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역사보고>
요절 :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1. 제주 개척의 선구자 이기풍
이기풍 선교사는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여섯 살 때 사서오경을 줄줄 외우고 열두 살 때는 백일장에 나가서 붓글씨를 써서 장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동네 어른들은 이런 그를 보며 우리 마을에 신동이 태어났다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청년 이기풍은 술을 좋아하고 박치기의 명수였습니다. 힘으로는 아무도 그를 당해낼 자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나타나면 무슨 행패를 부릴까 하여 슬금슬금 피하였습니다. 그는 거리에서 가끔 마주치는 서양인들을 보면 조선을 삼키려고 온 날강도처럼 여겼습니다. 그는 한 참 건축 중이던 평양 장대현 교회를 부셔버렸습니다. 어느 날 그는 마포삼열 선교사의 뒤를 밟아 그의 집을 알아내고는 친구들과 함께 다시 찾아와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유리창이 깨어지고 기왓장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집안에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제풀에 꺾여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그는 마포삼열 선교사가 장터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큰 돌을 집어 던졌습니다. 그가 던진 돌은 마포삼열 선교사의 턱에 정확히 명중되었습니다. 마포삼열 선교사의 턱에서는 피가 솟구쳤습니다. 이번에도 마포삼열 선교사는 어떤 반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스데반 집사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그를 핍박하는 청년 이기풍을 이미 용서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이기풍은 양심의 가책으로 힘들어했습니다. “내가 왜 죄 없는 사람을 돌로 쳤을까? 그 사람은 왜 돌에 맞아도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던 어느 날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더니 머리에 가시관을 쓴 분이 나타나 그에게 말했습니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그는 죄인 중의 괴수 같은 그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 후 이기풍의 삶은 180% 달라졌습니다.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자신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를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님의 은혜가 그를 헌신적인 크리스천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동만 트면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었습니다. 불량배로 유명했던 건달 이기풍은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시할 정도로 겸손과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때가 되자 이기풍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제 1회 평양신학교 졸업생 일곱 명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평양신학교 교장이었던 마포삼열 선교사는 제 1회 평양신학교 졸업생들을 향해서 물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누가 제주도에 선교사로 가겠습니까?” 아무도 이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제주에 올 때 특별한 위험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부분은 비행기를 타고 오셨고 30-40명은 고속정을 타고 두 시간 만에 제주에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00년 전만 해도 제주에 도착 하려면 작은 목선을 타야 했는데 10척 중에 7척이 침몰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쉽게 제주 땅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자원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기풍 선교사는 마포삼열 선교사의 말을 들으며 제주 선교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결단하지 못하고 갈등하였습니다. 이때 그의 아내가 이기풍에게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가 가지 않으면 누가 그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겠소. 우리들이 갑시다."
드디어 1908년 2월 이기풍 선교사는 제주도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제주사역은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평양사투리를 쓰는 그는 제주사투리를 알아들을 수 없어 마치 외국에 와 있는 것 같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돼지 - 도새기 감자 - 지슬 쥐 - 중이
계란 - 독새기 당신 - 이녁 왜? - 무사?
“뭐랜 고람 수과 ? = 무슨 말씀이십니까? “뭐랜 주껍나? =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폭삭 속았수다예~” -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또한 이기풍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당시 제주 사람들은 뱀을 자기 집을 지켜 주는 수호신처럼 여겼습니다. 그들은 구렁이를 ‘뒷집 하라방’이라고 부르며 신성시했습니다. (토산 여자들은 시집갈 때 구렁이를 상자에 넣고 갔습니다.) 이기풍 선교사는 뱀을 숭배하는 죄악에 분명히 도전했습니다. 그러다가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특이한 제주문화에 대해서 신문에 기고했다가 제주 청년들의 손에 죽을 뻔 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제주사람들의 기독교에 대한 지독한 편견이었습니다. 예수라는 말만 꺼내면 “그만하시오. 예수를 믿다가는 내 목이 날아간다니까!”(설러 버려, 설러 버려, 야가귀 끊어지젠!) 하며 도망을 쳤습니다. 그들은 대원군이 천주교신자 일만 명을 학살한 일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목이 날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천주교로 개종한 관원들의 행포로 일어난 이재수의 난(1901년)으로 인하여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컸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할 기회조차 쉽게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제주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제주사람들은 그를 경계하며 집으로 초대해 주지 않았고 방을 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벧엘에서 돌을 베고 잠을 잤던 창세기 야곱처럼 한라산 기슭에서 돌을 베게 삼아 잠을 청하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흘러내리는 물을 마시며 칡뿌리를 캐어 배고픔을 해결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바닷가에서 영양실조로 실신하여 쓰러지고 맙니다. 한 해녀가 쓰러져 있는 이기풍 선교사를 발견하고 장정 두 사람을 불러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간호해 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하며 해녀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 해녀가 이기풍 선교사의 첫 양이요, 제주사역의 첫 열매입니다.
