敬亭集(奎5348), 李民宬(朝鮮)著.
13卷 遺補 合4冊 木板本 31.5×20.5cm.
四周雙邊 半郭:20.7×14.9cm.
有界 10行 19字 注雙行.
敬亭 李民宬(1570∼1629)의 詩文集으로 그의 養子 李廷機가 1664년(顯宗 5)에 간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李民宬의 본관은 永川, 字는 寬甫, 觀察使 李光俊의 아들. 1597년(宣祖 30) 庭試文科에 甲科로 급제. 注書, 說書, 兵曹正郞, 濟州點馬御史, 正言, 修撰 등을 지내고 仁祖反正 後엔 書狀官으로 復職, 明에 다녀와서 承旨에 오르고 丁卯胡亂이 일어나자 慶尙左道義兵將이 되어 활약했으며 吏曹參議에 이르렀다. {卷1∼11}까지가 모두 詩이며 {卷12}에 賦, 辭, 序文이 실렸고, {卷13}에 酊庵記, 望日軒記 등 8편이 실렸으며, 論으로 東海無湖汐論, 守道不如守官論, 孟子不尊周論, 階伯論, 刪後無詩論과 3편의 祭文, 銘, 讚, 啓辭, 跋文, 書 등이 실려 있다. 이에 이어 「敬亭集補遺」라 하여 玉堂處置箚 1편이 수록되어 있다. 다른 板本엔 13卷 외에 續集 4권이 더 있는데 續集 {卷1,2}가 朝天錄 上이며 {卷3}이 朝天錄 下이다. {卷4}에 明나라 皇帝에게 올린 奏本, 秘密狀啓 등이 실려 있다. 또 年譜도 2권이 있는데 {卷1}엔 敬亭의 年譜가 실려 있고 {卷2}는 부록으로 門下生 申悅道(1589∼1647)와 丁範祖가 쓴 行狀이 각각 있으며, 旅軒 張顯光(1554∼1637)이 지은 壙銘과 樊巖 蔡濟恭이 지은 墓碣銘을 위시하여 崔??, 申適道 등의 祭文, 輓詞가 실려 있다. 敬亭은 詩文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詩에 뛰어났다는 것은 仁祖·孝宗 당시의 巨儒인 龍洲趙絅, 旅軒 張顯光, 東溟 鄭斗卿등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趙絅은 序文 中에서 "公之文章, 不亶擅一國名, 有味乎天下之口也……"라 하여 우리나라에서만 文名을 독차지했을 뿐 아니라 天下의 口味를 맞게 하였다고 극찬했으며, 鄭斗卿 역시 序文에서 "披讀其文章 本諸六經 참以先秦漢魏六朝唐宋 흘于皇明 其有諸書 無不貫穿……有似小陵者 有似昌黎者 有似唐宋請名家者……向之聞於洛下稱文章巨擘者 信不虛矣"라 하여, 저 先秦에서부터 明에 이르기까지의 中國의 文章들을 모조리 섭렵했으며 따라서 그의 文章 솜씨는 唐의 杜甫를 닮은 것도 있고 韓愈와 흡사한 것도 있어 文章의 거벽이라고 들은 말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헛소문이 아니라고 하였다. 다른 板本에 있는 年譜에 보편, 樊巖 蔡濟恭은 敬亭의 行狀을 撰한 가운데서, 敬亭이 燕京에 있을 때 中國人으로부터 李謫仙(李太白)이란 別稱을 들었다고 하였다. {권13}에 실린 論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守道不如守官論:唐의 柳宗元의 說을 반박하여 「守道不如守官」을 말한 孔子의 근본 의도는 道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함에 있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2}孟子不尊周論:「孟子不尊周」를 말한 宋나라 司馬光의 말을 反駁한 것이다. {3}階伯論:황산 벌에서 있은 羅唐연합군과의 싸움에서 자기의 妻子까지 죽이면서 勇戰하다가 最後를 마친 百濟의 階伯將軍을 評하여 「殘忍」하다고 한 史臣들의 評에 對해 그 不當性을 力說하고, 千秋에 길이 빛날 忠臣임을 論한 것이다. {4}刪後無詩論:孔子가 詩 三百篇을 刪定한 뒤엔 世上에 詩가 없다고 慨嘆한 宋나라 邵雍의 見解에 우선 贊同한 뒤에 邵雍의 刪後란 궁극적으론 詩가 없다는 뜻보다는 그 詩를 刪定할 수 있는 聖人이 끊어졌다는 뜻일 것이란 自身의 견해를 붙인 것이다. {5}東海無潮汐論:우리나라의 東海엔 潮水가 없다는 說을 강력히 否認한 論이다. 東海는 끊없이 넓고 크기때문에 그 조수가 우리의 눈에 뜨이지 않을 뿐이지 조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경정집(敬亭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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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정집(敬亭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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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서지 |
