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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시대에 나타난 이단들
기독교 신앙의 분열은 거의 기독교 신앙의 가장 초기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열은 일시적인 파벌주의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던 것으로서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각자 자기들이 좋아하는 지도자를 따름으로써 일어난 것이다(고전1:12). 그런데 이 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각각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몇몇의 옛 저자들은 유대주의적 분파들과 희랍학파들을 기독교의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러한 오류는 분열의 위험이 주로 이 두 부류의 영향으로 인하여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해 준다.
기독교 초기의 많은 회심자들은 그들이 전부터 물려받아 온 유대주의로부터 완전히 이탈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반면에 희랍 로마의 회심자들은 기독교의 메시지 안에서 그 완성된 형태를 지니게 된 그들 자신의 종교적 열망들에 연관되어 있는 이념들에 집착해 있었다. 그러므로 유대주의는 기독교의 법적, 제외적, 양식들을 유대교와 일치시키고 기독교의 풍부한 종교적 이념들을 유대교의 추상적인 유일신론적인 개념으로 해석함으로써 기독교를 유대교로 환원시키고 기독교의 독자적인 특성을 말살시키고자 위협하였으며 또한 희랍 정신은 기독교 신앙을 관념적인 철학의 범주에 끌어 넣고자 함으로써 기독교를 위협했다.
이러한 이단적인 움직임에 있어서 그 최초의 핵심적인 관심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보수적이며, 비 진보적인 유대인 신도들은 예수를 단순한 인간으로 보고자 하였으며 관념적인 희랍 신도들은 예수를 실제적인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보고자 하였다. 전자와 같은 경향은 그 후에 에비온주의로 알려지게 된 분파를 낳았으며 후자의 경향은 예수의 인간성을 단지 허사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했던 소위 가현설을 낳게 하였다. 그리고 에비온주의는 그 후에 실제적인 양자설로 발전하였으며 가현설은 모든 신비적이고 추상적인 기독론에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신약성서 기자들이 주로 경계한 것은 이러한 두 가지 이단들 중에 후자의 것이었다. 또한 희랍적 기독교 사상과 동양적인 심상이 연합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위기는 더욱 더 증가되었다. 즉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비전적 지식에 관한 매력적인 공언은 그리스도(여기서 그리스도라 함은 인간인 예수와 구별되는 신적인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를 천상의 존재들과 연관시키고 그를 우주적인 힘으로 간주함으로써 은밀한 신비의식을 수행하고 이에 관련된 도덕적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종파를 낳게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연히 지상적인 기독교의 종말론, 특히 육체적 부활을 부정하였는데, 이러한 이단적 움직임과의 주장은 신약성서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이러한 견해들을 확고하게 정립한 구체적이고도 조직적인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러한 이단적 견해는 이것이 기독교에 최초로 나타났던 영지주의의 시작인 바, 후기의 영지주의와 같이 단순한 하나의 경향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신약성경 안에는 이러한 이단들 중에 단지 니골라당 하나만이 언급되어 있다. 이 니골라당은 반 유대주의적이었으며 도덕적으로 다소 문란하였는데, 후기의 저자들은 니골라당의 원조를 안디옥교회의 집사였던 니콜라우스로 간주하고 있다. 아무튼 니케아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추론적인 움직임이 1세기 말 이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한 사실이다.
제2절 니케아공의회 이전의 이단들
1. 영지주의
2세기와 3세기에 저술된 기독교 작품들의 대부분은 초기의 기독교 전통을 희랍적 사고와 동양의 신화에 연결시키려는 철학적이고도 환상적인 시도들에 대항하여 이 초기의 기독교 전통을 순수하게 보존하려는 노력의 결실들이었다. 교회의 저술가들에 의하여 작성된 이단자들에 대한 방대한 목록들은 대부분의 경우 단지 일반적인 유형의 이단의 변형들을 제시해 주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발전적인 유형의 이단, 즉 기독교회의 이단성을 위협하던 전체적인 움직임을 영지주의라는 용어로 지칭할 수 있다.
영지주의란 단독적인 분파나 교의체계의 명칭이 아니라 오히려 사상과 실천의 한가지 경향을 가리키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까지 시도되어 온 이 영지주의의 현상들을 분류하려는 시도들은 그 어느 하나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는데, 이는 영지주의의 현상들이 너무나도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때 기독교 신앙의 출현은 만물에 대한 최종적이고도 완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소망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었다. 기독교는 하나의 신앙으로써 출현 하였으나 이제 기독교는 지식으로 고양 되어야만 했는데, 동양적 심상을 통하여 스며든 알렉산드리아의 신플라톤주의는 바로 이러한 일을 성취시킨 도구였다.
2. 오리게네스주의
기독교 내에서는 기독교적 영지주의가 출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적 영지주의의 중심부는 판타이누스에 의하여 설립된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학교였다. 바로 이 곳에서 유대인 필로는 은유적 방법을 통하여 히브리 전통을 플라톤 철학에 결부시키는 방법을 그의 기독교 제자들에게 가리켜 주었으며, 클레멘트는 비전의 사도적 전승에 관한 가설들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일련의 추상적 고찰들을 통하여 그리고 오리게네스는 조직적인 방법을 통하여 그 대부분이 기독교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극히 축소되고 간략화된 영지주의적 교의들의 주요 부분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외관상 성경의 내용을 보존하고 일반적인 전승들과 신앙 규범을 수호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단지 후대에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오리게네스의 교의들의 특징들에 대해서만 고찰해 보고자 한다.
