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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周易)과 점(占)
정 병 석 명예교수(인문대학 철학과)
1. 왜 『주역』이 다시 소환되는가?
어떤 언론에서 21세기의 최첨단 대한민국이 점술(占術) 공화국으로 변하였다는 특집 보도를 한 적이 있다. 이것은 최근 우리 사회에 점을 치는 현상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인공지능 'AI' 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한지도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치는 행위 혹은 현상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진단하여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점술공화국’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최첨단 디지털 국가인 한국이 다시 원시시대로 회귀한 것이란 말인가?
음지(陰地)에 숨어있었던 명리학 등의 점술이 이제는 거리의 한복판에 당당하게 등장하여 맹활약하고 있다. 여기에 인터넷 공간도 여지없이 자리를 내주고 있다. 백화점의 문화센터나 대학의 평생교육원에 사주명리(四住命理)로 대표되는 점술 강좌가 다른 강좌들을 압도적으로 누르면서 성황리에 개설되고 있다. 이들 전문가들은 심심찮게 방송에 출현하여 사주명리학이야말로 최고의 학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이것을 통하여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들에 대해 예측하기도 한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인가?
점술은 이제 당당하게 제도권 속에 진입하여 대학원에서 상당히 인기 있는 전공과목으로 자리매김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중요한 산업 영역으로까지 진출하고 있다. 10조원을 훨씬 상회하는 규모의 새로운 업종으로 등장하였다. 이것은 물론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한자문화권뿐만 아니라 미국의 월 스트리트에도 이런 직업이 존재하고 있다. 바로 점성술(占星術) 펀드 같은 것이다. 어차피 모든 사업이나 일의 성공이라는 것은 미래에 대한 예측(豫測)과 의사결정(意思決定)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신앙으로 여겨지던 과학에 대한 믿음이 깨어지는 현상과 예측 불가능한 미래의 불확실성은 현대인을 점술이라는 공간으로 내몰고 있다.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과학이나 인간의 노력보다는 운(運) 혹은 우연(偶然)이 훨씬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태어날 때 어떤 재질의 수저를 물고 나오는가 하는 것이 미래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의 결과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운이나 운명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해진 것이고 결과도 그런 것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을 통제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가? 시간은 과거·현재·미래의 연속선상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문제는 미래를 인간 자신이 통제하거나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미래를 예측 가능한 어떤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게 된다. 여기서 점 혹은 점술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수단 혹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심지어 과감하게(?) 과학을 대신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과론(因果論)’보다는 ‘우연성과 팔자(?)’가 더 강력하고 우세하게 현실을 지배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나 생각들이 점술이 우리의 생활 속에 굳건하게 자리 잡게 만드는 이유이다.
점에 의지하는 경향은 자아(自我) 혹은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아에 대한 확신’과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능력’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점차 점술에 의지하게 되고 점술이 가진 신비성을 높게 평가하게 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점술의 대표로 『주역』 을 언급하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은 점술 특히 사주명리학과 『주역』 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여 점술을 아예 역술(易術)이라고 말한다. 이런 일종의 오해로 인해 유학의 오경(五經) 중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역』 에 대한 관심 역시 엄청난 열기를 불러오고 있다. 여기에서 『주역』 은 현대인들에 의해 다시 소환된다.
2. 『주역』 은 어떤 배경에서 출현하였는가?
『주역』의 출발점 혹은 발생적 기원은 분명히 점치는 것에서 나왔다. 출발은 점이지만 『주역』은 점점 인간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쪽으로 철학적 해석이 부가되기 시작한다. 단순히 점치는 책이 경전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주역』은 점과 철학 두 가지를 모두 가진 매우 특이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주역』공부에 환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반가운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 씁쓸한 느낌을 가지게 만든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주역』이라는 경전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점치는 책’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주역』의 발생적 기원 혹은 출발은 분명히 점치는 책이다. 첨단의 디지털 시대에 2천년도 더 이전의 사람들이 신봉하였던 점에 여전히 관심을 보이고 의지하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여야 하는가? 최첨단의 시기에 사람들이 점에 의존하려는 것은 인지 능력이나 합리성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불안감과 두려움을 가진 감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중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 중 하나는 장래에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을 안다는 일종의 불안감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가 그 일을 조종할 수 없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점은 이런 고통들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주역』은 점치는 책인가? 그렇지 않으면 동양의 세계관(世界觀), 인생과 도덕을 말하는 철학책인가? 그 답은 둘 모두이다. 『주역』 과 관련해서 가장 큰 논란 중의 하나는 점(占)과 연관되는 문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역』을 단순히 점치는 책으로만 알고 있다. 왜 이런 관점이 발생하는가? 사주(四柱) 팔자(八字)라는 명리학(命理學)의 관점이 『주역』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역』과 명리학(命理學)은 완전히 계통이 다른 두 가지이다. 점치는 방법이나 내용도 다르다.
