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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이 하나님으로 무르익는 온실>의 줄거리 :
성막 제작을 위한 다양한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48개의 널빤지로 직육면체의 골격을 이루고 그 위에 덮개를 씌움으로써 완성됩니다. 이러한 성막의 규례 중에 특이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네 가지 덮개를 중복하여 덮는다는 점입니다. 널빤지로 막고 그리고 그 위로 덮개를 네 가지나 중복하여 씌움으로써 완전히 차단되어야 함을 특별히 강조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증거판을 넣어 둔 법궤를 이처럼 외부 세계와 철저히 차단시키려는 의도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은혜를 캐내어 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무르익는 온실
(출애굽기 26:1~37)
1.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2. 매 폭의 길이는 스물여덟 규빗, 너비는 네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3. 그 휘장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다른 다섯 폭도 서로 연결하고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막 제작을 위한 각종 규격과 식양을 알려주시는 내용입니다. 1~14절까지는 성막을 덮기 위한 휘장의 내용이고, 15~30절까지는 휘장을 덮기 전에 성막의 골격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막은 48개의 널판을 이용하여 직육면체 형태로 제작되고 그 위에 휘장을 덮습니다. 31~37절까지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과 성소의 출입문 역할을 하는 휘장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성막 제작과 관련된 내용을 기록한 말씀 중심으로 “마음이 하나님으로 무르익는 온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성막이 내 마음을 하나님으로 무르익게 해주는 온실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 복음 가족 중에 온실에서 딸기를 재배하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께서 ‘1월이 딸기의 제철입니다.’라고 하신 말이 떠오릅니다. 1월은 가장 추울 때입니다. 시베리아에서 삭풍이 불어오고 눈보라가 치고 영하의 날씨가 지속됩니다. 그런데 그 1월이 딸기의 제철이라니 놀랍습니다. 온실은 온도와 습도와 햇빛을 인공적으로 조절하여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줍니다. 그렇기에 딸기는 1월이 제철일 수 있습니다. 1월 날씨에 딸기가 그대로 밖에 노출된다면 얼고 말라서 비틀어질 뿐이지만 온실 안에서는 새빨갛고 통통한 탐스러운 결실을 이룹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무르익기를 꿈꾸셨습니다. 마치 온실 작물을 재배하시는 분이 새빨갛고 통통한 딸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위해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한 기능을 넣어주셨습니다. 있음을 느끼는 존재감의 기능, 비어있는 마음을 좋은 것으로 채우려는 흡입력의 기능,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주체성의 기능입니다. 하나님으로 무르익음이란 마음의 공백이 하나님의 있음으로 가득 채워지고, 하나님의 좋음으로 가득 채워져서 이 세상을 향해서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고, 세상을 향한 유일한 주권자이십니다. 우리 마음이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받아들여서 가득 찬다면 하나님으로 무르익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과의 친분이 두터워지고, 하나님을 많이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무르익을 때 이 세상일은 하나님이 도맡아서 이끌어가십니다. 우리는 육체로 사는 삶의 현장에서 다양한 대상과 문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장소와 시간에 대한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주권을 포기하시는 부분은 바늘 끝만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무르익을 때 삶은 온전히 하나님의 몫이 되고 내 몸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속성들로 채워지고 하나님으로 무르익으려면 문제가 있습니다. 빗나감의 죄가 체질이 되었습니다. 본래 사람은 있음에 대한 존재감은 하나님을 향해서만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빗나가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의 존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준과 하나님이 그림 그리신 모습에 비추어 볼 때 마치 딸기가 겨울철에 절대로 결실하지 못하고 얼어 죽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빗나감의 죄는 마음 채움에 있어서도 작용합니다. 하나님을 제쳐두고 이 세상 것을 좋음으로 알고 흡입합니다. 세상 것의 존재를 느끼고 좋음을 흡입하다 보니 마음의 주체성에서도 빗나감이 발생합니다. 하늘을 향해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체성이 내려오고 있는 세상을 향해 주체성을 쏟아붓습니다. 세상에 노출된 마음은 겨울철 눈보라가 몰아치는 온실 밖 딸기와도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는 24시간 존재감의 기능, 흡입력의 기능, 주체성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세상에 노출되는 한 절대로 하나님으로 무르익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성막의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온실 속 탐스러운 딸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성막 제작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에는 성막 제작에 관련된 각종 숫자가 빈번하게 등장하여 읽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본문을 읽다 보면 눈에 확 들어오는 부분이 있는데 성막을 덮는 휘장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8장의 널판으로 성막의 골격을 만들라고 지시하십니다. 한 규빗은 45.65cm임을 염두에 두자면 성막의 길이는 30규빗으로 13.7m 정도가 되고, 너비가 4m가 좀 넘고, 높이가 4.5m 정도가 됩니다. 성막은 이러한 크기의 직육면체 상자 형태입니다. 그리고 이 성막을 네 종류의 휘장으로 덮게 하십니다. 첫 번째는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놓은 열 폭의 휘장이고, 두 번째는 염소 가죽으로 만든 열한 폭의 휘장이고. 세 번째는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만든 휘장이고, 네 번째는 매우 질기다고 알려진 해달의 가죽으로 만든 휘장을 덮습니다. 웬만큼 모진 기후에도 끄떡도 하지 않는 가죽으로 덮는 것입니다.