먼저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단일성과 우월성에 절충시키지 않고 또한 하나님의 아들의 아들됨의 실제성을 부인하지 않은 채 로고스를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시 함에 있어서 성자가 성부의 본질로부터 파생된 것이라는 점을 자명한 사실로 가정하였다. 이러한 그의 교의는 성자를 신격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성자를 성부에 종속시키고 있다. 여기서 후자의 견해는 후대의 정통 신앙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이단적인 것이었다. 둘째로 그는 만물의 근원을 가장 지고한 존재로 보고 또한 만물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주장함에 있어서 만물이 마귀들 마저도 결국 하나님께로 회복된다는 점을 단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오리게네스의 교의들이 후기에 와서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에 관한 정통교리의 근거가 되었다는 점을 고찰해 볼 때 오리게네스의 교의들 속에 나타난 영지주의적 이단들이 정통교리의 활로를 예비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3. 마르키온주의
이처럼 만연해 있던 추론적인 경향에 대한 강한 반발은 일개 상인이었던 마르키온에 의하여 제기 되었는데, 그는 A.D 140년경에 폰투스(본도)에서 로마로 왔으며 분명히 바울 노선에 속한 반 유대적으로서 금욕주의적인 기독교를 선포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운동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그 결과 그의 견해를 지지하는 수백 개의 교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마르키온은 복음이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은총이 하나님의 계시이며 신약의 하나님은 유대교의 의와 복수의 하나님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또한 끝까지 바울 노선에 따른 율법과 은총의 반립을 고수함으로써 구약의 야훼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홀연히 그 자신을 나타내신 사랑의 하나님과 동일시 될 수 없음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유대교의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이 세상은 악한 것이며 참된 기독교인의 삶은 천상에 속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교인들에게 결혼을 금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자신의 견해에 따라 열편의 정통적인 바울 서신들과 누가복음과 유대교적인 부분들을 삭제한 사도행전만을 기독교의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예수를 선하신 하나님과 동일시 한 마르키온의 견해는 정통교회로 하여금 기독교 정경을 확정짓도록 하였다. 마르키온주의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거부하였던 까닭에 필연적으로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들의 도덕적 열의는 이들의 교회가 오랜 기간동안 이탈리아·이집트·팔레스타인·아라비아·시리아 그리고 그밖의 지역에 영향을 미칠 만큼 지대한 것이었다.
4. 모나르키아니즘
영지주의에 대한 또 다른 반동 세력들은 마르키온주의와는 반대로 예수에 관한 단순한 초대교회의 견해와 합리적인 유대주의로 되돌아 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운동은 추론적이고 은유적인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대항하여 안디옥에서 일어난 비판 역사적인 해석학파에 의하여 강력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반동세력의 주요한 양태는 모나르키아니즘과 몬타누스주의였다. 우리는 이 모나르키아니즘을 오늘날 우리가 소위 가톨릭 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데 이는 모나르키아니즘은 우주에 대한 유일신론적인 통치를 수호하는데 지적이고도 도덕적인 관심을 기울였던 반면에 가톨릭 주의는 오늘날의 가톨릭 신학의 계기가 되었던 구원의 군주성과 완전성을 수호하는데 감정적 종교적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주의"는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각기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모나르키아니즘은 비록 때로는 가현설적인 경향을 지니기도 하였으나 예수의 인간적인 삶의 사건들의 실제성을 강조하는 한편 그 당시에 만연해 있던 다신론적 경향에 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돌려진 지극한 고귀성과 탁월성을 신앙으로 보존코자 하였다. 이들의 기독론은 예수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들리워진 인간이었다는 양자설이거나 혹은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 이상의 존재로서 그 안에는 하나님의 선재적인 영이 거하고 계셨으며 따라서 그는 인간을 구원할 능력을 지녔다는 영성론이었는데, 전자는 에비온주의에 스며들어간 반면에 후자는 그 당시에 만연해 있던 추론적인 경향을 띤 것이었다.
A.D 170년경에 소아시아 지방에서 출현한 "알로기파"는 이러한 후기 양자론자들 중에서 가장 주요한 분파였다. 이들은 몬타누스주의에 반대하였으며 예수의 인간적인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로고스에 관한 논리를 거부하였으며 아마도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제4복음서를 요한의 작품으로 보지 않고 영지주의자였던 케린투스의 작품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후기에 와서 사모사타의 파울로스는 한층 더 강력한 양자설을 제시하였다.
양성론적 기독론은 이 기독론이 그리스도를 신의 영역에서 제거시키느냐 아니냐에 따라 양식론적 기독론과 신력론적 기독론으로 나뉘어졌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두 기독론 모두에 있어서 매우 어려운 난제였는데, 신력론자들은 그리스도가 사망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주장했던 반면에 양식론자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완전히 동일시 하였으며 따라서 테르툴리아누스로부터 "성부수난론자"라는 별명을 부여 받았다.
5. 몬타누스주의
기독교 사상의 추론적인 경향에 맞선 두 번째 주요한 반동세력인 카타브루기아주의, 혹은 몬타누스주의라는 이단의 명칭은 브루기아의 기독교 예언자인 몬타누스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몬타누스는 부루기아인들의 광적이고도 도취적인 성향을 초기 기독교의 비 세속적인 도덕성과 영감설과 단순성에 조화시키려 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보혜사에 대한 약속의 성취(몬타누스는 이 약속이 자기에게 성취되었다고 주장하였다)와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과 머지않아 그리스도의 왕국이 브루기아에 있는 페푸자에 세워질 것이라는 사실을 단언하였다(A.D 156년경).
그리고 그는 성령을 받은 자들은 모두 다 예언자가 되며 이들은 이로 인하여 완전해진 까닭에 죄없는 삶을 살 수 있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결혼을 금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이러한 이상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실천 불가능한 것임을 인정하여 신앙이 낮은 사람들에게는 결혼을 허용해 주었으며 죄를 용서받을 수 없는 죄와 용서받을 수 있는 죄로 나누었다. 몬타누스주의는 분명히 지고한 도덕적, 영적생활을 그 목표로 삼고 있었다. 몬타누스주의는 두 번째 회개를 부인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만연해 있던 방종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며 교회적인 권위를 직접적인 영감의 권위 하에 예속시킴으로써 그 당시에 만연해 있던 형식주의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자신의 만년에 몬타누스주의로 돌아선 사실은 몬타누스주의가 지대한 도덕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
이 몬타누스주의 운동은 크게 발전하였으며 5세기에 종결된 오랜 논쟁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다소간의 망설임과 불안 가운데 이단으로 정죄 되었다. 그리고 이와같이 몬타누스주의가 이단으로 제거됨으로써 교회의 교권은 강화되고 정경의 수립이 촉진되었으나, 가톨릭 주의는 이에 속한 많은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해 두 계급의 기독교인과 두 부류의 죄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옛 이단들 중에는 위에 언급된 유형의 모든 이단들과 다소 분리된 두 가지 유형의 이단들, 즉 바울과 마니교가 있다.
