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캠퍼스를 등진 채 수백 년 전 시간이 멈춘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6호선 돌곶이역 밖으로 나와 10분 정도를 걷다 보면 담장 너머로 멈춘 시간의 흔적들을 눈에 고스란히 담을 수 있었다. 이제 막 봄이 움트기 시작하며 따스함이 곳곳에 스며들기 시작할 때, 나뭇가지에 새순이 올라왔고 주변에 거주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어르신들의 발걸음에는 여유가 넘쳤다. 지하철 역에서부터 시작된 정감 넘치는 시장 골목을 지나 서울 한가운데 이런 곳이 있었구나 싶을 정도로 의릉의 첫인상은 참으로 평화로웠다.
시대의 변곡점에 즉위했던 왕과 왕비의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곳을 오랫동안 지켰을 나무들은 릉 주변을 감싸 안은 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입장권 구매 후 의릉 안쪽으로 들어왔을 때 오랜만에 느껴보는 전환의 순간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얼핏 보면 똑같아 보이는 구성들도 그곳에 깃든 시대적 배경과 더불어 녹아든 서사가 공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줬다. 어떤 이야기가 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줄지를 기대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정자각 주변으로 옮겨 본다.
1. 여유로웠던 순간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다른 곳들처럼 오를 필요도 그렇다고 지체 없이 내려갈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바로 능역을 만날 수 있으니 평화로웠던 주변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며 가끔씩 뒤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들은 간간히 현실감각을 잃지 않도록 도와줬다. 주변을 걷던 사람들 따라 카메라를 내려둔 뒤 잠시 주변을 걸어 본다. 특별한 공간에서 떠오른 생각들을 담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받은 일이다.
여유롭게 주변을 거닐 때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순간들과 더불어 단순히 시험을 위한 암기가 아닌 왕 그 개인의 치세와 기록에 담긴 삶을 되뇔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책으로 접했던 사실들이 더욱 크게 와닿았다. 하지만 재위 내내 본인의 뜻을 펼치지 못한 채 영면에 들었던 왕과 붕어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찬가지로 유명을 달리했던 왕비의 생각은 어땠을까? 를 생각하며 차츰 그 들과 결을 함께 하고자 정자각 주변으로 걸어 들어갔다.
2. 경종과 선의왕후
형태는 단출했지만 정자각 뒤에 자리한 능침의 구성은 다른 조선왕릉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형태로 자리했다. 앞은 경종 대왕릉이며 그 뒤가 선의왕후의 능침인데, 능침 주변을 감싸는 장식들을 통해 그 차별을 뒀다.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나 싶었지만, 가까이로 올라가는 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아쉬운 상태로 뷰 파인더를 통해 그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간혹 왕릉 소개 페이지에서 보이던 그 장엄한 사진을 언젠가 담아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4년, 조선의 20대 왕 경종이 즉위했던 시간이다. 선왕과 그의 뒤를 이은 영조가 즉위한 각각 46년과 52년의 시간에 비교하면 상당히 미미해 보이나 시대를 관통한다는 부분에 있어서 중요성 대비 인지도가 덜 한 부분이 있지만 한 순간도 놓칠 수 없을 정도로 갖가지 사건사고로 가득했던 시대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각종 자료를 찾아보던 중 나도 모르는 사이 절로 한숨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숙종과 희빈 장 씨 사이에서 태어난 경종은 두 달 만에 후사를 이을 다른 아들이 없었기에 생후 두 달 만에 원자로 책봉된다. 하나 아직 중전이었던 인현왕후의 나이가 젊다는 것을 빌미로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중심으로 아직 시기상조라는 반발이 조정에서 일어났다. 이후, 송시열은 축출된 뒤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아 유명을 달리하게 됐고, 서인 세력은 조정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붕당 정치의 한가운데 다시 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니, 그의 나이 3세였다.
세자의 자리에 오른 뒤 그의 생모인 희빈 장 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사실이 숙종에 의해 밝혀지는데, 이에 분노한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게 된다. 세자의 자리에 있던 경종은 대신들을 찾아가 희빈 장 씨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으나 돌아오는 답변은 '이 모든 것들이 세자 저하를 위한 일이다.'라는 말뿐이었다. 결국 이 사태를 막지 못한 채 법적으로 어머니였던 인현왕후의 빈소를 지켜야만 했던 비극을 겪게 된다. 그의 나이 14세에 일어난 일이었다.
숙종 말년에 왕이 지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국정 전반의 일을 세자에게 맡겼다. 본격적으로 대리청정을 맡았으나 장희빈이 사사된 후 지지기반도 예전 같지 않았을뿐더러 경종의 실수를 빌미로 폐세자 시키려는 자들의 노림수도 있었으니 하루하루가 불안의 연속이었다. 3년의 대리청정 기간 동안 경종이 내뱉은 대답은 "유의하겠다" "따르지 않겠다" "아뢴 대로 하라"라는 말이 전부일 정도로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다.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을 추대하려는 신하들의 움직임에도 흔들리지 않고 무사히 대리청정을 마친 뒤 1720년 마침내 왕 위에 오르게 된다.
