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문학이나 예술에서 등장하는 영웅의 역할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원망 충족이라는 요소도 많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기대하는 결과를 낳지는 못한다. 영웅의 자질과는 거리가 있는, 소위 반영웅(antihero)이라 불리는 변형되고 왜곡된 영웅상이 나타나는 것은 그에 대한 반성이나 풍자에서 비롯된다.
영웅은 감상자의 감정이입을 유도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구심점이 되는 반면, 반영웅은 감상자와 심리적인 거리를 둠으로써 인물보다 그 주변(대개는 부조리한 모습으로 드러난다)을 보도록 한다. 반영웅에도 여러 유형이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로 영웅적 자질 중 일부분만 남겨서 이를 평범한 일반인(감상자들 자신에 가까운)의 모습과 결합하는 것이 있다. 그럼으로써 어떤 유형의 영웅상을 요구하거나 받아들이는 사회상을 비판·풍자하고, 원망 충족의 허구적인 면을 드러낸다. 한편 이 변형된 영웅상을 완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하지 않을 때 일반인의 영웅심리를 반영하는 효과를 띠게 된다.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같은 것을 전형적인 예로 삼을 수 있는 이런 반영웅의 본보기를 한국 만화 등장인물 중에서 찾는다면(유일하거나 가장 좋은 예가 아니라도) 김진태 만화의 두 주인공인 황대장과 쾌걸 조로가 있다.
김진태 만화의 대표 캐릭터 황대장은 1991년 성인 만화지 ≪주간만화≫에 연재된 <대한민국 황대장>의 주인공이다. <대한민국 황대장>은 단행본으로 3번 발행되었으나 현재는 모두 절판되었다. 이 중 <섹시걸>은 <스커트 밑의 극장>, <행복한 이방인> 등 ≪주간만화≫에 연재한 다른 만화를 합본 발행한 것으로 19세 미만 구독 불가이다. <개그 하우스>는 김진태 중·단편 모음으로, <대한민국 황대장>도 수록되었으나 청소년 독자를 의식해 그림이 수정되고 연재 순서가 바뀌어 있는 등 보존 상태가 나쁘다.
- <대한민국 황대장>, 전 1권, 호산문화, 1991.
- <섹시걸>, 전 3권, 영미디어, 1997.
- <개그 하우스>, 전 7권, 영미디어, 1997.
머리숱이 유달리 적은 어떤 전임 대통령 같은 유명인사와 파충류를 합성하여 만든 얼굴에, '대장'이라고 큼직하게 써붙인 내복처럼 생긴 옷을 입고 이불홑청 같은 빨간 망토를 두른 황대장은 성격도 단순함을 넘어 막무가내에 자아도취적으로 존경심이나 친밀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인물은 아니다. 물론 초능력이 있는 것도, 첨단 기술이 결집된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겉으로 보아서는 그저 모자라 보이는 아저씨가 슈퍼맨 흉내를 내는 것으로만 보인다. 이렇듯 슈퍼맨을 패러디한 황대장의 모습은, 일면 키하나 노인이 늙은 말을 타고 기사들의 무용담을 따라하는 모습처럼 가상의 영웅담을 현실로 무리하게 끌어올 때 얼마나 우스워질 수 있나를 보여준다.
그러나 황대장이 하는 일까지 겉모습처럼 우스운 것은 아니다. 그는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창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법의 심판을 피해가며 비리를 일삼는 권력층,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익을 가볍게 무시하는 경제인, 흉악범에서 전철 성추행범에 이르기까지 서민의 안녕을 위협하는 여러 유형의 '공공의 적'들에게 가차 없이 필살기 '처절한 응징'(당해본 사람은 이것이 결코 한두 시간으로 끝나는 게 아님을 안다)을 날리고 서민들은 이를 보며 통쾌해한다.
이 시기는 인신매매를 비롯한 성범죄가 연일 신문지상을 장식하고, 1990년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할 정도로 강력 범죄에 대한 불안과 경계심이 증대될 시기였다. 황대장의 모습에는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우격다짐으로라도 불안을 해소해 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반영되어 있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 대신 추정 연령 40-50대의 중년 남자 황대장이 나선 것은 작가 나름의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일 수도, 기성 세대가 팔짱만 끼지 말고 사회 정화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 것일 수도 있다.
