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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조춘숙
말 씀 사무엘상 6장 10-7장 2절
제 목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8]
사람 마음안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악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망설일 때가 많습니다.
어떤 것이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어서 망설이기는 하지만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사람입니다.
한번 선택하고 나면 돌이키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언제나 신중을 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37편 4-9절에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여호와를 기뻐하면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권능안에서 그 분이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시고 성도의 믿음을 빛같이 나타내 주시며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여호와앞에서 잠잠하며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요를 위해서 악한 꾀를 이루는 자가 혹시 여러분보다 빨리 잘 되는 것을 보더라도 하박국처럼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시라도 그런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멸시하는 것이며 사단을 도와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성도들이 바로 서 있어야만 악을 행하는 자들이 끊어지는 것도 볼 것이고 기업을 축복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을 들으면서 우리는 다시 축복의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낸 블레셋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암소가 벧세메스로 가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징계하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히 재앙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라는 다윗의 고백과 너무나 다른 선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 인생의 길을 맡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생명을 받은 성도라면 온전히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제작된 어떤 프로그램에서 집을 사러 다니는데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는 부자를 보았습니다.
집들이 워낙 커서 그 집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봐야만 정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헬리콥터를 타고 다닌다고 합니다.
인간들이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에서 그 모든 것을 보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쩌면 아름다운 집은 보지 못한 채 세상의 벽만 보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여러분 인생 전체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만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도 볼 수 있고 혹시 만날지도 모를 막다른 인생의 골목을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보시는 하나님은 막다른 길임을 이미 알고 계시는데 땅에 붙어 있는 인간은 넓은 길이라고 판단할 수 있기에 맡겨야 합니다.
땅만 바라보는 블레셋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벌어진 재앙만 보았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의 길을 짐승인 암소에게 맡겼습니다.
암소가 송아지를 떼어 놓고 떠나기 힘겨워하면서도 울며 울며 벧세메스로 곧장 가자 그 경계까지 따라가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재앙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한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언약궤를 전리품으로 빼앗았다는 기쁨보다는 재앙을 내리던 언약궤가 자기들에게서 떠난 것이 편하고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시험을 잘 보든 못 보든 시험이 끝나고 나면 즐거워하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시험을 잘 치루지 못하면 그 때부터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은데도 그것은 생각지 않고 당장 끝났다는 기쁨에 들뜬 철없는 아이처럼 블레셋사람들은 골치 아팠던 언약궤를 암소가 실고 떠나가자 기쁜 마음으로 다곤신에게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고난과 재앙을 블레셋에 내리신 것은 그들이 이방인이기 보다는 고난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안에 다곤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고난과 재앙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고난이 왔을 때 내안에 있는 다곤을 버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의를 빛같이 나타내실 것입니다.
고난과 연단은 다곤 때문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진노일 뿐입니다.
블레셋에 계셨던 언약궤는 어둠안에서 죄로 가득찬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려졌고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당하신 그 모습이 바로 세상인 블레셋안에 계셨던 언약궤가 멸시 당한 것과 같습니다.[사53;1-3]
블레셋사람과 같이 자신의 죄를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들 때문에 이 땅에서 간고를 겪고 질고를 당하신 것입니다.
블레셋사람들은 결코 우리와 무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들이고, 그들이 짓고 있는 죄가 지금도 우리가 짓고 있는 죄입니다.
블레셋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죄를 봐야만 동일한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이고, 율법을 통해 드러난 우리의 죄를 진리의 말씀안에서 회개할 때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칭해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했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목욕한 자가 발만 씻으면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땅에 있는 한 죄가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며, 주님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10장 35-36절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향해 드린 기도입니다.
언약궤가 함께 있다는 것은 두렵기도 하지만 축복을 받을 기회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언약의 증표인 거룩한 십계명 두 돌판이 보관 된 나무상자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상징하는 것이며 이스라엘백성들을 인도하시는 인도자이고 보호자의 역할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궤와 함께 행진할 때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이 말은 단순히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적을 만났을 때 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대적과 싸워달라는 기도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길을 여호와께 전적으로 맡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세상사람들의 부귀영화를 보고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했을 뿐입니다.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앞에서 도망하게 해 달라는 기도는 결국 하나님의 능력 뒤에 내가 숨을 것이니 보호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대적은 결국 모세와 이스라엘의 대적일 것입니다.
블레셋처럼 하나님의 대적이 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를 괴롭히고 힘겹게 하는 대적이 하나님의 대적이 되어야만 모세와 같이 기도할 수 있고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 모세가 패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패배입니다.
