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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Ⅰ.
복음서의 형성 과정
복음이라는 단어는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다. 황제나 임금이 즉위하면 죄인들을 풀어주곤 하였다. 지금도 광복절 특사 등으로 형량이 남아 있는 사람들을 풀어주는데 이런 특별 사면은 감옥에 갇혀 있었던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었다.
복음이란 단어 원어의 뜻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음과 멸망의 감옥에 갇혀 있었던 존재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 제사로 우리는 죽음과 멸망의 감옥에서 벗어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에게 구원을, 해방을, 영원한 생명을 받았음을 알려주는 기쁜 소식 그것을 복음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공생활 동안 어떤 글도 남기신 것은 없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이야기에서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는 기록만이 유일하다. 하지만 그것도 어떤 내용인지 모른다.
제자들의 말씀 선포와 기록의 시작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케리그마’ 곧 짧은 형태의 설교로 전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을 모아 전례, 교리 교육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구전 전승과 기록 전승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의 부활 후 약 33 년경부터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자 하였다.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구전 전승과 기록 전승 등을 가지고 고유한 복음서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최초 복음서는 60-70 년경 써진 마르코 복음이다. 그리고 70-80 년경 마태오와 루카 복음이 쓰였다.
이 세 복음서를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내용이 있고, 내용이 다른 것도 있다. 이런 동일점과 차이점을 바탕으로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기원후 50 년대에 예수님의 말씀들을 따로 모아 글로 엮은 ‘어록집’이 존재했었고 이 어록을 바탕으로 마태오와 루카는 최초의 복음서인 마르코를 참조하면서 복음서를 집필한 것이다.
이 어록집을 Q 자료라고 하는데 독일어 Quelle 의 첫 글자로, 출처, 원천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 어록집은 현재까지 발견되지는 않았고, 복음서 연구를 통해 ‘공통된 기록 문서가 있다.’ 라고 추정한 것이다.
정리를 해 보면 사도들과 72 인의 제자들이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어떤 것들은 구전 전승으로 남았고, 어떤 것들은 기록으로 남겨졌다.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성경의 시초, Q 문서의 기초가 된다.
이런 어록의 존재는 루카 복음 1 장 1 절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손을 대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2 절에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앙 공동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되새기면서 신앙을 찾았고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 행적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어록이 작성된 것이다.
마르코 복음과 Q문헌을 바탕으로 마태오와 루카 복음이 쓰여졌다는 가설이 있다. 마르코는 60- 70 년경, 마태오와 루카는 70-80 년경 집필되었다.
예수님의 유년 시절
예수님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자마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고 전한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인물은 헤롯왕이다. 헤롯은 오늘날 요르단의 산악 지방인 에돔,이두메, 이두메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외국인이었다. 그의 아버지 헤롯 안티파스 2 세는 이두메 지역의 유력 인사였고, 로마 제국 안에서 권력층들이 권력 싸움을 할 때 줄리어스 시저의 편에 가담했고, 후에 시저는 헤롯 안티파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그리고 그를 유대 지역의 행정장관 즉 초대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후에 장남에게는 예루살렘 총독으로 둘째 아들 헤롯을 갈릴래아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 헤롯이 후에 로마 원로원의 비준을 얻어 유대왕으로 임명이 됩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그를 싫어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우고 대규모 수로 시설을 건설했습니다. 또한 유대의 왕가였던 하스모니아 왕조의 공주 미리암과 결혼해 유대교 제사장 가문의 후원을 받았고, 로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유대의 왕’이란 칭호를 유지했습니다.
헤롯은 마태오 복음 2 장에 등장하는 동방박사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어린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왕이기도 합니다. 동방박사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에만 등장합니다. 또 어린이 학살에 대한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에만 등장하고 당시 어떤 역사적 기록에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헤롯왕에게는 유아 학살에 대한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유아들이 로마 제국에 반대해서 쿠테타를 일으킬 일도 없고, 로마 제국에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고, 또 그 당시 유아들의 부모들이 로마제국에 반대하는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아를 학살할 명분이 헤롯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아 학살을 언급한 마태오복음 사가는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이 이야기를 써 놓았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구약의 모세처럼 묘사하고자 한 것 같다는 것이 학계의 해설입니다.