권수제 |
경정선생집(敬亭先生集) |
판심제 |
경정집(敬亭集) |
간종 |
목판본 |
간행년 |
원집(原集) 1664년경 간행, 속집(續集) 정조말경간(正祖末頃刊). |
권책 |
목록(目錄), 원집(原集) 14권, 속집(續集) 4권 합 10책 |
행자 |
10행 19자 |
규격 |
19.9×15(㎝) |
어미 |
上下二葉花紋魚尾 |
소장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
소장도서번호 |
도서번호 : 4-5744, 필름번호 : M35-1741 |
총간집수 |
한국문집총간 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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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성명 |
이민성(李民宬) |
생년 |
1570년(선조 3) |
몰년 |
1629년(인조 7) |
자 |
관보(寬甫) |
호 |
경정(敬亭) |
본관 |
영천(永川) |
특기사항 |
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의 문인(門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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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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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전거 : 行狀(申悅道ㆍ丁範祖 撰), 李光俊墓誌(李民
撰, 紫巖集 卷3) 등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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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력 |
왕력 |
서기 |
간지 |
연호 |
연령 |
기사 |
선조 |
3 |
1570 |
경오 |
隆慶 |
4 |
1 |
11월 8일, 義城縣 蘇侍郞里에서 태어나다. |
선조 |
19 |
1586 |
병술 |
萬曆 |
14 |
17 |
讓陽權氏와 혼인하다. |
선조 |
21 |
1588 |
무자 |
萬曆 |
16 |
19 |
봄, 鶴峯 金誠一의 문하에 나아가다. |
선조 |
22 |
1589 |
기축 |
萬曆 |
17 |
20 |
9월, 모친상을 당하다. |
선조 |
25 |
1592 |
임진 |
萬曆 |
20 |
23 |
봄, 부친을 모시고 江陵 任所로 가다. |
선조 |
27 |
1594 |
갑오 |
萬曆 |
22 |
25 |
9월 부인 權氏의 상을 당하다. |
선조 |
28 |
1595 |
을미 |
萬曆 |
23 |
26 |
2월, 南以仁의 女 宜寧南氏와 혼인하다. ○ 〈鳳凰來儀賦〉를 짓다. |
선조 |
30 |
1597 |
정유 |
萬曆 |
25 |
28 |
4월, 庭試에 합격하다.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어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다. |
선조 |
32 |
1599 |
기해 |
萬曆 |
27 |
30 |
부친을 모시고 忠州 任所에 다녀오다. |
선조 |
33 |
1600 |
경자 |
萬曆 |
28 |
31 |
12월, 正字가 되다. |
선조 |
34 |
1601 |
신축 |
萬曆 |
29 |
32 |
1월, 著作이 되고, 奉常寺 直長, 博士를 역임하다. |
선조 |
35 |
1602 |
임인 |
萬曆 |
30 |
33 |
윤2월, 승정원 주서가 되다. ○ 4월, 시강원 설서를 거쳐 사서가 되다. ○ 10월, 전적 겸 감찰이 되고, 王世子冊封奏請使 書狀官으로 北京에 가다. |
선조 |
36 |
1603 |
계묘 |
萬曆 |
31 |
34 |
1월, 孤竹城에 도착하다. ○ 5월, 돌아오다. ○ 6월, 예조 좌랑, 병조 좌랑이 되다. ○ 겨울, 張顯光을 따라 冰溪書院으로 가서「周易」을 강하다. |
선조 |
37 |
1604 |
갑진 |
萬曆 |
32 |
35 |
2월, 전적이 되다. ○ 12월, 병조 정랑이 되다. |
선조 |
38 |
1605 |
을사 |
萬曆 |
33 |
36 |
3월, 濟州 點馬御史로 나가다. |
선조 |
39 |
1606 |
병오 |
萬曆 |
34 |
