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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와 보살 숭배
7. 법연(法然, H?nen)
법연(1133-1212)은 아미타불과 그의 정토를 지향한 최초의 일본 승려는 결코 아니다.
일본에서 아미타불 숭배는 적어도 7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어 12세기 말엽에 아주
대중화되어서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그러나 법연이 단지 아미타불의 이름만을 염송하는
것과 그 아미타불의 서원이 가진 구제력에 의지하여 극락을 얻기 위한 모든 희망을 거는
방법은 그 종파의 새롭고 매우 영향력 있는 면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헤이안시대(794-1185)의 종말과 가마쿠라시대(1185-1333)의 도래를 알리는
시민전쟁, 기근, 질병, 경제적 붕괴 그리고 총체적 불행은 정토불교의 성장에 강한 자극이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위제희 부인이 현생의 근심에서 벗어난 다른 행복의 세계를
갈망하는 것을 여실하게 체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이 끔찍한 고통과 그에 수반되는 ‘다른 세계의 존재’가 종말론(말법사상)에 강한
자극을 주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종말이 다가왔을 때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떻게 종교수행을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모면할 것인가?
대략 답하자면 그것은 간단한 방식으로 충분한 구제력에 집중하는 수행인 것이다.
도원의 엄격한 조동종(曹洞宗)이나 『법화경』의 제목만 염송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일련의
극단적인 주장도 그 예이다. 또한 재가자를 더 받아들였다. 정토불교는 이러한 상황에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대응이다. 왜냐하면 정토불교는 이미 중국의 영적인 쇠퇴기에 대응해서
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겪고 있던 고통은 새로운 위기의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로 인해 불교는 보다
단순화되었고, 붓다의 자비심에 모든 것을 완전히 맡기고, 언제나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반대중과 승가에 기반을 두지 않는 형태로 대응하게 되었다.
법연은 아홉 살에 비예산의 천태종 승려가 되었으며 학승의 과정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이것만으로는 깨달음에 다가갈 수 없다고 느꼈다. 법연은 그 시대 다른 천태종
승려들처럼,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솔직하게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나는 눈이 있지만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발이 있지만 무력하여 성도(聖道)를 걷지 못하는
사람이다. … 나는 밤낮으로 명예와 부를 따르고 있음을 참으로 후회한다. (Yui-en 1961: vii)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말했다.
종파와 사상이 다른 많은 불교가 있다. 하지만 요약하자면 계율·선정·지혜의 3가지를
넘어서는 것은 없다. 내 경우에, 나는 하나의 계율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참선을 닦지도
않았고; 볼품없는 사고를 막아 버리는 지혜조차도 얻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천태종의 구조 안에서 정토 수행할 것을 주장한 영향력 있는 초기 일본의
주창자인 원신(源信, Genshin, 942-1017)의 주요 저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법연은 원신이
강조한 관법 수행이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그의 주장을 부정했지만 이 저작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법연은 솔직히 다음과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신적으로 아무리 훌륭하게 정토를 구현해 낸다고 하더라도 미적인 면에서 그것은 위대한
스승들의 조각작품과 결코 겨루지 못할 뿐 아니라, 정토의 모습은 벚꽃, 자두꽃, 복숭아꽃,
배꽃 같은 진짜 꽃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 (Matsunaga and Matsunaga 1974/6: II, 59)
반주삼매를 통해 본 모습들은 기껏해야 눈앞에 떠다니는 간접적인 영상이 아니겠는가?