이른바 역학(易學)이라는 것은 『주역』 에 관한 학문 즉 『주역』의 경전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분야를 말한다. 명리학을 역학(易學)이라고 부르는 것은 완전히 오도된 관점이다. 이런 차이를 명리학을 공부하거나 이런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문제는 명리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명리학의 근거를 『주역』의 권위에 기대기 위해 명리학을 역학으로 말하려 한다. 또 그들은 둘의 관련성이 없음을 잘 알면서도 이를 의식적으로 눈감아 버린다. 명리학이 역학이 아닌 가장 뚜렷한 근거는 명리학을 하는 사람들이 『주역』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명리학을 역학(易學)이라고 부르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주역』은 온전히 점치는 책으로만 알려지게 된다. 물론 『주역』은 점을 치기 위한 것에서 출발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처음에 『주역』은 점에서 출발하여 국가의 대사・ 인간사의 길흉(吉凶)과 운명을 추측하는 점술로 이용되어졌다.
『주역』의 점은 복서(卜筮)라는 중국 고대의 점법(占法)에서 출발하고 있다. 복(卜)은 거북이나 동물의 뼈로 점을 치는 것을 말한다. 서(筮)는 50개의 시초(蓍草)로 점을 치는 것을 말한다. 즉 시초라는 식물의 줄기를 이용해 점을 치는 것이다. 시초는 한 뿌리에서 매우 많은 줄기가 나오는 특이한 풀인데, 이것을 구하지 못할 경우에는 편의에 따라 다른 재료 예를 들면 대나무 등을 깎아서 사용하곤 하였다.
『주역』이란 책의 성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 있다. 즉 『주역』 은 주대(周代)의 점서(占書)인 동시에 만물의 변화를 말하는 철학책이다. 『주역』의 ‘易’이라는 말은 변화를 의미한다. 『주역』 이란 책을 영어로 번역할 경우 “Book of Changes”이다. 이런 관점은 ‘易’이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를 분석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문자를 풀이하는 가장 유명한 책에서는 ‘易’을 보호색을 빈번하게 바꾸는 도마뱀의 상형으로 보고 있다. 이런 도마뱀을 한자로 석척(蜥蜴)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카멜레온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의 가장 이른 시기의 한자는 아래와 같다.
또 위백양(魏伯陽)의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에서는 ‘易’이란 글자는 日과 月이 합해진 것으로 보아, 해와 달의 교체와 변화를 통하여 ‘易’을 설명하고 있다.
세 번째의 관점으로 황진화(黃振華)는 ‘일몰을 역으로 보는(日沒爲易)’ 관점을 말하고 있다. 그것의 고대문자는 아래와 같다. 즉 해가 지면 달이 뜨는 것으로 ‘易’의 교체와 변화를 말하고 있다.
위의 세 가지 견해들을 종합하면 ‘易’은 바로 변화(變化)의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종합할 수 있다. ‘易’이 가지는 철학적 의미는 바로 “모든 만물과 인간을 포함한 우주 자연의 살아서 움직이는 변화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사를 포함한 전체 우주를 변화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어느 누가 내일의 일을 확실하게 알 수 있겠는가? 인간은 당장 내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내일도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겠지만 내일도 지금처럼 우리를 편안하게 보장해 줄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왜 우리는 내일을 알 수 없는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도 변하고, 나도 변하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존재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결코 같은 강물 속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 변화에 대한 인식, 여기에서 철학적 사유가 시작되고 『주역』이 형성된다. 『주역』은 변화의 책이고, 걱정과 우환(憂患)을 말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3. 『주역』 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주역』은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끄는 책이지만 막상 이를 대했을 때 느끼는 인상은 무척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다른 경전들과는 달리 진입장벽이 매우 높아 쉽게 이해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주역』 의 가장 핵심을 이루는 괘(卦)와 효(爻) 등의 특수한 부호체계가 주는 난해함 때문이다.
