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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유행(遊行) 및 기연(機緣)
대사는 본시 민현( 縣) 땅의 어른이시다. 어려서 본주(本州) 땅
황벽산으로 출가하셨다. 스님의 이마 사이에 솟아 오른 점은 구슬과
도 같았고, 음성과 말씨는 낭랑하고 부드러웠으며, 뜻을 깊고도 담박
하셨다. 뒷날 천태산(天台山)에 노니시다가 한 스님을 만났는데, 처
음인데도 오래 사귄 사람 같았다. 이윽고 함께 길을 가다가 개울물
이 갑자기 불어난 곳에 이르렀다. 그때 대사께서는 석장을 짚고 멈
추시니, 그 스님이 대사를 모시고 건너려고 하자, 대사께서 말씀하셨
다.
"형씨가 먼저 건너시오."
그러자 그 스님은 곧 삿갓을 물 위에 띄우고 곧장 건너가 버렷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내 어쩌다 저 나한 좀놈하고 짝을 했을까? 한 몽둥이로 때려죽
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어떤 스님이 귀종(歸宗)을 하직하는데 귀종이 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려는가?"
"제방에 다섯 맛의 선[五味禪]을 배우러 갑니다."
"제방은 다섯 맛의 선이지만 나의 이곳은 오직 한 맛의 선이라
네."
"어떤 것이 한 맛의 선입니까?"
그러자 귀종이 문득 후려쳤다. 그 스님이 소리쳤다.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
귀종이 다르쳤다.
"말해 봐라, 말해봐라."
그 스님이 입을 열려고 하자 귀종은 또 몽둥이를 내리쳤다. 그 스
님이 뒤에 대사의 회하에 이르자 대사께서 물었다.
"어느 곳에서 오는가?"
"귀종에서 옵니다."
"귀종이 무슨 말을 하던가?"
그 스님이 앞날의 이야기를 그대로 말씀드리니, 대사께서는 곧 바
로 법좌에 올라가 그 인연을 들어서 말씀하셨다.
"마조스님께서 84명의 선지식을 배출하긴 했으나, 질문을 당하면
모두가 똥이나 뻘뻘 싸는 형편들인데, 그래도 귀종이 조금 나은 편
이다."
대사께서 염관(鹽官 ?-842)의 회하에 있을 때에 대중(大中) 황제
는 사미승으로 있었다. 대사께서 법당에서 예불을 드리는데 그 사미
승이 말하였다.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고,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으며, 대
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는 것이어늘, 장로께서는 예배하시어 무엇
을 구하십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아니하고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 아니하
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아니하면서, 늘 이같이 예배하느니라."
"예배는 해서 무얼 하시렵니까?"
그러자 대사께서 갑자기 사미승의 뺨을 올려치니 그 사미승은
"몹시 거친 사람이군"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에 무슨 도리가 있길래 네가 감히 거칠다느니 섬세하다느니 뇌
까리느냐!"하고 뒤따라 또 뺨을 붙이니, 사미는 도망가 버렸다.
대사께서 제방을 행각하실 적에 남전(南泉 734-843)에 이르렀다.
하루는 점심 공양을 할 때 발우를 들고 남전의 자리에 가서 앉으셨
다. 남전이 내려와 보고는 대사께 물었다.
"장로께서는 어느 시절에 도를 행하였오?"
"위음왕 부처님 이전부터입니다."
"그렇다면 내 손자뻘이 되는구먼."
그러자 대사는 곧바로 내려와 버렸다.
또 어느 날 대사께서 외출하려고 할 때에 남전이 말하였다.
"이만큼 커다란 몸집에 조금 큰 삿갓을 쓰셨군!"
"삼천대천 세계가 모두 이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남전의 대답이로다."
그러자 대사는 삿갓을 쓰고 곧 가버렸다.
또 하루는 대사가 차당(茶堂)에 앉아 있는데 남전이 내려와 물었
다.
"정과 혜를 함께 배워서 부처님의 성품을 밝게 본다 하는데, 이
뜻이 무엇이오?"
"하루 종일 한 물건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레 바로 장로 견해인가요?"
"부끄럽습니다."
"장물[奬水] 값은 그만두어도 짚신 값은 어디서 받으란 말이오?"
그러자 대사는 문득 쉬어 버렸다.
뒷날 위산(瀉山 771-853)이 이 대화를 가지고 앙산(仰山 803-887)
에게 물었다.
"황벽이 남전을 당해내지 못한 게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황벽에게는 범을 사로잡는 기틀이 있었음을 아
셔야 합니다."
"그대의 보는 바가 그만큼 장하구나!"
하루는 대중이 운력을 하는데 남전이 대사께 물었다.
"어디로 가는가?"
"채소 다듬으러 갑니다."
"무엇으로 다듬는가?"
대사가 칼을 일으켜 세우자 남전이 말하였다.
"그저 손님 노릇만 할 줄 알지 주인 노릇은 할 줄 모르는군."
그러자 대사는 세 번을 내리 두드렸다.
하루는 새로 온 스님 다섯 명이 동시에 서로 보게 되었다. 그 중
에서 한 스님만은 예배를 올리지 않고 그저 손으로 원상(圓相)을 그
리면서 서 있었다. 이것을 본 대사가 그에게 말씀하셨다.
"한 마리의 훌륭한 사냥개라고 말하는 줄 아느냐?"
"영양(羚羊)의 기운을 찾아왔습니다."
"영양이란 기운이 없거늘 너는 어디서 찾겠느냐?"
"영양의 발자욱을 찾아 왔습니다."
"영양은 발자욱이 없거늘 너는 어디서 찾겠느냐?"
"그렇다면 그것은 죽은 영양입니다."
이 말을 듣자 대사는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튿날 법좌에
올라 설법을 끝내고 물러나면서 물었다.
"어제 영양을 찾던 스님은 앞으로 나오너라."
그 스님이 바로 나오자 대사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어제 너와 대화를 하다가 끝에 가서 미처 다하지 못한 말
이 있는데, 어떤가?"
그 스님이 말이 없자 대사께서 말을 이었다.
"본분 납승(本分衲僧)인가 했더니, 그저 뜻이나 따지는 사문이로
구나."
대사께서는 일찍이 대중을 흩으시고, 홍주(洪州) 당의 개원사(開
元寺)에 머물고 계셨다. 이 때에 상공 배휴거사가 어느 날 절로
들어오다가 벽화를 보고 그 절 주지스님에게 물었다.
"이것은 무슨 그림입니까?"
"고승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고승들의 겉모습은 여기에 있지만, 고승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 절 주지스님이 아무런 대답을 못하자 배휴가 "이 곳에 선승은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 "한 분이 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상공은
마침내 대사를 청하여 뵙고, 전에 주지스님에게 물었던 일을 스님게
여쭈었다. 그러자 대사가 불렀다.
"배휴!"
"예!"
"어디에 있는고?"
상공은 이 말 끝에 깨치고 대사를 다시 청하여 개당설법을 하시
게 하였다.
師 本是 中人 幼於本州黃蘗山 出家 額間降起如珠 音辭
朗潤 志意沖澹 後遊天台 逢一僧如舊識 乃同行 屬□水暴
漲 師倚杖而止 其僧 率師同過 師云 請兄先過 其僧 卽浮
笠於水上便過 師云 我却共箇稍子作隊 悔不一棒打殺
有僧辭歸宗 宗云 往甚處去 云 諸方 學五味禪去 宗云 諸
方 有五味禪 我這裏 祇是一味禪 云 如何是一味禪 宗便打
僧云 會也會也 宗云 道道 僧 擬開口 宗又打 其僧 後到師
處 師問 甚�處來 云歸宗來 師云 歸宗 有何言句 僧遂거
前話 師乃上堂거此因緣云 馬大師 出八十四人善知識 問著
箇箇 地 祇有歸宗 較些子
師在鹽官會裏 大中帝爲沙彌 師於佛殿上禮佛 沙彌云 不著
佛求 不著法求 不著衆求 長老禮拜 當何所求
師云 不著佛求 不著法求 不著衆求 常禮如是事 沙彌云 用
禮何爲 師便掌 沙彌云 太序生 師云 這裏是什�所在 說序
說細 隨後又掌 沙彌便走
師行脚時到南泉 一日齋時 捧鉢向南泉位上坐 南泉 下來見
便問 長老什�年中行道 師云 威音王巳前 南泉云 猶是王
老師孫在 師便下去
師一日出次 南泉 云 如許大身材 戴箇些子大笠 師云 三千
大千世界總在裏許 南泉云 王老師 師戴笠便行
師一日 在茶堂內坐 南泉 下來 定慧等學 明見佛性 此理如
何 師云 十二時中 不依倚一物 泉云 莫便是長老見處� 師
云 不敢 泉云 漿水錢 且置 草鞋錢 敎什�人還 師便休 後
山거此因緣 問仰山 莫是黃蘗 他南泉不得� 仰山云
不然 須知黃蘗 有陷虎之機 山云 子見處得與�長
一日 普請 泉問 什�處去 師云 擇菜去 泉云 將什�擇 師
揷起刀子 泉云 只解作賓 不解作主 師 三下
一日 五人新到 同時相看 一人 不禮拜 以手 一圓相而立
師云 還知道好隻獵犬� 云 尋羚羊氣來 師云 羚羊 無氣
汝向什�處尋 云 尋羚羊 來 師云 羚羊 無 汝向什�處
尋 云 尋羚羊跡來 師云 羚羊 無跡 汝向什�處尋 云 與�
則死羚羊也 師便休 來日陞座退 問 昨日尋羚羊僧出來 其
僧便出 師云 老僧 昨日 後頭未有語在 作�生 其僧無語
師云 將謂是本色衲僧 元來祇是義學沙門
師曾散衆在洪州開元寺 裴相公 一日入寺行次 見壁 乃問
寺主 這 是什� 寺主云 高僧 相公云 形影 在這裏 高
僧 在什�處 寺主無對 相公云 此間 莫有禪僧� 寺主云
有一人 相公遂請師相見 乃거前話問師 師召云 裴休 休應
諾 師云 在什�處 相公於言下有省 乃再請師開堂
19. 술찌꺼기 먹는 놈
대사는 이에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모조리 술찌꺼기나 먹는 놈들이다. 이처럼 행각을 한답
시고 남들의 비웃음이나 사면서 모두 이렇게 안이하게 세월을 보내
고 있구나! 세월이 한 번 가면 언제 오늘이 또 오겠느냐? 이 큰 당
나라 땅 안에 선사(禪師)가 없음을 너희는 아느냐?"
이 때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제방에서 지금 선사들이 세상에 나와 여러 대중들을 바로 이끌
어 지도하시거늘, 어찌하여 스님께서는 선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
까?"
"내 말은 선(禪)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선사(禪師)가 없다는 말
이니라."
뒷날 위산이 이 인연에 대해 앙산에게 물었다.
"그래 네 생각은 어떠냐?"
"거위왕이 젖을 고르는 솜씨는 본디 집오리 무리와는 다릅니
다."
그러자 위산이 말하기를, "이것은 참으로 가려내기 어렵느니라"고
했다.
上堂云 汝等諸人 盡是 酒糟漢 與�行脚 笑殺他人 總似
與�容易 何處更有今日 汝還知大唐國裏 無禪師� 時有僧
問 祇如 諸方 見今出世 匡徒領衆 爲什� 却道無禪師 師
云 不道無禪 祇道無師 後 山거此因緣問仰山 云 意作�
生 仰山云 鵝王擇乳 素非鴨類 山云 此實難辨
20. 배휴의 헌시
어느 날 배상공이 불상 한 구를 대사 앞에 내밀면서 호궤(胡 )합
장하며 말씀드렸다.
"청하옵건대 스님께서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배휴!"
"예!"
"내 너에게 이름을 다 지어 주었노라."
그러자 배상공은 곧 바로 절을 올렸다.
하루는 상공이 시(詩) 한 수를 대사께 지어올리자 대사께서 받으
시더니 그대로 깔고 앉아 버리면서 물었다.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몰라야만 조금은 낫다 하겠지만, 만약 종이와 먹으로써
형용하려 한다면 우리 선문(禪門)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상공의 시가 이러하였다.
대사께서 심인을 전하신 이후로
이마에는 둥근 구슬 몸은 칠척 장신이로다.
석장을 걸어 두신 지 십년 촉나라 물가에서 쉬시고
부배(浮杯)에서 오늘날 장( )의 물가를 건너왔네.
일천 무리의 용상대덕들은 높은 걸음걸이 뒤따르고
만리에 뻗친 향그런 꽃은 수승한 인연을 맺었도다.
스승으로 섬겨 제자 되고저 하오니
장차 법을 누구에게 부촉하시렵니까?
대사께서 대답하여 읊으셨다.
마음은 큰 바다와 같아 가이 없고
입으론 붉은 연꽃을 토하여 병든 몸 기르네.
비록 한 쌍의 일 없는 손이 있으나
한가한 사람에게 일찍이 공경히 읍(揖)한 적이 없었노라.
裴相 一日 托一尊佛於師前胡 云 請師安名 師召云 裴休
休應諾 師云 與汝安名竟 相公便禮拜 相公 一日 上詩一章
師接得便坐却 乃問 會� 相公云 不會 師云 與�不會 猶
較些子 若形祇墨 何有吾宗 時曰 自從大士傳心印 額有圓
珠七尺身 掛錫十年棲蜀水 浮杯今日渡 濱 千徒龍象 隨高
步 萬里香花 結勝因 願欲事師爲弟子 不知將法付何人 師
答曰 心如大海無邊際 口吐紅蓮養病身 雖有一雙無事手 不
曾祇揖等閑人
21. 여래의 청정선
"도를 배우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잡된 학문과 모든 반연을 물리
쳐야 한다. 그리하여 결정코 구하지도 말고 집착하지도 않아서, 아주
깊고 깊은 법을 듣더라도 맑은 바람이 귓가에 잠깐 스쳐지나간 듯이
여기어, 그것을 쫓아가서는 안된다. 이것이 바로 여래선(如來禪)에
매우 깊숙히 들어가 참선을 한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 것이다.
위로부터 역대의 조사들께서 오로지 한마음[一心]만을 전하셨다. 결
코 두 법이 있을 수 없으니 마음이 그대로 부처임을 바르게 가르치
신 것이다. 등각이니 묘각이니 하는 지위와 차례를 단박에 뛰어 넘
어서 절대로 또 다른 생각으로 흘러들어가서는 안된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우리 선종의 가문에 비슷하게나마 들어오는 것이다. 나희 경
망한[取次] 사람들이야 이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는가? 그러므
로 말하기를 '마음으로 헤아릴 때에는 그 헤아리는 마음의 마구니에
묶여 버리고, 한편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을 때에는 또 헤아리지 않
는 마음의 마구니에 묶인다. 그렇다고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는 것도
아닐 때에는 또 역시 헤아리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의 마구니에 묶
인다. 그러므로 마구니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마음에서
저절로 나온다'고 한 것이니라. 이것은 오직 신통없는 보살은 그 발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니라.