6. 바울교
팔미라의 여왕인 제노비아의 궁중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안디옥의 주교였던 사모사타의 파울로스는 양자설과 오리게네스주의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반-형이상학적인 견해와 결합시켰다.
그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서 비 인격적인 로고스에 의하여 영감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격적, 도덕적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시면서 하나님께 복종함으로써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뜻과 하나님의 뜻과는 완전한 일치는 절대로 다시 풀려질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부활시에 영원한 신적인 위엄을 지니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파울로스는 A.D 268년(혹은 269년)에 안디옥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나 순교자 루키아누스에 의하여 얼마동안 지지되었던 그의 견해는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즉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에는 그의 제자들이 수 없이 많이 있었으며 아르메니아로부터 그의 교의들을 트레이스와 불가리아에 전래시킨 이주민들은(이들은 그들 자신의 교단을 바울교라고 지칭하였다) 중세기에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일어난 대폭동의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 8세기에 스페인에서 이들의 견해는 그 유명한 알퀸이 가담했던 극히 중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는 이러한 교의들을 지녔던 종파들이 종교개혁 시대까지 존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즉 최근에 촌락에 있는 아르메니아인들 사이에서 "진리의 열쇠"라는 문헌이 발견되었는데 이 문헌은 금욕주의와 혼합된 이들의 복음주의적인 특성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7. 마니교
마니라는 이름의 메소포타미아 사람이 여러 지방을 여행하다가 245년에 페르시아의 수도에 도달하였으며 이 때부터 새로운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선교활동은 그가 왕의 총애를 받게 될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다른 왕이 즉위하자 '마기'의 반발로 인하여 왕의 총애를 잃고 279년에 십자가 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교의들은 깊은 뿌리를 지니고 있었던 까닭에 소멸되지 않고 급속히 유포되어 갔다. 그의 교의들은 이탈리아와 북아메리카에서 많은 추종자들을 획득했으며 결국에는 프랑스의 카타리와 스페인 그리고 그 인근 지역들을 휩쓸어 훗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전조가 된 문화와 동맹관계를 맺음으로써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항하는 강력한 종교 단체로 발전하였다.
마니교는 다시 소생하는 영지주의 같다. 마니교는 유대교와 바벨론 종교와 조로아스터교와 불교의 신조들과 우주관들을 병합하여 이를 기독교 용어로 표현하였다. 마니교는 신자들을 방청인과 선민, 혹은 완전자의 두 부류로 나누었으며 가공적인 우주관과 우주적 구원론과 이원론적인 윤리관을 제시하였다.
특히 마니교의 교의는 위의 마지막 항목에 있어서 신플라톤주의를 능가하고 있는데 이는 이 이원론적 윤리관이 악의 실체성과 영원성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마니교는 물질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이 그 근본에 있어 하나이며 각기 사단과 하나님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는 어두움의 왕국과 빛의 왕국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단에게 항거하시기 위하여 원초적 인간(이 인간은 지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을 창조 하였으나 이 인간은 사단에게 패배를 당하고 말았으며 또한 이 인간은 비록 하나님과 천사들에 의하여 구조되었으나 이와 동시에 빛의 요소를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오늘날의 악한 세상은 이 빛의 요소들이 어두움과 혼합됨으로써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마귀들은 빛의 요소를 감금시키고 보존하기 위하여 이에 알맞은 인간을 창조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감금되어 있는 빛의 요소들을 되찾고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그 빛의 저장소가 될 천상계-태양·달·별들-을 창조하심으로서 구원의 방편을 마련하셨다. 여기서 예수-비 역사적인 예수-와 선택받은 자들은 인간을 돕는 구실을 한다. 이러한 과정은 죽음 이후(연옥)에까지 계속되는데, 구원을 받지 못한 영혼들은 이 세상의 종말시에 어두움의 군주에게로 예속된다. 이러한 인상적인 철학의 배후에 깔려 있는 도덕적인 진지함과 엄격한 금욕주의와-이들은 결혼, 세속적인 욕망, 더러운 말, 육식, 육체적인 가해 등을 엄금하였다. 간결한 제의 행사는 많은 숭고한 사람들의 마음을 매료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세력은 관대함에 대한 교의로 인하여 약화되었는데, 이 마니교의 영향은 중세기의 유케파, 광신파, 보고밀파, 베가프회 등에 나타나 있다.
제3절 니케아공의회와 그 이후 시대 이단들
1. 아리우스주의
안디옥의 역사비평적 해석학파와 합리주의에 근거를 둔 모나르키아니즘과 구원에 대한 실제적인 견해와 은유적인 해석 방법과 신성에 대한 형이상학에 근거를 둔 가톨릭 주의 사이의 긴 논쟁은 니케아공의회(325년)에서 제기된 아리우스주의와 아타나시우스주의 사이의 통렬한 논쟁으로 그 절정에 달하였다. 이 논쟁에서 이긴 쪽에게 돌아갈 상급은 기독교에 관한 자신의 해석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은 것뿐만 아니라 황제의 후원을 받는 것이었다. 이 논쟁에서 패배한 인물은 다름 아닌 아리우스였으며, 그 결과 아타나시우스는 이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기독교의 변증자가 되었다.
이 논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선재하신 성자께서 개별적인 위격을 지니고 계셨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본성에 의한 것이었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더의 주장이었다. 알렉산더의 장로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아리우스는 이러한 알렉산더의 주장에 반대하여 성부의 본질은 자존적인 것이며 또한 성자는 참으로 아들이신 까닭에 성자의 본질은 성부로부터 산출된 것임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아리우스는 성자께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성부의 창조의지에 의하여 이 세상의 창조 질서에 따라 무로부터 창조되셨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에 의하면 성자는 성부와 같은 선재적인 존재가 아니며 또한 성자는 하나님이시기는 하지만 성부로부터 신성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성부께서 낳으신 아들, 곧 "로고스"이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지니고 계신가 그렇지 아니한가 하는 것이었다.
