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齋記(학산재기)
본 鶴山齋는 諱(휘) 有中을 비롯하여 여러 세대 중 15분 神位를 시초로 하여 가을시제를 받들어 모시는 사당이다.
우리의 派祖이신 有中은 본시 창원군 구산면에서 태어나시고 그 곳에서 돌아가셨는데 일제 강점기 때 그 묘지가 일본군의 병영지가 되어 강제 철거 당하여 이 곳 소곡리 객방의 마곡 언덕 酉坐에 안장하게 되었다.
안동권씨 문중이 入泗川 한지는 지금으로부터 약 210여년이 되고 사천으로 처음 입향하신 분은 諱 銓(전 30世 1774갑오생 1838 무술졸)이시다. 祖父 諱 璹(숙28世)의 五兄弟 막내인 有中(29世 1742임술생 1792임자졸)의 둘째(鏶집 銓전)아들이시다. (1724英祖卽位~,1776正祖~,1800純祖~,1834憲宗~,1849哲宗~,1863高宗~,1907純宗~,1910 韓日合邦)
문중의 시조 權 幸이 始祖이며 원래는 경주 김씨로 신라의 태성이었다.시조 權 幸은 신라 大輔公 金閼智(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로 古昌郡(지금의 安東郡) 별장으로 계실 때 후백제 견훤이 927년 경주에 침입하여 때마침 여러 신하들과 포석정(경주 월성군 내남면)에 있던 景哀王(경애왕)을 살해한 것을 크게 분하게 여기고 견훤군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우시고, 고려 창업에 한창이던 왕건을 도우니 태조께서 ‘權敏(권민:권력을 행사함이 영리하고 재빠름)에 밝고 權道(목적달성을 위한 임기응변 능력)에 통달하였다’하여 三韓壁上 三重大臣 亞父功臣 太師(삼한벽상 삼중대신 아부공신 태사:막중한 삼 대신이며 아버지와 같은 공신이고 삼사의 한 벼슬로 정일품인 벼슬)의 爵位(작위)를 내려주셨으며 특히 金 幸께서는 ‘能炳幾達權(능병기달권:권력을 행사함에~ 능력이 밝고 뛰어나다)라여 태조13년(서기990년)에 權氏를 賜姓(사성)하고 고창군을 安東府(안동부)로 승격 食邑(식읍)으로 하셨다. 그리하여 그 후손들 貫鄕(관향:본관)을 安東으로 쓰게되었다.
경남 우리 문중의 鼻祖(비조:중간 시조)는 軍資監正(군자감정:군사자금을다루는 벼슬)을 지내셨던 휘 執德(집덕 16世)은 有中의 13代祖이시다.
매년 11월 조상을 기리는 시제를 한 곳에서 모시자는 문중의 여러분의 뜻을 모아 齋舍(재사)를 건립하였다. 문중의 어른들께서 추진방안을 논의하고 장소 선정과 재사 건립자금 모금방안을 논의하여 所谷里 金谷 33세 휘 賢柱의 생가터를 손자 琮赫의 제공으로 큰 난관를 통과하고 건립자금 모금은 각 종친들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건축 主骨彫 자재는 加谷 宋씨가문 철거가옥목재를 인수해서 활용하도록 하였다.
모든 여건이 여의치 못하여 중연로하신 漢龍(한룡) 丙鉉(병현) 周壽(주수) 어른들께서 물심양면 대희사를 기금으로 다년간 숙원이던 이 공사를 琮赫의 總括(총괄)로 1983년(癸亥)에 시공하여 1984년(甲子) 2월에 上樑(상량)하고 1985년(乙丑) 10월에 준공하였다.
그동안 기금찬조는 별판에 게시되어 있으며 특히 앞에 기명된 분들 외에 采圭(채규) 敬春(경춘) 良赫(양혁)의 특별성원에 크게 힘입어 건립이 조기완공됨에 衷心(충심)으로 謝意(사의)를 표한다.
이제 모든 문중 종친들이 조상을 欽慕(흠모)하는 효심으로 時祭(시제)를 모시게 되었다. 누가 족보들 잘찿어놓았는지 고맙고
위항렬에 의하면 우리는 안동권씨 유종공파로 할아버지가 34대 아버지 37대로 이어진다
34代 權道生서기1890.05.17 ∼ 1965.05.27
35 代 權龍圭서기1923.12.29 ∼ 1965.06.04
1.갑순(甲順)뒷집 고모님.
2.갑남(甲南)축동고모님.
3.용규(龍圭)아버지.
4.귀순(貴順)대구고모님
5.용경(龍卿)앞에작은아버지
6.용운(龍雲)부천작은아버지
7.용윤(龍閏)건네작은아버지(4남3녀)
36 代 權政玉 ~ 權九浩.기옥.일구.은경.혁용.익구.
37 代 權鉉志 ~ 權鉉株
◆종친회(제각)위치는 경남 사천시 정동면 소곡리 (쇠실부락)에 있다
34세 權道生서기1890.05.17 ∼ 1965.05.27
35세 權龍圭서기1923.12.29 ∼ 1965.06.04
36세 權政玉 ~ 權九浩
37세 權鉉志 ~ 權鉉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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