만약 언제든지 마음에 항상하다는 견해[常見]가 있으면 그것이
바로 상견외도(常見外道)이며, 만약 일체의 법은 공(空)하다고 관
(觀)하고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견해에 빠지면 그것이 바로 단견외도
(斷見外道)이다. 그러므로 '3계는 오직 마음이고 만법은 오직 식(識)
이다[三界唯心 萬法唯識]'고 하는 것은 외도와 삿된 견해를 가진 사
람들을 제도하기 위한 말일 뿐이다. 만약 최고의 법신자리에서 본다
면 그것은 3현(三賢), 10성(十聖)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말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의 어리석음을 끊으셨
는데, 하나는 미세하게 아는 어리석음이며 또 하나는 극히 미세하게
아는 어리석음이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는 이미 이와 같으셨거늘, 다
시 무슨 등각이니 묘각이니 하는 차례를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저 밝음만을 추종하고 어둠을 싫어하며, 그저 깨우침만
을 얻으려 하고 번뇌와 무명은 받으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부
처님은 깨달은 분이고 중생들은 망념이 남아 있는 존재이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이렇게 생각하면 백천 겁이 지나도록 다만 6도에 계속
윤회하여 쉴 날이 없으리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본래 근원의
자성을 비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너희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부처 또한 밝음도
아니요 중생 또한 어둠도 아니다. 왜냐하면 법에는 밝음도 어둠도
없기 때문이다. 부처라고 해서 또한 강하지도 않고 중생이라고 해서
약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법에는 강함도 약함도 없기 때문이다. 또
부처라고 해서 지혜로운 것도 아니고, 중생이라 해서 어리석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법에는 지혜로움도 어리석음도 없기 때문이다.' 너
희들이 나타나서는 모두들 선을 안다고 말들 하지만 입을 벌리기만
하면 그대로 병통이 생기고 만다. 그리하여 근본은 말하지 않고 지
말만을 말하며, 미혹함은 말하지 않고 그저 깨달음만 말하며, 본체는
말하지 않고 작용만을 말하는데 제대로 말한 것이라고는 도무지 없
다.
저 일체 법은 본래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금 또한 없는 것도
아니어서 반연이 생겼다고 해서 있는 것도 아니며 반연이 사라졌다
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다. 근본이라 할 만한 것이 있지 않으니, 근
본은 근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마음 또한 마음이 아니니, 마음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모양 또한 모양이 아니니, 모양은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법도 없고 본래 마음도
없어야만 비로소 마음이라 하는 마음법을 알게 된다'고 했다. 법은
곧 법이 아니요 법 아님이 곧 법이며, 법도 없고 법 아님도 없다. 그
러므로 이것이 바로 마음이라 하는 마음법이니라.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허깨비인 줄 분명히 알면
곧 과거의 부처님에게로 흘러들어 간다. 과거의 부처님은 또한 있지
도 않고 미래의 부처님 또한 없지도 않다. 그렇다고 또한 미래의 부
처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한다. 반면에 현재의 생각 생각이 일정하게
머물지 않으니 현재의 부처님이라고도 부르지 못한다. 부처님이라는
생각이 만약 일어날 때에, 그것을 두고 깨달은 것이라거나 혹은 미
혹한 것이라든가, 또 이것은 좋은 것이거나 혹은 나쁜 것이라고 사
량분별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문득 그것에 집착하여 끊어 버리려 하
지도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 한 생각 갑자기 일어나면 수천
겹으로 자물쇠를 채우더라도 가둘 수가 없고, 수만발의 오랏줄로도
그것을 묶어 두지 못한다. 이미 이와 같은데 어찌 그것을 없애려고
하고 그치게 하겠는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의 이 아지
랑이같은 의식이 어떻게 저 생각을 끊어 버려서, 아지랑이 같은 데
다 비유하겠느냐. 너희가 가깝다고 말하면 시방세계를 두루 찾아도
구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멀다고 말하면, 볼 때에 단지 눈 앞에 있어
서 쫓아가면 더더욱 멀리 가 버리며, 피하려 하면 또 쫓아와서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다.
그러므로 알라. 모든 법의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여 그것을 근심하
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앞 생각이 범부이여, 뒷 생각이 성인이라
는 말처럼 손을 뒤집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3승교(三乘敎)의 종극
(終極)이다. 그러나 우리 선종의 가르침에 의거하면 앞 생각 또한 범
부가 아니고 뒷 생각 또한 성인이 아니며, 앞 생각이 부처가 아니고
뒷 생각이 중생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모든 빛깔이 부처님의 빛깔이
며 모든 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소리이다. 한 이치[理]를 들면 모든
이치가 다 그러하므로, 한 현상[事]을 보아 모든 현상을 보며, 한 마
음을 보아 모든 마음을 보며, 한 도를 보아 모든 도를 보아서 모든
것이 도 아님이 없다. 또 한 티끌을 보아 시방세계의 산하대지를 보
며, 한 방울의 물을 보아 시방세계에 있는 모든 성품의 물을 보며,
또한 일체의 법을 보아 일체의 마음을 본다. 모든 법이 본래 공(空)
해서 마음은 없지도 않다. 없지 않음이 바로 묘하게 있는 것[妙有]이
고, 있음[有] 또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있지 않음이 바로 있는 것이
니, 이것이 바로 참으로 공하면서 오묘하게 있음[眞空妙有]이니라.
그렇다면 시방세계가 나의 '한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며, 티끌처럼
많은 모든 국토들이 나의 '한생각'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안과 밖을 구별하여 말하겠는가? 마치 벌꿀의 성질이 달콤해서
모든 꿀은 다 그러하므로, 이 꿀은 달고 저 꿀은 쓰다고 말할 수 없
는 것과 같다. 이런 일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
를, '허공이 안팎이 없으니 법의 성품도 또한 그러하며, 허공이 중간
이 없으니 법의 성품도 그와 같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그대로 중생이니라. 중생과 부처가 원래로 한 본
체이며, 생사열반과 유위(有爲), 무위(無爲)가 원래 동일한 본체이며,
세간, 출세간과 나아가 6도, 4생과 산하대지와 유정, 무정이 또한 같
은 한 본체이다. 이렇게 같다고 말하는 것은 이름과 모양이 역시 공
(空)하여 있음도 공하고 없음도 공하여, 간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온 세계가 원래 똑같이 공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중생
을 제도할 부처가 어디 있으며, 부처의 제도를 받을 중생이 어디에
있겠느냐? 무엇 때문에 이러한가? 만법의 자성이 본래 그렇기 때문
이다. 그러나 만약 저절로 그렇다는 견해를 내면 곧 자연외도(自然
外道)에 떨어지고, 만약 나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다는 견해를
내면 3현, 10성의 지위에 떨어진다. 너희들이 지금 어찌 한 자, 한
치를 가지고 끝없는 허공을 재려 하겠는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하기
를 '법과 법이 서로 다닫지 못하나니, 법은 스스로 공적함으로써 그
자리에 본래부터 머물러 있으며, 그 자리에서 스스로 참되다'고 하였
느니라.
몸이 공하므로 법이 공하다고 하며, 마음이 공하므로 성품이 공하
다고 하며, 몸과 마음이 모두 공하므로 법의 성품이 공하다고 하며,
나아가 천 갈래로 다른 갖가지의 말들이 모두 다 너희의 본래 마음
을 여의지 않은 것이다. 지금 보리와 열반, 진여와 불성, 이승과 보
살 등을 말하는 것은 모두 누런 나뭇잎을 가리켜 돈이라 하는 주먹
과 손바닥의 비유에 불과하다. 주먹을 펴면 천상세계와 인간세계의
모든 대중들이 모두 그 속에 아무 것도 없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에 티끌이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본래 한 물건도 없어서 3세(三世) 역시 있는 바 없다. 그러
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단도직입으로 이러한 뜻을 알아야만 된다.
그러므로 달마스님께서 인도로부터 이 땅에 오시어 여러 나라를 거
치셨지만, 오직 찾아 얻으신 것은 혜가스님 한 분뿐이었다. 혜가스님
에게 마음의 도장[心印]을 은밀히 전하였으니, 이는 너희의 본래 마
음에 새기신 것이다. 마음으로써 법에 새기며 법으로써 마음에 새겨
서, 마음이 이미 이 같으며 법 또한 이 같아서 진제(眞際)와 같고 법
의 성품과 평등하다. 법의 성품이 공한 가운데 누가 수기(授記)하는
사람이며, 누가 부처가 되는 사람이여, 누가 법을 얻는 사람이겠는
가? 부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보리란 몸으로 얻을 수 없으
니, 몸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또 마음으로도 얻을 수 없는데, 마
음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그허다고 성품으로도 얻을 수 없으니,
성품은 곧 바로 근본원류의 자성이 청정한 부처[本源自性淸淨佛]이
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부처로써 다시 부처를 얻을 수 없으며, 모양
이 없는 것으로 다시 모양이 없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또한 공함으
로써 공함을 얻을 수 없고, 도로써 도를 얻을 수 없다. 본래 얻은 것
이 없어서 얻은 것이 없음도 얻을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말씀하시
기를 '얻을 만한 한 법도 없다'고 하신 것이다. 이는 다만 너희로 하
여금 본 마음을 분명히 찾게 하고자 한 것이다.
당장 요달했을 때라도 요달한 모양을 얻을 수 없어서, 요달함이
없는 모양도, 요달하지 않음이 없는 모양도 또한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법을 얻은 사람은 곧 얻으나, 얻은 사람이라도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하고, 얻지 못한 사람이라도 또한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한
다. 이와 같이 법을 예로부터 몇 사람이나 알 수 있었겠느냐? 그러
므로 말하기를 '천하에 자기를 잊은 사람이 몇이더냐?'고 하였다. 지
금 한 기틀, 한 경계, 한 경전, 한 가르침, 한 세대, 한 시기, 한 이
름, 한 글자를 6근의 문 앞에서 알 수 있다면, 꼭두각시와 무엇이 다
르겠느냐. 한 이름, 한 모양 위에서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 사람이 갑
자기 나타난다면 온 시방세계를 다 찾는다 해도 이런 사람은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노라. 그와 버금갈 만한 사람이 둘
도 없으므로 조사의 자리를 이으며, 또한 부처님의 종자라고 일컫나
니, 순수하여 전혀 잡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왕이 부처를 이룰 때
에 왕자도 역시 따라서 출가한다'고 했는데, 이 뜻을 알기가 매우 어
렵느니라. 다만 너희에게 아무 것도 찾지 말도록 할 뿐이니, 찾으면
곧 잃어버린다.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산 위에서 한 번 소리를 질러
메아리가 울리면 곧장 산 아래로 달려 가지만 끝내는 아무 것도 찾
지 못하고, 거기서 또 한 번 소리를 지르자 산 위에서 메아리가 울
리며, 그는 다시 산 위로 달려 가는 것과 같다. 이렇게 천생만겁을
소리를 찾고 메아리를 좇는 사람일 뿐이어서 허망하게 생사에 유랑
하는 자이니라. 만약 소리가 없으면 메아리도 생기지 않는다. 열반이
란 들음도 앎도 없고 소리도 없어서 자취도 발자욱도 모두 끊긴 것
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겨우 조사의 방 근처에 인접한 것이라 하겠
다."
夫學道者 先須屛却雜學諸緣 決定不著 聞甚深法 恰似淸風
屆耳 瞥然而過 更不追尋 是爲甚深入如來禪 離生禪想 從
上祖師 唯傳一心 更無二法 指心是佛 頓超等妙二覺之表
決定不流至第二念 始似入我宗門 如斯之法 汝取次人 到這
裏 擬作魔生學 所以道 擬心時 被擬心魔縛 非擬心時 又被
非擬心魔縛 非非擬心時 又被非非擬心魔縛 魔非外來 出自
心 唯有無神通菩薩 足跡 不可尋 若以一切時中 心有常
見 卽是常見外道 若觀一切法空 作空見者 卽是斷見外道
所以 三界唯心 萬法唯識 此猶是對外道邪見人說 若說法身
以爲極果 此對三賢十聖人言 故 佛斷二愚 一者 微細所知
愚 二者 極微細所知愚 佛旣如是 更說什�等妙二覺來 所
以 一切人 但欲向明 不欲向闇 但欲求悟 不受煩惱無明 便
道 佛是覺 衆生是妄 若作如是見解 百劫千生 輪廻六道 更
無斷絶 何以故 爲謗諸佛本源自性故 他分明向 道 佛且不
明 衆生且不闇 法無明闇故 佛且不彊 衆生且不弱 法無彊
弱故 佛且不智 衆生且不愚 法無愚智故 是 出頭 總道解
禪 開著口 便病發 不說本 祇說末 不說迷 祇說悟 不說體
祇說用 總無 話論處 他一切法 且本不有 今亦不無 緣起
不有 緣滅不無 本亦不有 本非本故 心亦不心 心非心故 相
亦非相 相非相故 所以道無法無本心 始解心心法 法卽非法
非法卽法 無法無非法 故是心心法 忽然瞥起一念 了知如幻
如化 卽流入過去佛 過去佛 且不有 未來佛 且不無 又且不
喚作未來佛 現在念念不住 不喚作現在佛 佛若起時 卽不擬
他是覺是迷 是善是惡 輒不得執滯他斷絶他 如一念瞥起 千
重關鎖鎖不得 萬丈繩索索他不住 旣若如是 爭合便擬滅他
止他 分明向 道 爾焰識 作�生擬斷他 喩如陽焰 道
近 十方世界求不可得 始道遠 看時 祇在目前 擬 他 他
又轉遠去 始避他 他又來逐 取又不得 捨又不得 旣若
如此 故知一切法性 自爾 卽不用愁他慮他 如言前念是凡
後念是聖 如手蒜覆一般 此是三乘敎之極也 據我禪宗中 前
念且不是凡 後念且不是聖 前念不是佛 後念不是衆生 所以
一切色 是佛色 一切聲 是佛聲 거著一理 一切理皆然 見一
事 見一切事 見一心 見一切心 見一道 見一切道 一切處無
不是道 見一塵 十方世界山河大地皆然 見一適水 卽見十方
世界一切性水 又見一切法 卽見一切心 一切法本空 心卽不
無 不無卽妙有 有亦不有 不有卽有 卽眞空妙有 旣若如是
十方世界不出我之一心 一切微塵國土不出我之一念 若然
說什�內之與外 如蜜性첨 一切蜜皆然 不可道這箇蜜첨 餘
低苦也 何處有與�事 所以道허空 無內外 法性 自爾 虛空
無中間 法性 自爾 故衆生卽佛 佛卽衆生 衆生與佛 元同一
體 生死涅槃 有爲無爲 元同一體 世間出世間 乃至六道四
生 山河大地 有性無性 亦同一體 言同者 名相 亦空 有亦
空無亦空 盡恒沙世界 元是一空 旣若如此 何處有佛度衆生
何處有衆生受佛度 何故如此 萬法之性 自爾故 若作自然見
卽落自然外道 若作無我無我所見 墮在三賢十聖位中 如
今 云何將一尺一寸 便擬量度虛空 他分明向汝道 法法 不
相到 法自寂故 當處自住 當處自眞 以身空故 名法空 以心
空故 名性空 身心 總空故 名法性空 乃至千途異說 皆不離
之本心 如今 說菩提涅槃 眞如佛性 二乘菩薩者 皆指葉
爲黃金 拳掌之說 若也展手之時 一切大衆 若天若人 皆見
掌中 都無一物 所以道 <本來無一物 何處有塵埃> 本旣無
物 三際 本無所有 故學道人 單刀直入 須見這箇意 始得
故達摩大師從西天來至此土 經多少國土 祇覓得可大師一人
密傳心印 印 本心 以心印法 以法印心 心旣如此 法亦如
此 同眞際等法性 法性空中 誰是授記人 誰是成佛人 誰是
得法人 他分明向 道 菩提者 不可以身得 身無相故 不可
以心得 心無相故 不可以性得 性卽便是本源自性天眞佛故
不可以佛更得佛 不可以無相更得無相 不可以空更得空 不
可以道更得道 本無所得 無得亦不可得 所以道 無一法可得
祇敎 了取本心 當下了時 不得了相 無了無不了相 亦不可
得 如此之法 得者卽得 得者 不自覺知 不得者 亦不自覺知
如此之法 從上巳來 有幾人 得知 所以道 <天下 忘己者有
幾人> 如今 於一機一境 一經一敎 一世一時 一名一字 六
根門前 領得 與機關木人 何別 忽有一人出來 不於一名一
相上 作解者 我說此人 盡十方世界覓這箇人 不可得 以無
第二人故 繼於祖位 亦云釋種 無雜純一 故言 <王若成佛時
王子亦隨出家> 此意大難知 祇敎 莫覓 覓便失却 知癡人
山上叫一聲 響從谷出 便走下山 及尋覓不得 又叫一聲
出上響又應 亦走上山上 如是千生萬劫 祇是尋聲逐響人
虛生浪死漢 汝若無聲卽無響 涅槃者 無聞無知無聲 絶迹絶
踪 若得如是 稍與祖師隣房也
22. 양의 뿔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임금님의 창고 안에 이런 칼이 전혀 없다'고 하셨는데, 바라옵건
대 그 뜻을 가르쳐 주십시오."
