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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대교구 역촌동 성당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Gervase
2009년 11월 17일 화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엘리사벳 성녀는 1207년 헝가리의 공주로 태어나, 14세 때 이웃 나라 귀족과 혼인했다. 남편이 십자군 전쟁에서 전사하자, ‘프란치스코 제3회’에 가입하여 기도 생활과 자선 활동에 전념하였다. 1231년 24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했고, 4년 뒤 시성되었다. 엘리사벳 성녀는 자선 사업과 ‘작은 형제회 재속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 자케오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Zacchaeus, 말씀의 초대 율법 학자 엘아자르는 진실한 신앙인이었다. 박해 가운데에서도 용감하게 믿음을 고백한 사람이었다. 관리들은 그를 변절시키려고 강제로 돼지고기를 먹게 한다. 율법에 금지된 일을 시킨 것이다. 그는 거절한다. 매를 맞으면서도 신앙을 증언한다. 마침내 그는 이스라엘의 순교자가 된다(제1독서). 자캐오는 세리였다. 당시 세리는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들을 멀리했고 상종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을 방문하신다. 세상의 편견을 깨신 것이다. 감동한 자캐오는 새사람이 될 것을 약속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자캐오는 세관장이며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았습니다.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자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의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눈이 마주쳤을까요?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감동한 자캐오는 다른 사람을 등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 사랑하는 사람은 닮습니다. 좋은 모습은 빨리 닮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에게 조금씩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은 물들어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인도 모르는 새 서서히 물들어 가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사랑법 - 김수만 신부 - 나무도 사랑을 합니다. 나무는 자신 이외의 것을 말없이 받아들일 줄 아는 미덕을 지니고 있습니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어도, 비바람이 세차게 내리쳐도 스스로 그 모든 것을 넉넉하게 받아들일 줄 압니다. 따사로운 햇살도 매서운 비바람도, 자신의 뿌리를 건강하게 뿌리 뻗고 쑥쑥 자랄 수 있도록 해주는 자양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무는 그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감싸 안을 줄 압니다. 묵묵히 ‘나무 자신의 사랑법’으로 하늘 높이 사랑을 키워갑니다. 포용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조명언신부- 어떤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혼한 후부터 만날 때마다 서로 싸웠지요. 물론 서로 소리를 지르고 욕하는 심각한 싸움은 아니지만, 서로 상대방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다보니 약간의 다툼을 계속했던 것이지요. 그들은 상대방이 자기에게 얼마나 잘못했는지, 자신이 얼마나 속상하고 억울한 지에 대해서 항상 열심히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논리는 서로 너무 정확하고 빈틈이 없어서 어느 쪽이 옳고 그른 지를 제3자가 가늠하기가 매우 어려웠지요. 그런데 이 둘이 결혼한 지 10년쯤 지난 후, 이런 팽팽한 긴장감, 말싸움이 조금씩 완화되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봐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를 결혼 때부터 쭉 봐왔던 어떤 분이 웃으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요즘에는 잘 안 싸우나 봐요?"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네, 이젠 포기했거든요. 아무리 많이 이야기해도 소용없더라구요. 도무지 변화가 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결혼 생활을 하시는 분들에게 있어서, 서로 간의 갈등은 바로 배우자를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화시키려고 애쓰다보니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자기는 변화되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는 끊임없이 요구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개구리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려고 하고, 새들에게 수영을 가르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사람 역시 자신의 본성을 바꾸기란 쉬운 것이 아니지요. 결국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변화시키려고 애쓰는 것이 훨씬 편하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행복해질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캐오를 떠올려 봅니다. 자캐오는 다른 사람보다 키가 매우 작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놀림을 당했겠지요. 그래서 그는 그런 놀림을 극복하기 위해서, 로마의 앞잡이라고 할 수 있는 세관장이 되어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죄인이라고 더 따돌리고 비웃었지요. 그래서 그 마음에는 항상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고, 사람답게 살아보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자신과 같은 죄인들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했겠지요. '혹시 그분이시라면,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를 사람으로 받아주시지 않을까?'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예수님과 만나게 해주지 않습니다. 