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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편 103편 —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찬양하라
시편 103편은 찬양의 시입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주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이어지는 시편 104편도 곧 살펴보겠습니다만,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를 풀어 놓은 아주 흥미로운 시입니다. 그다음 시편 105편과 106편은 창세기부터 출애굽기까지, 오경의 역사를 압축해 놓은 듯한 시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하신 역사를 노래합니다.
시편 103편은 워낙 유명한 시이지요.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경에서 “내 영혼아”라고 부르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이인칭처럼 불러서 권면하는 표현입니다. 가장 유명한 찬송 가운데 하나가 있지요.
“내 영혼아 주 찬양하여라.”
이렇게 자기 자신을 향해 부르는 것은 자신의 고백이자 간증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그다음 구절입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 부르면서 “내 속에 있는 것들아”라고 표현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나 자신을 살펴보면 내 속에는 감정도 있고, 피도 있고, 살도 있고, 심장도 있고, 간도 있고, 장도 있습니다. 오장육부가 다 있지요.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하나하나 불러 모으듯이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온전히 총동원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하나님을 찬송하고 송축하고 싶은 간절한 심정을 표현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하나님을 송축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모든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바로 하나님의 모든 은택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은택’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와 선하심을 가리킵니다.
제가 대학에서 젊은이들에게 강의할 때, 신앙을 거부하는 학생들에게 무조건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건방지게 살지 마라. 네가 숨 쉴 때까지 네 힘으로만 살아온 줄 아느냐?”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군가가 돌봐 주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로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걷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합니다. 누군가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돌봐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스무 살까지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스무 해 동안 수많은 은택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가끔 제가 아내를 바라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저는 아직도 국수 끓이는 것 외에는 음식을 잘하지 못합니다. 며칠 전에도 아내가 감자 삶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에 감자를 삶으라고 하면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에 배웠는데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저는 한 15년은 어머니가 해 주시는 밥을 먹고 살았고, 몇 년은 누나가 해 주는 밥을 먹고 살았습니다. 또 몇 년은 기숙사 밥을 먹고 살았고, 그 후로는 40년 넘게 아내가 해 주는 밥을 먹으며 살아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은택 아닙니까?
인간이 은택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혼자 잘나서 살아온 것처럼 행동하는 순간, 사람은 사람답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십시오. 부모님의 사랑, 가족의 돌봄, 이웃의 도움,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2. 자기 자신을 향한 고백 — 죄를 사하시고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3절부터 5절까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절과 2절에는 “내 영혼아”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3절부터 5절까지는 “너는”이라는 이인칭 표현으로 바뀝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여기서 ‘너’는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 영혼을 향해 말하다가 이제는 자기 자신에게 직접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영혼을 향한 고백입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여기서 죄를 사하신다는 말씀과 병을 고치신다는 말씀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이 두 가지가 병행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이 모든 질병이 개인의 특정한 죄 때문에 생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식으로 모든 질병을 단순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죄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인간을 회복시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몸에는 날마다 수많은 세포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비정상적인 세포가 생기기도 하지만, 건강한 면역 체계가 그것을 통제하며 몸의 균형을 유지합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4절입니다.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인자와 긍휼입니다.
시편 103편에서 시인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개념으로 압축한다면 바로 인자와 긍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병을 고치시며,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건져 내십니다. 그리고 인자와 긍휼로 우리를 감싸 주십니다.
5절입니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여기서 “좋은 것”이라는 표현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보시며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된 히브리어 ‘토브’와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의 세계, 죄가 들어오기 전의 아름답고 만족스러운 창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고, 우리의 청춘을 독수리처럼 새롭게 하십니다.
여기서 청춘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젊음과 새로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은혜를 노래합니다.
이렇게 1절과 2절에서는 자기 영혼을 향해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권면하고, 3절부터 5절까지는 자신의 삶에 베푸신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구체적으로 고백합니다.
이제 6절부터 18절까지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께서 행하신 일을 더욱 깊이 찬양합니다.
3.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고 인자가 풍부하신 분이다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억압받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고, 고통받는 자들을 위하여 심판하십니다.
7절에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등장합니다.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여기에는 출애굽과 광야 생활을 비롯하여 오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돌보셨습니까? 그분의 성품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8절입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13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두 가지 표현을 발견합니다. 긍휼과 인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은 ‘긍휼’이라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까? 익숙한 단어이지만 막상 설명하려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긍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함’은 깊은 애정과 자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아주 쉬운 우리말로 표현한다면 깊이 사랑하다, 애틋하게 여기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고 애틋하게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부모의 마음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추모 예배를 드리며 비로소 깨닫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저는 부모님께서 지금의 저보다 훨씬 젊으셨을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부모님 두 분 모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며칠 전에도 형제자매들이 온라인으로 만나 부모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때 그러셨어.”