법연은 불경 전체를 다섯 번이나 읽으며 공부했지만 자신이 깨달음과는 여전히 동떨어져
있음을 느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러나 결국 법연은 42살이나 43살에 선도의 저술을
읽다가 아미타불의 이름을 염송하고 거기에 완전히 의지하는 것만이 현생에 적합한 유일한
수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의 이 끔찍한 세계에서는 오로지 타력, 즉 아미타불의 무한한 자비력만이 구원의
근본이다. 염불만이 그 구제의 필요충분조건인 것이다. 법연은 삼매로 이끄는 관법수행과
환상들에서 추가적인 노력―위에서 보았듯이 중국 정토종의 수행에 칭명염불을 통합시키려
했고, 초기 일본불교에서도 받아들이려 했다―을 아주 불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서 법연은 그의 주석서 들에서 주장한 정토 수행의 관점과 철저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이전에 불가능한 사람, 악한 사람, 그리고 죽어 가는 사람에게만 적당할 뿐이고 열등한
수행법이라고 생각했던 단순한 수행을 현 시대의 유일하고 가능한 수행으로 옹호했다. 아마
법연의 접근 방식이 널리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고 하더라도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법연의 주요 저서는 『선택집(選擇集, Senchakush?)』으로 알려져 있지만, 생전에는 비밀로
하기를 바란 그의 희망에 따라 책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자신의 가르침을
간단히 정리한 『일매기청문(一枚起請文, Ichimai kish?mon)』에 나타나 있다. 그는 제자의
요청으로 염불이라는 쉬운 교리와 자기 가르침의 핵심을 강조하기 위해 죽기 며칠 전에
그것을 편찬했다고 한다. 법연은 염불을 하거 나 붓다의 이름이 갖는 의미를 깊이 연구하고
이해해서 외우는 것이 선(禪)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의심하지 않고
염불하는 것만이 자신을 정토에 태어나게 해줄 것이라고 한다.
그대는 석가모니의 전체 가르침을 연구하더라도 한 마디로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일
것이고, 스스로를 비구니 혹은 재가자처럼 무지한 사람이라 여겨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처럼
행동하지 말고, 일심으로 염불하라.
법연이 다른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이 염불하는 정신은 ‘… 하늘보다 높고 땅보다
깊은 환희의 하나이고 … 언제나 … 아미타불의 본원과 만남으로써 이루어지는 이 생에서의
커다란 행복에 대해 감 사드리는 기쁨’이다. 그 밖의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모든 것은 이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보다 더 필요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아무리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염불만 하는 단순한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또한 법연은 『일매기청문』에서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의심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아미타불은 누구도 미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연은 염불하면서 선도가 가르쳤던
것처럼 진실한 믿음, 깊은 믿음, 그리고 정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바람의 세 가지 요소를
가져야 하지만 아미타불의 서원을 완전히 신뢰하고 염불한다면 그 세 가지 요소들을 이미
갖춘 것이라고 한다(Burtt 1955: 213-16; 『Senchakush?』 1998: 제8장 참조).
아미타불의 서원을 완전히 신뢰하고 염불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면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도 구제될 것이다. 이 시기에 다음과 같은 일본의 민요가 남아 있다.
나는 떠나 버렸네,
만 명의 붓다들로부터.
사냥하고 낚시하면서,
이 중생의 삶을 살아가는 나는
해탈을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Tetsuro 1971: 102)
법연도 직업상 항상 공포와 만나고 억압에 짓눌린 가난하고 늙은 어부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는 그들에게 아미타불의 이름이 지닌 구제의 힘을 전파하였다. 기쁨이 넘친 그들은 낮에는
고기를 잡고 밤에는 염불하면서 자신들의 길을 가게 되었다(Eliot 1935: 265).
‘어떤 죄인이라도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 구제된다. … 구원은 … 전쟁터에서 죽더라도
확실하다.’ 어떤 유명한 창녀는 할 수 있으면 그녀의 직업을 포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다면 ‘그때 염불을 하라.’ 사실 그대
같은 여성은 아마타불의 서원에서 가장 환영하는 손님이다’(Machida 1999: 12). 한 교훈적인
이야기에서 준겐(Jungen)이란 승려는 자신의 딸과 성관계를 맺은 후에도 정토를 얻었다고
한다(Payne and Tanaka 2004: 97에 있는 Stone).
