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일하고 있던 C사장이 미국에 같이 가보지 않겠냐고 했다. C사장은 오랫동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업을 했다. 그래서 외국 생활이 두렵지 않은것 같았다. 나도 이곳에서 일이 제대로 풀리는것이 없어 이민을 가볼까 생각했다. 미국으로 가서 그쪽 사정도 알아보고 만약 이민을 간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알아보려 했다. 미국에는 C사장의 친구가 사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미국행 비행기를 탓다. 12월초 쯤 이었다. 도착지는 필라델피아 뉴저지였다. 미국에 알고 있는 도시는 뉴욕과 LA가 전부였다. 뉴저지는 뉴욕 아래, 워싱턴D.C위에 위치한 동네였다. 미국동부까지는 비행기를 타고 열대여섯시간 날아가야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기를 많이 타보지 않은 나는 그 시간 동안 무얼하나 고민했지만 생각보단 시간이 잘 지나갔다. 나는 비행기에서도 잠을 잘 잤다. 엉덩이가 너무 아플때는 화장실을 가는척 하며 복도를 걸었다. 비행기 앞쪽에 여유공간이 조금 있었다. 나는 그 공간에 서서 기지개를 펴며 몸을 풀기도 했다. 날짜 변경선을 지나가는데 태양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태양빛이 앞날을 밝혀주는것도 같았다. 우리는 필라델피아 공항에 도착했다. C사장의 친구가 우리를 픽업하러 공항에 나와 있었다. 친구는 2층 주택에 살고 있었다. 약 100년이 지난 주택이라고 했다. 필라델피아에는 100년이 경과된 주택들이 많이 있다고 했다. 마루로된 거실을 걸으면 삐걱삐걱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그 집에서 약 10일 정도 있을 계획이었다. 친구는 미국에서 타일수리를 전문으로 한다고 했다. 미국은 타일수리나 미장 등 전문직업을 가지면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자동차 부품 사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알아본 바로는 미국은 땅덩어리가 넓어 자동차가 반드시 필요했고, 일본차를 수입해서 엔진만 미국차에 올려 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자동차를 오랜시간 타지 않고 빨리 바꾸는 경향이 있어 미국에 수입해 들여오면 엔진 등 부품을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을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워싱턴D.C에서 자동차부속품 사업을 하는 공장을 방문했다. 사장은 동남아시아인이었다. 공장은 제법 넓었다. 미국이란 나라가 워낙 땅덩어리가 넓으니 이 공장이 큰건지 작은건지 판단하긴 어려웠다. 사업은 잘 돌아가고 있다고 같이 간 친구가 얘기했다. 나는 괜찮은 아이템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뉴저지로 돌아와 아틀란타에 있는 뷔페에 가서 친구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뷔페는 씨푸드 전문이었다. 먹거리는 넘쳐났다. 그런데 놀란것이 친구는 게 다리만 수북히 가져와 오로지 게 다리만 먹었다. 나는 게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게다리를 많이 먹는 사람을 처음 봤다. 미국은 밤문화가 우리처럼 발달되어 있지는 않은 듯 했다. 아니면 우리가 돈을 쓰지 않아서인지 모르겠다. 어느날은 모처럼 밤에 술을 먹으러 가자고 친구가 말했다. 우리는 인근 상업지로 술집을 찾아 나섰다. 대부분 상가는 불이 커져 있었다 유난히 한 곳만 불이 밝혀있었다. 한국인이 사장인 바라고 했다. 입장을 해보니 온통 한국출신의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친구는 간혹 이 집에 들르는지 몇몇과 아는채를 했다. 우리는 보드카를 한병시키고 술을 마셨다. 시간이 점점 깊어지자 누군가 술주정을 심하게 했다. "왕년에 나도 한국에선 놀았다고 하면 놀았던 사람이야" 혀 꼬부라진 소리로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한국이나 여기나 사람사는 것은 똑같구나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와 C사장과 미국 사업에 대하여 의논을 했다. C사장은 사업도 사업이지만 생활비가 너무 많이 들어갈것 같다며 미국행을 포기했다. 나도 그의 의견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뉴욕에 아버지가 다른 형님이 살고 있었다. 형은 어머니가 나의 아버지를 만나기 전 결혼했던 사람의 아들로 어머니에겐 첫째 아들이었다. 형님은 나보다 열댓살 나이가 많았다. 어릴적 명절에 어머니와 함께 형님이 할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던 집을 간혹 방문했다. 다른사람과 결혼 했음에도 어머니는 무슨 때가 되먼 옛 시댁을 찾아갔다. 물론 큰아들이 보고 싶어서였겠지만, 형은 어머니가 찾아가도 데면데면 인사만하고 자기 할 일을 하던지 집을 나갔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점심을 먹었다. 한 100평 정도 되는 넓은 집에 방도 5칸 정도 있었다. 그러니 먹성이 우리집과는 달랐다. 그래서 나는 형님집을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형님은 새로나 자동차에 영업사원으로 근무를 하다 친구와 함께 미국으로 여행은 간다고 한 후, 바로 미국에 눌러 앉으셨다. 한국에서도 자동차회사를 다니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왠일인지 형수님과 얘 셋을 나두고 미국에서 불법 체류자 신세로 전락했다. 아마도 미국 생활이 한국보단 훨 좋은듯 했다. 불법 체류를 하는동안 형님은 한국을 들어올 수 없었다. 오랜시간 형님은 가족과 떨어져 외롭게 미국생활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