"임금님의 창고란 바로 허공의 성품[虛空性]이니라. 그것은 시방의
허공세계를 받아들여 모두가 다 너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 또
다른 말로는 임금님의 창고를 허공장보살이라고도 일컫는다. 네 만
약 그것에 대해 있고 없음과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을 말한다면,
모두가 양의 뿔이 되느니라. 양의 뿔이란 바로 네가 구하여 찾는
것이니라."
배상공이 물었다.
"임금님의 창고 속에는 진짜 칼이 있습니까?"
"그것도 역시 양의 뿔이니라."
"임금님의 창고 속에 애초부터 진짜 칼이 없다면, 왕자가 그 창고
에서 진짜 칼을 가지고 다른 나라로 나간 것이어늘, 어찌하여 스님
께서는 그저 없다고만 말씀하십니까?"
"칼을 가지고 나갔다는 것은 여래의 심부름꾼에 비유한 것이다.
네 만약 임금님의 창고 속에서 왕자가 진짜 칼을 가지고 나갔다고
말한다면, 창고 안에 있는 허공도 함께 따라 갔을 것이니라. 그러나
본원의 허공성(虛空性)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인데, 그
것이 무슨 말이겠느냐? 설령 네가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양
의 뿔이니라."
問 如王庫藏內 都無如是刀 伏願誨示 師云 王庫藏者 卽虛
空性也 能攝十方虛空世界 皆總不出 心 亦謂之虛空藏菩
薩 若道是有是無 非有非無 總成羊角 羊角者 卽 求覓
者也
問 王庫藏中有眞刀否 師云 此亦是羊角 云 若王庫藏中 本
無眞刀 何故云王子持王庫中眞刀 出至異國 何獨言無 師云
持刀出者 此喩如來使者 若言王子持王庫中眞刀出去者
庫中應空去也 本源虛空性 不可被異人將去 是什�語 設
有者 皆名羊角
23. 여래의 심부름꾼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가섭존자는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받았으니, 말을 전하는 사람
이 아닙니까?"
"그렇다."
"만약 말 전한 사람이라면 양의 뿔을 여의지 못한 사람이겠군요."
"가섭존자는 스스로 본래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양의 뿔이 아
니니라. 만약 여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곧 여래의 뜻을 알게 되며, 여
래의 겉모습을 보는 사람은 곧 여래의 심부름꾼에 속하는 자로서 말
전하는 사람이 되느니라. 아난존자가 20여년 동안 부처님의 시자로
있었으면서도 다만 여래의 겉모양만 보았기 때문에 부처님으로부터
'세간을 구제하는 것을 보는 자는 양의 뿔을 벗어나지 못하니라'는
꾸지람을 들었다."
問 迦葉受佛心印 得爲傳語人否 師云 是 云 若是傳語人
應不離得羊角 師云 迦葉 自領得本心 所以不是羊角 若以
領得如來心 見如來意 見如來色相者 卽屬如來使 爲傳語人
所以阿難 爲侍者二十年 但見如來色相 所以被佛訶云 <唯
觀救世者 不能離得羊角>
24. 무분별지는 얻을 수 없다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문수보살이 부처님 앞에서 칼을 든 것은 어찌 된 까닭입니까?"
"500명의 보살들이 전생을 아는 지혜를 얻어서 지난 과거 생의
업장을 볼 수 있었다. 500이란 너의 오음으로 된 몸이니라. 이 숙명
을 보는 장애 때문에 부처가 되기를 구하고 보살, 열반을 구하게 되
었느니라. 그러므로 문수보살이 지혜로써 헤아리는 칼을 가지고 부
처를 봄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베어 버렸다. 그래서 '아주 잘 베
어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칼입니까?"
"헤아리는 마음이 칼이다."
"헤아리는 마음이 이미 칼이라고 한다면 부처를 봄이 있다고 생
각하는 마음을 베어 버린 것인데, 그렇다면 능히 베는 그 마음은 어
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너의 분별이 없는 지혜로써 보는 것이 있다고 분별하는 마음을
베느니라."
"부처를 봄이 있다느니 혹은 부처를 구함이 있다느니 하는 마음
을 내는 경우에는 분별이 없는 지혜의 칼로써 베는 것이지만, 그 지
혜의 칼이 있는 것은 어찌 해야 합니까?"
"분별 없는 지혜로써 있다는 견해[有見]와 없다는 견해[無見]를 베
어 버리면, 분별 없는 지혜도 또한 얻을 수 없느니라."
"지혜로써 지혜를 자르지 말며, 칼로써 칼을 자르지 마소서."
"칼이 스스로 칼을 베어서 칼과 칼이 서로 베어지면, 칼 또한 얻
을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혜가 스스로 지혜를 베어서, 지혜와
지혜가 서로 베어지면 지혜 또한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어미와 자식
이 함께 죽는 것도 역시 이와 같느니라."
問 文殊執劍於瞿曇前者 如何 師云 五百菩薩 得宿命智 見
過去生業障 五百者 卽 五陰身 是 以見此夙命障故 求佛
求菩薩涅槃 所以文殊將智解劍 害此有見佛心故 故言 善
害 云 何者是劍 師云 解心 是劍 云 解心旣是劍 斷此有見
佛心 祇如能斷見心 何能除得 師云 還將 無分別智 斷此
有見分別心 云 如作有見有求佛心 將無分別智劍斷 爭奈有
智劍在何 師云 若無分別智 害有見無見 無分別智 亦不可
得 云 不可以智更斷智 不可以劍更斷劍 師云 劍自害劍 劍
劍相害 卽劍亦不可得 智自害智 智智相害 卽智亦不可得
母子俱喪 亦復如是
25. 견성이란?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자성을 보는 것[見性]이란 무엇입니까?"
"성품이 곧 보는 것이요, 보는 것이 곧 성품이니, 성품으로써 다
시 성품을 보지 말라. 또 들음이 그대로 성품이니 성품으로서 다시
성품을 들으려 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성품이라는 견해
를 내며, 능히 성품을 듣고 능히 성품을 보아서 문득 같다거나 다르
다는 견해를 일으킨다. 저 경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볼 수 있는 바
는 다시 보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너는 어찌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얹겠느냐? 경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마치 소반 위에 구슬을 흩어 놓
는 것과 같아서, 큰 구슬은 크게 둥글며, 작은 구슬은 작게 둥글어서
각각의 구슬끼리 알지 못하며, 각각 서로를 방해 하지 않아서, 일어
날 때에 <내가 일어난다> 말하지 않으며, 없어질 때에 <내가 없어
진다>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4생과 6도가 이렇지 않은
경우가 없느니라.
또 중생이 부처를 보지 못하고 부처가 중생을 보지 못하며, 4과
(四果)가 4향(四向)을 보지 못하고 4향이 4과를 보지 못하며, 3현(三
賢), 10성(十聖)이 등각과 묘각을 보지 못하고 등각과 묘각이 3현,
10성을 보지 못하며, 나아가 물이 불을 보지 못하고 불이 물을 보지
못하며, 땅이 바람을 보지 못하고 바람이 땅을 보지 못하며, 중생이
법계에 들지 못하고 부처가 법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법의
성품은 가고 옴이 없으며 능히 보는 것도 보여지는 대상도 없다. 능
히 이와 같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본다느니 혹은 나는 듣
는다느니 말하겠느냐?
무엇보다도 선지식의 회하에서 깨닫도록 하여라. 선지식이 나에게
법을 설하시며,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셔서 중생들에게 법을
설해 주신다. 그러나 가전연은 다만 생멸하는 마음을 가지고 실상
(實相)의 법을 전하였기 때문에 유마거사에게 꾸중을 들었느니라.
분명히 말하건대, 어떤 법이라도 본래로 속박하지 않는데 어찌 풀어
제칠 필요가 있겠으며, 또 본래 물들지도 않는데 굳이 맑게 할 필요
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말하기를, '모든 법의 참다운 모양이 이와 같
거늘 어찌 말로써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네가 지금 다만 시
비하는 마음, 염정(染淨)을 따지는 마음을 내고 하나하나마다 알음알
이를 배워 얻어서, 온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결정코
취하려고 하는 것을 곧 보게 되는데, 도대체 누가 마음의 눈을 갖추
었으며,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 말해 보아라. 만약 이렇게 한다면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현격하게 다른 것이니, 다시 무슨 견성(見性)
을 논하겠느냐?"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이미 성품이 그대로 보는 것이며 보는 것이 그대로 성품이라고
스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성품이 본래 장애가 없어야 하며
제한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물건이 가로막히면 곧
보지 못하고, 또 허공이 가운데서 가까우면 보고 멀어지면 보지 못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은 네가 망령되게 다르다는 견해를 낸 것이니라. 만약 물건
이 앞에 가로막히면 보지 못하고 그것이 없어지면 본다고 생각하여,
성품을 가로막는 장애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잘못이니라. 성품
이란 보는 것도 보지 않는 것도 아니며, 법 또한 보는 것도 보지 않
는 것도 아니다. 만약 견성한 사람이라면 어느 곳인들 나의 본래 성
품이 아님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6도, 4생과 산하 대지가 모두 내
성품의 맑고 본체 그대로이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물질[色]을 보
는 것이 곧 마음[心]을 보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물질과 마음이 다
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모양에 집착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알아
서 눈 앞의 물건을 없애고 나서야 비로소 보려고 하는 자들은 2승
(二乘)의 무리 가운데 떨어진, 의지하여 통하려는 견해이니라. 허공
가운데서 가까우면 보고 멀면 볼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외도에
떨어지고 만다. 분명히 말하노니,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며, 가깝
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것이니, 가까우면서도 볼 수 없는 것이 중생
들의 성품이니라. 가까이 있어도 오히려 그렇거늘, 멀어서 볼 수 없
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이겠느냐?"
問 如何是見性 師云 性卽是見 見卽是性 不可以性更見性
聞卽是性 不可以性更聞性 祇 作性見 能聞能見性 便有一
異法生 他分明道 所可見者 不可更見 云何頭上更著頭
他分明道 如盤中散珠 大者大圓 小者小圓 各各不相知 各
各不相 起時 不言我起 滅時 不言我滅 所以 四生六道
未有不如時 且衆生 不見佛 佛不見衆生 四果不見四向 四
向不見四果 三賢十聖 不見等妙二覺 等妙二覺 不見三賢十
聖 乃至水不見火 火不見水 地不見風 風不見地 衆生 不入
法界 佛不出法界 所以法性 無去來 無能所見 能如此 因什
� 道我見我聞 於善知識處 得契悟 善知識 與我說法 諸佛
出世 與衆生說法 迦 延 祇爲以生滅心 傳實相法 被淨名
呵責 分明道 一切法 本來無縛 何用解他 本來不染 何用淨
他 故云實相 如是 豈可說乎 汝今祇成是非心染淨心 學得
一知一解 天下行 見人便擬定當取 誰有心眼 誰彊誰弱
若也如此 天地懸殊 更說什�見性
問 旣言性卽見見卽性 祇如性自無障 無劑限 云何隔物卽
不見 又於虛空中 近卽見遠卽不見者 如何 師云 此是 妄
生異見 若言隔物不見 無物言見 便謂性有隔 者 全無交涉
性且非見非不見 法亦非見非不見 若見性人 何處不是我之
本性 所以 六道四生 山河大地 總是我之性淨明體 故云見
色便見心 色心 不異故 祇爲取相作見聞覺知 去却前物 始
擬得見者 卽墮二乘人中依通見解也 虛空中 近則見遠則不
見 此是外道中收 分明道非內亦非外 非近亦非遠 近而不可
見者 萬物之性也 近尙不可見 更道遠而不可見 有什�意旨
26. 한 생각 일지 않으면 곧 보리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소생(小生)이 알지 못하겠사오니, 큰스님께서는 가르쳐주십시오."