법연은 겸손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고 사람들은 그런 그의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 그러나
법연을 만난 적이 없는 일련은 아미타불을 강조하고 석가모니를 부정한 것에 상응하여
법연이 죽은 후에 그가 사악한 사람이라고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엘리엇은 법연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법연이 인간적으로 그렇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남달리 온화한 성격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친구들과 친지들의 사랑을 받았다. … 그는 예의 바르고 가장
설득력 있게, 간단하고 호감 이 느껴지도록 가르침을 폈다. … 이것은 스스로 배운 것도 없고
선행을 행하지도 않았다고 밝힌 사람들까지 해탈로 이끌었다. … (Eliot 1935: 266-7)
법연은 승려로서 금욕적인 생활을 했으며 음주와 육식을 하지 않았다. 금욕적인 천태종
승려로서, 법연 자신도 계속 천태종 수계식에 참여하였으며, 심지어 질병 치료를 위해
속인들에게 수계를 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연이 천태종의 다른 승려들과 다른
점은 문제가 되었다.
즉 염불만으로도 해탈할 수 있고, 아미타불은 가장 사악한 죄인조차도 구제한다는 법연의
가르침은 도덕폐기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왜 사악한 짓을 안 하거나 혹은 적어도 좋아하는
대로 행동을 하지 않는가? 염불하면 아미타불이 우리를 구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법연의
말대로라면 사악한 짓을 저지르거나, 적어도 마음대로 행동을 해도 상관이 없게 된다.
거기에는 계율을 범하는 행위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미타불의 타력을 통해서만 구제된다는
사상은 없다.
이러한 논쟁은 법연에게 문제를 제공하였다. 많은 반대론자들은 법연의 가르침에 대해 아홉
가지 비판을 하면서(K?fukuji s?j?, 興福寺奏?; 법원에 제기된 청원서) 그를 비방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계율을 부정하고, “도박을 하거나 육식과 같은 죄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아미타불의 힘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법연의 제자 가운데는
공공연하게 육식과 같은 계율을 범하고, 아미타불을 제외한 다른 붓다들은 숭배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사람까지 있다고 전해진다.
한편 진언종과 화엄종의 가장 존경받는 화엄학자인 명혜(明惠, My?e 혹은 高弁, K?ben,
1173-1232)는 『선택집』에서 나온 어떤 진술을 토대로 염불에 대한 법연의 배타성을 격렬히
공격하면서, 그가 ‘보리심’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관점은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도 아니며 자비심을 발전시키는 것도 아니며 단순히 정토에 태어나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법연의 가르침은 대승불교가 아니다. 사실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 겉모습만 다를
뿐 천상을 구하는 비불교인 것이다(Sh?jun 1971: 72 이하; Tanabe 1992: 97 이하). 명혜는
그런 일들을 가르치는 속에서 법연은 ‘야비하고, 중생이나 다름없고, 더 이상 불교도가
아닌 승려이고, 악마의 전도사이다. … 일본에는 수많은 중생들이 태어난다. … 그러나 이와
같은 어리석음에 분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Tanabe 1992: 82, 106).
법연은 ‘석가모니의 끔찍한 적이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이단이고, … 붓다의 가르침이
아니다’(앞의 책: 108). 실제로 『선택집』의 12장(1998: 129)에서 법연은 보리심에 대한
분명한 필요성에서 양면적인 모습을 상당히 보여 주고 있다. 때로 그는 보리심을 부정하지
않았고, 정토에 윤회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을 옹호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실로 그것은 정토에 다시 태어나기를 갈망하기 시작할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보리심의
발생과 함께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12장의 끝에서(앞의 책: 135-6) 그는 오히려 현재
정토에 다시 태어나기 위해 보리심은 실제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은 법연은 현 시대에서 정토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실제로 보리심의
요구를 충족한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승려 명혜 에게 답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므로
보리심에 대한 직접적이고 분명한 관심, 그것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필요한 어려운 수행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연은 보리심을 부정하지 않았고, 현재에
유일하고 실제적인 방법을 함축적으로 포용하려는 것이다.
결국 제자들이 연루된 사건(황제의 첩과 몰래 애정행각을 벌였다는 주장) 때문에 법연은
승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되었다. 여러 제자들이 고문받고 처형되었다. 그는 이를 겸손하게
받아들였으며 항상 아미타불의 자비심에 감사하였다. 법연이 죽은 후 그의 저서인
『선택집』을 인쇄한 목판은 ‘약탈 대상을 찾아 돌아다니는 천태종 승려들에 의해’ 파괴
되었고, 심지어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주검을 강에 던지려고도 하였다.
