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속의 인생
강신재
내일 손님이 오시면 쓴다고 문어 다리를 자른다. 장갑을 끼고 써는데도 손마구리가 아프고 두어 조각 씹어보았더니 턱도 뻐근하다. 아이는 방바닥에 기다랗게 엎드려 남의 노작勞作 을 널름널름 입으로 집어간다.
이 집의 가장은 평생 대하는 일 없는 TV 화면을 '뭣들 하는지' 본다고 미심쩍은 눈초리로 지키고 있다. <미션 임파서블>의 테마 뮤직은 나쁘지 않다. 가끔가다 우르릉 으르릉 울리는 음향이 아주 그럴 듯하다. 허나 그보다 더 좋은 소리가 들린다. 밖에서 주룩주룩 비 내리는 소리다. 더러 바람이 쏴악 하고 파도처럼 창유리를 두들기기도 한다. 화신花信을 몰고 올 봄비다.
아이가(커다란 대학생이다) 일어나 앉아 "내가 썰어줄게." 하더니, 가위를 검사하고 "이런 걸 가지고……." 하면서 드라이버로 수리부터 하였다. 그리고는 등에 구슬이 박힌 엄마 장갑 한 짝을 끼고서 오리기 시작한다.
우스꽝스런 물건을 한두 개 만들더니, 다음부터는 <마스터>의 문양처럼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밝은 등불, 창밖의 빗소리…….
이런 평화를 퍽이나 사랑한다고 나는 짐짓 느낀다. 아무도 바깥에 나가지 말고, <마나슬루> 같은데 가지 말고, 위험한 짓은 하나 하지 말고, 식구가 모여 가만히 있는 것만 제일 좋은 것처럼 느낀다.
허나 아마 이것은 틀린 얘기일 것이다. 물론 틀려 있다. 나도 안다. 사람들은 험한 산에도 가고 기괴한 해저海底 도 뒤져보고, 우주로도 뛰어나가고, 교통지옥의 도시를 가로질러 일터에서 싸우기도 해야 된다. 그래서 인간의 능력의 극한이 어디 쯤에 위치하는지 밝혀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해서만 사람은 태어난 보람을 가지며, 생존의 의의―그 일차적인 의의를 납득하게 마련인 것이다.
따뜻한 장소에 가두어 놓고 조용하게 안전하게 오직 그렇게만 삶을 살라고 한다면, 음식물이 쉬듯이 사람의 영혼도 쉬어서 망그러지고 말 것이다. 나도 안다. 잘 알고 있다.
인류는 이렇듯 발전하는 것이며, 여자들의 눈물이나 가슴 아파하는 일은 결국 별 쓸모없는 노릇으로 한옆에 비켜진다.
그러나 사람이 왜 불행한 위험과 등을 맞대인 곳에서 기쁨을 찾도록 만들어져 있는지 나는 여전히 불만이다.
빗소리가 조금씩 불행하게 들려왔다. TV에서는 살인이 행해지고 있었다.
강신재(1924―2001) |《임진강의 민들레》《젊은 느티나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