"내게는 한 물건도 없어서, 이제까지 남들에게 한 물건도 전혀 가
르켜 준 바가 없다. 너는 한량없는 세월 전부터 그저 남에게 가르침
을 받아서 이해하려고만 하니, 이야말로 스승과 제자가 함께 왕의
난[王難]에 빠지는 것이 아니겠느냐. 너는 다만 이 사실을 알아야 한
다. 한 생각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받음이 없는 몸이며, 한
생각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생각 없는 몸이니라. 절대로 인
위적인 조작에 휩쓸리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행함이 없는 몸이며,
요리조리 따지고 분별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식(識)이 없는 몸이
니라. 그러므로 네가 달리 한 생각 일으키기만 하면 그대로 12인연
에 빠져들어서, 무명이 행을 연하여 서로 인(因)이 되기도 하고 또
과(果)가 되기도 하며, 나아가서는 늙음과 죽음이 서로서로 인이 되
기도 하고 과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선재동자가 110곳에서 선지
식을 구했지만, 다만 12인연 속에서만 구하다가 최후에 미륵보살을
만났었다. 그러자 미륵보살이 문수보살을 찾아뵈라고 다시 가르켜
주었다. 문수보살이란 다름 아닌 바로 너의 근본 무명이니라.
만약 마음과 마음이 각기 달라서 그저 밖으로만 선지식을 구하는
자는, 한 생각이 갓 일어났다가는 꺼지고 꺼졌다가는 또 생긴다. 그
러므로 너희 비구들도 생, 노, 병, 사 하기도 하여 인과의 값을 치뤄
오면서 마침내는 다섯 갈래[五聚)의 생멸을 당한다. 다섯 갈래란 5음
(五陰)이니 한 생각 일어나지 않으면 곧 18계(界)가 공하여 이 몸
그대로가 보리의 꽃 열매이며, 또한 이 마음이 그대로 신령스런 지
혜이며 신령스런 보리좌이니라. 그러나 만약 집착하는 바가 있으면
이 몸은 곧 송장이 되고, 마음은 송장 지키는 귀신이 되고 만다."
問 學人 不會 和尙 如何指示 師云 我無一物 從來 不曾將
一物與人 無始已來 祇爲被人指示 覓契覓會 此可不是弟
子與師 俱陷王難 但知一念不受 卽是無受身 一念不想
卽是無想身 決定不遷流造作 卽是無行身 莫思量卜度分別
卽是無識身 如今 裳別起一念 卽入十二因緣 無明緣行
亦因亦果 乃至老死亦因亦果 故 善財童子一百一十處求善
知識 祇向十二因緣中求 最後 見彌勒 彌勒 却指見文殊 文
殊者 卽汝本地無明 若心心別異 向外求善知識者 一念裳生
卽滅 裳滅又生 所以 汝等比丘 亦生亦老 亦病亦死 酬因答
果已來 卽五聚之生滅 五聚者 五陰也 一念 不起 卽十八界
空 卽是便是菩提華果 卽心便是靈智 亦云靈臺 若有所住著
卽身爲死屍 亦云守死屍鬼
27. 둘 아닌 법문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유마거사가 잠자코 있으니 문수보살이 찬탄하기를 '이것이야말로
둘 아닌 법문[不二法門]에 드는 것이로다'했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
니까?"
"둘 아닌 법문이란 바로 너의 본 마음이니라. 그러니 법을 설했느
니 혹은 설하지 않았느니 하는 것은 기멸(起滅)이 있는 것이다. 말
없을 때에는 나타내 보인 것이 없으므로 문수보살이 찬탄한 것이니
라."
"유마거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소리가 단멸된 것이 아닙
니까?"
"말이 곧 침묵이고 침묵이 그대로 말이다. 말과 침묵이 둘이 아니
기 때문에 소리의 실제 성품도 역시 단멸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라.
문수보살이 본래 들음[本聞]도 역시 단멸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일찌기 말하지 않은 때가 없다'고 하
신 것은 여래의 말씀이 곧 법이요 법이 곧 말씀이니, 법과 말씀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나아가 보신, 화신, 보살, 성문과 산하대지
와 물, 새, 수풀이 일시에 법을 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도 설법
이고 침묵도 설법이어서, 종일 설법하나 일찍이 설한 바가 없다. 이
미 이와 같다면 말없음으로서 근본을 삼느니라."
問 淨名 默然 文殊讚歎云是眞入不二法門 如何 師云 不二
法門 卽 本心也 說與不說 卽有起滅 無言說時 無所顯示
故 文殊讚歎 云 淨名 不說 聲有斷滅否 師云 語卽默默卽
語 語默不二故 云聲之實性 亦無斷滅 文殊本聞 亦無斷滅
所以如來常說 未曾有不說時 如來說卽是法 法卽是說 法說
不二故 乃至報化二身菩薩聲聞 山河大地 水鳥樹林 一時說
法 所以語亦說默亦說 終日說而未嘗說 旣若如是 但以默爲
本
28. 한 마음의 법 가운데서 방편으로 장엄하다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성문이 3계에서는 모습을 감추지만, 보리에 있어 감추지 못하는
까닭은 어찌된 것입니까?"
"여기서 말한 모습이란 바탕이니라. 성문들이 다만 3계의 견도혹
(見道惑)과 수도혹(修道惑)을 끊을 수 있어 이미 번뇌를 여의긴 하
였으나, 보리에 있어서는 모습을 감추지 못한 까닭이니라. 그래서 보
리 가운데서 마왕에게 붙들리어 숲 속에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보
리를 미세하게 본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니라. 그런데 보살들은 3계
와 보리에 있어서 결정코 버리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느니라. 취하지
않으므로 7대(七大)가운데서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하고, 버리지않으므
로 외도, 마구니가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한다. 네 다만 한 법에라도
집착하려 하면 흔적[印子]이 벌써 생기게 된다. 있음[有]에다 도장을
찍으면 곧 6도, 4생의 무늬가 나오고, 공(空)에다 도장을 찍으면 곧
모양 없는 무늬가 나타나느니라. 만약 모든 사물에 도장을 찍지 않
으면, 이 도장은 허공과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어서, 공(空)이 본
래 공이 아니고 도장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닌 줄을 다만 알지니라.
시방 허공 세계의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심은 번갯불을 보
는 것과 같으며, 꿈틀거리는 모든 벌레를 보는 것은 메아리와 마찬
가지이며, 시방의 셀 수 없는 많은 국토를 보는 것은 흡사 바다 가
운데 한 방울 물과 같은 것이다. 매우 기폭 깊은 법문을 듣더라도
허깨비와 같아서,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으며, 법과 법이 서로 다
르지 않고, 나아가 천만 가지의 경론(經論)이 오로지 너의 한 마음
때문이니라. 모든 모양을 결코 취하지 않으므로, 말하기를 '이와 같
은 한 마음 속에서 방편으로 부지런히 장엄한다'고 하였느니라."
問 聲聞人 藏形於三界 不能藏於菩提者 如何 師云 形者
質也 聲聞人 但能斷三界見修 已離煩惱 不能藏於菩提 故
還被�王於菩提中捉得 於林中宴坐 還成微細見菩提心也
菩薩人 已於三界菩提 決定不捨不取 不取故 七大中覓他不
得 不捨故 外魔亦覓他不得 汝但擬著一法 印子早成也 印
著有 卽六道四生文出 印著空 卽無相文現 如今 但知決定
不印一切物 此印 爲虛空不一不二 空本不空 印本不有 十
方허空世界諸佛出世 如見電光一般 觀一切蠢動含靈 如響
一般 見十方微塵國土 恰似海中一滴水相似 聞一切甚深法
如幻如化 心心不異 法法不異乃至千經萬論 祇爲 之一心
若能不取一切相故 言 <如是一心中 方便勤莊嚴>
29. 인욕선인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뚱이가 토막토막 잘리었다'는 경우는
어떤 것입니까?"
"선인(仙人)이란 곧 너의 마음이며, 가리왕이란 구하기를 좋아하
는 마음이니라. 그리고 왕위를 지키지 않는다고 함은 이로움을 탐하
는 마음이니라. 그런데 요사이 공부하는 이들이 덕과 공을 쌓지는
않고, 보는 것마다 배워서 알려고 하니 가리왕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물질을 볼 때는 선인의 눈을 멀게 하고, 소리를 들을 때는 선인의
귀를 먹게 한다. 나아가 무엇을 느껴 알 때에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마디마디 갈기갈기 찢겨진다고 한 것이니라."
"선인이 참을 때는 마디마디 갈기갈기 찢김이 없어서, 한 마음으
로 참았느니 혹은 참지 않앗느니 하는 말은 가당치 않겠습니다."
"네가 남이 없는 견해[無生見]을 내어서, 인욕을 닦는 견해거나 구
할 것이 없다는 견해를 내는 것은 모두 손상을 주는 것이니라."
"선인도 몸을 잘리울 때 아품을 느낍니까? 만약 이런 가운데 고
통을 받는 사람이 없다면 누가 고ㅌ을 받습니까?"
"네가 이미 고통받을 것이 없다면 나타나서 도대체 무엇을 찾는
것이냐?"
問 如我昔爲歌利王割截身體如何 師云 仙人者 卽是 心
歌利王 好求也 不守王位 謂之貪利 如今學人 不積功累德
見者便擬學 與歌利王何別 如見色時 壞却仙人眼 聞聲時
壞却仙人耳 乃至覺知時 亦復如是 喚作節節支解 云 祇如
仙人 忍時 不合更有節節支解 不可一心忍一心不忍也 師云
作無生見 忍辱解無求解 總是傷損 云 仙人 被割時 還知
痛否 又云此中無受者 是誰受痛 師云 旣不痛 出頭來 覓
箇甚�
30. 한 법도 얻을 수 없음이 곧 수기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연등부처님이 수기하신 때는 오백세(五百歲) 이내입니까, 오백세
밖입니까?"
"오백세 이내에 수기를 받을 수 없느니라. 이른바 수기라 하는것
은 너의 근본을 결정코 잊어 버리지 않아서, 하염있는 법도 잃지 않
고 보리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세간과 세간 아님을 모두 요달
했기 때문에 오백세 밖을 벗어나서 따로 수기를 얻을 수 없고, 또한
오백세 이내에도 수기를 얻지 못한다."
"세간 3제(三際)의 모양을 요달할 수 없습니까?"
"한 법도 얻을 수 없느니라."
"그런데 무엇 때문에 경(經)에서 오백세(五百歲)를 지난다고 자주
말씀하시어, 앞뒤로 시간을 길게 말씀하셨습니까?"
"오백세(五百歲)가 길로 멀어서 오히려 아직은 선인(仙人)임을 알
아야 한다. 그러므로 연등부처님께서 수기하실 때는 실로 얻었다할
작은 법도 없느니라."
問 然燈佛授記 爲在五百歲中 五百歲外 師云 五百歲中 不
得授記 所言授記者 本決定不忘 不失有爲 不取菩提 但
以了世非世 亦不出五百歲外別得授記 亦不於五百歲中得授
記 云 了世三際相 不可得已否 師云 無一法可得 云 何故
言頻經五百世 前後極時長 師云 五百世長遠 當知猶是仙人
故 然燈授記時 實無少法可得
31. 법신은 얻을 수 없다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교(敎)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억겁 동안 전도된 생각을
녹이어서, 3대 아승기 겁을 거치지 않고 법신을 얻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만약 3대 아승기의 헤아릴 수 없는 겁을 통하여 수행을 함으로
서 증득한 바가 있는 자는, 간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겁이 지난
다 하더라도 깨닫지 못한다. 만약 한 찰나 사이에 법신을 획득하여
곧바로 분명하게 깨달아 성품을 보는 것은 오히려 3승교(三乘敎)의
극치를 이룬 말씀이다. 왜냐하면 가히 얻을 수 있는 법신을 보기 때
문에 모두가 불요의교(不了義敎)에 속하는 것이니라."
問 敎中 云鎖我億劫顚倒想 不歷僧祇獲法身者 如何
師云 若以三無數劫修行 有所證得者 盡恒沙劫不得 若於一
刹那中獲得法身 直了見性者 猶是三乘敎之極談也 何以故
以見法身可獲故 皆屬不了義敎中收
32. 마셔보아야 물맛을 안다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법을 보고 단박에 깨달은 사람은 조사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조사의 뜻은 허공 밖을 벗어났느니라."
"그러면 한계가 있습니까?"
"한계가 없느니라. 이는 모두 일정한 숫자로 헤아리는 대대(對待)
하는 법이니라.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한량이 있지도 않고 한량이
없음도 아니며 한량이 있고 없음이 아님도 아니어서, 대대가 끊어졌
기 때문이다'하였다. 너희 요즘 배우는 사람들이 3승교 밖을 아직 벗
어나지 못했는데, 어찌 선사라 부를 수 있겠느냐?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겠다. 으뜸으로 선을 수행하는 사람일진댄, 함부로 망령되이 다
른 견해를 내지 말라. 마치 어떤 사람이 물을 마셔보면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다. 움직이거나 머물러 있거나 한 찰나 사이에
생각생각이 달라지지 않아야 한다. 만약 이와 같지 못하다면 윤회를
면치 못하느니라."
問 見法頓了者 見祖師意否 師云 <祖師心出虛空外> 云
有限劑否 師云 有無限劑 此皆數量對待之法 祖師云 <且非
有限量 非無限量 非非有無限量 以絶待故> 如今學者 未
能出得三乘敎外 爭喚作禪師 分明向汝道 一等學禪 莫取次
妄生異見 如人飮水 冷煖 自知 一行一住 一刹那間 念念不
異 若不如是 不免輪回
33. 참된 사리(舍利)는 볼 수 없다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부처님의 몸은 하염이 없기 때문에 모든 숫자적인 개념으로 한
정할 수가 없거늘, 어찌하여 부처님 몸의 사리가 여덟섬 너말이 됩
니까?"
"네가 이런 견해를 낸다면, 그저 껍데기 사리만 볼 뿐 참된 사리
는 보질 못하느니라."
"사리가 본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노력하여 얻은 결과입니까?"
"본래 있는 것도 아니며 노력하여 수행의 결과로 얻으신 것도 아
니니라."
"그렇다면 어찌하여 부처님 사리는 그토록 잘 다듬어졌고 그토록
정교로와서, 금빛 사리가 항상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사께서 꾸짖어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견해를 가지고서 어찌 참선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 너는 허공에 사리가 있는 것을 일찍이 보았느냐? 모든
부처님의 마음은 큰 허공과 같은데 무슨 사리를 찾는 것이냐?"
"지금에도 분명히 눈으로 사리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도대체 무
슨 법입니까?"
"그것은 너의 망상심이 일어나서 사리라고 보는 것이니라."
"그렇다면 화상께서는 사리가 있습니까? 청컨대 내보여 주십시
오."