니케아공의회는 유세비우스주의자들이 절충안으로 내놓은 절충적인 용어인 유사한 본질이라는 용어를 기각시키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지지를 얻어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파문하였다. 니케아공의회는 이에 대한 최종적인 판결로서 하나님께서 세 가지 인격들 성부·성자·성령을 지니고 계심을 공포하였으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인간 편에서 하나님 편으로 확실하게 이전되었다. 그러나 이 논쟁은 여기서 끝날 것이 아니었다. 이 두 종파들은 각기 정치적인 권력자의 지지를 얻는데 따라 이기기도 하고 패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아리우스 주의의 견해는 동방교회를 3세기 동안 분열시키고 결국 동방교회를 이슬람교의 희생제물로 만들었던 격렬한 논쟁들 가운데 재차 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울필라스에 의하여 고트족 국가들에 전패됨으로써 많은 게르만 부족들의 신조가 되었다. 그리고 고트족이 이탈리아를 통치함에 따라 아리우스주의는 이탈리아의 지배적인 신조가 되었으며 유럽 대륙에 있어서의 아리우스주의의 최종적인 정치적 패배는 로마 가톨릭 교황이 프랑크인들과 동맹을 체결하고 비 가톨릭 국가들을 정복함으로서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주의는 소멸되지 않았으며 오늘날까지 영국에 그 자체를 옹호하는 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니케아공의회의 결정은 아리우스주의 논쟁을 종식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논쟁들을 불러 일으켰으며 새로운 이단들을 출현시켰다. 이러한 이단들 중에서 아이티우스·아스테리우스·유노미우스 등과 같은 인물들의 지도하에 "동일본질론"에 반대한 수 많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아노모이오스파로 불리워졌는데 이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라오리케아의 주교였던 아폴리나리우스였다.
2. 아폴리나리우스주의
아폴리나리우스는 최초에 니케아공의회 법령의 옹호자였으나 그는 아타나시우스가 동정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지칭한데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 두 인격, 즉 인성과 신성을 부여한 사실에 따르는 위험을 지적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이 혼합되어 있다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견해와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됨으로써 그 독자적인 특질을 상실했다는 닛사의 그레고리우스의 견해에 공감하여 그리스도 안에는 로고스가 이성적 영혼, 혹은 정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의 동물적 영혼과 육체만이 그의 이단성에 속한 것이라는 점을 주장함으로써 인격과 의지의 이원론을 탈피하고자 하였다. 형이상학적 구원에 대한 이러한 함축적인 부정은 362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정죄되었으며 381년에 열린 제1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3. 네스토리우스주의
다소의 디오도루스,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루스 그리고 레오도레투스와 같은 안디옥 신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에 대한 주장은 콘스탄티노풀의 주교였던(428년) 네스토리우스로 하여금 점차로 증가하고 있는 마리아 예배에 대하여 반기를 들게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로고스에는 인간적인 속성이 부과될 수 없는 까닭에 그리스도 안에는 인성과 신성이 병존해 있고 또한 서로 협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지만 이 두가지 속성은 결코 하나로 융합되지 않았으며 상호간에 서로 유통되고 있지도 않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의 견해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는 단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어머니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교황의 지지를 받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는 이에 대한 반대 견해를 피력하였으며, 에베소공의회(431년)는 키릴루스의 견해를 지지하여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파문시켰다.
그 결과 에렛사의 네스토리우스파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는데 이들의 일부는 페르시아로 도주하여 그곳에서 다시 인도·중국·타타리·아라비아 등지로 흩어졌다. 이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쿠르디스탄에 오늘날까지 계속 존속해 오고 있는데 말라바르 해안에서는 이들의 한 분파가 발견되었다. 이 네스토리우스파의 제의 의식은 희랍정교회나 로마 가톨릭교회의 의식보다 단순하며 이들의 조직은 사제제도와 다소 거리가 멀다.
4. 그리스도 단성론과 그리스도 단의론
유티게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로 되었으며 따라서 성모 마리아는 그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어머니이시고 그리스도의 육체는 인간의 육체와 동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어서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키릴루스의 반론을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이들간에는 새로운 논쟁이 전개 되었는데 교황 레오1세의 제안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는 점을 받아들임으로써 이 논쟁을 한층 더 가중시켰다. 그리고 이 논쟁에는 정치적인 세력이 개입되었는데 이들 간의 다툼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간의 무력에 의한 싸움으로 발전하였으며 비잔틴 제국의 황제들은 오랜 박해와 자체 분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콥트족·이디오피아·아르메니아교회에 잔존해 오고 있다.
그리스도의 단의론은 그리스도 단성론의 결과로 생겨났다. 이 "그리스도의 단의론"이란 명칭은 페르시아에 항거하여 자신의 그리스도 단성론적 견해를 옹호하려는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시도에 의하여 7세기에 이르러 독자적인 분파로 발전된 종파에 붙여진 명칭으로서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그리스도의 이원성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두 가지 본성을 지니고 계시지만 오로지 단일한 활동력만 지니고 계신다는 절충안을 제의 했었다. 그러자 이에 대하여 또 다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는데 교황들은 각기 자신의 견해에 따라 이편을 들기도 하고 저편을 들기도 하였다 동로마제국의 황제들과 총대 주교들은 이 새로운 교의를 지지하였으나 이 그리스도 단의론은 680년에 열린 제3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제3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는 그리스도께서 두 가지 의지를 지니고 계신다는 사실을 공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단의론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존속되었다.
옛 이단들에 대한 위의 고찰들은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독단적인 분파들의 산물이 아니라 기독교 발전에 있어서 근본적인 추진력이었으며 정통교리의 수립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4절 중세의 이단들
중세의 이단들은 주로 이단들의 관심사가 교회 외적인 것보다 오히려 교회 내적이고 실제적이었다는 점에 있어서 옛 이단들과 그 성격을 달리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중세의 이단들은 정통교리에 대한 적대적인 사상 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세력에 대한 개인주의적 항거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개인과 공동체에 있어서의 보다 높은 삶을 영위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결국에 가서는 기존 교회와 맞서는 교회 조직을 수립하였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특수한 교의들에 대한 개별적인 수정이나 부정을 다루기보다는 오히려 가톨릭교회의 기반을 위협했던 바 많은 사람들이 가담했던 영적 운동들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개별적인 교의들에 대한 수정이나 부정을 다루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까지 늘 계속되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서방교회에 있어서의 교황권의 성장과 프랑크인들의 개종파 이슬람 교도들에 의한 동방 기독교의 정복은 기독교의 핵심부를 서부 유럽으로 이전시켰다. 따라서 중세의 이단들은 유럽에서 일어난 것들이다. 이 이단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이 이단들의 존재는 11세기에 이르러 갑자기 눈에 띄게 커지기 시작하였으며 짧은 기간에 전 유럽을 다시 말해서 횡적으로는 스페인에서 불가리아까지, 종적으로는 영국에서 이탈리아 중앙지역까지 휩쓸었다.
