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에 처음으로 가보다
오랫동안 경상도에 살면서 가장 멀게 느껴졌던 곳은 강원도 철원이다. 포항에 살 때 영동지방은 동해안을 따라 속초까지 가는 버스가 있어 거리는 멀지만 상대적으로 쉽게 갈 수 있다고 느꼈다. 전라남도 서쪽 끝에 있는 목포는 창원에서 차 타고 세 시간이면 도착하기에 서울보다도 가까웠다. 그런데 철원은 강원도에 속해있긴 하지만 강릉이나 원주에서도 한참을 가야 하며 서울에서 가는 게 더 쉽게 느껴질 정도로 경기도와 가깝다. 철원으로 가려면 서울까지 갔다가 버스를 타고 두 시간을 더 소비해야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철원만큼은 아니지만 심리적으로 거리가 멀어 쉽게 갈 수 없었던 곳을 꼽자면 충청남도 태안이다. 철원과 마찬가지로 직행버스가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에 태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대전역에서 내려 시내버스릍 타고 대전 서남부 시외버스터미널로 간 뒤 태안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게다가 포항과 창원이 각각 동해와 남해가 가까워 바다를 실컷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서해까지 갈 필요성을 못 느낀 것도 컸다.
태안으로 가기로 결심한 건 대학교 선배가 서산에 한 번 놀러 오라고 초대했기 때문이다. 선배는 학교에서도 특유의 느린 충청도 말투를 구사하며 다른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경상도에서 충청도 사람을 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 서산 출신의 선배와 같은 동아리에서 부대끼며 시간을 보냈던 것이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충청도에 연고도 없는 터라 가기도 힘들었는데 서산에 놀러 오라고 하니 충청도 여행을 즐길 때가 바로 이때라 생각이 들었다.
국립공원 이야기 51 - 해미읍성
해미읍성 (海美邑城)은 고창읍성, 낙안읍성과 함께 한국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3대 읍성 중 하나로 꼽힌다. 서산시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며 서산 9경 중 제1경으로 꼽힐 정도로 아름답다. 해미읍성이 위치한 해미면은 조선시대에는 해미현 (海美縣)이었으며 대한제국 시기에는 해미군으로 승격될 정도로 번창한 곳이었지만 점점 더 규모가 줄어 현재는 읍도 아닌 면으로 남아있다.
해미읍성은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 왜구가 해안지방에 출몰해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것을 막고자 축성되었다. 조선 태종 17년 (1417)부터 세종 3년 (1421) 사이에 당시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 (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곳에 옮기고자 건설되었으며 효종 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존재했다. 이후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 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으며, 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 (武砂石)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 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서산에 간 김에 태안까지
서산에 도착하니 드넓은 벌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충청남도가 전라북도 못지않은 곡창지대라는 걸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선배 집에서 하루를 자면서 다음날 어디를 가보면 좋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서산에도 나름 볼거리가 많지만 그중 가장 인기 많은 곳이 바로 해미읍성이다. 해미읍성에 들러 조선시대 이후 잘 보존된 읍성을 보고 태안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태안에서 가장 큰 섬은 안면도로 서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인 꽃지 해변이 있는 곳이다. 꽃지 해변을 비롯해 안면도 자연휴양림과 썰물 때 걸어갈 수 있는 안면암 등 안면도가 자랑하는 볼거리는 수도 없이 많다. 하루의 짧은 일정 동안 지금까지 언급한 곳을 다 보기도 힘들었지만 충청도를 처음 봤다는 점에서 힘들다는 생각보다 즐거웠던 생각이 앞선다.
가장 먼저 들린 곳은 서산에 있는 해미읍성이다. 곧바로 태안으로 향할 수도 있었지만 서산의 랜드마크인 해미읍성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안면도로 가기 전에 먼저 해미읍성에 들렀다. 해미읍성은 대한민국의 세 개 읍성 중 가장 먼저 만난 읍성이다. 이후에 낙안읍성에도 가봤지만 아직도 고창읍성에는 가 보지 못 했다.