또 예수님의 가족이 이집트로 도망쳤다가 헤롯이 죽은 후에 갈릴래아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모세가 파라오로부터 도망쳐 시나이 반도 미디안 광야로 갔다가 파라오가 죽자 이집트로 돌아온 이야기와 일치합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 사가는 예수님을 히브리인들을 구원한 모세처럼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할 분으로 믿었기에 모세의 이야기와 병행해서 서술한 것이라고 본다.
어린 시절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30 년간 살았습니다. 나자렛은 예루살렘에서 134km 떨어진 곳에 있는 산골 마을로, 삼척에서 횡성 휴게소까지 거리이니까, 차로 가도 먼 거리이니 당시 걸어 갈려고 하면 마음 먹고 가야 하는 거리였습니다.
나자렛은 오래전부터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어 유대인들의 경전인 토라를 배우는 학교가 있었습니다. 당시 아이들은 토라(모세오경)과 토라를 유대인의 실제 삶에 적용해 다시 해석한 미쉬나를 배웠다. 토라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기원전 6 세기경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했을 때 소멸했고, 경전을 읽을 때만 사용한 고전어였고, 일상생활에서는 아람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용한 언어는 아람어이다.
우리에게 전해내려 온 신약성서에 담긴 예수님의 어록들은 아람어를 당시 학자들의 언어인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이 원래 했던 말들이 잘못 번역된 경우도 많다.
결정적 두 사건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일상적인 삶을 살았던 예수님과 메시아 예수님 사이에 결정적인 두 가지 사건이 존재한다. 바로 세례와 40 일간의 단식 시간이다. 이 두 사건은 예수님의 3 년간의 공생활을 위한 변환 점이었다.
우리가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쳐야 하는 장소가 있는데 그것을 현관이라고 부른다. 라틴어로 현관을 의미하는 단어가 ‘리멘 limen’인데, 리멘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하고 힘든 기다림의 시간, 장소를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없다.
프랑스 인류학자 반 즈네프는 ‘리멘’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통과의례’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 책에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려는 사람은 세 단계를 성공적으로 완수해야 한다고 한다.
첫 번째 단계는 분리이다. 이 단계는 과거로 상징되는 모든 것들,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한 세계와의 의도적인 단절을 하는 단계이다. 이 단절을 다른 말로 ‘혁신’이라고 한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 내 편한 생각들, 내가 익숙한 삶을 가차 없이 버리는 행위입니다.
구약에서는 이것을 성기에 상처를 내는 할례로 표현했고, 신약에서는 혼돈과 죽음, 또 생명을 상징하는 물에 자신을 담금으로써 오래된 자아에서 죽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 태어나는 세례의 행위로 표현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전이의 단계이다. 이 두 번째 단계가 앞서 말한 ‘리멘 limen’이다. 낡은 자아를 소멸시키는 오랜 기간의 투쟁의 시간이다. 시간이 필요하고 오랜 노력이 필요한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는 충분한 전이 단계를 거친 자가 자신도 모르게 도달하는 단계이다. 자신의 몸에 밴 습관이나 행동을 제거하고 새로운 자아를 만드는 창조의 시간이며, 자신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절대적 고독 안에서 자신을 성장시키는 시간이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통해 ‘리멘’ 의 단계로 들어선다. 4 복음서 모두 세례자 요한의 활동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루카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친척관계로 묘사된다.
세례
세례는 세례자 요한이 처음 실시한 종교의식은 아니었다. 세례는 유대인들의 정결 예식(미크바)에서 유래하며, 쿰란 공동체에서는 세례 예식을 행했는데 ‘율법에 순종하겠다는 증거로 물을 뿌려 육신을 정결케 해야 하고, 회개의 물로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는 규칙을 전합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죄의 고백과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가에서 세례를 베풀며 회개를 촉구하고 있었다.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가죽 띠를 찼으며 들에서 메뚜기와 야생 꿀로 살았다고 성경은 전한다. 그는 가난한 떠돌이의 모습으로 예언자로 활동을 하였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카리스마가 넘쳤으며 수백 명의 유대인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쳤다’.
회개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회개는 그리스어로 ‘메타노이아’이다. 이 말은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을 바꾸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자신의 삶에 대한 묵상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묵상, 성찰을 통해 내가 익숙했던 세상을 떠나 새로운 세상,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려는 결단을 의미한다.
