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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농암에 대한 평가 1. 퇴계의 평가 농암과 남다른 인간적 문학적 교류를 가지고 그에 대해 풍부한 기록을 남긴 분은 퇴계이다. 농암, 퇴계는 다같이 안동부 예안현의 사족으로, 그들의 조상은 고려말 영천(永川), 진보(眞寶)로부터 각각 이주해 와서 관의 비호, 묵인 아래 토지를 개척하고 노비를 늘려서 가세를 이루어1), 선점(先占)한 토성인 광산김씨(光山金氏), 봉화금씨(奉化琴氏)와 더불어 이른바 예안 향내(鄕內)의 4대 가문을 형성시켰다. 이들은 대대로 중첩적인 인척관계를 맺었으며, 농암과 퇴계의 발신으로 인해 안동지방의 대표적인 가문으로 번창했다. 이런 연유로 농암의 영천 이씨 가문과 퇴계의 진성(眞城) 이씨 가문도 예외 없이 인척관계를 이루었는데, 농암과 퇴계와의 관계를 좀더 분명히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주변인물 몇 사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농암의 증조(參議公 坡)가 퇴계 조모 김씨(金氏)의 외조부라는 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본다면, 퇴계는 곧 파(坡)의 외현손이 되며 농암과는 7촌 족질(族姪)간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농암이 명종 4년(1549) 음 2월 한식일에 그의 증조인 참의공(參議公) 파(坡)의 묘에 입석을 하였는데 풍기군수로 있던 퇴계가 외현손으로 묘갈문을 짓고 제수를 차려 제사를 돕기까지 하였다.2) 둘째, 농암과 퇴계의 숙부 송재(松齋) 이우(李堣)가 함께 급제한 죽마고우란 점과 퇴계와 농암의 셋째 아들 하연(賀淵) 이중량(李仲樑)이 함께 과거에 급제한 동향의 벗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교류가 있었음을 들 수 있다. 셋째, 농암의 여섯 째 아들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 농암의 종손자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농암의 손서(孫婿)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농암의 사위인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이 모두 퇴계의 문도라는 점에서 인맥적으로도 두 사람의 관계가 대단히 밀접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3) 또 농암의 맏손자 청암 이원승(靑巖 李元承)은 퇴계와 동서간이니, 화산 권주(花山 權柱)는 이들 처조부이다. 이러한 관계 형성은 역시 두 사람간의 친분관계를 설명해 주는 주요 단서임에 틀림없으나 이보다 농암집과 퇴계집에 실린 내왕서찰과 수창시 등은 두 사람간의 밀접한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자료이다.4) 이런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서 볼 때 농암은 퇴계를 매우 아끼고 사랑하였으며, 퇴계는 평생 농암을 동향의 대선배로 존경하며5) 시와 학문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이미 언급한 하연 이중량과 형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은 퇴계의 이웃 마을에서 함께 자란 절친한 친구로 퇴계집에 편지만 각각 50, 150여 편이 보인다.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은 농암의 여섯 째 아들로 문재가 뛰어나서 일찍이 ‘선성삼필(宣城三筆)’로 알려졌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아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과 더불어 ‘안동의 3처사(處士)’로 손꼽힌다. 이들은 모두 퇴계의 제자들로 국문시조를 남기거나 일생을 순수처사로 일관해 버린 사실은 농암, 퇴계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고 있다.6) 두 분의 긴밀한 관계를 밝혀주는 시문들은 농암집과 퇴계집에 무수히 나타나지만, 여기서는 퇴계가 농암을 어떻게 평가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간략히 서술하고자 한다. 퇴계가 농암을 얼마나 존경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농암이 벼슬을 물러날 때 지은 전별시이다. 퇴계는 1542년 7월 16일에서 18일까지 연 사흘에 걸쳐 농암을 전별하는 시 4편을 지어, 그에 대한 지극한 사모의 정과 아울러 그를 뒤따르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데, 그 중 7언 율시 1편을 보자. 