이기풍 선교사는 그저 복음만 소리쳐 전하는 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양들의 필요를 알고 채워주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는 조랑말을 타고 제주도를 순회하며 전도했는데 전도여행을 떠날 때는 반드시 간단한 옷가지와 농기구를 챙겼습니다. 이곳, 저곳 순회하다가 밭에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는 농부들을 만나면 챙겨간 일복으로 갈아입고 농사일을 도와주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이렇게 관계성을 맺은 후 복음을 전했습니다. 양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농사일을 도와주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한번은 큰 비가 내려서 홍수가 났습니다. 가구, 돼지들이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고 사람도 떠내려 왔습니다. 모두가 발만 동동 굴릴 때 이기풍 선교사가 평양 대동강에서 수영하던 실력을 발휘하여 다섯 사람을 살려냈습니다. 이기풍 선교사의 희생적인 사랑 실천은 기독교에 대한 편견과 반감을 누그러뜨렸습니다. 이기풍 선교사의 희생적인 사랑 속에서 증거 한 복음은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았던 제주사람들을 감동시켜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복음전도의 결과 성내교회, 성안교회, 금성교회, 성읍교회, 조천교회를 비롯한 수많은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캠퍼스는 100년 전 제주도처럼 기독교에 대한 편견과 반감을 가진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이후 기독교에 대한 호감은 줄고 비호감만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캠퍼스 복음역사는 희망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기풍 선교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사로잡힌 학생리더들을 세워주시고 있습니다. 후배들의 필요를 알고 채워주는 학생리더들을 세워주고 있습니다. 그 숫자가 적다고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사랑을 맛본 후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 한 사람 아닐까요?
2. UBF 제주개척 역사
1964년 3월 15일은 제주개척을 위해서 김한옥 선교사가 제주로 파송된 역사적인 날입니다. 당시 광주 UBF 동역자들은 세계선교에 대한 간절한 열망 속에서 김한옥 선교사를 비행기에 태워 제주에 파송했습니다. 김한옥 선교사 뒤를 이어 김관옥 목자님, 김정일 목자님, 유기황 선교사와 고이삭 목자님, 이여호수아 목자님들이 제주개척에 역사에 헌신하셨습니다. 본격적인 제주개척역사는 1982년 광주 UBF에서 김누가 목자 가정을 제주개척 스텝 가정으로 파송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해 9월에는 종로 UBF에서 박사무엘, 박한나 목자님이 제주에 내려와 동역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김누가 목자님 가정과 박디모데 목자님 가정이 제주 땅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섬길 때 제주 땅에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세워주셨습니다.