이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를 히브리어로 ‘슈브’로, 아람어로 ‘타브’로 말할 수 있다. 이 단어는 구약 시대에 예언자들이 회개를 촉구할 때 사용했다. ‘타브’는 ‘돌아오다’ 혹은 ‘회복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회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각자 개인에게 맡긴 삶의 몫을 깨닫고 인간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하느님의 DNA를 발견하고 회복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광야로 나아간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아버지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렸고, 성령 하느님이 비둘기 모양으로 함께 하신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유일무이한, ‘ 단 하나의 아들’ 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세상에 예수님을 소개하시거나 개인적으로 예수님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당신의 아들로 인정하시기 위해서이다.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인간의 아들이었는데 이제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서 초세기 교회에 이단이 생겨나기도 했었다.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곧 시작하시게 될 활동이 모두 성부 하느님과 성령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성자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이 세상에 드러내시는 구원 역사라는 것. 즉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 라고 확증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후 성령에 이끌려 사막으로 갑니다.
광야, 사막
사막에서 낮은 살인적인 더위로 숨조차 쉬고 힘든 시간이고 밤이면 반대로 엄청 추운 곳입니다. 또 들짐승의 위협에 시달려야 하는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영적으로 치료하기 위한 처방을 고민하셨을 것이다.
우리가 구약 성경 공부를 할 때 엘리야 예언자가 아합 왕과 이사벨에게 쫓겨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40 일 동안 단식기도를 했으며, 거기서 엘리야는 천둥, 번개, 지진과 같은 커다란 천체의 변화에서 하느님을 찾았지만 하느님은 엘리야를 부드럽게 들려오는 ‘섬세한 침묵의 소리’를 통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한다.
사막은 그리스어로 ‘에레모스 eremos ’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사막’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본래 의미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버려진, 비어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과 떨어져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 섬세한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사막이다.
성경에 40 일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상징적 의미로 과거의 자아가 소멸되는 기간이며, 과거의 자아가 죽는 죽음을 경험하고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광야 생활을 통해서 성삼위의 일치와 섬세한 침묵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묵상과 기도의 차이
잠시 묵상과 기도의 차이를 살펴 보겠다. ‘기도’ 라는 한자어 祈禱 에서 ‘기’ 자는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간절한 바람을 뜻하고, ‘도’ 는 ‘빌다’의 의미가 있다. 새벽에 장독대에 정안수를 떠놓고 손에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비는 것을 떠올리시면 된다.
반면 묵상은 그리스어로 ‘테오리아’라 하는데, 하느님과 합일되는 깨달음을 위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묵상은 자아 발견, 우리 안에 하느님의 DNA를 발견하는 것, 섬세한 침묵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묵상은 더러운 생각, 말, 행동을 정화하여 정결한 삶, 하느님 말씀의 실천,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묵상은 회개를 통해 자신의 죄를 씻어내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하느님께 길을 묻는 것이다.
정리하면, 묵상은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올바른 길인지 스스로 관찰자가 되는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에고’라는 자아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영 안에 머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성부 하느님과 성령 하느님과 일치 속에서 당신의 완수해야 할 인간 구원을 위한 여정에 대해서 묵상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우리가 일상 생활을 살아가면서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의식주입니다. 오늘은 뭐 먹을까, 무슨 옷을 입고 나갈까, 집값은 올랐나 떨어졌나, 이번 전세가 끝나면 어디로 이사를 해야 하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먹고살 것인지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6 장 25 절 이하, 루카 12,22-32 절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부와 권력을 소유했던 솔로몬의 영광도 나리꽃보다 못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현실을 부정하고 외면하게 하는 무책임한 말씀처럼 들린다. 그럼 길거리에 앉아 구걸이나 하며 살아가라는 것인가?
이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우리 삶에 있어서 의식주에 대한 걱정보다 우리의 근본적인 임무인 ‘하느님 나라’를 이루려고 노력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가득 찬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나라’ 는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하는 상태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 그래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 또는 상태가 부족함 없이 온전히 충만한 상태, 바로 그곳이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란,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가족과 이웃에 대한 자비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 각자에게 맡긴 몫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하느님의 형상을 일깨워 그 뜻이 무엇인지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