"참 사리는 보기 어렵느니라. 네가 다만 열 손가락으로 수미산의
높은 봉우리를 한꺼번에 움켜쥐어 그것을 부수어 가루로 만든다면
비로소 참 사리를 보게 되리라."
問 佛身無爲 不墮諸數 何故 佛身舍利八斛四斗 師云 作
如是見 祇見假舍利 不見眞舍利 云 舍利爲是本有 爲復功
勳 師云 非是本有 亦非功勳 云 若非本有 又非功勳 何故
如來舍利 唯鍊唯精 金骨 常存 師乃呵云 作如此見解 爭
喚作學禪人 見虛空曾有骨否 諸佛心同太虛 覓什�骨 云
如今見有舍利 此是何法 師云 此從 妄想心生 卽見舍利
云 和尙 還有舍利否 請將出來看 師云 眞舍利難見 但以
十指 撮盡妙高峯爲微塵 卽見眞舍利
34. 일체처에 마음이 나지 않음
"대저 참선해서 도를 닦는 이는 모름지기 어디에서나 마음을 내
지 않아야 한다. 다만 '마음의 작용을 잊으면 곧 부처님의 도가 융성
하고, 사량분별하면 곧 마구니의 도가 치성해진다'하는 것만은 논할
뿐이니, 끝내는 털끝만큼한 작은 법도 얻지 못하니라."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조사께서 어떤 사람에게 법을 전하여 부촉하셨습니까?"
"사람에게 줄 법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어찌하여 2조(二祖) 혜가스님이 달마스님께 마음을 편
안하게 해달라고 청했습니까?"
"네가 만약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2조께서는 분명히 마음을 찾아
서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찾으려 해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달마스
님께서, '너의 마음을 이미 편하게 해주었노라'고 하신 것이니라. 만
일 얻은 바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생멸법으로 돌아가고 만다."
夫參禪學道 須得一切處不生心 祇論忘機卽佛道륭 分別卽
魔軍盛 畢竟無毛頭許 少法可得
問 祖傳法付與何人 師云 無法與人 云 云何二祖請師安心
師云 若道有 二祖卽合覓得心 覓心不可得故 所以道與
安心竟 若有所得 全歸生滅
35. 조계문하생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구경에 무명을 얻으십니까?"
"무명이란 바로 모든 부처님들께서 도를 얻으신 자리이니라. 그러
므로 연기법이 바로 도량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한 티끌 한 빛깔
이 그대로가 가이 없는 진리의 성품이니라. 발을 들었다 놓는 것이
모두 도량을 여의지 않나니, 도량이란 얻은 바가 없는 것이니라. 내
너에게 말하노니, 다만 이 얻은 바 없는 자리를 도량에 앉아 있음이
라고 하느니라."
"무명이란 밝음입니까, 어두움입니까?"
"밝음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두움도 아니다. 밝음과 어두움이란 서
로 바뀌어서 갈아드는 법이니라. 그렇다고 무명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것이다. 밝지 않음이 곧 본래의 밝음이어서, 밝지도 않고 어둡
지도 않느니라. 이 한마디 말이 온천하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비록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사
리불과 같아서, 모두 함께 헤아려 사량할지라도 부처님의 지혜는 측
량할 수 없도다'라고 했다. 부처님의 걸림 없는 지혜를 허공을 벗어
나 너희들이 언어 문자로는 따져볼 수가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한량과 같은 삼천대천 세계에 갑자기 어떤 보살이 출현하여, 한 번
걸터앉으매 모든 삼천대천 세계를 걸터앉아버린다 해도, 보현보살의
한 털구멍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네가 지금 무슨 본래의 이치
를 가지고서 그것을 배우려고 하겠느냐?"
"말씀대로 배워서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둘이 없
는 본원의 성품으로 돌아가지만, 방편에는 여러 문들이 있다'고 말씀
하십니까?"
"둘이 없는 본원의 성품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무명의 참 성
품이니, 이것은 바로 모든 부처님의 성품이니라. 또 방편에 여러 문
이 있다는 뜻은, 성문들은 무명이 생겼다 없어진다고 보며, 연각들은
다만 무명이 없어지는 것만을 보고 무명이 생기는 것은 보지 못하여
생각마다 적멸을 증득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들이 종
일 생겨나나 그 남이 없음을 보시고, 또 그것이 종일 없어지지만 그
없어짐이 없는 것임을 보아서,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음이 곧 대승
의 최고 과(果)이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과(果)가 가득 차면 깨달
음이 원만하고, 꽃이 피면 세계가 일어나서, 한발짝 드니 그대로가
부처요, 한발짝 내리니 그대로가 중생이도다'고 하는 것이니라.
모든 부처님을 양족존(兩足尊)이라 부르는 것은 이(理)의 측면에
도 구족하시고, 사(事)의 측면에도 구족하시며, 나아가 중생에도 구
족하시고 나고 죽음에도 구족하시며, 모든 것에 다 구족하시니 구족
하시므로 구할 것이 없느니라. 그대들이 지금 생각생각에 부처는 배
우려 하면서 중생을 싫어하니, 만약 중생을 싫어하면 이것이야말로
저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어, 똥치는 그릇을 들고 희
론의 똥을 제거하신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다만 너희들에게
옛부터 알음알이로 배워서 알려는 마음과 도를 보려는 마음을 없애
려고 그러신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마음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나
면 희론에 떨어지지 않은 것이며, 또한 똥을 내다버린다고 하느니라.
이는 다만 너희로 하여금 마음을 내지않게 하시는 것이다. 또 마음
이 일어나지 않으면 저절로 큰 지혜가 완성된다는 것은, 부처니 중
생이니 하는 분별을 결코 내지 않아서 일체를 모두 분별치 않아야만
비로소 우리 조계의 문하에 들어오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옛부터 성인들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법을 조금은 행
하였다'고 하신 것이다. 때문에 행함 없음[無行]이 나의 법문(法門)이
니라. 오로지 한 마음의 문일 따름이니, 모든 사람이 이 문에 이르러
서는, 모두 감히 들어오지는 못하나 전혀 없었다고 말하지는 말라.
다만 얻은 사람이 적을 뿐이니, 얻은 자는 곧 부처이니라.
편히 하여라."
問 佛窮得無明否 師云 無明 卽是一切諸佛得道之處 所以
緣起是道場 所見一塵一色 便合無邊理性 擧足下足 不離道
場 道場者 無所得也 我向 道 祇無所得 名爲坐道場 云無
明者 爲明 爲暗 師云非明非暗 明暗是代謝之法 無明 且不
明 亦不暗 不明 祇是本明 不明不暗 祇這一句子 亂却天下
人眼 所以道 <假使滿世間 皆如舍利佛 盡思共度量 不能測
佛智> 其無 慧 出過虛空 無 語論處 釋迦量等三千大千
世界 忽有一菩薩出來一跨 跨却三千大千世界 不出普賢一
毛孔 如今 把什�本領擬學他 云 旣是學不得 爲什� 道
歸源性無二 方便有多門 如之何 師云 歸源性無二者 無明
實性 卽諸佛性 方便有多門者 聲聞人 見無明生見無明滅
緣覺人 但見無明滅 不見無明生 念念證寂滅 諸佛 見衆生
終日生而無生 終日滅而無滅 無生無滅 卽大乘果 所以道
<果滿菩提圓 華開世界起 擧足卽佛 下足卽衆生> 諸佛兩
足尊者 卽理足事足 衆生足生死足 一切等足 足故不求 是
如今 念念學佛 卽嫌著衆生 若嫌著衆生 卽是謗他十方諸
佛 所以佛出世來 執除糞器 除 論之糞 祇敎 除却從來
學心見心 除得盡 卽不隨 論 亦云搬糞出 祇敎 不生心
心若不生 自然成大智者 決定不分別佛與衆生 一切盡不分
別 始得入我曹溪門下 故自古先聖云 <少行我法門> 所以
無行爲我法門 祇是一心門 一切人到這裏 盡不敢入 不道全
無 祇是少人得 得者 卽是佛 珍重
36. 계급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어떻게 해야 수행의 등급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종일토록 밥을 먹되 일찍이 한 톨의 쌀알도 씹은 바가 없으며,
종일토록 걸어다니지만 일찍이 한 조각의 땅도 밟은 바가 없다. 이
러할 때에 나와 남 등의 구별이 사라져, 종일토록 갖가지 일을 하면
서도 그 경계에 현혹되지 않아야만 비로소 자유자재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생각생각 모든 모양을 보지 않아서 앞뒤의 3제(三際)를 헤
아리지 말라. 과거는 감이 없으며 현재는 머무름이 없고 미래는 옴
이 없으니, 편안하고 단엄하게 앉아 움직이는 대로 내맡겨 얽매이지
않아야만 비로소 해탈했다고 할 수 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 이
문중의 천 사람 만 사람 가운데서도 오로지 서너명만이 얻었을 뿐이
니라. 만약 도 닦기를 일삼지 않는다면 재앙을 받을 날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힘을 다하여 모름지기 금생에 도업을 마칠 것이
요, 뉘라서 누겁토록 나머지 재앙을 받겠는가?'라고 하였느니라."
스님께서는 당(唐) 대중(大中 ; 847-859)년간에 본주(本州) 황벽산
에서 세연을 마치셨다. 선종(宣宗) 황제가 단제선사(斷際禪師)라고
시호를 내리고 탑호는 광업(廣業)이라 하였다.
問 如何得不落階級 師云 終日喫飯 未曾咬著一粒米 終日
行 未曾踏著一片地 與�時 無人我等相 終日不離一切事
不被諸境惑 方名自在人 念念不見一切相 莫認前後三際 前
際無去 今際無住 後際無來 安然端坐 任運不拘 方名解脫
努力努力 此門中 千人萬人 祇得三箇五箇 若不將爲事 受
殃有日在 故云 <著力今生須了却 誰能累劫受餘殃>
師於唐大中年中終於本山 宣宗 謚斷際禪師 塔曰廣業
제4권 신심명(信心銘)
머리말
<신심명(信心銘)>은 삼조(三祖) 승찬대사(僧璨大師)가 지은 글입
니다. 명(銘)이란 일반적으로 금석(金石), 그릇, 비석 따위에 자계(自
戒)의 뜻으로나, 남의 공적 또는 사물의 내력을 찬양하는 것을 내용
으로 하여 새긴 한문 글귀를 말하는데, 이 <신심명)>은 삼조(三祖)
스님께서 우리가 처음 발심할 때로부터 마지막 구역성불할 때까지
가져야 하는 신심에 대해서 남겨 놓으신 사언절구(四言絶句)의 시문
(詩文)입니다.
이 <신심명>은 글 자체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심이란
도(道)의 본원(本源)이며 진여법계(眞如法界)에 사무쳐야 하는 것이
기 때문에, 이 글은 우리 수도인의 좌우명(左右銘)인 것입니다. 승찬
대사는 수(隋)나라의 양제(煬帝) 대업(大業) 2년 10월 5일(서기 606
년)에 입적하셨으며, 그의 세수는 알 수 없습니다. 승찬대사가 돌아
가신 지 150여 년 뒤 당(唐)나라 현종(玄宗) 황제가 감지선사(鑑智禪
師)라 시호(諡號)를 올리고 탑호(塔號)를 각적(覺寂)이라 하였으며
그 당시 유명한 재상인 방관(房琯)이 탑비문을 지었습니다.
승찬대사는 본래 대풍질(大風疾)이라는 큰 병에 걸려 있었는데 오
늘날의 문등병입니다. 스님은 문둥병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하다 이조
(二祖) 혜가 대사(慧可大師)를 찾아가 자기의 성명도 밝히지 않고
불쑥 물었습니다.
"제자는 문둥병을 앓고 있사옵니다. 화상께서는 저의 죄를 참회케
하여주십시오."
"그대는 죄를 가져 오노라. 죄를 참회시켜 주리라."
"죄를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죄는 모두 참회되었느니라. 그대는 그저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에 의지하여 안주해라."
"지금 화상(和尙)을 뵈옵고 승보(僧寶)는 알았으나 어떤 것을 불
보(佛寶), 법보(法寶)라 합니까?"
"마음이 부처며 마음이 법이니라.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요, 승보
도 또한 그러하니 그대는 알겠는가?"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은 마음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
지 않음을 알았으며 마음이 그러하듯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이에 혜가대사께서 그가 법기(法器)인 줄 아시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바로 머리를 깎아 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의 보배이다. 구슬 찬(璨)자를 서서 승찬(僧璨)이라 하
라."
그해 3월 18일 복광사(福光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그로부
터 병이 차츰 나아져서 2년 동안 혜가스님을 시봉하였습니다.
승찬대사는 평생을 은거하여 지내다가 나중에 어린 나이의 도신
선사(道信禪師)를 만나 법을 깨우쳐 주고 뒤에 구족계를 받게 한 후
법을 전하면서
"나에게서 법을 받았다고 절대로 말하지 말아라."
고 당부 하셨다고 합니다.
돌아가실 때에는 법회하던 큰 나무 밑에서 합장한 채 서서 돌아
가셨다고 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묘를 써서 스님을 모셨는데, 뒤에
이상(李常)이라는 사람이 신회선사(神會禪師)에게 물어서 산곡사(山
谷寺)에 승찬대사의 묘가 있음을 알고는 가서 화장하여 사리(舍利)
삼백 알을 얻었다고 합니다.
승찬스님은 본래 문둥병을 앓았기 때문에 문둥병이 나은 후에도
머리카락이 하나도 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스님을 적두찬(赤頭
璨)이란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이는 대머리의 붉은 살뿐이라는 뜻입
니다.
그 승찬대사가 남겨 놓은 저술이 바로 이 <신심명>입니다. 요즈
음 일본 학자들 가운데는 그 분이 숨어 다니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
의 행적에 모순된 점이 많다고 하여 실제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ㄱ사적인 여러 가지 점들을 상고
해 보면 삼조 승찬스님이 실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고 나는 봅니다.
그런데 이 <신심명>에 있어서 그 신(信), 곧 믿음이 보통의 신
(信), 믿음이 아니라 신, 해, 오, 증(信解悟證) 전체를 통하는 신(信),
믿음입니다. 글 전체는 4언절구(四言絶句)로 해서 146구 584자로 되
어 있는 간단한 글이지만, 팔만대장경의 심오한 불법도리와 천칠백
공안의 격외도리(格外道理)전체가 이 글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모두
들 평(評)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의리적(義理的)으로 법문한 것 같
지만 간단한 이 글 전체 속에 격외도리가 다 갖추어져 있으며, 교리
의 현묘한 뜻도 빠짐없이 있습니다. 중국에 불법이 전해진 이후로
'문자로서는 최고의 문자'라고 학자들이 격찬할 뿐만 아니라 삼조 승
찬대사의 <신심명>같은 문자는 하나일 뿐, 둘은 없다고들 평합니다.