이들 이단자들은 특히 프랑스 남부와 스위스와 이탈리아 북부에 많이 있었으며 파리, 오를레앙, 페임, 네델란드의 아라스와 캠브레이, 독일의 고슬라르와 쾰른과 트리에르와 메츠와 스트라스부르크, 헝가리, 영국의 남동부, 카탈로니아, 아라곤 등지에도 상당수가 있었다. 로마 교황청은 이들을 분쇄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결국 이단들은 세속의 권력과 손잡은 로마교황청의 무력에 의하여 분쇄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이 이단들이 완전히 분쇄된 것은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종교개혁이 여러 면에 있어서 이들의 활동을 재기시키고 또한 이러한 활동에 영구성을 부여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직 명백한 증거는 없으나 이러한 이단의 활동이 교회 정책에 몰두해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권이 위기를 인식하게 되기 이전에 이미 일반 백성들과 일부의 사제들 사이에 오랫동안 그 세력을 넓혀 왔었던 것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로 여겨진다.
우리는 중세기 이단들의 근원을 명확하게 추적해 볼 수 있다. 옛 이단들 아리우스주의, 바울교, 마니교의 교의들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유럽에 전래되었으며 초기의 비 교권적 형태의 신앙은 유럽 대륙에 계속 잔존해 있었다. 그리고 샤를 마뉴의 학교들과 수도원 학교들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과학적인 지식에 관심을 갖게 하였으며 또한 유럽에는 대학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클루니회 유형의 많은 수도회들의 성장의 계기를 이룬 커다란 종교 부흥운동은 일반인들의 삶에 급속히 파고 들어 갔으며, 그 당시 이미 자국어로 번역되어 있던 성경을 읽음으로써 사제가 집전하는 성례전에 의존하지 않고도 종교적, 도덕적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점증하는 확실성은 각 개인을 비교적 독립적인 위치에 올려 놓았다.
바로 이러한 종교 부흥운동에서 일어난 십자군 운동은 궁극적으로 유럽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개혁시켰으며 봉건제도를 붕괴시키고 인간의 마음과 육체를 농노제에서 해방시켰으며 스페인과 아르리아해와 다뉴브강을 통하여 아라비아인들의 학문을 도입시켰고 이와 동시에 희랍 고전과 라틴 고전들을 학생들의 손에 넘겨줌으로써 교회 권위에 속한 많은 마력적 요소들을 타파하였다.
우리는 고트샬크의 예정론(9세기), 화체설에 대한 베렌가리우스의 반론(11세기), 아벨라르두스의 염세론(12세기) 등과 같은 개별적인 이단들을 고찰함에 있어서 각기 다른 종교 공동체를 형성한 이 이단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추론적 이단들 : 하나님과 이 세계에 대한 철학적 견해와 근거를 둔 이단들. 이들은 영지주의, 마니교와 유사하며 그 금욕적인 면에 있어서는 가톨릭 주의 자체와 유사하다.
신비주의와 광신주의에 속한 이단들 : 이들은 무아경에 대한 체험과 예언주의를 가장 높이 평가하며 범신론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반교권적인 복음주의적 이단들 : 이들은 교권주의와 성례전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한편 민주주의적인 성경주의를 제창하고 있다. 교권적인 복음주의적 이단들 : 이들은 가톨릭교회의 단일성과 계속성을 파괴하지 않은 채 그 내부로부터 가톨릭교회를 개혁시키고자 하였다.
중세기의 이단들에 대한 이와같은 구분들은 몇몇 경우들에만 관련된 것으로서 이는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는 이단들도 서로 공통적인 요소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5절 추론적 이단들
추론적 이단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단들은 카타리파, 보고밀파와 같은 이원론적인 이단들과 아말릭파, 베가르회, 베긴회, 자유정신 형제파와 같은 범신론적인 이단들이다.
1. 중세기의 카타리파
아퀸데인과 오를레앙에서의 이들의 활동을 통하여 11세기 초에 로마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의 관심을 끌었으나 오를레앙에서는 1012년에 10명의 사제들이 이들의 견해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 카타리파는 이미 대중들 속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곧 프랑스 남동부와 그 인근 지역으로 전파되었는데, 이들의 근거지는 툴루즈였다.
이 카타리파의 추종자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이들이 그들 자신의 지식과 산업과 숭고한 생활방식을 통하여 그들 자체의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자 교황은 무력으로 이들을 멸절시키지 않고는 이들의 세력을 저지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주변의 군주들을 명하여 이를 감행하였으며 그 결과 알비파에 속한 전 지역이 페허화되고 말았다(1229년). 그리고 그 결과 카타리파(알비파, 대중파, 파타리파, 불가리파 등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는 절대적 이원론자들인 알바넨시스파(중심지는 프랑스의 알비)와 상대적 이원론자들인 콘코리치파(중심지는 이탈리아의 곤코레조)로 나누어 졌는데 전자의 수가 후자의 수보다 월등히 많았다. 특히 알바넨시스파는 트레이스와 불가리아의 파울룻 교도들을 통하여 마니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통하여 프랑스에 전래된 아라비아 철학과 유대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가톨릭교회의 타락한 상태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카타리주의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대조를 이루고 그 내용을 제시했던 바, 교회의 제외 방식과 조직에 연관된 동양의 철학과 엄격한 금욕주의를 유럽에 정착시키고자 한 시도였다. 이 카타리파의 지고한 도덕성과 로마 가톨릭교회가 만족시켜 주지 못했던 영적인 갈망을 채워줄 수 있었던 강한 힘은 로마 가톨릭교회로 하여금 로마 가톨릭교회의 지고성에 대한 위협을 절감케 하고 이들을 억제할 강력한 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카타리파는 물질과 정신의 기원을 서로 상반된 두 존재로 거슬러 올라갔으며 물질을 좋게 여기는 성경 구절들을 삭제하고 인류의 기원과 타락과 구원에 대한 공상적인 견해와 예수에 관한 가현실적인 견해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성령을 세 부류, 즉 거룩한 성령, 중재적 성령, 최고의 성령으로 나누었으며, 이중 마지막 부류의 성령이 거하고 있는 사람들은 완전하고 무죄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하였고 영성이 낮은 단계의 기독교인들을 간단히 "신자"라고 지칭하였다. 또한 이들은 "최고의 성령"이 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엄격한 금욕주의 결혼 육식 등의 금지를 요구하였으며 마지막 일들에 대해서는 죽음 후에 부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윤회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카타리파가 파문을 받게된 요인은 특히 가톨릭교회의 교회적이고 제의적인 체제들을 그들이 부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가톨릭교회의 체제를 악마적인 것으로 간주했었다. 그들은 가톨릭교회의 사제제도를 네 단계의 완전한 성직자를 주교, 큰아들, 작은아들, 집사로 구성된 사제제도로 대치시켰으며 서품식은 주교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또한 이들은 가톨릭교회의 일곱 가지 성례전을 이와는 다른 네 가지의 성례전으로 대치시켰다.
