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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通政大夫司僕寺正善오堂先生墓碣銘 - 諱蒔 先生姓李諱蒔字中立號善오堂永川人世稱光海逸民麗朝有諱大榮封永陽君爲貫籍肇祖入我朝有 少尹諱軒七世祖高祖諱欽縣監贈左參贊曾祖諱賢佑習讀贈禮參祖諱忠樑敎授贈兵參考諱德弘陶 山高弟世稱艮齋先生妣貞夫人英陽南氏進士應乾女以隆慶己巳九月二十八日生先生甫受書已知 爲己之學早廢擧業以心近朱退書潛心玩頤遊寒岡鄭先生門先生稱其精義深密設講會于오溪鄭寒 岡張旅軒金溪巖諸先生皆與焉第三弟茳通籍昏朝及北論方張先生作烏鷺操舟候風歌諷誡之又以 書諭之曰平日讀書所學何事陷身辱先寧不可悲勿爲隨波於敗倫亂常之議弟終不聽被孔慘之禍先 生尤無意於世平日著述手自焚之無巾衍之藏崇禎丙子五月二十一日考終于寢享年六十八葬于愚 溪高宗庚午移奉于오溪坐丑原贈司僕寺正配享오溪書院配淑人眞城李氏進士宗道女墓在愚谷艮 坐原生二男一女榮久文學諭榮全贈左承旨女進士金履善於乎炳觀自弱冠聞諸長老尙論三百年間 人物稱德行惟曰善오堂李公稱文學亦惟曰善오堂李公余心竊慕之從而疑之曰德行文學有難兼得 是以夫子之門顔閔游夏各一其長先生烏能兼人所不能兼者乎及讀遺事余乃瞿然曰有是哉可謂德 行矣文學矣始信長老之論不妄也銘曰 源接退水緖承寒岡本之孝弟潤以文章克遵庭訓無違師受 築室端坐牖蒙開後斂跡昏朝屹立頹波諷弟諭弟以書以歌薄己厚人賙恤貧窮余豈阿私一辭攸同오 川之西花山之北有石巋然銘庶不泐 嘉善大夫經筵參贊官原任奎章閣副提學延安李炳觀謹撰
증통정대부 사복시 정 선오당선생 묘갈명 - 휘 시 선생의 성은 이(李)씨이고 휘(諱)는 시(蒔)이고 자는 중립(中立)이고 호는 선오당(善오堂)이고 영천인이다. 사람들이 광해조에 덕행을 숨기고 세상을 피해서 은거한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고려 때 휘 대영(大榮)이 영양군(永陽君)에 봉해져서 본관과 조조(肇祖)로 삼았다. 조선조에 들어 와서 소윤을 지낸 휘 헌(軒)이 七세조이고, 고조부 휘 흠(欽)은 현감을 지내고 증직이 좌참찬이고, 증조부 휘 현우(賢佑)는 습독을 지내고 증직이 예조 참판이고, 조부 휘 충량(忠樑)은 교수를 지내고 증직이 병조 참판이고, 부친 휘 덕홍(德弘)은 퇴계(退溪)선생의 뛰어난 제자로 사람들이 간재(艮齋)선생이라 불렀고, 모친 정부인 영양 남씨(英陽南氏)는 진사 응건(應乾)의 따님이다. 융경 기사년(一五六九년-선조二) 九월 二十八일에 선생이 출생했고, 글을 배우면서 이미 위기지학(爲己之學-자기를 위하여 수양하는 학문)을 알았고, 일찍부터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심경 근사록 주자서 퇴계집 등에 마음을 붙이고 깊이 몰두하여 음미했고, 한강(寒岡) 정선생(鄭逑)의 문하에서 공부하니 선생이 그의 정미한 뜻과 심오하고 치밀함을 칭찬했고, 오계서당에서 강회를 개설하니 정한강(寒岡 鄭逑) 장여헌(旅軒 張顯光) 김계암(溪巖 金玏) 등 여러 선생이 모두 참여했다 셋째 아우 강(茳)이 광해조에 벼슬하고 북론(北論-仁穆大妃의 폐위논의)이 바야흐로 널리 퍼지자 선생이 오로가(烏鷺歌)와 조주후풍가(操舟候風歌)를 지어서 풍자하여 훈계했고,또 글로서 깨우치기를 『평소에 공부는 왜 배우는가? 자기를 망치고 조상을 욕되게 함은 정녕 슬픈 일이 아닌가? 세파에 휩쓸리어 천륜을 무너뜨리고 법도를 어지럽히는 논의는 하지 말라.』라고 했으나 아우가 끝까지 듣지 않았고, 매우 참혹한 화를 당하자 선생은 더욱 속세에 뜻이 없어 평소의 저술을 손수 불태우고 문서 상자에 남기지 않았다.
숭정 병자년(一六三六년-인조十四) 五월 二十一일에 침소에서 돌아가니 향년 六十八세였고, 우계(愚溪-얼안)에 안장했다가 고종 경오년(一八七○년)에 오계의 축좌 언덕에 이장했고, 사복시 정에 추증 됐으며 오계서원에 배향 됐다. 배위 숙인 진성이씨(眞城李氏)는 진사 종도(宗道)의 따님이고 묘소는 우곡(愚谷-얼안)의 간좌 언덕이다. 슬하에 二남 一여를 두었으니 영구(榮久)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學諭)를 지냈고, 영전(榮全)은 증직이 좌승지이고, 사위는 진사 김이선(金履善)이다. 아! 내(炳觀)가 젊을 적부터 여러 장로들이 三百년간의 인물을 평론하는 것을 들었는데 덕행으로는『오직 선오당 이공』이라고 칭하고, 문학으로도 역시『오직 선오당 이공』이라고 칭하니, 나는 마음으로 은근히 흠모하여 따르면서도 의심하기를「덕행과 문학을 겸비하기는 어렵다. 그 때문에 공자의 문하에서 안자(顔回) 민자(閔損) 자유(言偃) 자하(卜商)도 각기 장점이 하나씩인데 선생이 어찌 사람이 겸비할 수 없는 것을 겸비 했을까?」라고 여겼으나 선생의 유사를 읽고 나서 나는 송구한 마음이 들면서「여기 있도다. 덕행이로다. 문학이로다.」라고 외치며 비로소 장로들의 평론이 헛된 말이 아니었음을 믿게 됐다. 명(銘)은 이르나니 퇴계의 학맥에 연원하고 한강의 서업(緖業)을 계승해서 효제에 근본하여 학문이 윤택하게 빛났도다. 가훈에 잘 따르고 스승의 가르침 어기지 않았고 집을 짓고 단정히 앉아 후학을 깨우쳐서 길을 열어 주었도다. 혼탁할 때 은거했고 억센 세파(世波)에도 우뚝 서서 아우를 깨우침에 글로서도 하고 노래로도 했도다. 자기에겐 박하고 남에겐 후하며 궁핍한 자 돌봤는데 내 말이 아첨일까? 모두의 한결같은 말이로다. 오천의 서쪽이요 화산의 북쪽에 이 비석이 높이 서서 이 명(銘)이 영원하기 바라노라
가선대부 경연참찬관 원임 규장각 부제학 연안인 이병관은 삼가 짓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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