그러므로 이 글이 불교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
다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사상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
지하고 있는 신심명의 근본 골자가 무엇인가 하면 글 전체가 모두
양별을 여읜 중도(中道)에 입각해 있다는 것입니다. 글 전체를 자세
히 살펴보면 대대(對對)를 40대(四十對)로 갖추어 설명하고 있습니
다.
여기서 대대(對對)란 곧 미워함과 사랑함[憎愛]. 거슬림과 다름[逆
順], 옳고 그름[是非] 등등 일상생활에서 나타나고 있는 중생의 상대
개념 즉 변견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심명>은 간단한 법문이지만
대대(對對)를 떠난 중도법을 간명하게 보여준 드문 저술입니다. <신
심명>은 일관된 논리로서 선(禪)이나 교(敎)를 막론하고 불교 전체
를 통하여 양변을 여읜 중도(中道)가 불교의 근본 사상임을 표현한
총괄적인 중도총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심명信心銘
1 至道無難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唯嫌揀擇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2 但莫憎愛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洞然明白 통연히 명백하리라.
3 毫釐有差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天地懸隔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
4 欲得現前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莫存順逆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
5 違順相爭 어긋남과 따름이 서로 다툼은
是爲心病 이는 마음의 병이 됨이니
6 不識玄旨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徒勞念靜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7 圓同太虛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無欠無餘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8 良由取捨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所以不如 그 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도다.
9 莫逐有緣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勿住空忍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10 一種平懷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泯然自盡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11 止動歸止 움직임을 그쳐 그침으로 돌아가면
止更彌動 그침이 다시 큰 움직임이 되나니
12 唯滯兩邊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니
寧知一種 어찌 한가지임을 알건가.
13 一種 不通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兩處失功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
14 遺有沒有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從空背空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
15 多言多慮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轉不相應 더욱 더 상응치 못함이요
16 絶言絶慮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無處不通 통하지 않는 곳 없느니라.
17 歸根得旨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隨照失宗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18 須臾返照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보면
勝脚前空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19 前空轉變 앞의 공함이 轉變함은
皆由妄見 모두 妄見 때문이니
20 不用求眞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唯須息見 오직 망녕된 견해만 쉴지니라.
21 二見不住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愼莫追尋 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
22 裳有是非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紛然失心 어지로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
23 二由一有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一亦莫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24 一心不生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萬法無咎 만 법이 허물 없느니라.
25 無咎無法 허물이 없으면 법이 없고
不生不心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26 能隨境滅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境逐能沈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27 境由能境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能由境能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
28 欲知兩段 양단을 알고저 할진대
元是一空 원래 하나의 空이니라.
29 一空同兩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齊含萬象 삼라만상을 함께 다 포함하여
30 不見精추 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寧有偏黨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31 大道體寬 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無易無難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32 小見狐疑 좁은 견해로 여우같은 의심을 내어
轉急轉遲 서둘수록 더디어지도다.
33 執之失度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必入邪路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고
34 放之自然 놓아 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體無去住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35 任性合道 자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여
逍遙絶惱 소요하여 번뇌가 끊기고
36 繫念乖眞 생각에 얽매이면 참됨에 어긋나서
昏沈不好 혼침함이 좋지 않느니라.
37 不好勞神 좋지 않으면 신기를 괴롭히거늘
何用疎親 어찌 성기고 친함을 쓸건가.
38 欲趣一乘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勿惡六塵 육진을 미워하지 말라.
39 六塵不惡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還同正覺 도리어 정각(正覺)과 동일함이라.
40 智者無爲 지혜로운 이는 함이 없거늘
愚人自縛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얽매이도다.
41 法無異法 법은 다른 법이 없거늘
妄自愛着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하여
42 將心用心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豈非大錯 어찌 크게 그릇됨이 아니랴.
43 迷生寂亂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悟無好惡 깨치면 좋음과 미움이 없거니
44 一切二邊 모든 상대적인 두 견해는
良由斟酌 자못 짐작하기 때문이로다.
45 夢幻空華 꿈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何勞把捉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46 得失是非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一時放却 일시에 놓아 버려라.
47 眼若不睡 눈에 만약 졸음이 없으면
諸夢自除 모든 꿈 저절로 없어지고
48 心若不異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萬法一如 만법이 한결 같느니라.
49 一如體玄 한결 같음은 본체가 현묘하여
兀爾忘緣 올연히 인연을 잊어서
50 萬法齊觀 만법이 다 현전함에
歸復自然 돌아감이 자연스럽도다.
51 泯其所以 그 까닭을 없이하면
不可方比 견주어 비할 바가 없음이라
52 止動無動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動止無止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53 兩旣不成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거니
一何有爾 하나인들 어찌 있을건가.
54 究竟窮極 구경하고 궁극하여
不存軌則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요
55 契心平等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케 되어
所作俱息 짓고 짓는 바가 함께 쉬도다.
56 狐疑淨盡 여우 같은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正信調直 바른 믿음이 고루 발라지며
57 一切不留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여
無可記憶 기억할 아무것도 없도다.
58 虛明自照 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不勞心力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로다.
59 非思量處 생각으로 헤아릴 곳 아님이라
識情難測 의식과 망정으론 측량키 어렵도다.
60 眞如法界 바로 깨친 진여의 법계에는
無他無自 남도 없고 나도 없음이라
61 要急相應 재빨리 상응코저 하거든
唯言不二 둘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
62 不二皆同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無不砲容 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63 十方智者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皆入此宗 모두 이 종취로 들어옴이라.
64 宗非促廷 종취란 짧거나 긴 것이 아니니
一念萬年 한 생각이 만년이요
65 無在不在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十方目前 시방이 바로 눈 앞이로다.
66 極小同大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서
忘絶境界 상대적인 경계 모두 끊어지고
67 極大同小 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아서
不見邊表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음이라.
68 有卽是無 있음이 곧 없음이요
無卽是有 없음이 곧 있음이니
69 若不如此 만약 이 같지 않다면
不心須守 반드시 지켜서는 안되느니라.
70 一卽一切 하나가 곧 일체요
一切卽一 일체가 곧 하나이니
71 但能如是 다만 능히 이렇게만 된다면
何慮不畢 마치지 못할까 뭘 걱정하랴.
72 信心不二 믿는 마음은 둘 아니요
不二信心 둘 아님이 믿는 마음이니
73 言語道斷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非去來今 과거.미래.현재가 아니로다.
제5권 증도가(證道歌)
머리말
<증도가(證道歌)>는 영가(永嘉)스님이 지었습니다.
영가(永嘉)스님의 휘(諱)는 현각(玄覺)이요, 자(字)는 도명(道明)이
며, 성은 대(戴)씨이며, 절강성 온주부 영가현[浙江省溫州府永嘉縣]
사람입니다.
어릴 때 출가하여 안으로는 삼장(三臟)을 두루 섭렵하고 밖으로는
외전에도 널리 통달하였다고 합니다.
영가스님은 본래 천태종 계통으로 천태지관(天台止觀)을 많이 익
혀서 그 묘를 얻고 항상 선관(禪觀)으로 수행하였습니다. 천태종 팔
조(八祖)인 좌계 현랑(左溪玄朗) 법사와는 동문(同門)이며, 나중에
도를 성취하고 난 뒤에도 서로 서신 왕래를 하였다고 합니다.
일찍이 온주의 개원사(開元寺)에 있으면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지
내며 효순하기로 소문이 났으나, 누님까지 함께 지내니 두 사람을
보살피고 있다하여 온 사중(寺中)과 동구(洞口)에서 비방을 하였습
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별세하여 상복을 입고서도 누님을 떠나 보
내지 못하니 사람들의 비방이 더욱 심했으나 영가스님은 전혀 그러
한 데 개으치 않았습니다.
영가스님이 천태종에 있으면서 선관을 닦고 선종과 비슷한 길을
밟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면 왜 천태종에서 선종으로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개원사 복도로 현책(玄策)이라는 선사가 지나가고 있었는
데 나이는 60여세였습니다. 이때 그의 누님이 발 밖으로 그 노숙(老
宿)을 보고,
"저 노스님을 방으로 청해서 대접했으면 좋겠다."
고 하였습니다. 영가스님이 얼른 나가서 노스님을 청했더니, 노숙
은 들어오지 않으려 하다가 스님의 간절한 청에 못이겨 방에 들어왔
습니다. 그 노숙과 법에 대해 여러 가지로 토론해 보니 자신의 견처
나 노스님의 견처가 같은 점도 많이 있고 독특한 점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책스님은 영가스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대의 법사는 누구인가?"
"제가 <방등경론>을 배울 때는 각각 스승이 계셨으나, 뒤에 <유
마경>에서 불심종(佛心宗)을 깨치고는 아직 증명하실 분이 없습니
다."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노스님은 영가스님의 기상이 다
른 사람들과 다르고 또 그 누님에게도 협기(俠氣)가 있음을 느끼고
다음과 같이 권했습니다.
"부모와 형제에게 효순하는 일도 한 가지 길이지만, 당신은 불법
의 이치를 밝히기는 했으나 스승의 인가를 얻지 못하고 있소. 과거
의 부처님들도 성인과 성인이 서로 전하시고 부처와 부처가 서로 인
가하였습니다. 석가여래께서도 연등불의 수기를 받으셨소. 그렇게 하
지 않으면 천연외도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오. 남방에 큰 스승으로
혜능선사가 계십니다. 그곳으로 가서 발 아래 예배하고 스승으로 섬
기시오."
그러자, 영가스님이
"다른 분을 증명법사로 모실 것이 아니라 스님께서 법이 수승하
신 듯 하니 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시면 좋겠습니다. 저를 위해서 허
락해 주십시오." 하자, 현책스님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로서는 그대의 증명법사가 되기는 곤란하오. 지금 조계에는 육
조대사가 계셔서 사방에서 학자가 운집하여 법을 받는 터이니 만약
그대가 가겠다면 함께 가리다."
그러나 영가스님은 누님을 홀로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어 망설였
습니다. 그러자 누님이 하는 말이 "나는 다른 데 의지해서 지낼 수
있으니 나를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시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현책스님과 함께 떠났는데, 그 때에 영가스님의 나이는
31세였습니다. 그럭저럭 시흥현(始興縣) 조계산(曹溪山)에 이르니 때
마침 육조대사(六祖大師)께서 상당(上堂)하여 법문을 하고 계셨습니
다. 이에 영가스님은 절도 하지 않고 선상을 세 번 돌고 나서 육환
장을 짚고 앞에 우뚝 서있자니 육조대사께서 물으셨습니다.
"대저 사문(沙門)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추어서 행동이 어긋남이 없어야 하거늘, 대덕(대덕)은 어디서 왔기
에 도도하게 아만을 부리는가?"
육조스님의 이러한 말씀은 건방기제 와서 인사도 하지 않고 선상
만 세 번 돌고 턱 버티고 서 있기만 하니 그것은 아만심이 탱천하기
때문이 아니냐하는 힐난입니다. 그러나 육조스님이 영가스님 하는
짓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한 번 슬쩍 법을 걸어보는
것입니다.
그러자 영가스님께서
"나고 죽는 일이 크고, 무상(無常)은 빠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저 피상적으로 관찰하는 것과는 뜻
이 다르므로 그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육조스님이 말씀하
셨습니다.
"어찌하여 남[生]이 없음을 체험해 얻어서 빠름이 없는 도리를 요
달하지 못하는가"
이렇게 육조스님께서 반문하시니 이것은 '네가 지금 무상이 빠르
다고 하니 그 무상(無常)의 근본을 바로 체험하여 깨치고, 남이 없음
[無生]을 요달하면 빠르고 빠르지 않음이 떨어져 버린 구경을 성취
하게 되는데 왜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느냐'라는 말
씀입니다.
이에 영가스님이 답하였습니다.
"본체는 곧 남이 없고 본래 빠름이 없음을 요달하였습니다."
본체는 원래 남이 없으니 그걸 우리가 체득할 필요가 뭐 있느냐
는 것입니다. 이대로가 남이 없고 그대로가 빠름이 없는데, 다시 남
이 없고 빠름이 없음을 요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영가스님이 반
박하자, 육조스님이
"네 말과 같다. 네 말과 같다."
고 인가하시니, 천여명의 대중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때에야 이로소 영가스님은 다시 동랑(東廊)으로 가서 육환장을
걸어 놓고 위의를 갖추어 육조스님께 정중히 예배하였습니다. 위의
를 갖춘다는 것은 큰 가사를 입고 향을 피우고 스님에게 예배를 드
리는 것을 말합니다. 영가스님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나서 바로
하직 인사를 드리자 육조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리 빨리 돌아가려고 하느냐?"
"본래 스스로 움직이지 않거니 어찌 빠름이 있겠습니까?"
"누가 움직이지 않는 줄 아느냐?"
"스님께서 스스로 분별을 내십니다."
"네가 참으로 남이 없는 도리를 알았구나!"
"남이 없음이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
이는 남이 없음에 뜻이 있다면 남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
니다.
"뜻이 없다면 누가 분별하느냐?"
뜻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있는 그것부터가 분별하는 것이 아니냐
는 욱조스님의 질책입니다.
"분별하는 것도 뜻이 아닙니다."
분별을 하여도 심(心), 의(意), 식(識)의 사량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대용의 나타남이라는 영가스님의 말씀입니다. 그러자 육
조스님께서 선상에서 내려오시더니 영가스님의 등을 어루먼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장하다 옳은 말이다. 손에 방패와 창을 들었구나. 하룻밤만 쉬어
가거라."
그리하여 그 때 사람들이 영가스님이 조계산에서 하룻밤만 자고
갔다 하여 일숙각(一宿覺)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튿날 육조스님께 하직을 고하니 몸소 대중을 거느리시고 영가
스님을 전송하셨는데, 영가스님이 열 걸음쯤 걸어 가다가 석장을 세
번 내려치고 말했습니다.
"조계를 한 차례 만난 뒤로는 나고 죽음과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
았노라!"
선사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그의 소문은 먼저 퍼져서 모두들 그를
'부사의(不思議) 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그의 가(歌), 항(行), 게(偈), 송(頌)은 모두가 그의 누나
가 수집한 것입니다.