키가 작아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려 했지만, 사람들은 '네가 이곳에는 왜 왔어? 키도 작은 것이... 너 같은 죄인이 올 때가 아니야.'하면서 틈을 내주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지요. 한 도시의 세관장이며 내노라하는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체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보고 위해서 돌무화과 나무 위로 기어올라갑니다. 이런 자캐오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캐오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자캐오는 사람들과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삶의 변화를 통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 주겠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계속 원망만 한다면, 자캐오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행복은 바로 내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그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생긴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런 자캐오의 변화를 일으키게 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포용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얼마나 내 이웃을 받아들이고 있는 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포용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아멘. <초고속 성장촉진제> -양승국신부- 요즘 이 세상이 너무도 불공평한 세상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은 극점을 향해 치닫는다는 것을 수시로 느낍니다. 또래가 먹는 "성장촉진 보조식품"을 보고 자기도 "성장촉진제" 좀 구해달라고 제게 떼를 쓰는 아이(제 때 못 먹어서 그런지 나이에 비해 체구가 너무도 왜소해 보이는 아이)를 볼 때마다 아이의 고달팠던 지난날들이 눈앞에 어른거려 눈물이 앞섭니다. 주말이 오면 함께 외출이라도 나가 "초고속 성장 촉진제"라도 한 병 사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언젠가 만난 한 할머니의 사연도 기가 막혔습니다. 자식들이 알아서 조금이라도 용돈을 주면 좋겠는데, 용돈 받은 기억이 너무도 가물가물하다는 할머니. 단돈 천 원 짜리 한 장이 아쉬워 죽겠다는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도 "짠해" 보였습니다. 할 수 없이 제 용돈에서 거금 만원을 빼내 손에 쥐어드리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시절이 시절인 만큼 요즘 주변을 조금만 살펴보면 경제적인 문제로 가슴아파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죽음과도 같은 절박한 상황 앞에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 앞에서 피같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여유 있는 분들의 관대한 나눔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시기에 걸맞게 오늘 복음은 한 부자(돈 많은 세관장)의 회개 여정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가장 안타깝게 보이던 부류의 사람들이 "모을 줄만 알았지 세상이 두 쪽 나도 나눌 줄 모르는 사람들", "꽉 움켜 쥔 손을 죽어도 펴지 않는 부자들", "세상 뜰 날이 다가오는 데도 끝까지 재물을 하늘처럼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세관장 자캐오 역시 돈이 너무도 많았기에, 또 돈의 위력을 늘 실감하고 살아왔기에,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재물을 하느님처럼 모시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전형이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자캐오는 예수님과의 극적인 만남을 통해 회심의 기회를 잡습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예수님과의 만남, 극히 짧은 만남이었지만 자캐오는 회심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캐오의 회개여정은 극히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바로 이것이 회개다"하는 교훈을 우리에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캐오는 갑자기 다가온 주님의 초대(자캐오야, 나무에서 어서 내려오너라)에 즉각적으로 응답합니다. 지체 없이 "예, 주님!"하고 무화과나무를 타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억지로가 아니라 온전한 자유의지로,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십니다. 자캐오는 진정으로,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또 얼마나 기특합니까? 회개여정을 시작한 자캐오는 예쁜 짓만 골라서 합니다. 행동 하나 하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다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들이었습니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 주겠습니다." 자캐오의 이 말은 예수님께서 가장 바라시던 응답이었습니다. 참된 회개는 자캐오의 회개처럼 구체성을 요구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캐오의 회개처럼 그릇된 생활 태도를 구체적으로 바꾸겠다는 실질적인 다짐이 요청됩니다. 우리의 지난 그릇된 과거를 기워 갚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지한 반성을 토대로 한 철저한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관대한 나눔, 그것은 회개의 가장 좋은 결실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자. 주께서 문을 두드리시면 얼른 내려오너라 - 임영인 신부-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행복의 길은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헛된 것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헛된 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소외됩니다. 