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생신을 맞이한 거창에 거주하는 개성왕씨 병사공문중 30세 한철(漢哲/세복) 종친님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5일 차인 마지막 여름 휴가일 일요일이다.
어제는 “삼복 중 제일 덥다”는 중복이었고 8월 병사공파재부친목회 격 월례회 개최를 앞둔 시점이라
사전 분위기를 살필 겸 부산 개금동에 위치한 한방삼계탕 식당을 찾았었다.
조선의 역대 국왕 중 약 52년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하고 향년 82세까지 장수(長壽)한 21대국왕 영조(휘 이금/李昑),
부친은 숙종이고 선(先)왕인 경종의 이복동생이며 사도세자의 부친이다.
지명도(知名度)가 높으니 우리가 TV사극에서 자주 접하는 인물이다.
장수의 비결은 인삼이었다.
가성비가 좋고 룸까지 갖추어 있으니 적격이라 생각되었다.
식당은 많은 손님으로 가득차 있다.
기상청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니 온열질환을 유의하라”는 당부의 메시지를 잃지 않는다.
개성왕씨 인터넷족보에서 ‘미’를 찾아보기하면 네 분이 검색되는데
힘쓸 미(亹)가 두 분이고 아름다울 미(美)가 두 분이다.
전자(前者) 두 분 신원(身元)은
효은태자계 12세 교서감공(족보등록번호 1000155)과 현종계(평양공파) 13세 광릉후(1031407)이다.
교서감공은 출생이 공민왕14년 을사생(1365년)이니 여말선초 인물이고
광릉후의 조부는 원종 대신 몽골의 볼모가 된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이며
부친은 신안공(信安公) 왕옹(王雍)으로 삼별초의 난이 발발한 원종 재위 시 인물이니
광릉후는 충렬왕 재위 시 인물이다.
원세조(쿠빌라이칸)은 부마인 충렬왕에게 처음으로 공물과 공녀를 요구하였으니
광릉후 할아버지는 약소국의 설움을 뼈저리게 체감하였을 것이다.
공녀 제도가 할아버지 가계에 영향은 없었을까.
사진은 인터넷보 속의 ‘미’ 검색 모습이다.
진부한 얘기가 시작된다.
광릉후는 신미보 폐간 사유의 정점에 선 인물이다.
신미보 당시 수보위원은
교서감공의 자손을 평양공의 원손이자 후손이 없는 광릉후 자손으로 위보(僞譜)시켜 보를 1991년 발간하였는데
어느 종친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시도가 “황제의 후손이 되면 문벌이 좋을 것이다 라는
헛된 욕심에서 나왔다”고 전한다.
위보 사실을 뒤늦게 인지한 종친들이 분기탱천(憤氣撑天)하였고
13년 만에 세계(世系)를 환원하여 개성왕씨 마지막 서책 족보인 갑신보(2004년)가 수정 발간되었다.
만수 중앙종친회초대회장님의 당시 2차 호소문에 의하면 광릉후의 휘 마지막 한자(漢字)는
창간무오보(1798년)와 2차보인 경술보(1850년)에는 틈 흔(舋)이었으나
4치보인 후(後)무오보에는 힘쓸 미(亹)로 바뀌어졌는데 이는 교정의 잘못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두(亠) 변이 있고 없고 차이이다.
아무런 해명도 없이 휘가 어느 날 바뀌어졌다면 후손의 소견은 회장님과 같이 한다.
인터넷보에서 교서감공과 광릉후 두 분 관계가 23촌간 동명이인이 아닌
이명이인(異名異人)으로 하루 빨리 고쳐지기를 기대한다.
사진은 고려성원록(고려왕실족보) 고려종족기 속의 광릉후 할아버지 가계도이다.
창간보와 인터넷보를 살펴보면 두 보에서 세계가 가끔 다른 내용이 발견된다.
12세 교서감공 아우인 전공판서공(왕흥/王興) 현손(玄孫)인
16세 왕서군(王瑞君/1026399)의 선계와 관련된 내용이다.
공은 창간보로부터 5차보인 신축보(1961년)에 이르기까지 15세 유지(有智)의 셋째 아드님이었으나
6차보인 갑인보(1974년)에서 휘가 사라졌다가
7차보인 신미보(1991년)에서 15세 유벽(有壁)의 장자로 선계가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유벽에게는 형량(衡亮)이라는 외동아들이 있었으니 계자(系子/양자)로 입보할 이유도 없다.
4차보인 후(後)무오보(1918년) 발간 시 덕천문중 장적(帳籍/호적)에 의한 수정이라 하는데
5차보는 지난 보의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족보에 관심 있는 후손은 수정 과정이 궁금하다.
사진은 창간보 속의 왕서군 공 가계도이다.
교서감종중의 신주 이야기이다.
7세 왕중선(王仲宣/1000150) 선조의 부인 이씨 봉작은 창간보와 신주에는 ‘금마군이씨(金馬郡李氏)’이다.
검색하니 금마군은 현 익산시 금마면으로 읍호(邑號)이다.
할머니의 관향이 익산이씨라는 의미이다.
부인의 봉작은 부군(夫君)의 관직에 따르니 군부인(郡夫人)이 되어야 옳다.
‘상서(尙書)’는 검색하니 품계가 조선에서는 정2품이나 고려는 정3품이라 한다.
부족한 후손의 소견으로는
족보에 '부인금마군이씨'라 하였으니
신주에도 부인(夫人)을 추가하여 ‘금마군부인이씨’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진은 중선 선조의 가계도와 신주 모습이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더위에 건강 잘 유지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