“어머니가 그때 그러셨어.”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부모님보다 더 나이가 든 지금에야 그분들의 사랑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도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합니다.
13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데 인간 아버지의 사랑만큼 가까운 비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아버지의 모습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강릉을 떠나 대학에 가려고 집을 떠날 때였습니다. 저희 집은 강릉 내곡동에 있었고, 남대천 건너편으로 뚝방길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뚝방길을 건너 버스를 타러 갔습니다. 그런데 뚝방길 반대편에 도착했을 때, 이상하게도 뒤통수가 뜨거운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뚝방길에 쭈그리고 앉아 저를 한없이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제가 돌아보자 아버지는 손짓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가라. 어서 가!”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떠나는 모습을 차마 쉽게 돌아서서 보낼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때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마음도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돌아설 때까지 기다리시고, 우리가 힘들어할 때 마음 아파하시며, 우리가 돌아오면 기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은혜롭다’는 표현에는 은혜를 베풀고 호의를 보인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라고 말씀합니다.
4절에서 인자와 긍휼을 함께 언급했는데, 8절에서도 긍휼과 인자를 다시 강조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7절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로다.”
계속해서 인자하심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 인자와 긍휼이 시편 전체에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깊이 사랑하시며, 변함없는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붙드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가 얼마나 큰지를 반대의 표현으로 설명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바로 9절과 10절입니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잘못을 무조건 괜찮다고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다루시면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10절과 12절에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10절입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12절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여기에는 죄, 죄악, 죄과라는 세 가지 표현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어를 살펴보면 이 표현들은 서로 다른 단어에 해당합니다.
첫째, ‘죄’는 히브리어 ‘하타트’ 또는 관련 어형인 ‘하타’ 계열과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죄를 짓거나 과녁에서 빗나가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둘째, ‘죄악’은 히브리어 ‘아온’에 해당합니다. 잘못과 죄악, 그리고 그 죄로 인한 책임이나 왜곡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셋째, ‘죄과’는 히브리어 ‘페샤’에 해당합니다. 반역이나 범죄, 하나님께 대한 고의적인 범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세 단어의 의미가 언제나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편 기자는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여 인간의 죄를 포괄적으로 다룹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죄를 어떻게 다루십니까?
10절은 우리의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죄악을 따라 그대로 갚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
11절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12절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얼마나 멀리 옮기시는지를 설명하는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죄에서 돌이키게 하시며,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고,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14절에 나옵니다.
4.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신다
14절입니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우리가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의 본질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체질’이라는 표현이 참 좋습니다. 우리의 구성 요소와 근본적인 본질, 속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다고 하지요. 전통적으로 태음인, 소음인, 소양인, 태양인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혈액형으로 사람의 특성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요즘 젊은이들은 MBTI 검사를 통해 자신의 성격 유형을 알아보기도 합니다.
MBTI는 외향성과 내향성 등을 구분하여 성격의 경향을 살펴보는 검사입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성향과 특성이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성격뿐 아니라 우리의 근본적인 본질을 아십니다.
우리가 무엇에 약한지, 어떤 상황에서 넘어지는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아십니다.
14절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여기서 ‘먼지’라는 단어를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기서 ‘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다마’이고, ‘흙’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파르’입니다. ‘아담’이라는 이름도 ‘아다마’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편 103편 14절에서 ‘먼지’로 번역된 말 역시 ‘아파르’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럴듯하게 살아가고 있어도 본래 흙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자신이 만든 토기를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은 토기의 겉모습만 보지만, 토기장이는 그 토기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인자와 긍휼을 베푸십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악을 따라 그대로 갚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과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옮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넘어지는지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5. 온 세상아, 하나님을 송축하라
시편 103편의 마지막 부분인 19절부터 22절까지는 온 천지 만물을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22절입니다.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처음에는 자기 영혼을 향해 찬양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제는 온 세상으로 찬양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자기 자신만 찬양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기를 소망합니다.
이 말씀을 설교적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우리의 삶을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우리를 감싸 주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악을 따라 그대로 갚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저지른 죄과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옮겨 주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단지 먼지뿐인 존재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에게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