우리 마을(곧 예안)의 이참판 선생(李參判先生)께서 임시로 귀향7)하는데 장차 이를 바탕으로 벼슬에서 완전히 물러나려 하신다. 우리 고장 사람으로 서울에서 벼슬하는 사람들이 선생의 둘째 아들(李希樑임) 집에 모여 전별연을 열었는데 근체시(近體詩) 한 수를 지어서 선생에게 바친다.(吾鄕李參判先生假歸 將因以乞身 鄕人在朝者 會餞於先生仲子寓舍 奉呈近體詩一首, 퇴계집 권1, 장9~10) 引退非緣忘主恩 벼슬에서 물러나려 함은 임금님 은혜를 잊어서가 아니고 高年自合愛丘園 연세가 많으니 스스로 고향의 산천을 사랑함이 합당하다네 一鄕會餞簪纓簇 한 고장의 벼슬아치들이 모여서 선생을 전송하는데 二品辭歸齒德尊 2품 벼슬을 지니고 돌아가시니 연세와 덕망이 더욱 높다네 (이하 생략) 제법 긴 시제(詩題)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이참판선생(李參判先生)’이라는 다소 어색해 보이는 호칭이다. 한강가의 제천정(濟川亭) 송별연(조정의 고관대작이 거의 모두 참석하여 전례 없는 성황을 이루었음)이 있기 하루 전인 1542년 7월 16일에, 이황 형제를 비롯한 동향의 벼슬아치들은 따로 모여 별도의 전별연을 열었는데8) 위의 시는 이 전별연 석상에서 지은 것이다. 그런데 당시 전별시를 남긴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례대로 이현보를 ‘이참판’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이황만이 유별나게 ‘이참판선생’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벼슬아치는 그 벼슬을 부르는 것이 관례이므로, 비록 정승․판서를 지냈다 할 지라도 ‘정승선생’이나 ‘판서선생’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선생’이라는 말은 근대 이전 사회에서는 높은 학문이나 인품을 갖춘 사람에게만 붙이는 최고의 존칭으로 그 사용도 엄격하게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이참판선생’이라는 호칭 속에는 농암을 남들처럼 참판이라는 벼슬로만 부를 수 없는 퇴계의 개인적인 존경심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농암에 대한 이런 식의 호칭은 퇴계집에 다른 예가 더 있으나 생략함) 퇴계는 농암이 임종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같이 했고 임종의 순간 슬픔을 이기지 못해 다시는 분천을 향하지 않으리라고 술회했다.9) 그가 타계한 해에 퇴계는 아들 준(寯)과 제자 금계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지사(知事)선생께서 마침내 돌아가셨으니 나라와 집안의 불행으로 우리 부자는 이제 의지할 곳이 없다. 산이 무너지는 슬픔과 시사의 어려움이 겹치니, 금년이 무슨 시운으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10) 그의 사후 퇴계는 행장과 제문11), 만사를 짓고, 손수 제물을 차려서 치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퇴계가 그의 「행장」을 썼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퇴계는 그가 타계한 뒤 그의 「행장」을 씀으로써 그를 자신이 가장 존경하던 선배인 조광조, 이언적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 퇴계 이황과 같이 방대한 저술을 남긴 문장가가 일생동안 단지 여섯 편의 「행장」만을 썼다12)는 것은 매우 유래가 드문 일이다. 아마도 그는 죽은 이의 후손들로부터 「행장」을 써달라는 부탁을 수도 없이 많이 받았을 것이나, 「행장」만은 극히 선별적으로 썼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퇴계는 「행장」에서 농암을 어떻게 평가하였는지 그 일부를 살펴보자.
공은 날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용모가 범속하지 않았고, 성격이 호탕하여 구애됨이 없었고 사냥하기를 즐겨하여 학업에 전념하지 않았다. 20이 되어 향교에 들어가서 발분하여 독서를 했고 사장을 지으면 별로 힘들이지 않았는데도 공적은 남들보다 뛰어났다. … (공은) 남을 위하는 데는 부지런하고 자기를 위하여 데는 둔하며, 몸을 맑게 가지고 넘치는 것을 경계하여, 한 가지 경사가 있으면 근심이 낯빛에 드러나고, 한 번 작질(爵秩)이 오르면 조심하여 두려워하여 즐거워하지 않았다. 염담(恬淡)하여 욕심이 적어서, 무릇 입고 쓰는 물품이 간소하고 화려하지 않아서 서생(書生)이나 다름없었다. 평소에는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나아가 정침(正寢)에 거처하였는데, 종일토록 주렴과 책상이 깨끗하였으니, 비록 춥고 더울 때라도 그러하였다. 