영가스님은 선천(先天) 2년(서기 713년) 10월 17일에 입적하시니
세수 39세였으며, 시호(諡號)는 무상대사(無相大師), 탑호(塔號)는 정
광(淨光)이라 하였습니다. 그해에 육조스님께서도 돌아가시니 세수
76세였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흔히 어떤 사람들은 이 법담(法談)을
평하기를, 영가스님이 육조스님보다 나은 듯하고 육조스님이 말에
몰리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가스님이 육조스님보다 수승한
사람이 아니냐고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평을
하면 영가스님을 잘못 본 사람입니다. 영가스님 자신이 <증도가(證
道歌)>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조계의 길을 깨친 뒤로 나고 죽음과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다."고 하여, 조계산에 있는 육조스님을 찾아와서 근본을 확철히
깨쳤다고 자기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고인(古人)들은 영가스님이 깨친 대목을 두고 말하기를 앞의 법담
에서,
"어찌하여 남이 없음을 체험해 얻어서 빠름이 없는 도리를 요달
하지 못하는가?"
하는 말 끝에서 깨쳤다고 봅니다.
영가스님이 자기 스스로 조계의 길을 확실히 깨치고 난 뒤에는
나고 죽음에 자재하다고 말씀하셨으며, 자기가 평생동안 연구했던
천태종을 버리고 육조스님의 조계 선종의 입장에서 법문하였고 저술
도 하였습니다. 그런 만큼 육조스님께 와서 깨친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영가스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고 선종에서 깨친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영가스님의 행장(行
狀)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살펴보고 <증도가(證道歌)>에 대해서 조
금 이야기 하겠습니다.
영가스님이 육조스님을 찾아가서 확철히 깨치고, 깨친 경지에 의
지해서 <증도가>를 지었는데, 천태종이나 다른 교가의 사상과는 많
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천태종에서는 교리적으로 볼 때 맞지 않는
것이 많이 있다 하여 이것이 일종의 미친 견해이지 바른 견해는 아
니라고까지 혹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종에서 볼 때는 <증도
가>가 선종사상을 대표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으므로, 그러헥 비난하
는 사람들은 선종을 모르는 데서 하는 말이지 바른 길을 아는 사람
이면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벌대로 생각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禪)과 교(敎)의 관계가 <증도가>에서 더욱 더 완연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선(禪)에서는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간다[一超直入
如來地]'고 많이 주장하는데 대해서, 교[敎]에서는 '점차고 닦아 성불
하는 것[漸修]'만을 근본으로 표방하므로 서로가 정반대의 입장에 서
게 됩니다. 그래서 그 당시 영가스님의 <증도가>에 대해서 천태종
에서 가장 많이 공격했지만, 그 공격도 일시적인 것이 되고 말았으
며, 영가스님의 <증도가>는 실제로 도 닦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만고의 표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증도가(證道歌)>라 하였는데 '증(證)'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를 살펴 봅시다.
'증(證)'이란 구경(究竟)을 바로 체득함을 말합니다.
깨달음[悟]에도 증오(證悟)와 해오(解悟)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해오(解悟)란 견해(見解), 지해(知解)를 말하는 것으로, 알ㄴ기는 분
명히 알지만 실제 마음으로 체득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
면 얼음이 본래 물인 줄은 알았지만 아직 녹지 않고 얼음 그대로 있
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얼음을 녹여 물로 쓰고 있지는 못하듯
이 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은 분명히 알았지만 번뇌망상이 아직 그대
로 남아 있어서 중생 그대로인 것, 그것을 해오(解悟)라고 말합니다.
'증오(證悟)'란 얼음을 완전히 녹여서 물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
라 물 자체도 볼 수 없는 경계, 따라서 중생의 번뇌망상이 다 끊어
져서 제팔 아뢰야 근본무명까지 끊어진 구경각을 말하니 곧 실지로
성불한 것, 견성한 것을 증오(證悟)라 하고 간단히 줄여서 증(證)이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가(敎家)에서든지 선가(禪家)에서든지 증(證)이라 하면
근본적으로 체달한 구경각(究竟覺)을 말하는 것이지 그 중간에서 뭘
좀 아는 걸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통된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이 노래에 '증(證)'자를 붙였냐 하면, 선종에서 깨
쳤다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증오(證悟)'를 근본적으로 삼앗지 '해오
(解悟)'로서는 근본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다
시 말하면 선가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한다는
것은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조(普照)스님도 처음에는 선가에서 전한 법을 '해오(解悟)'라고
잘못 보았다가 나중에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이라든가 <원돈성
불론(圓頓成佛論)>같은 데서는 선이란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
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선가에서의
근본 표본은 '해오(解悟)'가 아닌 구경각이며, 선가에서의 깨달음[悟]
이란 구경적으로 체달한 것임을 표현하기 위해서 노래 이름부터도
'증(證)'이라 하였지 '해(解)'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종에서는 언제든지 깨친 것을 '돈오(頓悟)'라 하는데,
"돈(頓)이란 망념을 순식간에 없애는 것이요 오(悟)란 얻는 바가 없
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대주(大珠)선사는 설파하고 있습니다.
근본 무명인 제팔 아뢰야는 무기무심(無記無心)의 마계(魔界)까지
완전히 벗어나서 대원경지(大圓鏡智)에 들어가 진여본성을 확철히
깨친 것이 곧 '증(證)'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가에서는 그 중간
적인 것을 '깨달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앞으로 설명하는 <증도가>를 이해할 수 있지 '증
오(證悟)'와 해오(解悟)'를 혼동해서는 영원히 <증도가>를 모르고 마
는 것입니다.
이 <증도가>는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해서 부처님으로부터 달마
스님까지 달마스님에서 육조스님까지, 그리하여 오가칠종(五家七宗)
으로 내려온 정안종사(正眼宗師)의 증오처(證悟處)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증(證)'이라 한다는 것을 한 번 더 강조합니다.
그러면 어째서 도(道)라 하는가?
도(道)를 보리(菩提)라 각(覺)이라 하는데 <증(證)>을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이 도(道)라 하는 것은 증(證)한 도(道)를, 구경각을 성
취한 그 구경처(究竟處)를 말합니다. 즉 도(道)란 구경을 깨친 '증
(證)'한 도(道)이지 중각적인 도(道), 해(解)한 도(道)가 아니라는 것
입니다.
그러면 구경각인 도란 무엇인가?
"무심이 도라고 일컬어 말하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한 겹 두터운 관문이 막혀 있느니라.
[莫道無心云是道하라 無心猶隔一重關이니라]"
도는 무심과 통합니다. 우리가 실지로 공부해서 대무심지(大無心
地)에 들어가서 구경각을 바로 성취하면 그만인데,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지 못하고 제팔 아뢰야 무기무심에 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그
폐단을 막기 위해서 제팔 아뢰야의 무심 즉 멸진정(滅盡定)의 무심
은 도(道)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멸진정의 무심도 아주 벗어나서 제
팔 아뢰야의 근본 무명까지 끊어진곳에서 구경각을 성취하여 대원경
지가 현발한 이것이 도(道)인 것이며, 진연본성을 바로 보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증(證)'이 곧 '도(道)'이며 '도(道)'가 곧 '증(證)'이
라 하는 것입니다.
달마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外息諸緣하고 內心無喘
心如墻壁하사와 可以入道니라]"
그러면 마음이 담과 벽 같아야 한다고 하니 목석과 같고 장승과
같은 무심지에 들어가 버리면 그것이 도(道)냐 하면, 그것이 도가 아
니라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제팔 아뢰야 무기무심이
장애가 되어 근본적인 구경무심에는 아직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참으로 구경의 대무심지에 들려면 멸진정의 가무심(假無心),
거기서 한 관문을 더 뚫어서 구경무심을 성취해야 바로 도(道)를 깨
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인용한 달마스님의 말씀도 구경적인
도를 말씀함이지 중간적인 도가 아니며 증오(證悟)의 '도(道)'이지,
해오(解悟)의 '도(道)'는 아닙니다. 달마스님 이래로 선종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 구경각을 '증(證)'이라 하고, '도(道)'라 하는 것도 '증
(證)'을 근본 내용으로 삼기 때문에 구경각이 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도는 달마스님이 말씀하신 무심을 한층 넘어간 도가
되어야지 그 중간적인 것은 도가 아닙니다.
그러면 '가(歌)'란 무엇인가?
영가스님 자신이 확철히 깨친 경계를 노래로써 표현한 것입니다.
영가스님이 육조스님을 찾아가 확철히 깨쳐 구경각을 성취하고 나서
그 경지를 시가(詩歌) 형식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증도가證道歌
1 君不見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2 絶學無爲閑道人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
은
不除妄想不求眞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히지 않
으니
3 無明實性 卽佛性 무명의 참 성품이 곧 불성이요
幻化空身 卽法身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로다.
4 法身 覺了無一物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本源自性 天眞佛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5 五陰浮雲 空去來 오음의 뜬구름이 부질없이 가고 오며
三毒水泡虛出沒 삼독의 물거품은 헛되이 출몰하도다.
6 證實相無人法 실상을 증득하여 人. 法이 없으니
刹那 滅却阿鼻業 찰나에 아비지옥의 업을 없애버림이라
7 若將妄語�x衆生 거짓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自招拔舌塵沙劫 진사겁토록 발설지옥 보를 스스로 부르
리로다.
8 頓覺了如來禪 여래선을 단박에 깨치니
六度萬行 體中圓 육도만행이 본체 속에 원만함이라
9 夢裏 明明有六趣 꿈속에선 밝고 밝게 육취가 있더니
覺後 空空無大千 깨친 후엔 비고 비어 대천 세계가 없
도다.
10 無罪福無損益 죄와 복이 없고 손해와 이익도 없나니
寂滅性中 莫問멱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묻고 찾지 말
라.
11 比來 塵鏡 未曾磨 예전엔 때 낀 거울 미처 갈지 못했
더니
今日 分明須剖析 오늘에야 분명히 닦아 내었도다.
12 誰無念誰無生 누가 생각이 없으며 누가 남이 없는가.
若實無生無不生 진실로 남이 없으면 나지 않음도 없나
니
13 喚取機關木人問 기관목인을 불러 붙들고 물어 보라.
求佛施功早晩成 부처 구하고 공 베풂을 조만간 이루리
로다.
14 放四大莫把捉 사대를 놓아 버려 붙잡지 말고
寂滅性中 隨飮 적멸한 성품 따라 먹고 마실지어다.
15 諸行 無常一切空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니
卽是如來大圓覺 이는 곧 여래의 대원각이로다.
16 決定說表眞乘 결정된 말씀과 참됨을 나타낸 법을
有人 不肯任情徵 어떤 사람은 긍정치 않고 정에 따라
헤아림이라
17 直截根源佛所印 근원을 바로 끊음은 부처님 인가하신
바요
摘葉尋枝 我不能 잎 따고 가지 찾음은 내 할 일 아니
로다.
18 摩尼珠 人不識 마니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如來藏裏 親收得 여래장 속에 몸소 거두어 들임이라
19 六般神用空不空 여섯 가지 신통묘용은 공하면서 공하
지 않음이요
一顆圓光色非色 한 덩이 두렷한 빛은 색이면서 색이
아니로다.
20 淨五眼得五力 오안을 깨끗이 하여 오력을 얻음은
唯證乃知難可測 증득해야만 알 뿐 헤아리긴 어렵도다.
21 鏡裏 看形見不難 거울속의 형상 보기는 어렵지 않으나
水中捉月爭拈得 물속의 달을 붙들려 하나 어떻게 잡을
수 있으랴.
22 常獨行常獨步 항상 홀로 다니고 항상 홀로 걷나니
達者同遊涅槃路 통달한 이 함께 열반의 길에 노닐도다.
23 調古神淸風自高 옛스러운 곡조 신기 맑으며 풍채 스스
로 드높음이여
貌悴骨剛人不顧 초췌한 모습 앙상한 뼈 사람들 돌아보
지 않는도다.
24 窮釋子口稱貧 궁색한 부처님 제자 입으로는 가난타 말
하나
實是身貧道不貧 실로 몸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치 않음
이라.
25 貧則身常披縷褐 가난한 즉 몸에 항상 누더기를 걸치고
道則心藏無價珍 도를 얻은 즉 마음에 무가보(無價寶)를
감추었도다.
26 無價珍用無盡 무가보는 써도 다함이 없나니
利物應時終不 중생 이익하며 때를 따라 끝내 아낌이
없음이라
27 三身四智 體中圓 삼신. 사지는 본체 가운데 원만하고
八解六通 心地印 팔해탈 육신통은 마음땅의 인(印)이로
다.
28 上士 一決一切了 상근기는 한번 결단하여 일체를 깨치
고
中下 多聞多不信 중. 하근기는 많이 들을수록 더욱 믿
지 않는도다.
29 但自懷中解垢衣 스스로 마음의 때 묻은 옷을 벗을 뿐
誰能向外誇精進 뉘라서 밖으로 정진을 사랑할건가.
30 從他謗任他非 남의 비방에 따르고 남의 비난에 맡겨두
라.
把火燒天徒自疲 불로 하늘을 태우려 하나 공연히 자신
만 피로하리로다.
31 我聞恰似飮甘露 내 듣기엔 마치 감로수를 마심과 같아
서
鎖融頓入不思議 녹아서 단박에 부사의 행탈경에 들어
가리로다.
32 觀惡言 是功德 나쁜 말을 관찰함이 바로 공덕이니
此則成吾善知識 이것이 나에게는 선지식이 됨이라
33 不因 謗起怨親 비방 따라 원망과 친한 마음 일지 않
으면
何表無生慈忍力 하필이면 남이 없는 자비인욕의 힘 나
타내 무엇할건가.
34 宗亦通說亦通 종취도 통하고 설법도 통함이여
定慧圓明不滯空 선정과 지혜가 두렷이 밝아 공에 응체
하지 않는도다.
35 非但我今獨達了 나만 이제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
河沙諸佛體皆同 수 많은 모든 부처님 본체는 모두 같
도다.
36 獅子吼無畏說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百獸聞之皆腦裂 뭇 짐승들 들으면 모두 뇌가 찢어짐
이라
37 香象 奔波失却威 향상은 분주하게 달아나 위엄을 잃
고
天龍 寂聽生欣悅 천룡은 조용히 듣고서 희열을 내는
도다
38 遊江海涉山川 강과 바다에 노닐고 산과 개울을 건너
서
尋師訪道爲參禪 스승 찾아 도를 물음은 참선 때문이
라
39 自從認得曹溪路 조계의 길을 인식하고 부터는
了知生死不相干 생사와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40 行亦禪坐亦禪 다녀도 참선이요 앉아도 참선이니
語默動靜體安然 語默動靜에 본체가 편안함이라
41 縱遇鋒刀常坦坦 창. 칼을 만나도 언제나 태연하고
假饒毒藥也閑閑 독약을 마셔도 한가롭고 한가롭도다.
42 我師得見燃燈佛 우리 스승 부처님께서 연등불을 뵈옵
고
多劫 曾爲忍辱僊 다겁토록 인욕선인이 되셨도다.
