구학에서 한가롭게 노닐려고 했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성은 입고는, 늙어서야 전원으로 돌아와 쉬노라.
선고께서는 스스로 묘갈을 짓고 이미 비석에 새긴지 2년 후인 금상 정유년에 가례정사에 차임되었고, 경자년 12월 30일에 정침에서 작고하니 향년 81세이다. 부음이 전해지자 임금께서 전교하기를, “이 대신은 단정하고 온화한 자질과 온순하고 청신한 지조를 가졌고, 게다가 학술은 조예가 깊고 문장은 운치가 뛰어나서 그 가문의 아름다움을 잘 계승하고, 일찍이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순조대왕께서 왕세자가 되신 초기부터 나의 몸에 이르기까지 3대 동안 보필하는 책임을 맡아 그 공이 매우 크니, 단지 낭묘에서 도와준 공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성복하던 날 승지를 보내서 제수를 전하고 홍문관으로 하여금 문서를 기다리지 말고 장례 전에 시호를 의논하게 하여 문헌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로소 예장을 명하였으므로 나는 유언에 따라 3번이나 고사하였으나 명을 얻지 못하였다. 마침 대신이 공의 뜻을 아뢰니 중지의 명을 내리고 장례 용품을 넉넉하게 하사하였다. 신축년 3월 15일에 광주 둔촌 조비 묘소 아래 임좌의 자리에 장사지냈으니, 이것은 공이 정신이 맑을 때 내린 명이기 때문이다.
불초자 지구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삼가 기록함. 숭정기원후 네 번째 을미년(헌종 1, 1835년)에 비석에 새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