그래서 갈증에 목말라 합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양승국신부- ‘자캐오’란 이름은 ‘바르다’ 혹은 ‘깨끗하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관장 자캐오의 삶은 자신이 지닌 이름처럼 바르거나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그의 삶은 오랜 세월 제 갈 길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했습니다. 그의 생애는 부정부패, 중상모략, 권모술수, 이중적인 생활, 착취로 얼룩진 흠이 많은 나날이었습니다. 그는 히브리 사람이었지만, 직책상 히브리 사람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던 사람이었습니다. 동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민족의 원수였던 로마제국에 세금을 갖다 바쳤습니다. 말단 직원으로 출발했던 자캐오는 업무능력이 꽤 출중했던가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삥 뜯어내는 데’ 연륜이 쌓이면서 윗사람들에게 잘 보였겠지요. 그는 세리들 가운데 으뜸인 세관장이 되었습니다. ‘돈 많은’이란 표현을 통해 자태오가 세관장이란 자신의 직책을 이용해 상당한 부를 축척하였던 걸로 여겨집니다. 그에게는 한 가지 큰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그 정도가 유달리 심한 ‘숏다리’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세리들을 향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자연히 세관장이었던 자캐오는 ‘죄인 중의 죄인’ ‘대표 죄인’ ‘죄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자캐오는 ‘숏다리’였으니 군중들의 수근거름과 비아냥, 손가락질을 극에 달했습니다. 자캐오는 심심풀이 껌이나 땅콩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단골 놀림감, 첫 째 가는 조롱거리, 즐겨 씹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당시 분위기를 자캐오 본인이 몰랐을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이런 생각이 들었겠지요. “그래, 좋아! 너희들, 마음대로 갖고 놀아라. 언젠가 단단히 혼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죽어라고 돈을 모았습니다. 자캐오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돈이었습니다. 유일한 위안은 모아진 돈을 흐뭇한 마음으로 헤아려보는 일이었습니다. 돈을 모으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고 과제였기에, 그 방법도 잘 터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막대한 부를 축척하게 되었습니다. 동족들로부터 당한 심한 왕따, 눈총, 욕설과 로마제국으로부터 받은 심한 압박감과 스트레스의 결과가 수전노 자캐오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분노에 찬 그는 돈으로 복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엄청 속여도 먹었습니다. 말도 못하게 삥땅도 했습니다. 고리대금업도 시작하면서 악착같이 이자를 챙겼습니다. 채무를 제때 상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혹독한 방법으로 복수했습니다. 그런 자캐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죽을 죄인인 자캐오, 지옥이 확실하다고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니던 자캐오에게 예수님을 천국을 선포하십니다. 죽을 인간 자캐오에게 구원을 확증하십니다.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노력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가 아니라 구원받았다고 단언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희망의 복음입니다. ‘내가 이렇게 부족한데, 이렇게 지은 죄가 많은데, 이토록 죄질이 심각한데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우리 죄인들에게도 구원을 확증하는 희망의 복음입니다. 비록 우리 죄가 진홍빛 같을지라도 그분의 자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죄가 하늘을 찌를지라도 우리가 그분께로 돌아서기만 한다면, 우리가 그분의 자비에 매달리기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즉시 새 삶을,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주심을 믿고 다시 한 번 새 출발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새벽을 열며 저는 어제 오랜만에 자전거 동호회 사람들과 함께 자전거를 탔습니다. 평소에도 자전거를 타기는 하지만, 본당 신부라 동호회 사람들과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서 주로 혼자 탔거든요. 그래서 동호회 분들이 저를 위해 특별히 휴가까지 내서 어제 시간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추운 날씨였지만 좋은 분들과 함께 타는 자전거의 맛이 너무나도 좋았지요. 긍정적이고 좋은 생각을 하세요. 빠다킹신부 회개 -서현승 신부- 로마의 지배하에 놓여 있던 이스라엘인들에게 세리란 직업은 부당한 착취를 영혼의 키 높이 깔창 -이인옥- 우리는 가끔 죄와 수치로 움츠러들 때까지 움츠러든 키 작은 자캐오가 된다. 게으름과 이기심, 안일과 교만 등 수많은 장벽에 둘러싸여 주님을 뵐 수 없는 때가 종종 생긴다. 자캐오에게 올라갈 나무가 있었듯이, 우리한테도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성사(聖事)라는 나무가 있다. 나뭇잎 속에 가려진 자캐오를 그분이 먼저 알아보셨듯이, 성사의 그늘 속에 있는 우리도 그분이 먼저 부르신다. 그리고 자캐오한테도 그러셨듯이, 우리와도 함께 지내고 싶어하신다. '우리집은 겸손한 사람들만 올 수 있는 곳이다’라고 -최금자 - 늦은 나이에 결혼한 남편과 나는 모아놓은 돈이 없어서 시누이 집의 반 지하에 신혼집을 꾸렸습니다. 지금은 집주인으로 격상했지만 정이 흠뻑 들어 계속 반지하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살아서 익숙해졌음에도 출입문 천장이 낮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머리를 숙이지 않고 들어오다가 종종 정신이 퍼뜩 들도록 천장에 부딪치고 맙니다. 이런 연유로 나는 집에 들어올 때 겸손하게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자주 묵상합니다. 자캐오의 열망 -백광현신부- 세관장이었던 자캐오는 표면적으로 볼 때 부자였고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었지만 내적으로 어떤 불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것을 -전영준신부- 저는 동기들에게 성체 신심이 없는 신부로 통합니다. -홍성만 신부- 예수님 당시에 팔레스티나는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로마제국의 좋은 수입원이었습니다. 