한편 그의 제자들은 그를 정토종의 개조(開祖)로 신격화하였고, 그를 대세지(大勢至)보살의
화신이라고 하였다. 법연은 스스로 그러한 비판에 대해 제자들이 지켜야 할 일곱 가지
서약으로 답하였다. 여기서 그는 계율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에서 물러섰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특정한 다른 종파들을 비판하지 않을 것이며, 파계를 조장하지 않을
것이며, 자기의 견해들을 스승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게 하였다. 법연은
결코 훌륭한 경전들을 멸시하지 말며, 또한 석가모니가 가르친 어떤 것도 무시하지 말라는
글을 남겼다. 붓다는 경전 어디에서도 죄를 범하라고 권하지 않았다. 그리고
믿음을 갖는 한 심지어 열 가지 악한 행위와 오역죄를 범한 사람조차도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지만 가장 작은 죄라도 죄를 범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만일 이것이 사악한 자에게
해당된다면 하물며 선한 자에게는 말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법연의 가르침에는 왜 제자들이 반드시 계율을 준수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없다.
계율을 지키는 것이 해탈에 어떤 효과가 있는가? 때로 법연은 계율을 깨트리는 것을
포함하여 나쁜 일을 하는 것 (‘악업을 쌓는 것’)을 반대했고, 주로 그러한 행동이 본질적인 한
가지, 즉 다만 칭명염불하는 것을 실제로 행하는데 명백하게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는
수행적인 이유로 반대했다. 계율을 범하는 것은 방편이 아니다. 그는 계율은 ‘생명을 보장하는
것’으로 이끌고, ‘그대는 가능한 한 스스로 근신해야 한다’고 말한다(『선택집』 영역 프로젝트
1998: 13-4).
게다가, 여전히 붓다의 타력보다 자력에 의지하는 것이 칭명염불을 쉽게 하기 위해 계율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가? 또 구원받기 위해서는 아미타불을 얼마나 많이 염불해야만 하는가?
한 번을 하라고 하든 많이 하라고 하든 이것도 자력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가? 법연은 위대한
영적 인물이자 성자였지만 체계적이거나 이론적인 사상가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는 염불을 하면 죄과가 없어진다고 했고, 결국 염불을 하면 할수록 더 좋아질 것이라고 한
듯하다. 여하튼 법연은 수행상의 이유로 끊임없는 염불이 유용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Bloom 1965: 21). 그 자신도 하루에 약 6만 번 정도 염불을 했다고 전해진다. 법연의 한
제자는 하루에 84,000번 염불했다고 한다.
만일 염불을 하고 시간이 남는다면 선행을 해야 할 것이다(Andrews 2004: 98-9). 그렇지만
법연은 아무리 자주 염불하더라도 자력과 같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순전히 많이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문자 그대로 해탈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염불의
숫자가 해탈로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사악한 마음으로 한번 염불했더라도 자력이 될 수
있다.
반면 아미타불과 그의 위대한 서원을 완전히 믿고 수없이 염불하더라도 자력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법연은 죽는 순간에 마음이 사악한 상태에 있다면 아무리 염불을
반복하더라도 그 사람은 정토를 상실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아미타불을 계속
염불해야 하고 또 한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도 필요하다.
일본에서 아미타불 신자는 죽는 순간에 방의 서쪽에 위치한 아미타불과 그의
협시보살들의 그림이나 불상과 마주하고 앉는 것이 전통이다. 오색의 끈은 죽는 사람을
불상과 연결시키는 데 사용된다. 대다수 일본의 아미타 삼존불(三尊佛, 아미타불과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있는 것) 그림들이 이런데 사용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법연은 죽을 때 끈이나 불상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말년에
10년간 계속 정토·아미타불 그리고 협시보살들에 대한 염불을 했다. 염불에 대한 법연의
사상이 어떠하건 그들은 무덤까지 법연을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