황대장의 겉모습뿐 아니라 자아도취적인 사명감, 필살기 '처절한 응징'은 1993년부터 ≪보물섬≫에 연재된 <신한국 황대장>(1-5권, 육영재단, 서울문화사 재발행)(주 1)에서 중학생 아들 2대 황대장에게 대물림된다. 2대 황대장은 결정타 '처절한 응징' 외에도 '바른 생활'(한문으로는 항문일침(肛門一針)이라고 묘사할 수 있다), '부메랑 슈즈 어택' 같은 새로운 필살기로 무장하고 있고, 고종 황제 같은 차림에 예의 그 망토를 두르고 나오는 아버지 초대 황대장의 자아도취는 극에 달해 있다. 아들 2대 황대장이 중학생이다 보니 <대한민국 황대장>에서는 다루지 않던 학원 폭력이나 교육 유해 환경 같은 청소년 문제가 좀더 눈에 띈다.
※주 1: 김진태 홈페이지에서는 '전 5권'으로 쓰고 있다. ≪보물섬≫ 폐간 때문에 완결되지 않은 채 연재가 중단되었으나 작가가 연재를 재개할 의사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쾌걸 조로는 스포츠 일간지 ≪스포츠투데이≫에 연재된 <시민 쾌걸>의 주인공이다. <시민 쾌걸>은 1999년 3월 11일 ≪스포츠투데이≫ 창간호부터 인기리에 연재되어 작년 10월 9일 연재가 종료되었고, 현재 5년 7개월이라는 최장기 신문 연재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단행본은 학산문화사에서 32권까지 발행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되었다. 신문 연재 당시 모든 화가 컬러로 게재된 데 반해 단행본은 전부가 흑백으로 되어 있다.
지각, 조퇴 하루 없이 20년 동안 대기업에서 근속하던 중년 가장 정의봉은 금융 대란의 여파로 명예퇴직당한 후 보존 상태가 수상한 비디오 대여점을 헐값에 인수, 운영하게 된다. 어느날 가게에 비치해 둔 비디오 테이프들을 정리하던 중 '쾌걸 조로'라는 제목이 붙은 수상한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비디오에 나오는 '쾌걸 조로 국제연맹 한국 지부' 홈페이지(http://www. elim.net/~ggorro/zorro.htm)(주 2)에 접속했다가 얼떨결에 조로 세트를 구매, 쾌걸 조로 국제연맹 한국 지부 요원으로 임명되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런저런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맡는다.
※주 2: 위 웹 페이지는 만화가 김진태 홈페이지(현재 URL: http://www. ggorro.com/)에 실제로 있었다. 현재는 다음 URL로 바뀌었다.
http://www. zorrokorea.co.kr
원래 조로의 무기인 채찍 외에도 주변 시민들의 궐기를 이끌어내 범죄자를 혼내주는 '시민의 엄단', 인공 방전으로 범죄자가 있는 지점에 번개를 떨어뜨리는 '민족의 특단'과 같은 필살기로 사회 질서를 해치는 이들을 징벌하는 정의봉 조로는, 경제 위기 이후 힘을 잃은 소시민 중년 가장이 다시 힘을 차려서 나라를 지킨다는 발상에서 만들어진 인물이다. 그러나 유행에 뒤떨어진 과거의 영웅을 따라하는 것이나, 복면을 쓰고 정체를 숨기는 것은 영웅적 면모보다는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위축된 가장의 모습, 약해진 가부장제 위계를 대변한다. 필살기는 황대장보다도 더 규모가 커졌지만 행동의 폭은 좁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인데, 겉모습이 영웅답지도 않고 훌륭한 가장도 아닌 황대장이 당당함을 잃지 않는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황대장이 슈퍼맨의 패러디라면 정의봉 조로는 배트맨의 패러디로 볼 수 있다. 외형상의 모델은 쾌걸 조로지만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도 조로를 모티브로 한 것이고, 어딘가 기가 죽은 정의봉 조로의 모습은 자신의 활동에 거창한 정의감을 내세우지 못하는 우울증 환자 브루스 웨인을 연상케 한다. 조로와 같이 활동하는 비디오점 점원 배은(별명 '뺀')이나 조로걸 화니 같은 조연들은 각각 로빈과 배트걸에 해당한다(조커에 해당하는 인물은 배드맨이 가장 가까울 것이다). 한편 돈을 아끼려고 가장 싼 조로 세트를 사서 활동에 여러 가지 제약을 겪거나, 한 번 쓰면 전기료가 수백만원씩 나오는 '민족의 특단'을 쓸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 등은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금력을 등에 업은 배트맨의 모습을 뒤집은 것이다. 내용은 직접 관련이 없지만, 기존 영웅을 패러디한 정의봉의 '어설픈 영웅' 이미지는 순정 만화지 ≪윙크≫에 연재된 오미영의 <변태 미소녀전사 정의봉맨>(전 3권, 서울문화사)의 주인공 이름으로 이어진다.