동포들에게서 세금을 거워들여 로마 정부에 바치는 세리는 비록 착복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매국노로 낙인찍혀 죄인으로 취급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캐오는 그런 세리들의 '장'(長)이었습니다. 직업 때문에 언제나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죄인으로 취급당한 자캐오지만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리코 거리를 지나실 때 군중들 틈에 끼어 발돋움을 하며 몸을 바짝 추켜세우나, 작은 키 때문에 불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캐오는 포기하지 않고 앞질러 달려가, 장(長)이라는 체면이나 위신에도 불구하고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이러한 자캐오의 마음을 한눈에 알아본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예수님을 보고 싶은 강한 원의는 예수님의 뜻밖에 방문으로 이어지며 오늘 복음의 전반부가 끝납니다. 지금 자캐오는 예수님 앞에 서 있습니다. 보려고 애쓰는 정도가 아니라 집에 모셨습니다. 기쁨과 호의에 압도된 나머지 회개의 결단을 내립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자캐오는 구원을 안중에 두고 회개의 결단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신비스럽게 찾아옵니다. 아니 합께 합니다. 이렇게 자캐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푸짐한 선물 그리고 궁극적인 희망의 성취는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간절한 원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과연 나에게는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간절한 원의가 있는가? 조용히 뒤돌아보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자캐오야 내려오너라 -이회진신부- 오늘은 복음을 영성생활의 내적 측면에서 상징적으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썼다는 면과 높은 나무에 올라갔다는 점을 자신의 영적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으로 보았고, 키가 작았다는 것과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는 점을 아직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영적 상태라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자캐오의 모습을 상정한다면 두 가지 모습, 즉 영적 성숙을 위한 노력은 있는데 내적으로 충분히 성숙되지 못하는 상태라는 이중적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2000년 전 자캐오에게만 있었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신앙인 역시 이런 상태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성장하고 진보하는 길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에 있다고 흔히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술을 배우고자 합니다. 기도하는 기술, 묵상하는 기술, 관상하는 기술을 찾아 배우면 더 훌륭한 영성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실제로 영적 진보와 성장은 “의식과 깨달음”에 있습니다. 영적인 기교만으로는 온전하게 하느님께 이르는 영적 성장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에 대해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통달하고, 묵상하는 방법 관상하는 방법을 통달한다고 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보는 힘”과 “직관하는 능력”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기술적이고 기교적인 면에 집중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두 가지 면을 오늘 복음과 비교해서 생각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혼자”라는 것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을 갖고는 있지만 그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혼자 찾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은 모든 것이 개인주의화 되어 가는 문화적 환경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택배로 주문하면 되고,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인터넷 “다음”이나 “네이버”등의 지식검색에서 찾으면 다 채워줍니다. 개인의 문제마저도 혼자서 위로를 찾고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회성 만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캐오의 열망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인데 그가 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본다면 자신 앞을 지나가는 예수님을 그냥 한 번 보는 것이기에 그 만남은 한 번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기도와 하느님의 만남이 이런 일회성 만남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자신의 내적 문제가 생겼을 때만 예수님께 다가가 “위로”와 “평화”를 청합니다. 답답하고 뭔가 해결 안되면 성당에 나가 위로를 찾습니다. 마치 성당이나 예수님이 “박카스”와 같은 “피로 회복제” 역할을 하는 것에 익숙한 것이죠. 예수님은 오늘 이 관계를 뒤집어 놓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진정 당신을 만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당신이 직접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관계”, 다시 말해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자캐오야, 내려오너라.” 