조선의 역대 왕세자들 중 30년이라는 최장 기간 기록을 수립하며 본인의 하늘을 열 수 있게 된 경종. 하지만 신하들의 걱정과는 다르게 모든 것들이 왕의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왕세자 시절부터 이어진 병약했던 몸과 더불어 정치적 지지가 반을 갖추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고 노론은 오히려 이런 경종을 압박하며 왕세제로 '연잉군'을 즉위시키려는 뜻을 관철시킨다. 이후 경종을 뒤로한 채 대리청정의 의도를 넌지시 표했으나 여기까진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대리청정 문제가 도화선이 되어 이를 빌미로 노론의 숙청을 주장하는 상소가 올라가게 된다. 신임사화 또는 신축 환국 이라고도 불리게 되는 이 사건은 그동안 속내 깊숙한 곳에 품어왔던 칼을 본격적으로 들이대며 조정에 거대한 피바람이 각각 신축년과 임인년에 일어나게 된다. 경종 말년까지 노론의 흔적 지우기에 몰두하던 소론은 왕세제를 내치는 것까지 손을 뻗게 되지만 이에 크게 화를 내며 해당 문제를 일축시켜 버렸고 자칫 본인들도 노론처럼 내쳐질 것을 염려하며 행동거지에 신중을 기하게 된다.
와중에도 경종은 연잉군과의 화기애애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끝까지 왕세제의 자리를 지켜준다. 하지만 왕세자 시절부터 끊이지 않던 붕당 정치의 폐단에 심신이 많이 지친 경종은 결국 재위 4년 1724년 37세의 이른 나이로 승하했다. 그의 뒤를 이어 왕세제의 지위를 유지하던 연잉군이 왕위를 잇게 되니 바로 조선의 21대 왕 영조다.
짧고 굵었던 것만큼 한 편으론 아쉬움이 짙게 전해졌다. 일정 선을 넘었을 때 불같이 화를 내며 신하들을 다스리는 모습과 세자 시절 그의 총명함에 탄복했던 내용들이 겹치며 주변 환경이 많이 따라주지 않았다 라는 생각이 강하게 깔렸기에 말이다. 덩달아 그의 전, 후로 왕위를 지켰던 인물들의 재위 기간을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영면에 들어간 그의 능침을 바라보며 스스로 생각에 잠길 뿐 그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경종 대왕릉 뒤에 자리한 선의왕후도 그의 반려자와 결을 함께 하고 있었다. 경종이 세자 시절 얼마 되지 않았을 때, 14세의 나이로 세자 빈으로 왕실의 일원이 된다. 이후, 1720년 숙종이 사망하고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자연스레 그녀도 함께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경종과 선의왕후 사이에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후계자 문제가 거론되며 노론 신하들의 뜻이 관철되기 전까지 곤욕을 치른다. 그녀의 나이 17세에 겪은 일들이다.
이후 경종이 1724년에 승하하자 불과 20세의 나이로 왕대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후 그녀는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고 영조와 눈에 띄게 좋지 않은 관계를 이어왔다 전한다. 이후, 그렇게 쓸쓸히 여생을 보내다 1730년 오늘날의 경희궁에서 세상을 떠난 뒤 반려자의 곁에서 영면에 들게 된다. 고통스러웠을 이승에서의 시간은 잊은 채 저 세상에서 항상 편안한 일만 가득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덩달아 잡상은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염없이 하늘만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3. 금단의 구역
그러부터 수백 년이 흐른 뒤 이 땅의 굴곡의 세월과 함께하며 자연스럽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뒤 의릉 구역은 일반인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으로 변모했다. 의릉 능침 바로 옆에 중앙정보부의 강당이 세워지고 덩달아 능선을 깎아 축구장을 만드는가 하면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에 인공연못을 만들어 관상어를 키우는 등 능역 전반에 우리들의 손에 의해 훼손이 발생됐다. 이후, 2003년에 발굴 조사가 진행됐을 때 남아 있는 고 건축물은 홍살문과 비각, 정자각뿐이었으며 재실은 소실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전한다.
그렇게 원형을 잃고 경종이 순탄치 못한 삶을 살다 떠난 것과 같이 궁궐의 후원처럼 변모해 버렸던 이곳은 30년 뒤 중앙정보부가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새 청사를 짓고 이전을 하게 되면서 다시 일반의 품에 돌아오게 된다. 1996년 5월부터 다시 일반인들의 출입이 가능해지며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됐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토지 반환이 이뤄지며 의릉 본연의 능역을 되찾게 됐다. 이후 2009년 6월 세비야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를 통해 세계문화유산으로 거듭나며 그 고유의 가치를 세상에 인정받게 됐다.
4. 향유
의릉을 크게 한 바퀴 돌고 난 뒤 이곳에서의 순간을 마무리하려고 할 때 즈음, 정자각 앞에서 신나게 뛰놀던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엄숙해야 할 것 같은 공간에 정겨운 모습들은 문득 수년 전 베르사유 궁전에서 여유로운 나날들을 보내던 사람들의 모습과 많이 겹쳐 보였다. 드넓게 펼쳐진 녹지 공간에서 산을 등진 채 아파트 건물을 바라보고 있는 형태. 정자각 뒤편에 자리한 경종대왕과 선의왕후가 흐뭇하게 내려다 보이는 모습이 순간 지나갔다.
시간의 흔적들을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온전히 그 공간을 탐닉할 수 있다는 사실은 서사와 문화유산을 덩달아 좋아하는 내게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다. 사뭇 같으면서도 비슷해 보이는 공간에 깃든 그들만의 이야기는 참으로 독보적이기에 담장 안쪽에 형성된 그들만의 공간이 내포한 매력은 팔색조와 같았다. 굴곡의 세월을 겪으면서도 그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음에 무한한 감사를 보낼 뿐이다.
의릉을 포함에 각지에 흩어져 있는 조선왕릉에서는 원형을 고스란히 보존한 채 황실의 적통을 잇는 황사손에 의해 제례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도심 한가운데 녹아든 채 우두커니 수백 년의 세월을 보내온 공간만이 지닌 이 고풍스러움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결국 가치는 독과점을 넘어 다양한 이들과의 공유와 소통 및 교류를 통해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을 간직한 채 풍만했던 순간을 간직한 뒤 의릉 밖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