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을 향한 수도자의 노정 (이상헌 평전)
8) 하늘 섭리의 최전선 미국을 가다
3. 해방신학을 고발하다
프랑스의 유력한 일간지인 르피가로의 자매주간지인 피가로 마가진 4월24일호에 게재된 기사에 의하면, 페예세르 신부는 1981년 6월9일 과테말라에서 실종되었다. 이는 극우파에 납치된 것으로 믿어졌다. 그러다 112일 만인 같은 해 9월 30일 공식석상에 모습을 나타내어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동안 공산주의 혁명운동에 가담하였던 것을 밝힘과 동시에 그것을 깊이 참회한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1946년생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철학과 신학을 전공한 그는 예수회 신부가 되었다. 엘살바도르와 나카라과에 파견되었다가 과테말라에 귀환하였는데, 이념적 활동에 참여한 후 빈자의 게릴가군에 가담했다. 17개월간 활동했으나, 나중에 그 운동을 포기한 후 1981년6월경 경찰에 자수했다.
제2바티칸 종교회의 (1962.10.11-1965.12.8) 이래 교회의 상황이 변화하였다. 그때까지 가톨릭에서는 단지 구원은 교회에서만 가능하다고 여겼다. 1962년 이후 카톨릭은 세상과 격리된 섬이 아니라 대중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지구상에는 무명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 무명의 기독교도란 불신자나 영세를 받지 않는 사람들로, 이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믿어왔다.
구원의 문호개방과 해방신학은 메델린에서 시작되었다. 불신자에 관한 구원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것은 콜롬비아의 메델린에서 열린 중남미 주교회였다. 중남미의 주민들이 탄압받고 있는데, 이들은 빈민 가운데 희망도 참정권도 없는 바 이들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그들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1980년 후에 멕시코에서 또 하나의 중남미 주교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에서 예수회로 하여금 해방신학의 가르침에 따라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게 하였으며 좌경화로 몰아갔다.
해방신학은 첫째, 예수는 복음 속의 예수와 다른 새로운 예수였다. 이 예수는 자본주의 체제의 적으로, 반항적이고 혁명적인 예수였다. 또한 배타적이며 편파적이었다. 새로운 예수는 오로지 빈민만을 구원하기 위한 빈민의 신이며 결코 인류의 신이 될 수 없었다.
두 번째 원칙으로는, 새 예수가 확고한 계획과 임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주 하나님은 하나의 왕국인 사회주의 왕국을 만들기 위해서 지구상에 보냈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새 예수는 종래 교회의 제도, 구조, 사열 등을 거부하며,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오로지 힘의 장악이었다. 그 힘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뿐으로, 그 외의 것은 별개의 문제로 여겼다. 일단 해방신학의 원칙을 받아들인 후에는 대중 착취의 원인 분석과 그 제거 방안은 오로지 마르크스 레닌주의임을 배우도록 요구했다.
중남미가 처해 있는 저개발과 빈부의 양극화 현상에서는 현지의 주민들에게는 이 해방신학이 효과를 거두었다. 페예세르 신부는 엘살바도르와 니카라과 그리고 괴테말라에서 해방신학의 위력과 마르크스 레닌주의 조직의 힘, 빈민 속에 침투한 예수교도들의 위력에 감명을 받았다.
결국 페예세르 신부의 그동안의 활동에 관해 경찰에 자수하고 고백한 것은 해방신학의 모순과 잘못되었음을 시인하는 것으로 해방신학에 큰 충격을 가져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