이중 첫 번째 성례전은 어른들에게만 행해진 "안수식"으로서 이 의식은 성직자가 의식 참여자의 머리에 자신의 두 손을 얹음으로써 성령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이 의식을 받은 자는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상속인이 되고 완전한 사람으로 간주 되었으며 이에 대한 유효성은 집전자의 순결함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 두 번째 성례전은 "소환식"으로서 신자는 이 의식을 받음으로써 임종이 가까와지기까지 안수식을 연기하였다. 또한 이 소환식을 받은 자들은 거의 치명적인 것에 가까운 질식 상태와 자상을 견디어내야만 하는 "인내식"을 받아야만 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성례전 중에는 신자들이 무릎을 꿇은 채 완전의 축복을 받는 "선혜식"이 있었다. 이들은 매일 성찬식을 거행하였으나 화체설을 믿지는 않았으며 서품식을 행할 때 서약을 행하지 않았다. 이들의 삶은 흠이 없이 순결한 것이었으며 어떠한 방해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은 14세기까지 계속 존속하였다.
2. 보고밀파(하나님의 친우회)
보고밀파는 트라키아와 그 인근 지역에 살고 있던 슬라브족들 가운데 존재하던 한 종파로서 카타리파와 마찬가지로 우주론과 제의 형식에 있어서 바울파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보고밀파는 카타리파와 같이 그렇게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다. 이들은 시벨리우스주의와 유사한 삼위일체론을 지니고 있었으며 형상 숭배를 거절하고 입교의식으로서 세례의식을 베풀었다. 그리고 이들은 성만찬을 영적인 것으로 승화시켰으며 구약성경의 일부분을 인정하지 않고 은유적인 해석 방법을 채택하였다.
3. 아말릭파
아말릭파는 파리대학의 교수였던 아말릭의 추종자들로서 아말릭은 1204년에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들은 세계의 역사를 세 단계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안에 성육신하신 시대,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 안에 성육신하신 시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아말릭파 안에 성육신 하심으로서 개시된 성령의 시대로 나누었으며 외적인 법령들은 무시하였고 부활과 하늘나라와 지옥을 영력으로 해석하였다.
베가르회와 베긴회는 경건한 남·녀들로 구성된 형제단과 자매단으로서 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 주고 기도에 전념하였다(이 형제단과 자매단은 "브게"라는 사제가 최초로 조직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결코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떨어져 나오려고 한 것이 아니며 경건한 평신도들의 성장해가는 영적인 상태를 대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범신론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13세기에 유럽의 여러 지역, 특히 네덜란드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한편 자유정신 형제단도 역시 위의 베가르회, 베긴회와 유사한 집단으로서 이들보다 조금 후에 번영을 누리기 시작하였으며 16세기에 소멸되었다.
제7절 반 교권적인 복음주의적 이단들
중세의 이단들 중에는 그 민주주의적 성격에 있어서는 위에 언급된 부류의 이단들과 다소 유사하지만 전체적으로 이와는 전혀 다른 이단인 반유아세례파가 있었는데, 이들의 지도적 인물은 브뤼이의 페트루스와 로잔의 앙리였다. 그리고 이들의 시초는 본토의 아리우스와 밀라노의 요비니아누스와 남부 갈리아 지방의 비길란티우스가 교회 내에서 날로 성장해 가는 교권주의적 경향과 금욕주의와 이교화된 제의의식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요비니아누스와 비길란티우스의 추종자들은 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수세기 동안 깊은 알프스산 속에 은거해 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마도 투린의 클로드의 개혁운동은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클루니회의 부흥운동이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를 휩쓸던 11세기와 12세기의 격동기에 이 복음주의자들은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수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페트루스는 원래 사제였으며 그의 실제적인 활동기는 1104-1124년이었다. 그리고 앙리는 수도사로서 페트루스보다 약간 후대의 인물(1116- 1148년)이었다. 또한 페트루스는 화형을 당하였으며 앙리는 옥에 감금되었는데 그는 그 후에 탈옥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다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의 가르침을 반복하여 가르침으로 기독교의 순수한 도덕성과 민주주의적인 단순성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구약성경을 거의 중요시 하지 않았다. 이들의 가장 강한 적이었던 페트루스는 이들이 십자가에 대한 경의와 화체설과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와 봉헌을 거부하는데 대하여 공격을 가하였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에서 고찰해 볼 때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개인적 신앙, 인간의 영성, 사물에 대한 합리적인 사고, 도덕적인 순수성,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의 직접성, 현재의 삶이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지니게 될 중요성과 그 의의 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들과 동시대에 속한 또 다른 인물로는 레니쉬 지방에서 이와 유사한 운동을 전개하였던(1115-1146년) 탄켈름과 브리타니의 유도 데 스텔라(1147년 사망)가 있었는데, 이들의 활동 영역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또한 이 당시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개혁은 브레시아의 아르날도에 의하여 수행되었는데, 이 아르날도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속화에 반대하였으며 사제들과 수도사들의 생활을 정화시키고 이들에게 세속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도록 하며 또한 이들로 하여금 전적으로 일반 신도들의 헌물에 의존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아르날도의 노력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결국 그는 바르바로사 황제에 의하여 교황 알렉산더 3세에게 넘겨져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유아세례를 강력하게 반대하였던 아놀드파와 롬바르디아의 엄격파(혹은 빈곤파)는 어느 정도 이 아르날도의 영향으로 인하여 생겨난 집단들로서 이들은 14세기까지 존속하였다.