43 幾廻生幾廻死 몇번을 태어나고 몇 번인나 죽었던가.
生死悠悠無定止 생사가 아득하여 그침이 없었도다.
44 自從頓悟了無生 단박에 깨쳐 남이 없음을 요달하고부
터는
於諸榮辱何憂喜 모든 영욕에 어찌 근심하고 기뻐하랴.
45 入深山住蘭若 깊은 산에 들어가 고요한 곳에 머무니
岑 幽邃長松下 높은 산 그윽하여 낙락장송 아래로다.
46 優遊靜坐野僧家 한가히 노닐며 절 집에서 조용히 앉
았으니
격寂安居實蕭灑 고요한 안거 참으로 蕭灑하도다.
47 覺卽了不施功 깨친즉 그만이요 공 베풀지 않나니
一切有爲法不同 모든 유위법과 같지 않도다.
48 住相布施 生天福 모양과 머무는 보시는 하늘에 나는
복이나
猶如仰箭射虛空 마치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도
다.
49 勢力盡箭還墜 세력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招得來生不如意 내생에 뜻과 같지 않는 과보를 부르
리로다.
50 爭似無爲實相門 어찌 함이 없는 실상문에
一超直入如來地 한번 뛰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감과
같으리오.
51 但得本草愁末 근본만 얻을 뿐 끝은 근심치 말지니
如淨瑠璃含寶月 마치 깨끗한 유리가 보배달을 머금음
과 같도다.
52 旣能解此如意珠 이미 이 여의주를 알았으니
自利利他終不竭 나와 남을 이롭게 하여 다함이 없도
다.
53 江月照松風吹 강엔 달 비치고 소나무엔 바람 부니
永夜淸 何所爲 긴긴 밤 맑은 하늘 무슨 하릴 있을건
가.
54 佛性戒珠 心地印 불성계의 구슬은 마음의 印이요
霧露雲霞 體上衣 안개. 이슬. 구름. 노을은 몸 위의 옷
이로다.
55 降龍鉢解虎錫 용을 항복받은 발우와 범싸움 말린 석
장이여
兩 金環鳴歷歷 양쪽 쇠고리는 역력히 울리는도다.
56 不是標形虛事持 이는 모양을 내려 허투루 지님이 아
니요
如來寶杖 親 跡 부처님 보배 지팡이를 몸소 본받음
이로다.
57 不求眞不斷妄 참됨도 구하지 않고 망령됨도 끊지 않
나니
了知二法 空無相 두 법이 공하여 모양 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58 無相無空無不空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
음이여
卽是如來眞實相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59 心鏡明鑑無碍 마음의 거울 밝아서 비침이 걸림 없으
니
廓然瑩徹周沙界 확연히 비치어 항사세계에 두루 사무
치도다.
60 萬象森羅影現中 만상삼라의 그림자 그 가운데 나타나
고
一顆圓明非內外 한 덩이 두렷이 밝음은 안과 밖이 아
니로다.
61 豁達空撥因果 활달히 공하다고 인과를 없다하면
茫茫蕩蕩招殃禍 아득하고 끝없이 앙화를 부르리로다.
62 棄有著空病亦然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면 병이기
는 같으니
還如避溺而投火 마치 물을 피하다가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도다.
63 捨妄心取眞理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여
取捨之心成巧僞 취사하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루
도다.
64 學人 不了用修行 배우는 사람이 잘 알지 못하고 수행
하나니
眞成認賊將爲子 참으로 도적을 아들로 삼는 짓이로다.
65 損法財滅功德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앰은
莫不由斯心意識 心. 意. 識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
이라
66 是以 禪門 了却心 그러므로 선문에선 마음을 물리치
고
頓入無生知見力 남이 없는 지견의 힘에 단박에 들어
가도다.
67 大丈夫秉慧劒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般若鋒兮金剛 반야의 칼날이요 금강의 불꽃이로다.
68 非但能 外道心 외도의 마음만 꺾을 뿐 아니요
早曾落却天魔膽 일찍이 천마의 간담을 떨어뜨렸도다.
69 震法雷擊法고 법의 우레 진동하고 법고를 두드림이여
布慈雲兮灑甘露 자비의 구름을 펴고 감로수를 뿌리는
도다.
70 龍象 蹴踏潤無邊 용상이 차고 밟음에 윤택이 그지 없
으니
三乘五性 皆惺悟 三乘과 五性이 모두 깨치는도다.
71 雪山肥 更無雜 설산의 비니초는 다시 잡됨이 없어
純出醍 我常納 순수한 제호를 내니 나 항상 받는도
다.
72 一性 圓通一切性 한 성품이 두렷하게 모든 성품에 통
하고
一法 含一切法 한 법이 두루하여 모든 법을 포함하
나니
73 一月 普現一切水 한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고
一切水月 一月攝 모든 물의 달을 한 달이 포섭하도다.
74 諸佛法身 入我性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
들어오고
我性 還共如來合 나의 성품이 다시 함께 여래와 합치
하도다.
75 一地 具足一切地 한 지위에 모든 지위 구족하니
非色非心非行業 색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행업도
아니로다.
76 彈指圓成八萬門 손가락 퉁기는 사이에 팔만법문 원만
히 이루고
刹那 滅却三祇劫 찰나에 삼아승지겁을 없애버리는도
다.
77 一切數句非數句 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與吾靈覺何交涉 나의 신령한 깨침과 무슨 상관 있을
건가.
78 不可毁不可찬 훼방도 할 수 없고 칭찬도 할 수 없음
이여
體若虛空勿涯岸 본체는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도다.
79 不離當處常湛然 당처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니
멱則知君不可見 찾은 즉 그대를 아나, 볼 수는 없도
다.
80 取不得捨不得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나니
不可得中 只�得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얻을
뿐이로다.
81 默時說說時默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음이
여
大施門開無壅塞 크게 베푸는 문을 여니 옹색함이 없
도다.
82 有人 問我解何宗 누가 나에게 무슨 종취를 아느냐고
물으면
報道摩訶般若力 마하반야의 힘이라고 대답해 주어라.
83 或是或非人不識 혹은 옳고 혹은 그릇됨을 사람이 알
지 못하고
逆行順行天莫測 역행. 순행은 하늘도 헤아리지 못하도
다.
84 吾早曾經多劫修 나는 일찍이 많은 劫 지나며 수행하
였으니
不是等閑相�x惑 부질없이 서로 속여 미혹케 함이 아
니로다.
85 建法幢立宗旨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일으킴이여
明明佛勅曹溪是 밝고 밝은 부처님 법 조계에서 이었
도다.
86 第一迦葉 首傳燈 첫번째로 가섭이 맨 먼저 등불을 전
하니
二十八代 西天記 이십팔대는 서천의 기록이로다.
87 法東流入此土 법이 동쪽으로 흘러 이 땅에 들어와서
는
菩提達磨爲初祖 보리달마가 첫 조사 되었도다.
88 六代傳衣 天下聞 六代로 옷 전한 일 천하에 소문났고
後人得道何窮數 뒷 사람이 도 얻음을 어찌 다 헤아리
랴.
89 眞不立妄本空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 공함이
여
有無俱遣不空空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니 공하지 않
고 공하도다.
90 二十空門 元不著 二十空門에 원래 집착하지 않으니
一性如來體自同 한 성품 여래의 본체와 저절로 같도
다.
91 心是根法是塵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兩種 猶如鏡上痕 둘은 거울 위의 흔적과 같음이라.
92 痕垢盡除光始現 흔적인 때 다하면 빛이 비로소 나타
나고
心法雙亡性卽眞 마음과 법 둘 다 없어지면 성품이 곧
참되도다.
93 嗟末法惡時世 말법을 슬퍼하고 시세를 미워하노니
衆生 薄福難調制 중생의 복 얇아 조복받기 어렵도다.
94 去聖遠兮邪見深 성인 가신 지 오래고 사견이 깊어짐
이여
魔强法弱多怨害 마구니는 강하고 법은 약하여 怨害가
많도다.
95 聞說如來頓敎門 여래의 돈교문 설교를 듣고서는
恨不滅除令瓦碎 부숴 없애버리지 못함을 한탄하는도
다.
96 作在心殃在身 지음은 마음에 있으나 재앙은 몸으로
받나니
不須怨訴更尤人 모름지기 사람을 원망하고 허물치 말
지어다.
97 欲得不招無間業 무간지옥의 업보를 부르지 않으려거
든
莫謗如來正法輪 여래의 바른 법륜을 비방하지 말아라.
98 檀林無雜樹 전단향 나무 숲에는 잡나무가 없으니
울密深沈師子住 울창하고 깊숙하여 사자가 머무는도
다.
99 境靜林閒獨自遊 경계 고요하고 숲 한적하여 홀로 노
니니
走獸飛禽 皆遠去 길짐승과 나는 새가 모두 멀리 달아
나도다.
100 師子兒衆隨後 사자 새끼를 사자 무리가 뒤따름이여
三歲 卽能大哮吼 세 살에 곧 크게 소리치는도다.
101 若是野干 逐法王 여우가 법왕을 쫓으려 한다면
百年妖怪虛開口 백년 묵은 요괴가 헛되이 입만 엶이
로다.
102 圓頓敎勿人情 원돈교는 인정이 없나니
有疑不決直須爭 의심있어 결정치 못하거든 바로 다툴
지어다.
103 不是山僧 逞人我 산승이 인아상을 들어냄이 아니요
修行 恐落斷常坑 수행타가 斷. 常의 구덩이에 떨어질
까 염려함이로다.
104 非不非是不是 그름과 그르지 않음과 옳음과 옳지 않
음이여
差之毫釐失千里 털끝만큼 어긋나도 천리길로 잃으리
도다.
105 是卽龍女頓成佛 옳은 즉 용녀가 단박에 성불함이요
非卽善星 生陷墜 그른 즉 善星이 산 채로 지옥에 떨
어짐이로다.
106 吾早年來積學問 나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쌓아서
亦曾討疏尋經論 일찍 주소를 더듬고 경론을 살폈도다.
107 分別名相 不知休 이름과 모양 분별함을 쉴 줄 모르고
入海算沙徒自困 바다 속 모래 헤아리듯 헛되이 스스
로 피곤하였도다.
108 却被如來苦呵責 문득 여래의 호된 꾸지람을 들었으니
數他珍寶有何益 남의 보배 세어서 무슨 이익 있을건
가.
109 從來 學虛行 예전엔 비칠거리며 헛된 꾸지람을
들었으니
多年 枉作風塵客 여러 해를 잘못 풍진객(風塵客) 노릇
하였도다.
110 種性邪錯知解 성품에 삿됨을 심고 알음알이 그릇됨이
여
不達如來圓頓制 여래의 圓頓制를 통달치 못함이로다.
111 二乘 精進勿道心 이승은 정진하나 도의 마음이 없고
外道 총明無智慧 외도는 총명해도 지혜가 없도다.
112 亦愚癡亦小駭 우치하고도 겁이 많으니
空拳指上 生實解 빈 주먹 손가락 위에 실다운 견해를
내는도다.
113 執指爲月枉施功 손가락을 달로 집착하여 잘못 공부하
니
根境塵中 虛날怪 육근. 육경. 육진 가운데서 헛되이
괴이한 짓 하는도다.
114 不見一法 卽如來 한 법도 볼 수 없음이 곧 여래니
方得名爲觀自在 바야흐로 이름하여 관자재라 하는도
다.
115 了卽業障 本來空 마치면 업장이 곧 공함이요
未了還須償宿債 마치지 못하면 도리어 묵은 빛 갚으
리로다.
116 飢逢王膳不能飡 굶다가 임금 수라 만나도 먹을 수 없
으니
病遇醫王爭得差 병들어 의왕 만난들 어찌 나을 수 있
으랴.
117 在欲行禪知見力 욕망 속에서 참선하는 지견의 힘이여
火中生蓮終不壞 불 속에서 연꽃 피니 끝내 시들지 않
는도다.
118 勇施犯重悟無生 용시비구는 중죄 짓고도 남이 없는
법을 깨달으니
早是成佛于今在 벌써 성불하여 지금에 있음이로다.
119 師子吼無畏說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深嗟 頑皮� 어리석은 완피달을 몸시 슬퍼하는도
다.
120 只知犯重障菩提 중죄 범하면 보리를 막는 줄만 알 뿐
不見如來開秘訣 여래께서 비결 열어 두심은 보지 못
하도다.
121 有二比丘犯狀殺 어떤 두 비구 음행과 살생 저지르니
波離螢光 增罪結 우바리의 반딧불은 죄의 매듭 더하
였고
122 維摩大士頓除疑 유마대사 단박에 의심을 없애줌이여
還同赫日消霜雪 빛나는 해가 서리. 눈 녹임과 같도다.
123 不思議解脫力 不思議한 해탈의 힘이여
妙用恒沙也無極 묘한 작용 항하사같아 다함 없도다.
124 四事供養 敢辭勞 네 가지 공양을 감히 수고롭다 사
양하랴.
萬兩黃金 亦銷得 萬兩 황금이라도 녹일 수 있도다.
125 粉骨碎身未足酬 뼈가 가루되고 몸이 부숴져도 다 갚
을 수 없나니
一句了然超百億 한 마디에 요연히 백억 법문을 뛰어
넘도다.
126 法中王最高勝 법 가운데 왕 가장 높고 수승함이여
河沙如來同共證 강 모래같이 많은 여래가 함께 증득
하였도다.
127 我今解此如意珠 내 이제 이 여의주를 해설하오니
信受之者皆相應 믿고 받는 이 모두 상응하리도다.
128 了了見無一物 밝고 밝게 보면 한 물건도 없음이여
亦無人兮亦無佛 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129 大千世界 海中 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이요
一切聖賢 如電拂 모든 성현은 번갯불 스쳐감과 같도
다.
130 假使鐵輪 頂上旋 무쇠바퀴를 머리 위에서 돌릴지라도
定慧圓明終不失 선정과 지혜가 두렷이 밝아 끝내 잃
지 않는도다.
131 日可冷月可熱 해는 차게 하고 달은 뜨겁게 할지언정
衆魔不能壞眞說 뭇 마구니가 참된 말씀 부술 수 없도
다.
132 象駕觴嶸漫進途 코끼리 수레 끌고 위풍당당히 길을
가거니
誰見螳螂 能拒轍 버마재비 수레길을 막는 걸 누가 보
겠는가.
133 大象 不遊於兎徑 큰 코끼리는 토끼 길에 노닐지 않고
大悟 不拘於小節 큰 깨달음은 작은 절개에 구애되지
않나니
134 莫將管見謗蒼蒼 대통같은 소견으로 창창히 비방하지
말라.
未了吾今爲君決 알지 못하기에 내 이제 그대 위해 결
단해 주는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