자제와 비복에게는 치우치게 은애(恩愛)함이 없었고, 혼인에는 문벌있는 집을 희구하지 않았다, 성품은 비록 고상하고 간결하나 사람을 대우함에 어리석고 빈천함을 가리지 않고 표리가 한결 같아서, 혹 술상을 차리고 초청하면 구태여 사양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살 때에는 사(私)로써 공이 흔들리게 하지 않았다. … 황(滉)은 시골에서 성장하였는데, 공이 보잘 것 없다 하지 않고 매양 가르치고 좋게 대하였으므로, 부축해 모시고 좇아 놀기를 여러 번 하였다. 금년 봄에, 황이 서울에서 돌아와 공을 임강사(臨江寺) 반도단(蟠桃壇) 위에서 두 번 뵈옵자, 극히 기뻐하고 상쾌하게 여기는지라, 이제부터 가히 문하에서 모시고 길이 심부름할 수 있을 줄로 여겼더니, 집과 나라가 불행하여 갑자기 이 일을 당하니, 아아! 애통하도다. (퇴계집, 권48, 「숭정대부행지중추부사 농암이선생행장」) 퇴계는 「행장」에서 성격이 호방하여 검속하는 점이 적다는 기록과 사냥을 좋아하여 약관에 이르기까지 학업에 전념하지 않았다는 점 등 농암의 약점일 수도 있는 부분도 밝혔다. 하지만 자녀들의 혼사에 권문세가를 희구하지 않았다는 점과 고향에서 살 때 사(私)적인 것으로 공적인 것을 범하지 않았다는 점 등 그의 인품을 마냥 돋보이게 하는 글도 많다. 칭송 일변도가 아니라 얼마간의 단점일 수도 있는 부분도 적은 퇴계의 용기와 공정성은 평가된다. 「행장」 뿐만 아니라 시(詩)에서는 ‘일월(日月) 같은 신선(神仙)’ 혹은 ‘진은(眞隱)’으로 평가했으며, 특히 「어부가」의 발문에서 “바라보면 신선과 같았으니, 아! 선생은 이미 그 진락(眞樂)을 얻었다”라는 찬사를 하기도 했다. 2. 유서, 실록 등에서의 평가 유서나 왕조실록 등에서 농암을 어떻게 평가하였는지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경(卿)은 충과 효가 모두 온전하며 나이와 덕이 함께 고매하니, 천하(天下)의 대로(大老)요, 당세(當世)의 원구(元龜)라. … 나의 선대 임금을 도왔기에 큰 업적이 사람들에게 남아있고, 저 시골로 물러났으나 고풍(高風)으로 세속을 격려시켰노라. 벼슬이 높아져도 부(富)가 넘치는 누는 없었고, 명성이 드높아도 몸소 물러나는 영광은 있었노라. 신명(神明)이 그 수(壽)와 건강을 도왔고, 인심(人心)이 그 풍채를 흠모했도다. 깨끗하게 물러 나와 뜻을 길렀으니 이미 명철보신(明哲保身)을 넘었고, 고요히 보고 먼저 살폈으니 반드시 나라를 다스릴 원대한 계책이 많았노라. 세속 밖에 높고 깨끗함을 우뚝 세웠고, 국외(局外)에 공명함을 홀로 보았노라. 나이 더욱 많아지니 덕도 더불어 더욱 높아 졌노라. 내 대통을 이으매 그대 얼굴 보기를 갈망하노라. … 빨리 말에 멍에를 매어 이 바램을 위로하라. 나는 옛적부터 품어온 지극한 생각을 이루고 경도 또한 죽더라도 남은 여한이 없을 것이니, 빨리 역마를 타고 올라 올 일이다. (명종의 「유서(諭書)」 - 농암집 권5, 「선소교서(宣召敎書)」, 가정 33년 정월 18일) 현보는 영달을 좋아하지 않고 어버이를 위하여 언제나 외직을 구하여 나갔다. 어버이가 죽은 뒤에는, 지위가 2품이고 나이도 많지 않았으나, 조정에 있지 않으려고 여러 차례 물러나 휴양하기를 빌었는데, 마침내 윤허를 받아 물러났다. 식자들은 그를 ‘스스로 만족해 할 줄을 아는 뜻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중종실록 권96, 36년 8월 경신조)
이현보는 일찍이 늙은 어버이를 위해 외직(外職)을 요청하여 여덟 군현(郡縣)을 다스렸는데 모든 곳에서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늙어서 부모의 상을 당해 예를 다했고, 상을 마치자 다시 조정에 들어와 여러 벼슬을 거쳐서 참판에 이르렀다. 하루아침에 호연히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사람들이 다투어 말렸으나 소매를 뿌리치고 하직하고는 배를 타고 자유로이 떠났다. 배 안에는 오직 화분(花盆) 몇 개와 바둑판 하나뿐이었다. 집에 있으면서 담담하게 지냈고, 틈이 있으면 이웃을 찾아가 도보(徒步)로 상종하면서 전사옹(田舍翁)으로 자처(自處)하였다. 집 앞에 큰 시내가 있어 배를 띄울 만했는데, 가끔 손님과 더불어 중류(中流)에서 노[枻]를 두드리며 두건(頭巾)을 뒤로 높이 제쳐 쓰고 서성거리니, 사람들이 바라보기에 마치 신선과 같았다. (중종실록 권98, 37년 7월 신해조)