제주에는 특이한 괸당문화(친척문화)가 있습니다. 제주도는 작은 섬입니다. 2시간 이내에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명절이 되면 모든 친척들이 모여 조상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먼저 종손 집에 모여 제사를 드리고 친척 집을 차례로 돌아다니면서 그곳에서 또 조상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아버지, 어머니에게 핍박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제사상에 절을 하지 않는다며 온 친척들로부터 배척을 받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도 제주 복음화는 8%에 불과합니다. 더군다나 제주 토박이들의 복음화가 2% 밖에 안 됩니다. 또한 개종한 토박이들 가운데 큰 아들의 비율은 정말 미미합니다. 제사를 드려야 하기에 개종하는 것에 대하여 엄청난 압박이 가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주 UBF 형제 리더들의 60%가 큰 아들입니다. 그리고 제주 UBF 리더들의 90%가 제주 토박이들입니다. 제주 토박이들이, 그것도 장남들이 1대 1 성경공부를 통해서 변화되어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 중의 괴수 사도바울을 사로잡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평양의 죄인의 괴수 이기풍을 사로잡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제주 리더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경험한 제주 형제, 자매들은 다양한 핍박 앞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십자가 전달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한라대 채영애 목자님은 제주도 동쪽에 위치한 우도 출신입니다. 지금도 우도에서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채영애 목자님이 교회를 다닌 다는 것을 알고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동네 창피해서 내가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냐? 농약을 먹고 죽어버리겠다.” 그리고 채영애 목자님은 이틀 동안 할퀴고 발로 차고 주먹으로 맞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자 그의 어머니는 식칼로 자살을 하겠다며 협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채영애 목자님은 예수님 때문에 핍박 받으며 오히려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그의 죄 때문에 채찍질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그 본체가 하나님이신 분이 조롱을 당하고 욕을 먹고 구타를 당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묵상할 때 발로 맞고 주먹으로 구타를 당하면서도 오히려 그의 마음에는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감사가 넘쳤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사로잡힌 그는 지금까지 믿음중심을 지키며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캠퍼스 목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곳에 참석한 김창홍 목자님은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자 마자 그의 가족들과 친척들로부터 온갖 핍박과 회유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 중심을 지켰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그의 아버지는 트럭으로 그를 쳐서 죽이고자 그를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트럭을 피해 밭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 후에도 아버지의 구타로 그의 몸은 이곳, 저곳 멍들었습니다. 그는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이겨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지독한 가정핍박 가운데서도 믿음 중심을 지키도록 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체험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는 핍박을 받으면서 오히려 주님을 더 깊이 만났습니다. 그는 후배들에게 클래식 기타를 가르쳐주며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제 크로아티아 선교사로 나아가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김미혜 목자님은 한라대 3학년입니다. 그는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구했습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위하여 예의바르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착하고 성실하게 살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바른 생활 맨 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삶이 철저히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했던 삶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철저히 자기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를 붙들었습니다. 그 후 그의 삶의 방향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되었습니다. 그는 후배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시간을 내어주고 있습니다. 지난 1년간 후배 ‘아름’ 자매를 온 마음으로 성경을 공부시키고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며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후배가 힘들어 떠나고자 할 때마다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그의 희생적인 사랑과 헌신적인 성경공부를 통해 진 아름 자매가 복음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12학번 현승효 형제님도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지난 여름수양회를 통하여 정욕 죄로 인하여 고통 하던 그를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아주신 예수님을 구주로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어느 날 그는 한 목자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자님! 3월이 되면 캠퍼스에 후배들이 몰려올 텐데, 제가 직접 성경을 가르치며 도와주면 안 되나요?” 그는 지금 후배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자 성경공부노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85년 광주학생수양회에 참석한 제 심령에 신명기 6 : 5을 주셨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저는 이 말씀을 받고 수양회 내내 웃고 다녔습니다. 너무 기쁘고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욕과 가난의 운명에서 저를 건지시기 위해서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며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내가 맛본 십자가를 삶으로, 입술로 증거 하는 삶보다 가치 있는 삶이 있을까요? 저는 UBF 첫 선교지 제주에서 92년부터 사역을 섬겨왔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편견과 샤머니즘적인 영향이 강한 제주 땅에서 십자가를 경험하고 십자가의 전달자로 살고자 하는 학생리더들을 보면 너무나 행복합니다. 십자가를 경험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한 양을 사랑하고자 애를 쓰는 평신도 목자님, 사모님들과 함께 캠퍼스 사역, 세계선교 사역을 섬기게 된 것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10년 동안 같은 직장에서 일을 해도 250만원도 안 되는 적은 월급을 받는 그들, 그러면서도 캠퍼스 사역을 위해서 헌금하고 양들을 심방하며 섬기는 그분들을 존경하며 사랑합니다. 한 사모님은 몇 년 전 갑상선 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는 현재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생계를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매주 3일 이상 캠퍼스에 나아가 양들을 전도 하고 섬기고 있습니다. 또한 가난하여 가까운 일본 여행도 해 보지 못했던 20여명의 리더들이 멕시코,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파키스탄, 쿠바, 미국, 일본 등으로 나아가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러한 삶을 살도록 할까요? 그들의 마음에 심겨진 십자가 사랑 때문입니다. 이기풍을 제주에 선교사로 파송하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캠퍼스 선교사로 파송하십니다. 십자가 전달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희생하며 섬기며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그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의 모습으로, 입술로 십자가를 증거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국 캠퍼스와 세계 캠퍼스로 나아가 십자가 전달자로 살아갑시다. 십자가 전달자로 살아가게 마씸. 아멘!
(제주 조마가 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