한편, 성막의 가장 깊은 곳인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습니다. 그리고 법궤에는 증거판이라는 십계명 돌판이 들어있습니다. 십계명 돌판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인격체임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법궤가 들어있는 지성소는 휘장으로 성소와 구분됩니다. 또 성소에는 문 역할을 하는 휘장이 있습니다. 이처럼 성막 전체는 네 가지 종류로 만들어진 휘장으로 덮고 덮고 덮고 또 덮습니다. 이러한 휘장은 차단과 격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가 들어있는 지성소를 덮고 덮고 덮고 막아서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한다는 것에서 하나님의 의도가 눈에 띄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증거판이 담긴 법궤를 가장 깊은 지성소에 두시고, 세상과 완전히 차단한다는 의도를 위해서 네 가지 종류의 덮개를 말씀하신 것일까요?
선민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를 성막의 지성소 안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선민의 마음은 법궤가 있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지성소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육체가 놓여있는 삶의 현장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고, 차단되고 차단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한 마음은 육체가 놓여있는 환경으로부터 차단되어서 성막의 지성소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250만 선민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신 법궤가 있는 지성소 안으로 다 들어가 있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교회라는 모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마음들이 성막의 지성소 안으로 다 들어가 있는 상태가 교회입니다. 몸이 특정한 장소에 모여야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지성소에 마음이 모인 상태가 교회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선민은 남쪽 브엘세바에 삽니다. 또 어떤 선민은 북쪽 단에 삽니다. 요단강 동쪽에 사는 선민도 있고, 요단강 서쪽에 사는 선민도 있습니다. 이렇게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살고 있어도 이들의 마음은 성막의 지성소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성막의 지성소에 모인 자들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은 성막의 지성소입니다. 선민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기 위해서는 마음이 반드시 성막의 지성소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법궤가 있는 지성소는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차단되고 격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으면 이제 하나님으로 무르익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르익기 위해서는 조건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의 마음이 이 세상을 향하여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것은 딸기가 겨울철 삭풍과 눈보라에 노출되는 것과 같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부르기 시작했으면 그 마음은 절대적으로 이 세상으로부터 차단되고 격리되어야만 합니다. 마치 딸기가 온실 속에서 적절한 온도와 습도와 기후를 통해 무르익듯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성막의 지성소에 마음이 들어감으로써 세상에 노출되지 않은 상태로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지성소 안에서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의 속성이 온실의 온도와 습도와 기후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유일한 있음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있게 된 것들이지만 하나님만이 스스로 있는 자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속성은 유일한 좋음입니다.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은 유일한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삶을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세 가지 속성이 온실 속의 조건이 되어주면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무르익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 무르익으면 세상에 노출된 마음으로 살 때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다른 삶이 됩니다. 하나님으로 무르익은 믿음의 조상들의 예를 살펴봅니다.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몸이 놓인 세상 쪽으로는 관심이 없습니다. 한 번도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는 요청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조카 롯과 분가할 때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좋은 땅을 다 양보합니다. 애초에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라는 안정된 삶의 조건을 버리고 떠납니다. 당시에는 아직 성막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았습니다. 마음이 세상과 격리되고 차단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의 속성이 온도와 습도와 기후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그러한 환경 안에서 하나님으로 무르익었습니다.