영웅은 그들이 지닌 능력 자체에 대한 욕구뿐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고픈 일탈 욕구를 반영한다. 평소 의식적으로 보여주는 인격(페르소나)을 가면에 비유할 때, 이런 일탈행위는 가면을 바꿔쓰거나 아예 벗어던지고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것에 비견된다. 앞서도 황대장을 중년으로 설정한 이유를 추측했지만, 황대장과 정의봉 조로가 중년인 것은 이런 점에 비추어 이해할 수도 있다. 즉, 작가는 이들이 가정이나 사회에서 기대되는 역할에 안주할 것을 요구받으면서 모험이나 탈출 욕구를 쉽게 표출하지 못하고 소극적이 되어가는 면을 뒤집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영웅들이 다른 가면을 쓰는 일탈행위를 깔끔하게 해내는 반면, 황대장이나 정의봉 조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도 이들의 반영웅성 중 한 부분을 이룬다. 황대장의 자아도취는 영웅을 흉내내려고 쓴 가면이 아예 얼굴에 붙어버려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 모습을 연상케 하고, 반면 자기 확신을 품지 못하는 정의봉 조로가 쓴 복면은 정의봉의 페르소나를 가리기에는 너무 작아 보인다.
이런 것은 단순히 황대장과 정의봉 조로의 성격 차이를 나타내는 데 그치지 않고, 1990년대 초에서 1990년대 말-21세기로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국 사회가 좀더 다원화해서 어떤 기준으로 누구를 심판할 것인가가 그만큼 불분명해졌음을 시사하는 면도 있다.
<대한민국 황대장>과 <시민 쾌걸> 모두 정치인의 외모나 이름을 본뜬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 소재가 되는 사건을 볼 때 정치 풍자 만화로 읽을 수 있다. 이를 감안하면 두 만화의 차이는 두 시대 사이에 변화한 정치 환경을 시사한다. 필살기 이름도 '처절한 응징', '바른 생활'과 '시민의 엄단', '민족의 특단'으로 차이를 보이고, 황대장이 전철 안에서 치한에게 '처절한 응징'을 하면 알아서 비켜주는 반면 정의봉 조로가 흉악범을 쫓으며 '시민의 엄단'을 외쳐도 소가 닭 보듯 호응을 얻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대한민국 황대장>이 연재되던 시기는 군사정권의 흔적이 좀더 뚜렷이 남아 있어서(노태우 대통령 집권기) 사회악을 처단하는 인물 자신의 의지를 내세울 수 있던 반면 <시민 쾌걸>에 이르러서는 어떻게든 국민이나 민족을 끌어들여 합리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반영웅이 등장하는 문학 작품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비교하기 쉬운 대상을 고르다 보니 글머리에서는 이들 두 주인공을 돈 키호테에 비유했다. 그런데 만화가 김진태가 외국어대 스페인어과 출신임을 생각하면 이러한 연상 작용도 작가의 의도에 포함될지 모른다는―좀더 나아가면 작가가 패러디라는 양식에 꾸준히 천착하는 것도 기사도 문학의 패러디 ≪돈 키호테≫에 영향받은 것일지 모른다는―추측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