블레셋처럼 다곤이 이겼다고 하나님을 멸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늘 내편이 되어 승리하실 수 있도록 정직하고 성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믿음의 삶을 실패하면 결국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여러분을 공격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생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고 세상에서 형통하는 자를 보며 불평하지 말아야 하며 분을 그치고 노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기만 하면 도와달라고 떼를 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적으로 간주하시고 대신 싸워주실 것입니다.
블레셋처럼 언약궤를 보낼 것이 아니라 모세처럼 이스라엘에게 돌아와 함께 해 달라고 기도해야만 동행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신 것처럼 이사야 7장 14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을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그 분은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세가 그토록 돌아와서 함께 해 달라고 기도했던 여호와는 임마누엘이 되셔서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인간이 간절히 원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오신 그 분을 맞이하지 못한다면 여러분도 블레셋사람들처럼 짐승에게 태워서 멀리 보내게 될 것입니다.
온갖 고난과 연단을 몸소 감당하신 예수그리스도와 임마누엘 하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28장 13-14절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암소는 사랑하는 송아지를 떼어놓고 울며 울며 벧세메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면 암소가 송아지를 놓고 스스로 길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짐승은 본능적으로 새끼를 보호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새끼를 낳으면 태를 모두 먹어 버리는데 그것은 피 냄새를 맡고 다른 짐승들이 올까봐 새끼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산고도 잊은 채 새끼를 보호하는데만 마음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끼를 사랑하는 암소를 송아지와 강제로 떼어 놓은 것입니다.
보통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들은 아기를 생각만 해도 젖이 아프게 돌면서 젖이 그냥 흐르는데 이것이 모성입니다.
하나님은 자녀와 새끼를 키울 수 있도록 무조건적인 사랑의 마음을 어미에게 주신 것입니다.
만약 이런 사랑이 없다면 많은 아기들과 새끼들은 버림을 받아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암소는 젖이 불었을 때 새끼에게 가고파서 마음이 급했을 것입니다.
불은 젖이 흔들릴 때마다 암소는 송아지를 불렀을 것이고, 송아지 역시 어미를 애타게 찾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관계를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와 믿음안에서 반드시 버려야 하는 세상의 열매로 보시기 바랍니다.
암소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혔기 때문에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를 향해 곧장 걸어간 것입니다.
말씀으로 거듭난 믿음의 성도들이 세상의 욕심과 정욕을 버리고 하나님께 가는 길이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고 아픈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해서 쉽게 믿음의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두고 온 가장 사랑하는 세상의 열매 즉 재물과 권세와 내 의와 자존심과 자녀들까지 두고 떠나는 것이 힘겨워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소리 내어 울기도 하며, 기도로 부르짖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들린 암소처럼 갈 수밖에 없는 길이고, 마음에서 버려야 하는 세상의 유혹이 강해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곧장 가야 하는 것이 믿음으로 결단한 성도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 붙들려 믿음으로 걸음을 떼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암소가 송아지를 떼어 놓고 하나님의 역사안에서 곧장 걸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뒤를 돌아보지 말고 곧장 가야만 합니다.
그 암소는 벧세메스에 도착해서 번제와 화목제로 드려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번제의 제물이 된 암소는 완전히 불태워졌습니다.
그 피는 제단위에 부었으며 가죽은 제사장의 옷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암소보다 더 하나님을 잘 섬기고 계십니까?
새끼를 떼어놓고 걸음을 떼던 암소처럼 여러분의 목숨과 피와 가죽까지 모두 하나님께 드리려고 노력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하셨습니다.
자신 목숨과 물과 피까지 모두 죄인을 위해서 주셨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고자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암소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언약궤를 실고 간 것처럼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화목제물이 기꺼이 되신 것입니다.
그 분을 아직도 인간적인 계산속에서 사랑하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송아지를 떼어 놓고 따라왔으니까 대신 무엇으로 채워달라고 거래하고 계십니까?
물줄기교회 성도들만이라도 절대로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암소처럼 말씀을 놓지 말고 앞만 보고 가시기 바랍니다.
좌로나 우로나 잠깐 세상으로 치우치는 순간 사단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낚아챌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사단을 이길 수 없으며 사단이 보여주는 송아지를 보는 순간 돌이키게 될 것입니다.
육적인 열매를 놓는 것이 아파서 소리 내어 울지라도 앞으로 가야 하며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사단에게 굴복하게 될 것이고 영원한 사망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6장 19절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칠십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육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5장 22절에 언약궤에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룹들은 속죄소와 함께 언약궤를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속죄소는 언약궤를 덮는 덮개이고 그룹들은 금으로 만들어져서 두 날개로 속죄소를 덮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통해 역사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언약궤가 그 자체가 신상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시기 위해서 만드신 언약궤를 백성들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신처럼 생각하고 전쟁터로 가지고 간 것입니다.