37 |
여름, 동생 紫巖公 李民寏과 함께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
선조 |
41 |
1608 |
무신 |
萬曆 |
36 |
39 |
2월, 선조가 승하하고, 곧 持平이 되다. ○ 6월, 시강원 문학이 되다. ○ 겨울, 賜暇讀書하다. |
광해군 |
1 |
1609 |
기유 |
萬曆 |
37 |
40 |
봄, 弘文錄에 들다. ○ 7월, 부친상을 당하다. |
광해군 |
4 |
1612 |
임자 |
萬曆 |
40 |
43 |
봄, 冷泉亭을 짓다. |
광해군 |
5 |
1613 |
계축 |
萬曆 |
41 |
44 |
5월, 예조 정랑이 되다. ○ 6월, 교리가 되다. 23일, 上箚하여 鄭造, 尹訒 등이 母后를 廢하려 모의한 죄를 논하다. ○ 9월, 李德馨을 論救하다가 파직되다. |
광해군 |
6 |
1614 |
갑인 |
萬曆 |
42 |
45 |
7월, 부수찬이 되다. ○ 9월, 關西 京試官이 되다. ○ 10월, 교리가 되었다가 일로 파직되다. ○ 崔晛과 修淨寺에 노닐다. |
광해군 |
7 |
1615 |
을묘 |
萬曆 |
43 |
46 |
1월, 司果가 되다. ○ 8월, 李元翼을 伸救하다가 때마침 일어난 金尙憲이 지은 賀箋 문제로 삭탈관작되다. 이후 두문불출하며 性理學에 전념하다. |
광해군 |
12 |
1620 |
경신 |
泰昌 |
1 |
51 |
1월, 鄭逑를 곡하다. ○ 동생 李民寏을 만나러 關西에 다녀오다. |
광해군 |
13 |
1621 |
신유 |
天啓 |
1 |
52 |
4월, 張顯光을 따라 冰溪書院에서 經義를 講論하다. |
인조 |
1 |
1623 |
계해 |
天啓 |
3 |
54 |
3월, 仁祖 反正이 일어난 뒤 奏聞使 書狀官이 되어 宗簿寺 正의 벼슬로 중국에 가다. |
인조 |
2 |
1624 |
갑자 |
天啓 |
4 |
55 |
4월, 돌아와 司成 兼 執義가 되다. ○ 5월,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燕槎唱酬集을 편집하다. |
인조 |
3 |
1625 |
을축 |
天啓 |
5 |
56 |
5월, 동부승지가 되다. 〈象賢書院記〉를 짓다. |
인조 |
4 |
1626 |
병인 |
天啓 |
6 |
57 |
2월, 우승지가 되다. 〈論金浦葬山制殺法獻議啓〉, 〈白虹貫日啓辭〉와 〈請寢拜園啓辭〉를 올리다. |
인조 |
5 |
1627 |
정묘 |
天啓 |
7 |
58 |
봄, 胡亂이 일어나자 嶺南召號使 張顯光의 추천으로 慶尙左道 義兵大將이 되다. ○ 3월, 江都 행재소로 가서 扈駕하여 還朝하다. ○ 4월, 고향으로 돌아오다. ○ 11월, 좌승지, 우승지가 되다. |
인조 |
6 |
1628 |
무진 |
崇禎 |
1 |
59 |
1월, 좌승지가 되다. ○ 4월, 명을 받고 江陵에 가서 集慶殿 影幀을 봉심하고 論啓하다. ○ 6월, 좌승지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인조 |
7 |
1629 |
기사 |
崇禎 |
2 |
60 |
4월, 형조 참의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7월, 冰溪에 가서 張顯光의 講會에 참석하다. ○ 8월 15일, 병으로 冰月堂에서 졸하다. ○ 11월 3일, 義城縣 서쪽 霞峴에 장사 지내다. |
헌종 |
5 |
1664 |
갑진 |
康熙 |
3 |
- |
이즈음 아들 李廷機가 문집을 간행하다.(鄭斗卿의 序) |
현종 |
13 |
1672 |
임자 |
康熙 |
11 |
- |
士林이 藏待書院에 位版을 봉안하다. |
- |
- |
1928 |
무진 |
- |
- |
- |
義城 冷泉亭에서 續集, 年譜, 附錄 등을 모두 합쳐서 문집을 重刊하다. | 기사전거 : 年譜,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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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 및 간행 |