괘의 종류에는 세 개의 효(爻)로 구성된 8괘와 여섯 개의 효로 구성된 64괘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효라는 것은 괘를 구성하는 기본 부호이다. 8괘에는 건(乾☰), 태(兌☱), 이(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 등이 있고 64괘는 이런 8괘를 아래위로 중첩한 것을 말한다. 이런 복잡한 부호체계는 『주역』을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접근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주역』 에서 말하는 효와 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보통 부러지지(나누어지지) 않은 부호 ‘⚊’을 양효(陽爻)라 하고, 부러진(나누어진) 부호 ‘⚋’을 음효(陰爻)라고 한다. 음( ⚋ )과 양( ⚊ )의 부호를 세 번 중첩하여서 이루어진 여덟 가지의 괘 형태를 8괘라고 부른다. 팔괘는 각각 정해진 괘의 형태·괘의 이름·상징물을 가지고 있는데 그 대응 관계는 아래와 같다.
괘명 | 괘형(卦形) | 상징물 | 상징 의미 |
건(乾) | ☰ | 天(하늘) | 健(건, 강건함) |
태(兌) | ☱ | 澤(못) | 悅(열, 기쁨) |
리(離) | ☲ | 火(불) | 麗(리, 부착) |
진(震) | ☳ | 雷(우뢰) | 動(동, 움직임) |
손(巽) | ☴ | 風(바람) | 入(입, 들어감) |
감(坎) | ☵ | 水(물) | 陷(함, 함정) |
간(艮) | ☶ | 山(산) | 止(지, 멈춤) |
곤(坤) | ☷ | 地(땅) | 順(순, 따름) |
팔괘는 또한 각기 특정한 상징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하나하나 설명하면 위 도표의 상징 의미에 보이는 것과 같다. 팔괘의 상징 의미는 대체적으로 불변하지만 여덟 가지의 상징의 물상은 여러 부류로 확대 가능하다.
예를 들면 건은 하늘을 상징하지만 또한 군주․ 용(龍)․ 금(金)․ 옥(玉)․ 좋은 말(馬) 등을 상징할 수도 있는데 이들은 모두 ‘강건’의 성격과 부합한다. 기타의 다른 괘 또한 이와 같은 예를 가지고 있다.
괘명 | 괘상 | 8가지 자연물 | 時令(계절) | 방위 | 신체 기관 | 가족 관계 | 동물 | 색 |
진(震) | ☳ | 우레(雷) | 正春 | 동 | 발 | 장남 | 용 | 玄黃 |
손(巽) | ☴ | 바람(風) | 春夏之交 | 동남 | 허벅지 | 장녀 | 닭 | 白 |
리(離) | ☲ | 불(火) | 正夏 | 남 | 눈 | 둘째 딸 | 꿩 | |
곤(坤) | ☷ | 땅(地) | 夏秋之交 | 서남 | 배 | 어머니 | 소 | 黑 |
태(兌) | ☱ | 못(澤) | 正秋 | 서 | 입 | 셋째 딸 | 양 | |
건(乾) | ☰ | 하늘(天) | 秋冬之交 | 서북 | 머리 | 아버지 | 말 | 大赤 |
감(坎) | ☵ | 물(水) | 正冬 | 북 | 귀 | 둘째 아들 | 돼지 | 赤 |
간(艮) | ☶ | 산(山) | 冬春之交 | 동북 | 손 | 셋째 아들 | 개 |
위의 도표에서 보이는 것처럼 8괘는 처음에는 여덟 가지 자연물을 상징하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계절이나 방위 및 가족관계 등으로 확장된다. 또 이를 응용하여 선천팔괘방위도나 후천팔괘방위도 등이 출현한다. 우리나라의 국기인 '태극기' 역시 선천팔괘방위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도표들은 아래와 같다.
<선천팔괘방위도> <선천팔괘차서도>
<선천팔괘방위도>
8괘를 중첩하여 각기 다른 여섯 개의 부호로 구성된 것이 바로 64괘이다. 64괘는 8괘 스스로 중첩하여 생긴 여덟 가지 괘 외에 나머지 56개 괘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상괘가 천(☰)이고 하괘가 불(☲)인 것이 합해지면 '동인괘(同人卦)'가 되고, 상괘가 불(☲)이고 하괘가 천(☰)인 것이 합해지면 '대유괘(大有卦)'가 되는 식이다. 64괘의 일람표는 아래와 같다.