1. 발도파
발도파는 중세기의 이단들 중에서 가장 큰 힘을 지녔던 집단으로서 오늘날까지 역사학자들의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어 오고 있다. 이 집단의 명칭은 그 기원이 다소 불분명하다. 이 운동의 최초의 기원에 대해 분석가들은 발도파라는 이들의 명칭을 이들의 처음 출현했던 지역적 특성(이들은 알프스 계곡 프랑스어로-계곡을 의미한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활동은 종종 투린의 주교였던 클로드의 개혁운동(9세기)과 연관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이 명칭은 페트루스 발도의 활동에서 유래된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 페트루스 발도는 리용시의 부유한 상인으로서 12세기에 프랑스에 큰 영향을 미쳤던 종교운동의 영향을 받았으며, 신약성경에 대한 비 가톨릭 교인들의 통찰과 이해에 감명을 받고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여 이 번역본을 전국에 배포하는 데 자신의 전재산을 희사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평신도로서의 최초의 선교활동이었으나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이탈하려는 생각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러한 성경 읽기 주창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대립된 상태에 놓여 있는 그들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또한 두 교황들(알렉산더 3세<1179년>와 루키우스 3세<1183년>이 잇달아 이들이 요청한 바 가르치고 선교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해 주기를 바라는 탄원을 거절하고 더욱이 이들을 로마 가톨릭교회와 맞서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열심은 그들 앞에 놓인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곧 중부 유럽과 서부 유럽 전체에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들은 그 당시 참된 신앙의 주요한 표지로 간주되던 청빈의 이념을 받아들였으며 따라서 얼마 동안 리용의 빈자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세력이 이탈리아로 뻗어가게 됨에 따라 이들은 롬바르디아의 빈곤파라는 한층 더 급진적인 집단과 상호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이들은 결국 상호간에 부분적인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1217년). 이 당시 그곳에는 둔카리아파라는 이와 유사한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발도파는 얼마간 세례식과 성만찬에 구원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화체설을 믿었으나 이들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로마 가톨릭교회의 저항에 부딪히게 되자 근대의 “복음주의적”입장으로 전향하였으며, 13세기 중기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제도와 도덕성에 대하여 직접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들의 순수한 삶의 방식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결국에 가서는 이단의 표지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기적들과 축일들과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와 성자들의 중재와 연옥에 관한 교의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공적인 모임을 삼가하고 서원을 행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이들은 비록 카타리파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사람"과 "수련자들"을 구분하였으나 거의 모든 점에 있어서 결국 페트로부루이파와 앙리파의 일반적인 견해들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들은 프란체스코회와 유사한 강력한 조직과 선교활동을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사도들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순회 설교자들은 독일의 여러 도시들과 마을에서 수많은 상인 단체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그 당시 유럽 중부를 휩쓸고 있던 새로운 민주주의적인 사회 경제 운동 단체들에게 심오한 종교심을 심어주는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항상 종교재판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나 때로는 표면상 종교재판소의 결정을 따르는 방식으로써 이러한 위협을 슬기롭게 피해 나갔으며 따라서 이들은 결코 근절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보헤미아·모라비아 등지에서 급진적인 양상을 나타냈으며, 유럽 대륙에 후스파와 재세례파 그리고 영국에서는 위클리프파를 출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성경을 널리 보급시킨 것이 종교개혁의 주요한 원인들 중의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이들은 매우 독특한 형태로 오늘 날까지 이탈리아에 상당수가 존재 해 있다.
제8절 교권적인 복음주의적 이단
이들은 위에 언급된 이단들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을 인정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도덕적, 종교적 개혁의 중요성을 절감함으로써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나 실재론을 통하여 혹은 비 교권적인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통하여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의 분리를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주요한 예로는 영국에서의 위클리프의 개혁운동과 보헤미아에서의 후스파의 운동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의 개혁운동은 모두 다 정치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 두 집단의 활동력이 그 당시 영국과 보헤미아에 만연해 있던 바 교황권 혹은 교황의 독단적인 권위에 대항하는 국가적 정신에 힘입은 바가 크기 때문이다. 이 두 개혁운동 중에서 위클리프의 개혁운동이 어느 정도 후스파의 발단의 근거가 되었으나 로마가톨릭교회를 더 깊이 각성시킨 것은 이 후스파의 활동이었다.
1. 위클리프파
한 때 노르만족의 지배를 받던 옛 영국의 국가적 정신은 재차 소생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정신은 영국 내의 자유민들과 귀족들의 관심이 규합됨으로 인하여 마그나 카르타 시대에 왕과 교황의 세력에 맞설 정도로 강대해 졌다.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을 사이에 놓은 교황과의 다툼, 성직자들에 대한 세금징수, 아비뇽에서 프랑스 국왕들과 교황들에게 미친 지대한 영향에 대한 반감, 프랑스와의 전쟁, 교황이 영국으로부터 헌금을 징수해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성직 후임자 임명령과 서임령의 공고, 이 모든 조치들은 교황청에 대한 영국의 국가적 반감을 한층 더 첨예화시켰다. 그리고 성직자들을 정화시키고 탁발수도사들에게 설교를 권장했던 링컨의 주교 로버트 그로스테스트의 개혁운동과 일반 대중들이 타락한 성직자들을 경멸하게 되고 기존의 것보다 더 단순한 형태의 종교생활을 추구하게 된 양상을 잘 예시해 준다.