저자의 시문은 생전에 편집해 둔 燕槎唱酬集 등이 家藏되어 있었으나 많은 작품이 散佚되었고, 남은 것들을 동생 李民寏이 수습하여 수천 首를 繕寫해서 定稿本을 만들고 판각하려 하였다. (行狀, 申悅道 撰) 실제 그는 1630년에 張顯光에게 壙銘을 부탁하여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가 1649년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간행을 보지는 못하였다. 그 후 李民寏의 아들이자 저자의 양자인 李廷機가 1659년 順天 府使로 나가게 되면서 문집을 간행하려고 趙絅에게 序文을 받았으나 이루지 못하고, 다시 1664년 瑞興 府使로 나가게 되면서 재차 鄭斗卿에게 序文을 받아 간행하려 하였다. 실제 이때 문집이 간행되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현재 13권으로 남아 있는 原集이 이때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李廷機가 권13의 끝에 붙인 補遺 〈玉堂處置箚〉의 識에 “編次한 뒤에 수습하였기에 문집의 맨 끝에 기록한다.”고 하였으니, 13권으로 편차한 자가 李廷機임을 알 수 있다. 또 국립중앙도서관장본(한46-가1083)의 13권 4책 목판본의 印記에 宋詩烈(1607~1689)의 印이 찍혀 있으니, 늦어도 1689년 이전에는 간행된 것인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1664년경에 곧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李廷機는 李民寏이 만들어 놓았던 定稿本을 그대로 살리고 다시 詩 2권을 別集과 續集으로 첨가하여 권10과 11로 편차하였다. 권12와 13의 賦와 文도 새로 편차한 것이다. 현재 규장각(奎5348)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본이 이때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원집 초간본》 그런데 1739년에 玄孫 李命天이 지은 家狀에는 “文集 12권이 세상에 통행하고 朝天錄 5권이 家藏되어 있다.” 하였고, 1794년에 丁範祖(1723~1801)가 지은 行狀에도 “敬亭集 12권이 세상에 통행하고 있다.” 하였다. 그리고 1796년에 완성된「鏤板考」에도 敬亭集 12권의 판목이 義城 藏待書院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12권과 13권이라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원집은 모두 목판본 13권뿐이다. 위의 두 본과 장서각장본(4-5744),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D1-A837), 연세대 중앙도서관장본 등이 다 그렇다. 또한 李獻慶(1719~1791)의「艮翁集」에 나오는 〈敬亭先生遺集跋〉에는 구체적인 간행 경위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고, 다만 그의 詩에 대하여 극찬하고 詞ㆍ賦ㆍ序ㆍ記 등도 훌륭하다고 평하였다. 현존본에는 1~11권이 詩이고, 12권이 賦ㆍ辭ㆍ表, 13권이 記ㆍ序ㆍ論ㆍ議啓 등이다. 따라서 李獻慶이 본 것도 이 13권본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 현재로서는 결론지어 말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본서의 원집 저본은 장서각장본인데, 규장각장본과 비교하였을 때 字體가 다르고 補刻한 흔적이 역력하다. 따라서 이는 補刻後刷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속집이나 연보의 字體와도 달라 보각의 시기를 정확히 잡을 수 없다. 다만 장서각장본에는 규장각장본과는 달리 原集의 目錄이 붙어 있고, 거기에 年譜와 附錄을 권14로 편차해 놓았다. 이로 미루어 보면 혹 年譜와 續集이 간행된 시기를 즈음하여 補刻이 이루어지고, 이 목록도 집어넣어 인쇄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이 年譜와 續集의 간행은 저자의 玄孫 李命天에 의해 시도되고 그의 손자 李祥發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李命天은 1739년에 家藏 文字와 日記를 모아 家狀을 만들었고, 李祥發은 丁範祖에게 行狀을, 蔡濟恭에게 墓誌銘을 부탁하여 받았다. 丁範祖와 蔡濟恭이 이를 지어준 것은 그 말미의 관직명으로 미루어 볼 때 1794년경이었던 것으로 보이니, 실제 간행은 1794년 이후에 된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1796년에 완성된「鏤板考」에 속집에 관한 언급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1796년 이후 正祖 末年 즈음에 간행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는 이미 李命天이 졸한 뒤이므로 李祥發의 주도로 年譜 2권, 續集 4권의 목판본이 정조 말년 즈음에 간행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즈음에 원집도 보각, 후쇄되어 속집, 연보와 함께 결책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장서각, 연세대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본이다.