지중추부사 이현보(李賢輔)가 졸하였다. 이현보는 영천(永川) 사람이다. 약관(弱冠)에 글읽기를 시작했는데 글을 지으매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연산조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는데, 사관은 임금의 언어와 동작을 기록하므로 엎드려 멀리 있음은 불편하다는 것을 들어 조금 가까이 있게 하기를 계청하였다. 폐주(廢主, 연산군)는 마음에 거슬리면서도 그대로 윤허했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일을 말하다가 뜻을 거슬러 귀양갔다. 중종조에는 여러 관직을 거쳐 사간에 이르렀고 그 뒤에는 여러 차례 어버이 봉양을 위해 외직(外職)으로 나갔는데 가는 데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고 호조 참판으로 있다 은퇴하여 고향에서 지내었다. 중종조와 인종조에 그의 조용히 은퇴한 것을 아름답게 여겨 품계를 올려 소환했지만 모두 오지 않았다. 금상조(今上朝)에도 명소(命召)했지만 또한 극력 사양하고 이어 상소하여 일을 논했는데 당시의 병폐를 아주 잘 맞추었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담박하고 욕심이 없어 시골에 있을 때에는 일찍이 사사로운 일로 관에 청탁하는 일이 없었으며 오직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근래에 만년의 지조가 완전하였던 사람으로 이현보를 으뜸으로 친다. (명종실록 권18, 10년 6월 신묘조) 나아가, 인재(忍齋) 홍섬(洪暹)은 덕(德)․수(壽)․관(官)을 두루 갖춘 ‘달존(達尊)’으로, 송기수(宋麒壽)는 ‘유선(儒仙)’으로, 김희삼(金希參)은 ‘문장이 금세(今世)의 이두(李杜, 이백과 두보)’라고 평가했다. 요약하여 보면, 지우(知友)나 후배들은 ‘달존(達尊)’․‘유선(儒仙)’․‘금세의 이두(李杜)’․‘대선생(大先生)’․‘일월(日月)같은 신선(神仙)’․‘진은(眞隱)’으로 평가했으며, 명종 임금은 ‘천하대로(天下大老)’․‘당세원구(當世元龜)’라는 찬사를 보냈고, 전별연시 도성사람들은 ‘근고(近古)에 없는 성사(盛事)’라고 했고, 왕조실록 등에서는 ‘염퇴(恬退, 깨끗한 은퇴)’․‘근래에 만년의 지조가 가장 완전하였던 사람’․‘청백리(淸白吏)’ 등으로 평가하였다. 이처럼 농암에게 쏟아진 아낌없는 찬사는 많지만, 왕조실록을 비롯한 어느 문집에도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찾을 수 없음을 볼 때, 그는 진정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다고 단언할 수 있겠다. 어떤 인물이나 그 인물과 관련된 문화재(유물이나 유적 등)를 보고 받는 느낌은, 무엇보다도 보는 사람의 안목이나 생각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도산서원 유물전시관인 옥진각에는 ‘선기옥형(璇璣玉衡)’이 있다. 간재 이덕홍이 퇴계 선생의 명을 받고 만들었다는 선기옥형을 보고서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 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일주일을 머무르면서 깊은 고심에 잠겼다는 천문학자도 있기 때문에 실로 천차만별일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농암이나 농암과 관련된 문화재(예를 들면, 애일당이나 영정 등)를 살펴보고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그것은 기본적으로는 각자의 능력과 자유에 속하는 사항이다. 하지만 어설픈 부정확한 이해로 어떤 인물에 대해 속단한다거나 대충 한 번 곁눈질하는 것으로 문화재 감상을 끝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그 인물이나 문화재에 대해 결례를 범한 것은 아닐까? 사실 농암 선생은 왕조실록을 비롯한 어느 문집에도 부정적인 평가가 없는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이기에,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음만 먹고 그의 행적이나 그와 관련된 문화재를 세심하게 탐구해 본다면 그들의 생각과 생활 전반에 무언가 유익한 선물(?)을 제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 문헌】 ○ 이성원, 「聾巖과 退溪의 文學的 交遊樣相」, 농암 이현보의 문학과 사상,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형설출판사, 1992. ○ 이종호, 「농암 이현보의 강호시가와 풍류」, 안동문학 제22집, 한국문인협회 안동지부, 1999. ○ 강호문학연구소, 聾巖 李賢輔의 江湖文學, 2000. ○ 문화관광부․한국문화예술진흥원, 7월의 문화인물 이현보(주승택著, 소책자), 2001. ○ 안동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聾巖 李賢輔의 文學과 思想, 형설출판사, 1992.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聾巖 李賢輔의 문학과 영남사림(문화인물 농암이현보기념 학술회의 논문집), 2001. ○ 농암 홈페이지(www.nongam.com) ○ 退溪集(李滉), 聾巖集(李賢輔), 조선왕조실록 외 다수.