이 당시(에드워드 3세 치하) 옥스퍼드대학의 교수였던 위클리프는 교황권에 대항하는 강력한 반론을 전개하기 시작하였으며 결국에 가서는 교황을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적그리스도로 간주하고 일종의 장로교적인 교회 통치 제도를 주창하였으며 수도회들을 논박하였다. 그는 라틴어와 영어로 방대한 양의 작품을 쓰고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며(1380년), 온 지방에 자신의 청빈한 사제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고 이들을 통하여 자신이 번역한 성경을 일반 대중에게 유포하며 또한 이들로 하여금 일반 대중에게 참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함으로써 일반 대중을 교화시키고자 하였다. 이 당시의 고양된 국가적 감정과 영국 농민들의 단결은 이러한 그의 선교활동에 큰 성공을 안겨다 주었는데, 영국의 프로테스탄트운동 특히 청교도운동은 바로 이때에 기반을 다지게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위클리프는 곧 교회 당국에 의하여 공격을 받았으나 그는 에드워즈의 통치 말기까지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나약한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국가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옥스퍼드를 떠나 요크세주에 있는 루터워드 교구에 은거하였으며 1384년에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위클리프의 실재론은 그를 가톨릭교회에 속하게 하였으나 이러한 반면에 그것은 그를 구원에 관한 교회의 특권을 무효화 하는 엄격한 예정론으로 이끌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것은 비록 그에 의하여 선행의 필요성을 완전히 배제시키는 것으로 발전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믿음에 의한 갱생을 주장하였으나 세례를 받지 못한 어린아이들을 구원의 영역에서 배제시키지는 않았으며, 화체설을 부인하였고 말년에 와서는 연옥에 관한 교의를 거부하였다. 결국 1428년에 열린 콘스탄스교회회의는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의 시신을 파내어 불살랐으며 그 재를 세베른 해안의 바닷물에 던졌다.
그 후 위클리프파는 유럽 대륙에서 전래된 롤라드파와 병합되었으며 영국인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이 위클리프파는 사회적 개선을 위한 농민들의 특징의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랭카스터 가문이 영국을 지배하게 되자 로마 가톨릭교회는 영국 왕실에 압력을 가하여 위클리프파를 부분적으로 억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단들을 화형에 처하도록 한 영국 최초의 의회법령이 1401년에 통과되자 윌리엄소터를 필두로 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하였다.
장미전쟁 동안에 이러한 종교운동은 거의 간과되어버리고 말았으나 이 운동은 종교개혁 때에 재차 붕괴되기까지 은연 중에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2. 후스파
보헤미아의 국민들은 슬라브족이었으며 희랍정교회의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로마제국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 이들은 이러한 기존 세력들에 대한 종교적, 정치적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 당시 보고밀파와 발도파의 교의들은 보헤미아의 여러 지역에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져 있었다. 또한 보헤미아의 지식층과 일반 대중들은 발트하우젠의 콘라드, 클렘지어의 밀리취, 야고우의 마티아스, 스티트니의 토마스 등과 같은 사람들의 영향을 통하여 국가적 종교적 개혁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프라하대학은 이러한 반 교황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대학에는 영국 학생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 중 존후스와 프라하의 제롬은 위클리프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으며 1409년 긴 논쟁의 결과로 독일 학생들이 프라하를 떠나자 위클리프의 사상은 이들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존 후스는 1403년에 주임 사제가 되었으며 제롬의 도움과 웬케슬라스왕의 지지를 받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을 공격하였다. 교황은 이러한 반역을 제압하려는 여러 번의 시도에서 실패를 거듭하자 보헤미아를 공격할 십자군을 소집하였다. 그 결과 후스는 1413년 파문을 당하고 콘스탄스공의회에 소환되었으며 후스는 지기스문트 황제로부터 신변의 안전을 보장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옥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로부터 몇달 후인 1415년 7월에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을 당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롬도 역시 화형을 당하였다. 후스는 예정론과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점에 있어서 위클리프의 견해를 따랐으나 위클리프보다는 덜 급진적이어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체설을 받아들였다. 그가 화형을 당한 주요한 원인은 그의 국수주의에 있었다. 그가 죽은 후에 보헤미아인들과 모라비아인들은 사제주의에 대하여 극심한 반감을 품었으며, 또한 이들은 존 시츠카와 후시네크츠의 니콜라스의 지도 하에 다블산에 모여("라보르파"라는 명칭은 이로부터 유래 되었다) 분급을 통한 모든 사람들의 영적인 교제를 주장함으로써 그들의 민주주의적인 정신을 공포하였다.
이들은 최초에 전략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후에 평신도를 위한 성배 분급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계속하여 로마가톨릭교회 편에 남아 있는 칼릭스파와 이와는 반대로 발도파를 지지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에 항거한 다보르파로 나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중 다보르파는 신정정치를 주장하고 천년왕국설을 제창하였으나 오랜 투쟁 끝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으며(1453년), 그 잔존자들은 보헤미아형제단, 단일형제단, 혹은 다른 이름의 형제단들과 같은 그리고 다소 경건주의 집단과 같은 복음주의적 단체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다 종교개혁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역사적으로 모라비아형제단으로 알려져 있는 이와 유사한 집단과 합류하여 이를 통하여 오늘 날까지 존재해 오고 있다.
이와 같은 중세기의 이단들에 대한 고찰은 이단자들이 억압을 당하기는 하였으나 결코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 운동은 주로 이와 같이 로마 가톨릭교회와 다른 견해와 정신을 지닌 분파들의 활동으로 발달되었으며 이러한 운동들의 자연적이고도 필연적인 결과였다 재세례파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개신교들의 입장은 "이단적인" 정신이 유럽인들의 영적인 삶에 접근해 간 여러 가지의 다양한 정도들을 예시해 주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 이단들에 관한 고찰을 종교개혁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 고려해 볼 때 개신교운동은 이단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또한 개신교 운동이 개인의 특권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판단은 옳은 것이다. 모든 이단들의 근원은 바로 이러한 개인성에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이단인 이 개신교 운동을 경멸하는 것의 불합리성은 그 증거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명백한 사실이다.
프로테스탄트교의 고백교회들의 관점 뿐만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교회의 관점에 있어서도 재세례파는 분명히 이단이며 또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 재세례파는 중세의 비 가톨릭 교도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급진적인 프로테스탄트교도였다. 또한 프로테스탄트교의 신조들을 논박해 온 학자들이 때때로 그들이 경의를 표하는 공동체에 의하여 이단으로 정죄를 받아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속에는 소위 이단자들이 구원으로부터 배제되고 보이지 않는 참된 교회의 교제로부터 배제되어 있다는 생각이 추호도 깃들어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