하시는 말씀은 우리에게 건네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영적 발전 혹은 성장을 바라는 근본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캐오나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직접적인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만남을 이루는 방법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당신의 길로 우리가 들어오길 고집하지 않고 찾아가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여는 것(개방)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 당신이 부족한 자캐오를 받아들여 같이 지내고자 하는 것처럼 우리도 부족한 다른 이들을 받아들여 “함께 살아갈 때(공동체의 삶)” 비로소 우리는 신앙 안에서 “보는 눈”과 “직관하는 능력”을 올바로 갖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기도하는 방법, 묵상하고 관상하는 방법들이 하느님을 찾는 기술이나 기교가 아닌 기쁨을 얻게 하는 통로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만나고 영적으로 더 깊어지는 것은 어떤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그분과 세상을 만나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 혼자만이 멀리 보고 있다고 자랑하는 어리석음은 탓하여 주시고, 저의 어리석음은 당신 앞에 부끄럽게 하소서. 아멘.” 자캐오야, 어서 내려 오너라! -김웅태 신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강영구 신부- +자케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너와 나의 참된 만남의 길!! -석찬귀 신부 - 한 때는 이 거친 도시가 ‘만두파동’으로 야단법석이더니 그런데 오늘 루가 복음에 나온 예수님과 자캐오가 예리코에서 만난 사건은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절감한 자캐오는 자기 재산의 제 친구 J 신부는 오랜만에 후배 S 신부를 만난 적이 있는데 양심 - 내 마음속에 있는 내 것이 아닌 마음 -박상대신부- 공관복음이 모두 보도하는 예리고의 소경치유사화(18,35-43)에 이어 루가는 오늘 단독으로 ‘자캐오의 구원사화’를 전하고 있다. 예리고는 요르단강 서쪽, 예루살렘 북동쪽 36Km 지점, 요르단강이 사해(-395m)에 합류하는 북서쪽 15K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지중해의 해수면보다 250m 낮은 아주 비옥한 땅이었다.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 지도를 보면 예리고는 사마리아, 베레아, 이두매아 지방을 서로 이어주는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유다지방의 수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중요한 관문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예리고에는 지방간의 교역을 감시하면서 세금을 징수하는 많은 세관들이 있었고,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자캐오는 이들 세관들을 모든 관장하는 세관장으로서 돈 많은 부자였다는 것이다. 육체가 지나친 복을 누리면 그에 비해 영혼이 고갈되는 법, 자캐오는 돈 많은 부자로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수는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늘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다. 당시 세관원은 지방영주로부터 관세 징수권을 위임받은 민간인들로서 계약에 따라 보수를 받았다. 그러나 세관원은 이방인들과 자주 접촉해야 하고 개별적으로 지정액 이상의 관세를 매겨 부당하게 치부했기 때문에 대부분이 양심을 속이는 죄인 부류에 속해 있었으며, 정직하다 하더라도 직업상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다. 따라서 유대교의 신앙을 제대로 따르고 올바로 살기 위해서는 이 직업을 버려야 했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자캐오가 예리고의 모든 세관들을 관장하는 세관장이었다면 그가 유대인들로부터 얼마나 큰 죄인으로 취급받았을 것인지는 가히 짐작이 간다. 그런데 오늘 그에게도 구원의 날이 들이닥쳤다. 예수께서 그를 만나 주신 것이다. 물론 키가 작은 자캐오가 군중에 둘러싸인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해서 자캐오는 예수께서 지나가실 길목을 미리 잡아 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자캐오의 모든 처지를 한눈에 알아보신 예수께서 오늘 그에게 구원을 선사하신다.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절) 예수께서 ‘오늘’이라고 말씀하시면 인간의 역사 안에 분명히 새롭고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루가복음에만도 이러한 장면이 여러 번 있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2,11)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4,21)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19,9)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23,43)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에게 ‘오늘’은 구원의 날이지만, 오늘의 표징을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불평과 불만의 날이 될 수도 있다.(7절) 그렇다고 구원의 ‘오늘’이 아무에게나 선사되지는 않는다. 죄인으로 취급받았고, 또 그래서 죄인일 수도 있는 자캐오처럼 재물의 사회 환원과 부당한 착취에 대한 보상(8절)이 선행(先行)되어야 구원의 ‘오늘’이 선사되는 것이다. 즉, 회개가 하느님 구원의 선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자캐오가 자기 재산의 반을 사회에 환원하고 부당한 착취에 대한 4곱절의 보상을 다짐하는 회개와 회심을 불러일으킨 사건은 ‘그의 노력에 의한 예수와의 만남’과 이로 인해 ‘예수께서 그의 집에 머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인간은 누구나 양심(良心)을 가지고 있다. 양심이 무엇인가? 이는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자기의 것이 아닌 마음이다. 자캐오도 이 마음 때문에 늘 괴로웠던 것이다. 그래서 양심은 늘 올바르고 착한 행동을 요구하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마음이 이미 인간의 마음속에 거주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하느님의 마음인 이 양심의 현존을 깨닫고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노력의 결과는 의(義)를 향한 회개와 회심으로 드러나게 된다. 회개와 회심을 결심하고 실행하는 사람은 기쁠 수밖에 없으며, 이를 두고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15,7) 내일이 아니라 ‘오늘’ 양심과 만나 회개하는 사람은 분명히 오늘이 가기 전에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