해미읍성 안에는 현재 사람이 살지 않아 휑한 느낌을 받았다. 동헌을 비롯해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남아있어 이곳의 역사를 전하고 있었다. 해미읍성 성벽은 1.8km로 성벽을 따라 천천히 걸어도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해미면의 드넓은 들판은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조선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살았던 것을 증명하고 있다.
성벽을 한 바퀴 돌고 나서 한국 천주교 3대 성지라는 해미읍성의 역사를 알기 위해 관아로 향했다. 관아 앞 회화나무에는 아직도 철사가 남아있어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잡혀와 고문당하고 순교한 곳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지금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 조선 시대 건물이 서 있어 평화로워 보이지만 수백 년 전에 이곳은 끔찍한 학살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아픈 역사를 뒤로 하고 해미읍성을 나와 안면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미읍성에서 안면도로 가는 길에 간월암이라는 조그마한 암자가 서 있다. 서해답게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육지와 연결되어 걸어갈 수도 있지만 물이 차면 섬이 되는 곳이다. 때마침 우리가 간월암에 도착하니 썰물이라 걸어서 암자에 갈 수 있었다.
간월암은 역사가 오래된 고즈넉한 분위기는 아니다. 1530년(중종 25) 찬술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간월도만 언급되어 있고 간월암은 언급되어 있지 않아 조선 후기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말엽에 폐사되었는데 1914년 승려 만공(滿空)이 다시 창건하였다고 한다. 간월암은 다른 불교 사찰처럼 불교 유산을 보러 가기보다 암자 뒤로 보이는 서해 바다와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신비로움을 느끼러 가는 곳이다.
간월암에 들린 뒤 꽃지 해변으로 향했다. 서해를 대표하는 해변은 보령의 대천해수욕장이지만 꽃지 해변의 인기 또한 그 못지않다. 대천해수욕장이 머드로 대표되는 축제와 여름 액티비티로 유명하다면 꽃지 해변은 환상적인 노을을 가진 풍경으로 유명하다. 꽃지 해변의 노을을 유명하게 만든 건 할미 할아비 바위다. 해변 앞에 뜬금없이 서 있는 두 바위 뒤로 해가 질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일몰을 감상한다. 이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일몰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내가 꽃지 해변을 찾았을 때는 해 질 녘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꽃지 해변의 풍경은 이국적이었는데, 서해의 조수간만이 만들어내는 모래의 물결과 할미 할아비 바위의 모습이 너무나 특이했기 때문이다. 평일 겨울엔 드나드는 사람 없이 한적한 분위기라 겨울 바다의 아름다운 풍경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태안 여행 마지막 일정은 안면도 자연휴양림에 가는 것이었다. 보통 자연휴양림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봄이나 가을인데, 굳이 겨울에 자연휴양림에 간 건 안면도의 소나무 숲이 명품으로 소문나 있기 때문이었다. 최고 수령이 100년에 이르는 안면송은 강원도 금강송과 함께 최고의 목재로 꼽혔다. 한 때 벌목으로 인해 사라질 뻔했지만 다행히 자연휴양림에 안면송이 남아있어 그 역사를 전한다.
눈이 쌓여있었다면 안면송의 풍경 또한 배가 되었을 것이지만 봄이 가까워오는 2월에 눈은 다 녹아 사라지고 없었다. 소나무 숲을 지나니 봄과 여름에 한껏 꽃을 피웠을 휴양림 내 식물들이 황량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천천히 산책을 즐기고 다른 계절에 휴양림에 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태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을 끝냈다.
한여름 다시 태안으로 가다
태안 첫 여행은 안면도만 들린 말 그대로 수박 겉핥기식의 여행이었다. 태안해안 국립공원에 속한 건 안면도뿐만이 아니다. 꽃지해수욕장만큼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만리포 해변과 태안을 사랑한 외국인이 조성한 천리포 수목원은 안면도가 아닌 태안반도에 위치한다. 안면도에 사람이 가장 많기는 하지만 태안반도 쪽에도 숨 막힐 듯이 아름다운 해변이 많다. 태안해안 국립공원을 대표하는 건 바로 이 리아스식 해안으로 형성된 수많은 해변이다. 이를 보기 위해 겨울이 아닌 여름에 다시 태안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야속하게도 날씨가 우리를 배신하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