《연보와 속집 초간》 그 후 1928년에 義城 冷泉亭에서 原集 13권과 續集 4권, 年譜 1권, 附錄 1권을 합하여 19권 9책으로 重刊하였는데, 그 간행 경위는 자세하지 않다.《중간본》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047)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위에서 설명한 장서각장본(4-5744)이고, 이를 촬영한 同館所藏 마이크로필름(M35-1741)을 썼다. 다만 원집, 속집, 연보의 순으로 結冊되어 있는 것을 目錄에 따라 원집, 연보, 속집의 순으로 바로잡았고, 연보를 원집 권14로 편차하였다.
기사전거 : 序(趙絅ㆍ鄭斗卿 撰), 行狀(申悅道ㆍ丁範祖 撰), 家狀(李命天 撰) 등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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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과 내용 |
본집은 目錄, 原集 14권, 續集 4권 합 1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目錄은 原集의 것이고, 續集 目錄은 속집 권두에 따로 실려 있다. 原集은 원집 13권과 補遺, 年譜로 되어 있다. 권1~11은 詩이다. 1592년에 江陵 任所로 부친을 모시고 갔을 때 지은 〈陪登北城〉을 시작으로 대체적으로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하였다. 권1~4는 1592년의 작품부터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관직에 나오기 전까지의 작품이다. 여기에는 〈謁夷齊廟〉 등 1602년 王世子冊封奏請使 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오면서 지은 시들이 다수 들어 있고, 〈浮海〉 등 1605년 濟州의 點馬御史로 다녀오면서 지은 시들도 있다. 1617년에 지은 〈打麥詞〉는 崔岦으로부터 “文力이 雅健하니 今人의 口氣가 아니다.”는 극찬을 받기도 한 작품이다. 권5에는 명 나라 大復 何景明의 七言律에 和韻한 시 150여 수가 실려 있는데, 저작 연대순 편차 원칙으로 볼 때 1623년 전후 고향에 있으면서 독서에 전념할 때 지어진 것 같다. 권6~8은 燕槎唱酬集 上ㆍ中ㆍ下로, 인조반정 후 奏聞使 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오는 동안 지은 시들을 모은 것인데, 함께 갔던 副使 白沙 尹暄과 나눈 시가 다수이다. 저자는 중국인들로부터 ‘李謫仙先生’이라 불리울 정도로 시에 있어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1624년 이후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을 때 편집한 것이다. 권9는 1624년 4월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1629년 졸할 때까지의 작품이다. 권10은 詩의 別集으로 月課와 文臣庭試때 지은 작품 등이 실려 있고, 권11은 詩의 續集으로 연대가 불분명한 시들을 따로 모아 실은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권은 아들 李廷機가 原集을 간행하면서 새로 편차한 것으로 보인다. 권12는 賦 11편, 辭 2편, 表 6편이다. 賦 가운데는 〈鳳凰來儀〉가 유명한데, 1595년 26세에 지은 작품이다. 辭는 〈和歸去來辭〉와 月課로 지은 〈弔混沌死辭〉가 있다. 表에는 月課로 지은 〈擬宋監南嶽廟……〉 등과 〈領議政李恒福四度不允批答〉, 〈鳶魚亭上樑文〉, 〈四六精粹序〉 등과 雜儷文이 실려 있다. 上樑文이나 序는 권13의 雜著나 序에 함께 실어도 될 듯한데 굳이 여기에 실은 것은 권12까지를 韻文 성격의 글을 모은 것으로 구분하려 한 것 같다. 권13은 記, 序, 論, 祭文, 銘, 讚, 議啓, 題跋, 雜著를 모아 놓았다. 記에는 1609년에 宣慰使를 대신하여 玄蘇에게 지어준 〈酊庵記〉, 1604년 關西伯 金藎國을 위하여 지어준 〈望日軒記〉 등이 있다. 序는 送序 3편으로 권12에 실린 序와 구분되어 있다. 