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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좋은글 스크랩 [전북/익산] 3부자의 고택이 있는 걷기 좋은 돌담길
천사 추천 0 조회 44 09.11.13 10: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멋드러지게 휘적거리며 걷고 싶은 길,

3부자집 돌담길

전북 익산시 함열면

 

익숙한 돌담이 있다.

누런 황토의 색이 기분 좋은 길이다.

만져 보면 부드러운 감이 좋고,

적당히 벌려진 너비가 좋다.

곧지 않아 부드러운 휘어짐이 좋은 길이다.

 

 

 

물아(甘勿阿)라 했다. 백제때부터 그리 불렸다 한다.

옛부터 그리 불렀나 보다. 일찌기 단물이 가득한 언덕이란다. 금강변 비옥한 땅과 넓은 평야지대를 가진 곳으로 지금의 마을 모습이야 옛 길을 거니는 듯한 작은 시골마을이지만, 1900년대 초만 해도 이 마을에는 3대 부자집이 있었다.

99칸의 부잣집인 김안균 가옥을 비롯해 조부자, 이부자집등이 있는데, 현재 가옥의 안으로 들어 가볼수 있는 곳은 조해영 가옥이 유일하다.

 

라와 황등, 함열, 웅포, 성당은 마한의 땅으로 함해국(咸奚國)으로 불리다가 백제때 감물아현(甘勿阿懸)으로 불린다.

이후, 신라때 임피군의 관할하에 함열현(咸悅縣)으로 고려초에는 전주에 속하였고, 조선 태종 9년(1409년)에 용안현과 합하여 안열현으로 불리다가 고종 32년(1895년) 함열군으로 불렸으며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익산군 함라면으로 이후, 익산시 함라면으로 지금에 이른다.

조선 5백년동안 현청(縣廳)의 소재지로 관아가 있었으나 지금은 관아는 없고 터만이 남아 있다.

관아가 들어서기에는 참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꽤나 융성하고 화려했을 것이다. 이 깊은 시골마을에 관아가 있었다면 물길과 흙길이 잘 통했을 것이고, 한양으로 싫어 나를 곡물이 상당하다는 것이 된다.

 

라산 둘레길의 들머리다.

작고 조용한 전형적인 시골마을인 이곳에 보기 좋고 걷고 싶은 돌담길이 있다. 바닥의 길은 이미 콘크리트로 포장이 되어 있다지만, 그 고을에 사는 주민 삶의 편함을 위한 길이니 그것을 두고 왈가할일은 아니다.

그저 그 풍경이 좋고, 길 넓이의 편안함이 좋다, 황토색의 담장은 색이 빛으로 변해 눈에 드는 풍경은 이내 마음이 편해짐을 느끼게 되는 길이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그길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연결되는 조금은 굽은길이다. 그 모습이 자연스럽다. 고개들어 지붕을 올려봐도 매한가지다. 세월의 흔적 역력한 부자집네의 기와지붕은 멋스럽게도 제 마음대로 이어진다. 아슬아슬함이 아니라 참 편안한 자연스러움의 모습이다.

 

도 그럴것이 이 마을의 3부자는 제 배만 채우는 아귀들이 아니었다.

있으면 나누고 베푸는 그런 부자집인것이다.

그래서 마을안에서는 굶어 죽는 이가 없었다 한다. 없는자에게 있는 손길을 내어 주는 따듯한 부자였던 것이다.

부자이었며, 선망이었으며, 선비이자 양반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나랏일을 맡아보는 저~ 윗대가리일당들과 국개의원들과는 애당초부터 근본부터가 다르고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가로 이어 사는 민초의 느낌과는 또 다른 길이다.

키만한 돌담의 길은 뒷짐지며 휘적거리며 걸어도 좋은 그런 길이다. 한껏 여유를 부리며 걷기 좋은 그런길이다.

차라리, 막걸리 한잔에 거하게 취해 비척이며 걸어도 좋을 그런 편안한 길이다.

 

 

조해영 가옥(전북민속자료 제121호)

당시 상류층 가옥의 면모를 보여주는 집으로 여러채가 있었으나 안채와 별채, 문간채가 남아있다.

안채는 1918년, 별채는 1922년에 지어졌다. 안채와 별채 둘다 남북으로 길게 서로 평행이지만,

안채는 남쪽을 별채는 서쪽을 정면으로 하고 있다.

 

 

 

 

 

 

 

대동법실시 공덕비

공덕비가 조해영 가옥의 안에 들어 있는 정도로 보아

당시, 조부자집이 세금으로 내던 쌀의 양이 꽤나 많았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김안균 가옥(전북 민속자료 제23호)

안채와 사랑채는 1922년 동, 서핼랑채는 1930년대에 지어졌다.

조선말기의 양반가옥 형식으로 지어진 대가(大家)이지만, 구조및 의장(意匠)등에 일본의 양식이 가미되어 있다.

 

 

 

 

 

 

 

 

 

 

 

 

 

by 박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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