64괘의 괘형(卦形)은 특수한 상징 형상으로 각각 64가지의 사물과 현상의 특정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주역』을 지은 작자의 자연계와 인간 사회에 대한 여러 가지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인괘(同人卦)'는 하늘이 위에 있고, 불이 아래에 있지만 천의 기운이나 불의 방향이 다 같이 위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란 의미로 '동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유괘(大有卦)는 불이 하늘 위에 있는 상(象)으로 마치 태양이 하늘 위에서 대지를 밝게 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이 괘는 그 '비추는 영역이 매우 크고 거대한 것'이기 때문에 '크게 가지고 있다'는 의미의 '대유(大有)'라고 하는 것이다.
또 기제괘(旣濟卦)는 불이 아래에 있고 물이 위에 있어 마치 음식물을 끓이는 것 같아 '만사가 모두 순조롭게 완성되었다'는 의미에서 '기제(旣濟)'라고 한다. 다른 괘들 역시 이와 거의 비슷하다.
64괘의 전체 순서는 첫 번째 '건괘(乾卦)'와 두 번째 '곤괘(坤卦)'에서 시작하여 63번째의 완성을 의미하는 '기제괘(旣濟卦)'와 미완성을 말하는 64번째의 '미제괘(未濟卦)'로 끝난다. 이러한 괘의 순서는 천지가 만물을 낳는 것에서 시작하여 서로 이어받는 전체 과정을 통하여 만물의 탄생에서 발전으로의 단계적 전환 순서를 표현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의 64번째 미제괘는 '미완성'의 의미로 다시 첫 번째 '건괘'로부터 시작하는 '끊임없는 순환'을 표현하여 '우주의 무궁한 변화와 발전'을 상징하고 있다.
4. 『주역』의 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고대에 있어서 『주역』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당연히 점치는 기능이다. 물론 진시황(秦始皇)의 분서(焚書)사건이 발생하였을 때도 『주역』은 철학사상을 논하지 않는 점을 치는 단순한 방술서(方術書)로 분류되어 화를 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통해 『주역』은 더 이상 점치는 기능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삶의 의미와 우주자연의 변화 법칙을 담고 있는 철학책으로 완전히 환골탈태하게 된다.
『주역』의 발생적 기원이 점치는 것에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점치는 책인 『주역』이 오랫동안 최고 경전인 오경(五經)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는 말인가? 이런 관점은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오랫동안 최고 경전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주역』은 결코 점치는 책이 아닌 철학서 혹은 수신서로서의 『주역』이다. 다시 말하면 『주역』의 발생적 기원이라는 문제가 『주역』의 본질이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보다는 『주역』의 본질이나 성격을 규정하고 형성하는 것은 바로 후대의 끊임없는 철학적 해석의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다.
『주역』의 발생적 기원이 점에 있다고 한다면 『주역』의 원류는 분명히 거북이나 동물의 뼈로 점을 치는 귀복(龜卜)이나 시초(蓍草)로 점을 치는 서점(筮占)과 직ㆍ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중국 고대에서 점을 의미하는 복서(卜筮)라는 말은 원래 복과 서라는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점법을 총칭하여 말한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거북을 이용하는 귀복점(龜卜占)이 시초를 이용하는 『주역』의 서점(筮占)보다 앞서 생겼지만 상당한 기간 동안은 두 가지 점법이 동시에 사용되었다. 서점의 뿌리는 복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사실은 갑골문에 남아 있는 복사(卜辭)를 통하여 쉽게 발견된다. 갑골의 복사가 후대 『주역』 의 서사(筮辭) 즉 괘사(卦辭)와 효사(爻辭)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귀복은 주로 은대(殷代)에 행해진 점법(占法)으로 거북의 껍데기에 나타난 균열(龜裂)의 모습(象)을 살펴보고 길흉을 점친다. 귀복은 귀갑에 구멍을 파고 다시 불에 구운 후 껍데기의 균열의 흔적 즉 조상(兆象)에 근거하여 해석을 한다. 귀복점의 기원은 제사의 희생(犧牲)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귀복점을 행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균열 혹은 조문(兆紋)은 바로 제사의 희생을 태우는 과정에서 뼈에 생겨난 자연스러운 무늬에서 기원한다.
실제로 복(卜)이라는 글자의 본의 자체가 바로 갑골 위에 갈라져 있는 무늬 즉 열문(裂紋)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열문의 일반적인 형태는 현재 한자에서 말하는 ‘점친다’는 의미의 ‘卜’자의 모습과 거의 비슷하다. 갑골문에 나타난 열문의 상형이 드러내는 형태를 모아보면 대체로 아래와 같다.