論은 〈東海無潮汐論〉, 〈孟子不尊周論〉, 〈階伯論〉 등이다. 〈東海無潮汐論〉은 1609년 弘文錄에 든 뒤 課題로 지은 것으로, 東海에 潮汐이 없다 하는 것은 見聞이 편벽한 소치임을 논하였다. 議啓는 〈政院白虹貫日啓辭〉 등 1625년에 올린 계사 3편과 1628년에 集慶殿을 봉심하고 온 뒤 올린 계사가 실려 있다. 雜著 가운데는 1623년 인조반정 뒤 중국에 올린 〈辨誣呈文〉과 太極의 動靜 등을 논한 策問이 주목된다. 또한 여느 문집과는 달리 疏箚가 실려 있지 않은데, 이는 자신의 자취를 남기지 않으려 한 저자의 의도 때문이었다. 이에 아들 李廷機가 政院日記에서 수습하여 권13의 끝에 補遺로 계축년 6월 23일의 玉堂處置箚를 넣었던 것이다. 권14는 年譜와 附錄이다. 원래 2권으로 되어 있던 것을 본 총간에서는 목록에 따라 원집 14권으로 합하여 편차한 것이다. 附錄에 行狀, 壙銘, 墓誌銘, 家狀, 기타 祭文과 挽詞, 藏待書院 奉安文 등이 들어 있다. 續集은 4권으로, 朝天錄 上ㆍ中ㆍ下 3권과 奏本, 啓辭와 拾遺를 모은 1권이 그 내용이다. 朝天錄은 인조반정 이후 奏聞使 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올 때의 기록으로, 1623년 4월부터 1624년 4월까지의 旅程과 활동 사항을 적었다. 1624년 5월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있는 동안 편집한 것이다. 奏本과 啓辭 모두 이 시기에 올린 公文이다. 拾遺로는 敎, 啓, 記, 題跋 한 두 편씩이 실려 있다.
필자 : 김경희(金炅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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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
경정선생문집(敬亭先生文集) |
유물형태 |
책판 |
기탁자 |
의성 산운 경정종택 |
상세설명 |
『경정집』은 조선 중기의 문인 이민성(李民宬, 1570~1629)의 시문집이다. 이민성의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관보(寬甫), 호는 경정(敬亭)이다. 그는 의성출생으로, 그의 아버지는 관찰사 광준(光俊)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인의(引義) 권(權)의 딸이다. 이 책은 1664년(현종 5) 양자 정기(廷機)가 간행하였고, 1903년(광무 7) 다시 중간되었다. 목판본이다. 권두에 조경(趙絅)과 정두경(鄭斗卿)의 서문이 있다. 시 1,257수를 비롯하여 여러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당시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었는데, 특히 권6∼8의 「연사창수집(燕槎唱酬集)」은 중국에 다녀오는 동안에 지은 시로서, 두보(杜甫)와 한유(韓愈)와 비슷하다 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동해무조석론(東海無潮汐論)」은 우리나라의 동해에 조수가 없다는 설을 부인하고, 동해는 끝없이 넓기 때문에 조수의 폭이 보이지 않을 뿐이지, 결코 조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글이다. 「계백론(階伯論)」은 사신(史臣)의 평을 비판하고 계백을 만고의 충신이라 천명하였다. 「조천록」은 그가 중국에 서장관으로 다녀온 기록인데, 당시 우리나라와 청·명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를 두루 통달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있어 재덕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명나라에 갔을 때 그곳의 학사 · 대부들과 수창(酬唱)한 시는 사람들에게 애송되어 중국 사람들이 그를 이적선(李謫仙, 이태백을 말함)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하는 시는 1,000여수에 이른다. 경상북도 의성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경정집』13권, 보유(補遺) 합 4책과 『조천록(朝天錄)』 등이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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