또 다른 예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목동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성막을 늘 사모했습니다. 마음이 성막 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속성들에 둘러싸여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전쟁터에 심부름을 가게 되었고 골리앗을 마주하게 됩니다. 사울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군인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성막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있는 성막에 들어가 있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온실 속에서 하나님의 속성으로 둘러싸여 하나님으로 무르익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마음은 세상에 노출되었고 골리앗이라는 시베리아 삭풍이 불자마자 들판의 딸기처럼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으로 무르익어 본 적이 없는 마음은 세상에 노출되자마자 다 얼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으로 무르익은 다윗은 골리앗 앞에 나섭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 있음의 존재가 가장 컸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관점에서 골리앗은 조약돌 하나면 충분히 끝낼 수 있는 존재로 보입니다. 다윗이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이 양을 잡아가면 쫓아가서 아가리를 찢고 구해냈던 것과 같습니다. 골리앗은 시베리아의 삭풍처럼 사울과 군사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의 존재감과 하나님의 좋음과 전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무르익었습니다. 이로부터 완전히 다른 양태의 말과 행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목동으로 살면서 세상과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놓여있는 성막을 그리워하고 찬양했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으로 둘러싸인 온실 속에서 하나님으로 무르익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성막에는 원형이 존재합니다. 인간의 손으로 제작한 성막은 모형입니다. 성막의 원형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하는 모든 사람에게 십자가는 마음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차단하는 사중의 덮개입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은 십자가 덮개로 세상으로부터 차단하고 격리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 채 마음이 세상에 노출된다면 빗나감의 죄의 체질 때문에 하나님의 있음, 하나님의 좋음, 하나님의 주체성으로 무르익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 덮개를 통해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노출이 차단되고 격리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우리의 온실입니다. 이 온실 안에서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속성으로 무르익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성막의 원형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랑한 십자가는 마음을 세상과 차단하는 온실이자 사중의 덮개입니다.
온실에서 딸기가 새빨갛고 통통하게 무르익듯이, 십자가에서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우리 마음은 하나님으로 무르익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존재감과 하나님의 좋음에 대한 소망과 열망으로 살이 통통하게 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나님으로 무르익으면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의 의해서 다 진행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몸을 장갑 삼아 이끌어 가시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마음이 하나님으로 무르익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 덮개로 덮여있는 예수님의 몸인 성막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럴 때 온실 속의 딸기처럼 하나님으로 무르익어 갈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예를 들어 봅니다. 돈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제까지는 돈 문제를 붙잡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겨울철 삭풍과 눈보라에 딸기가 노출되는 것과 똑같습니다. 돈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할 일은 돈 문제에 마음이 노출되지 않는 것입니다. 돈 문제는 겨울철 삭풍이고 눈보라이고 내 마음은 딸기입니다. 이 딸기라는 마음은 돈 문제에 노출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십자가 덮개로 차단하고 격리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권자 되심은 온실의 온도와 습도와 기후가 됩니다. 이로부터 나의 마음은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존재감으로 무르익고, 하나님의 좋음에 대한 만족감으로 무르익고,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하며 내 주체성은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시간을 통하여 내 마음은 하나님으로 무르익게 됩니다. 내 삶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없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무르익은 자에게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대로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막 제작을 지시하신 본문 전체에 담겨 있는 메시지는 우리 마음에서 세상은 완벽하게 차단하고 격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마음은 세상과 차단하고 격리해서 먼저 하나님으로 무르익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무르익지 않은 채로 세상에 나간다면 시베리아 삭풍 속 딸기와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은 성막의 원형이고 우리가 들어가야 할 온실입니다. 교인이란 어느 한 장소에 모이는 자들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라는 성막의 원형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마음이 모인 자들이 교인입니다.
오늘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마음이 모여있을 때 그 전체가 몸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의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그 모든 교인들의 마음은 십자가 예수님이라는 온실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으로 무르익는 시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의 속성으로 둘러싸여 하나님으로 무르익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어디에서든 마음을 세상의 겨울 삭풍이 부는 장소에 노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았다면 그 이름을 담은 법궤를 지성소에 두신 하나님의 의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성소를 사중으로 덮고 덮고 덮고 덮으신 차단과 격리와 분리의 간절한 의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며 예수님의 십자가로 세상을 차단하고 격리하고 끊어내고 분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마음은 무조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속성에 둘러싸여 하나님으로 무르익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존재감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좋음에 대한 만족감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이 충만해져서, 내 주권은 100% 하나님께로만 향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으로 무르익기 위한 우리의 몸부림이 오늘도 이어져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성막은 온실입니다.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하나의 공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완전히 차단하는 성막의 원형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임을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눈앞에 펼쳐지는 이 세상의 겨울 삭풍에도 마음을 노출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머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천국이라는 온실 속에서 하나님과 아름다운 시간을 가지며 새빨갛고 통통하게 너무너무 달콤한 딸기처럼 무르익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의 성막이요 나의 온실인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십자가 덮개로 차단되고 분리되고 격리되어서 온전히 하나님만으로 무르익을 수 있는 시간을 놓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도 하늘에서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가 하나도 어긋남 없이 다 이루어질 수 있는 은혜를 실감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