『주역』 역시 점을 치는 책이지만, 그것이 근거하는 원칙은 위에서 말한 귀복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그중에서 가장 다른 첫 번째 관점은 귀복이 귀신이나 상제(上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주역』의 서점은 수의 연산과 인간의 종합적인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법(筮法)을 행하는 주요한 도구는 시초(蓍草)이다. 시(蓍)는 식물 이름으로 무리지어 생장하는데, 가늘고 질기면서도 긴 줄기를 가지고 있는 식물이다. 아래의 사진이 바로 시초이다.
이 시초의 줄기를 50개의 똑같은 길이로 만들어 점을 쳐 괘를 만든다. 지금은 대나무나 다른 재료를 이용한다. 점서가 근거하는 8괘나 64괘의 괘상은 배열되고 조합된 수학적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로 길흉을 판단하는 과정은 이전의 일들에 근거해서 앞으로의 결과를 예측하고 추론하는 방식으로 여기에는 상당한 논리적 사유와 추론을 필요로 한다.
시초점을 치기 위하여 산가지를 세는 즉 설시(揲蓍)하여 괘를 만드는 과정은 소정의 연산과정을 통하여 행해진다. 그러나 현재의 통행본(通行本) 『주역』은 결코 점을 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는 상당 부분 기능상에서 점이라는 측면이 퇴색되고 그보다는 도덕적 수신이나 형이상학적인 내용들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훨씬 더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역』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가? 『주역』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망원경인가? 혹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인가? 『주역』은 결코 초인적(超人的) 직관력이나 신통(神通)함을 사람들에게 부여하여 미래를 예측하고 예언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주역』을 열심히 공부하면 마치 망원경처럼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선명하게 내다볼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마디로 망상이다. 그보다는 『주역』이 말하려고 하는 미래에 대한 예측은 “뿌린 만큼 거둔다.”는 평범한 진리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주역』의 두 번째 괘인 '곤괘(坤卦)'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경사가 남아돌고, 불선(不善)을 쌓은 집은 반드시 재앙이 남아도니 신하가 그 임금을 시해하고 자식이 그 아버지를 시해하는 것은 하루아침이나 하루 저녁에 생긴 것이 아니라 점차로 이루어진 것이니, 분별할 것을 일찍 분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臣弑其君, 子弑其父, 非一朝一夕之故, 其所由來者漸矣! 由辯之不早辯也.)”
위의 말은 선행(善行)을 하게 되면 그 결과로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까지 미치는 경사와 복택(福澤)이 남을 정도로 많이 생길 것이고, 나쁜 행동을 하면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손까지도 재앙이 발생할 것이라는 경고와 예측이다. 바로 다름 아닌 “뿌린 만큼 거둔다.”는 평범한 진리이다. 이어서 임금이나 아버지를 시해하는 엄청난 죄악은 결코 하루 아침이나 하루 저녁에 생긴 것이 아니라 점차로 누적되어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결과는 과거에서 지금까지 쌓여서 생긴 것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처럼 어떤 하나의 결과가 점차적으로 누적되어 생긴 것이지, 결코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미래는 현재의 행위가 어떠한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미래는 지금의 자신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주역』이라는 경전이 가진 기능은 미래를 미리 살펴볼 수 있는 망원경의 역할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주역』의 점이라는 행위는 기능상의 전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예언(豫言)이나 예측(豫測)에서 조언(助言)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변화한다. 『주역』 이 한 권의 점치는 책으로서 작용하였던 고대시기에 있어서 '점' 즉 '복서(卜筮)'라는 행위는 국가나 개인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한 판단 근거와 자료를 제공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에 있어서 국가나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이 미래를 예측하여 의사결정을 위해서 필요한 과학적 근거와 통계들이 충분하기 때문에, 점술이라는 행위는 기능적 측면에서 이미 효험을 상실한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주역』의 점을 통해서 미래를 예측하려는 시도는 그다지 지혜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점에서 『주역』의 점은 미래에 대한 예측이나 예언을 발견하려는 시도보다는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로서의 역할'은 충분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주역』의 64괘 384효에는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고 어떤 삶의 태도가 올바른 것인지 또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돌파하여야 하는가? 등에 대한 수많은 교훈과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주역』 의 점법인 설시를 행하는 것은 결코 미래를 점치는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주역』에게 '상담과 조언'을 구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역』은 단순히 점을 치는 도구에서 우리의 마음을 씻어주는 책인 '세심경(洗心經)'이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역』의 점은 더 이상 ‘어리석은 생각의 창고’(엘겔스의 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돌아보도록 만들고 조언을 해주는 ‘지혜로운 교훈의 창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