20) 농암 이현보의 동생인 이현우의 증손자로, 퇴계 이황의 고제인 간재 이덕홍의 장자(長子)이다. 21)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李樹健의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一潮閣, 1995 ) 165~168면 및 239~269면을 참조. 22) 聾巖集 續集 「年譜」 권1, 장27, 선생83세조, “己酉二月寒食日 立石于曾祖參議公墓 退溪先生以外玄孫 時爲豊基郡守 書碣文 辦需助祭”(민족문화추진회, 표점․영인 한국문집총간 17, 1988, 468면)
23) 도산급문제현록에 실린 퇴계문도 중에는 농암의 아들이 3명(이윤량, 이숙량, 이연량), 손자가 5명(이원승, 이영승, 이선승, 이극승, 이광승), 증손이 2명(이사원, 이사순), 농암의 조카가 1명(이국량), 농암의 종손(從孫)이 3명(이명홍, 이복홍, 이덕홍)으로 영천 이씨가 인근의 어떤 성씨보다도 많았다. 24) 농암이 남긴 120 편이 좀 넘는 시 가운데 거의 40여 편이 퇴계와 주고받았거나 관련이 있는 시이고, 서(書) 18편 중 17편이 모두 퇴계와 주고받은 편지이다. 물론 퇴계집에도 농암과 관련된 많은 시문들이 실려있다.
25) 퇴계는 농암에게 ‘大先生’이란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퇴계집 권15, 장21, 「與李公幹曁諸兄弟」, “大先生平日 好於山間水曲 班荊野話 此事久廢 今欲修之(대선생께서는 평일에도 산수를 따라 반형의 정담을 나누기를 좋아하셨는데, 이 일을 폐하신 지가 오래 되었으니 이제 그 자리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 班荊 : 친구가 도중에서 서로 만나 옛 친구들의 정담을 논하는 것을 말함.
26) 李性源, 「聾巖과 退溪의 文學的 交遊樣相」, 聾巖 李賢輔의 文學과 思想 安東文化文庫 2 (安東大 安東文化硏究所 編, 螢雪出版社, 1992), 256~257면. 27) 중종 임금은 이현보가 76세 되던 1542년 더 이상 그를 조정에 붙잡아 두는 것이 무리임을 알고 동지중추부사라는 산직(散職, 실제로 근무하지 않는 벼슬을 주어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용인하였으나 언제든지 필요하면 다시 돌아온다는 조건이 붙었기 때문에 이 시의 제목에도 ‘임시로 귀향함(假歸)’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이다. 28) 1542년 7월 16일, 당시 경기도사(京畿都事)를 지내던 농암의 아들 하연(賀淵) 이중량(李仲樑)이 부친의 귀향연을 베풀고 예안 출신으로 서울에서 벼슬하고 있던 김연(金緣)․이해(李瀣)․이황(李滉)․남백인(南伯仁)과 풍기 출신의 안정(安珽) 등을 초대하였다. 29) 퇴계집 권2, 장27. 「知中樞聾巖李先生挽詞二首」 중 “限慟不忍過西門” 30) 答寯書曰 知事先生竟至損館 邦家不幸 我輩無所依仰. 答黃錦溪書曰 山頹靡仰 時事搶攘 不知今是何年何運而至此耶. 이 기록은 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도산전서에는 보이지 않으나 성균관대학교에서 간행한 퇴계집에는 이 사실이 보인다(答寯의 을묘년 편지에 참조).
31) 퇴계가 지은 「제문(祭文)」에는, “나(滉)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은 향리의 소생으로 문에 올라 학업한 것이 저 안동향교로부터 시작되었네.(愚蒙如滉 鄕里小生 登門質業 自彼府황) … 가까이 조그만 집을 지어 매양 이끌고 가르쳐 주셨으며 항상 부축하고 모심을 허락하셨네.(得近巖扃 每蒙提誨 常許扶擎)”라는 구절이 보인다.(농암집 권4, 「부록」)
32) 이황은 조광조, 이언적, 권벌, 이현보, 자신을 그토록 곁에 두고 싶어했던 명종 대왕과 이현보의 손주 사위인 비명에 간 아까운 제자 황준량의 「행장」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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