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Spirit and Truth) 예배할지니라.”는 요 4:24절 말씀은,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있는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의 한 여인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화하시는 가운데서 나온 말씀으로, 합당한 예배의 장소(聖殿)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 하신 최종적 말씀이다. 즉, 요 4:20의 “우리 조상들은 이 산(Gerizim)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는 방탕한 사마리아 여인의 말에, 예배의 본질이 장소(Gerizim or Jerusalem)와 같은 외형적이고 부수적인데 있지 않음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런데 24절에 있는 말씀은, 예배와 관련하여 장소의 문제에 관해서만 논박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예배에 있어 모든 부수적인 것들과 구별되는 본질의 문제를 다루신 내용이다. 예배의 본질이자 핵심은 ‘진리’(ἀλήθεια)에 근거하여 드리는 영적인(πνευματι)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24절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들은 예배의 본질이 예수 성경의 진리에 있다고 확신할 수 있으며,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에 의해 작성된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은 제23장에서 “교회의 기도와 찬송, 정한 기도 시간에 관해” 진술하면서 이르기를 “예배 모임에서 가장 큰 부분은 복음을 가르치는 일에 할당되어야 한다.”고 했다.
한편, 20절 말씀은 남편을 다섯이나 두고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방탕한 여인이 할 만한 질문이 아니었다. 예배에 있어서 장소의 문제와 같이 외적인 부분이 중요했다고 한다면, 이미 그 여인은 부정하여 예배를 드릴 수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3절에서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기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곧 참된 예배의 근거가 그리스도이신 예수께 있으며, 그리스도는 또한 진리 가운데서 알려지는바, 이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영적으로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하여 언급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은 “예배와 안식일(주일)에 관해” 고백하며 2항에서 이르기를 “아담의 타락 이후로 중보자 없이는 예배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그 어떤 것도 중보가 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방탕한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25절)라는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26절) 하셨으니, 그처럼 영과 진리로써 드리는 진정한 예배는 순전히 ‘은혜’로 가능케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수가라 하는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41절) 믿고서, 그 여인에게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42절)고 한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의 수가라 하는 동네에 오셨을 때에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때가 알려졌으니, 히 1:2절에서 사도는 더욱 분명하게 이르기를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셨다고(whom he hath made heir of all things) 했다. 따라서 예배의 모든 본질도 예수 그리스도께 근거하는 것이며, 그처럼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히 6:1절은 “그리스도의 도(doctrine of Christ)의 초보(beginning)”라고 한 것이다. 아울러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the doctrine)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고 했으니, 그러한 말씀의 교리들(doctrine or principle) 외에 다른 것들을 기초로 삼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갈 4:10절에 언급하는 바와 같이 “날(주 중 일곱 번째 날인 ‘안식일’이나 셋째 여섯째 날인 ‘금식일’)과 달(매월 첫 째 날인 ‘월삭’)과 절기(유월절, 초막절, 오순절 등)와 해(매 칠 년째인 ‘안식년’과 사십 구년 째인 ‘희년’)를 삼가 지키”는 것은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unto impotent and beggarly rudiments)으로 돌아가, 히 6:6절에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을……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make a mock of him)인 것이며, 성경에 전혀 예(example)가 없을 뿐 아니라, 지키도록 이른바도 없는데도 불과하고 현대에까지 지켜지고 있는 부활절, 성탄절, 사순절 등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성경 말씀들의 교훈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 1항은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그 자신에 의해 제정되었고, 그 자신의 계시된 뜻에 따라 제한되어, 어떤 보이는 표상이나,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어떤 다른 방법아래, 인간의 상상과 고안, 혹은 사탄의 제안들에 따라, 하나님이 예배되지 않도록 하신다.”고 했는데, 이에 따라 나오는 예배의 원리가 바로 ‘예배의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로서, 참되고 바른 예배는 예배자의 기호나 전통과 같은 것들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 가운데 자신을 예배하는 방법으로 계시하신 대로만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히 10:8-9절에서 사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하셨으니, 더더욱 예배의 원리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신약의 교훈으로 제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현대의 많은 교파들(특히 루터란, 성공회, 감리교 등)에서 예배의 규정적 원리는 ‘규범적 원리’(normative principle of worship)로 대체되어 있는데, 규범적 원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가운데 자신을 예배하는 방법으로 계시하신 것은 그대로 따라야 하지만, 명백히 금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자유롭게 생각하여 행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규정적 원리에 따르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명하신 것들이며,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금하는 것이다.
사실 예배 때에 어떤 찬송이 적합한지, 성찬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세례는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 등을 성경은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으므로, 그처럼 성경에 언급하지 않은 사항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자유로이 판단하여 정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을 합당하게 생각할 수가 있다. 더구나 부활절이나 성탄절, 사순절과 같은 것들을 하지 말도록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것들은 우리가 임의로 제정할 수 있다고 보는 예배의 규범적 원리가 더욱 합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6항은 이르기를 “하나님 자신의 영광, 인간의 구원,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의도는,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거나, 또는 선하고 필연적인 결론에 의해, 성경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고 했으며, 아울러 “인간의 활동과 생활양식에 공통된, 하나님에 대한 예배, 그리고 교회의 정치에 관한, 어떤 상황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은 항상 준수되어야 하는, 말씀의 일반적인 법칙들을 따라서, 본성의 빛과 기독교인의 사려 분별에 의해 규제되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배의 규정적 원리를 따르는 장로교인들은, 성경에 명백히 언급한 것은 언급한 대로 행하며, 성경에서 명백하게 언급하지 않은 것이라도 성경의 일반적인 원리에 따라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것일 뿐, 우리가 임의로 결정하거나 판단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기독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부활절, 성탄절 혹은 사순절과 같은 특별한 성일(holy day)들은 예배의 규정적 원리 가운데서 볼 때에, 갈 4:10절 말씀의 일반적 원리를 적용하여 전혀 시행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더구나 사순절의 경우는 1세기 교회들에서도 전혀 시행한 바가 없으며, 다만 여러 의미들과 상징을 담아 우리의 종교심을 표현하는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요 4:23절에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왔으니, 이제 우리들은 24절 말씀대로 “영과 진리로 예배”함이 마땅하다. 그에 더하여서 붙여진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갈 4:10)는 온갖 것들은, 사도가 말한바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에 다름이 아니니, 그런 것들에 우리를 억지로 얽어맬 이유가 없다. 바로 그런 것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는 요 4:24절 말씀의 의미요, 또한 그런 가운데 우리들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한 요 8:32절 말씀이 나타내는바 진정한 자유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종교심은 그 대부분이, 늘 하나님을 영이신 분으로서가 아니라 물질적인 분으로 제한하고 가두어 섬기려는 해괴한 습성을 지닌 부패한 본성의 한 단면이다. 그러므로 영이신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진실하고 거짓 없는 섬김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 하나님을 나타내려는 교묘함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하는 섬김이요 예배여야 마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