율법은 다만 죄를 드러낼 뿐 죄를 대속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을 모르는 성도들이 율법을 행위로 지키기 위해서 정성을 다하며 그 행위를 자랑하고 자신의 의로 삼기 때문에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도 충만함이 없고 믿음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언약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그동안 언약궤를 빼앗겼던 이스라엘백성들의 신앙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시려는 것 같습니다.
언약궤를 암소가 새 수레에 실고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새 수레처럼 여러분도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자아와 자존심과 세상의 지식속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터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아주 기뻐하며 암소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레위인들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이 보내 온, 금 보물이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같이 두었습니다.
레위인이라면 하나님이 각 지역에 제사장으로 세운 사람일 것입니다.
그들이 언약궤를 모시고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린 것까지는 잘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언약궤 곁에 블레셋사람들이 보낸 금보물이 담긴 상자를 함께 놓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언약궤는 지성소에 모시고 대제사장도 일년에 몇 번밖에 볼 수 없는 거룩한 궤입니다.
지금 성막이 없어서 지성소에 모시지 못한다고 해도 블레셋사람들이 보낸 상자를 곁에 두었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이 아직도 언약궤를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 제사장이라면 블레셋사람들이 보낸 금독종 다섯 개와 금 쥐들은 멀리 버렸어야 합니다.
만약 그것들이 금이 아니라 돌이나 나무로 깎은 형상이었다면 언약궤 곁에 두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들은 금을 보는 순간 그 가치를 생각한 것입니다.
블레셋을 심판하신 거룩한 언약궤곁에 그들이 당한 재앙을 형상으로 만든 보물상자를 놓았다는 것은 언약궤를 빼앗길 때와 그들의 신앙은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의 신앙이 이 정도라면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말씀을 안다는 사람들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하나하나 조심하지 않으면 곁에서 그들을 보는 신앙이 어린 사람들이 죽기 때문입니다.
궤를 들여다 본 사람들이 [오만]칠십인이 죽었습니다.
이 재앙은 이미 예견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약궤에 대한 두려움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궤를 들여다 본 것입니다.
레위기 16장 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안 법궤 위 속죄소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위에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죽이거나 징계하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말씀해 주시고, 기다려주시고, 인도하신 후 그래도 말을 듣지 않을 때 징계하시거나 책망하시는 분입니다.
제사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궤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와도 죽는다고 하셨는데 들여다 본 것입니다.
성경은 그 앞에 휘장이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휘장이 찢어지지 않고 있었으므로 절대로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블레셋에 큰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이십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궤를 빼앗겼는지 이 궤가 어떻게 해서 돌아왔는지 전혀 관심이 없이 인간적인 호기심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 재물과 내 자존심과 내 자녀들을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놓고 함께 섬기고자 합니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하고 형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셨기 때문에 금덩이가 나에게 있는 것이라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진노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언약궤를 들여다 본 사람들은 제사장으로부터 법을 배우지 않았거나 배웠더라도 쉽게 생각했기 때문에 들여다봤을 것입니다.
그들이 알든 모르든 하나님께서 이미 법을 선포하셨고 그 법은 세상의 생과 사를 결정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법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 법을 지키면 축복이고 지키지 않으면 죽음입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생명을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묻고 계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제자들에게 어떻게든 말씀을 깨닫게 하고 싶어서 되도록 쉽게 비유로 설교하시고, 마음을 열어 하나님께 회개하고 찬양하며 기도하도록 돕는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 분만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고 생명이며 문이고 진리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든 말씀을 받고도 세상을 놓지 못해서 블레셋에 남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말씀을 쉽게 대하다가 성령을 범하는 죄를 짓겠습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들 앞에 블레셋사람들의 신앙과 언약궤를 들여다보던 사람들의 신앙과 아비나답의 집에 언약궤를 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했던 기럇여아림 사람들의 신앙을 놓고 물러가겠습니다.
궤를 거룩하게 섬긴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이십년동안 궤를 잘 모셨고 안식을 누렸습니다.
사무엘상 7장 1절에 여호와의 궤를 블레셋사람들처럼 들이 아니라 산에서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 놓고 그의 아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들판과 같은 신앙이 아니라 산과 같은 믿음을 가진 아비나답은 자신의 아들 엘리아살을 세상과 구별하고, 말씀으로 거룩하게 한 다음 궤를 모시도록 한 것입니다.
성경은 언약궤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마치며 간곡하게 부탁하기는 여러분은 아비나답과 같은 신앙으로 엘리아살처럼 구별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 이십년 동안 언약궤와 함께 있을지라도 평안한 영적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언제나 거룩하게 구별된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