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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검토하는 열 가지 기준 / 윤석산 尹錫山
《심상》지의 특집에 발표된 180명의 360편 작품을 비롯하여 10여개 문예지에 발표된 1천여 편의 작품을 읽으면서, 이 땅의 시인들에게 좀 무례한 질문을 퍼붓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가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상당수의 시인들이 시의 기본조차 터득하지 못한 채, 그냥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각 잡지에 게재된 비평들이었다. 집필한 분들의 이름을 보면, 시가 무엇인지, 한국 현대시가 당면한 문제가 어떤 것인지, 어떤 자세로 시를 써야 할 것인지를 알만한 분들인데도, 그런 문제점을 논의하기보다는 '죽은 지식'을 자랑하기에 급급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쯤 이 글을 읽은 독자 여러분들은 아마 '그래, 맞아!'하고 공감을 표할 것이다. 그리고, 그 독자가 시인이라면 자신만은 예외적 존재 속에 포함시키고 싶어 할 것이다. 80년대 중반 이후 문학지가 우후죽순격으로 창간되고, 한정된 문학 시장에서 수록한 작품의 질이나 편집 방향의 개선으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된 각 문예지가 <신인 추천>이라는 제도를 이용하여 함량 미달의 시인들을 대량 양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자신을 예외적 존재로 취급하려는 시인들에게 아래와 같은 항목에 따라 자기 작품과 문학적 견해를 검토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우선 <의미적 국면(意味的局面)>부터 질문해 보기로 하자.
첫째로, 자기 시 속에 등장하는 <시적 인물>이 누구인가를 따져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그리고, <허구적 화자(虛構的話者)>를 선택한 시인이라면 왜 그런 인물을 선택했는가, 그 인물과 화제(話題) 이하의 층위와 어울리는가, 이 시대의 다른 시인들 작품과 선대 작품 속에 나타난 인물들과 비교할 경우 어떤 변별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와 같은 차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따져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필자의 진단에 의하면 지난 3개월 동안, 아니 어느 달에 읽은 작품이든 80% 이상이 시인 자신인 <자전적 화자(自傳的話者)>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허구적 화자>를 채택한 작품들도 화자 이하의 층위와 유기적인 연관 관계를 맺고 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전과 허구의 어중간한 지점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물론 자전적 화자를 택했다고 열등한 작품이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으면 가급적 듣는 이(독자)에게 멋있게 보이는 데 치중하고, 그로 인해 진실되게 이야기하기보다 위선적으로 말하기 쉽다. 그리고, 이런 심리 때문에 자연히 화제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검토해 보라는 것이다.
둘째로, <화제의 초점(焦點)>을 <관념>·<물질적 인식>·<무의식적 반응>·<지적, 추상적 논리>로 나누고, 자기시의 초점이 어디에 맞추어져 있는가를 살펴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이 역시 화자의 유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요소로서, 필자가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사상이나 감정을 이야기하는 데 초점을 맞춘 관념시(platonic poetry)가 주류를 이루었고, 시적 대상의 물질적 감각에 초점을 맞춘 즉물시(physical poetry)가 일곽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무의식과 지적 논리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은 극소수였다.
이 역시 작품의 우열을 평가하는 기준은 아니다. 낭만주의 시대에 주류를 이루었던 <관념시>나, 주지주의자들로부터 '의미 없는 텅 빈 그림(meaningless picture)'라는 비판을 받은 <즉물시>도 기존의 인식을 뛰어 넘어 새로운 관념과 감각을 창조한 것이라면 마땅히 상찬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시란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운율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는 전통적인 장르관(觀)에서 보면 무의식이나 지적 논리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 이단적이며 비시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아는 도덕을 장황하게 설교하거나 눅진눅진한 정서를 유출시킨 작품, 또는 그저 그렇고 그런 풍경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데 그친 작품들은 이미지스트들이 낭만주의자들을 공격하던 비판, 또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주지주의자들이 이미지스트들을 공격하던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셋째로, 자기 작품의 <거리>가 대상의 인식과 반응의 단계와 관계없이 <고정적>인가 그에 따라 <이동>하고 있는가 확인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심리적 거리(psychic distance)의 유형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은 문학 이론에서도 아직 확립된 게 아니므로 편의상 초점의 유형을 적용하여 나눠보면, <단일 초점>을 취하는 작품은 고정된 거리를 취하는 작품이고, <복합 초점>을 취하는 작품은 이동하는 거리를 취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기준을 적용하면, 대부분의 작품들이 단일 초점을 취하거나 <관념+물질>, <무의식+물질>, <무의식+관념>의 2차 결합형이고, 그 이상을 포괄하는 작품들은 거의 발견하기 어려웠다.
물론 동일한 작품 안에서 거리를 이동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시적 거리란 시인이 <자아>와 <화제>와 <청자(독자)>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 장치로서, 같은 작품에서 특별한 장치가 없이 이동할 경우에는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시에 모든 유형의 초점이 다 동원되었음을 고려할 때 거리를 이동시키는 방법 이외 새로워질 가능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고정된 거리를 취할 경우에는 '순수시(pure poetry)' 또는 '배제(排除)의 시(exclusive poetry)'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기에 권유하는 것이다.
이제 구조적 국면(構造的局面)에 대해 질문해 보기로 하자. 앞의 질문에 이어
넷째로, <플롯(plot)>에 대해 배려한 적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플롯의 문제는 흔히 소설론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모든 담화는 <작은 담화>의 집합이고, 전체 담화가 짜임새 있고 유기적(有機的)인 것이 되려면 무수한 작은 담화 가운데 무엇을 먼저 이야기하고 나중에 할 것인가에 대한 순서를 고려해야 하고, 같은 것끼리는 한 데 모아야 하며,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반복하는 배려가 있어야 한다.
시적 담화도 이런 원리에 지배를 받는다. 일상적 담화와 마찬가지로 화자와 등장하는 시간적·공간적 배경(setting)과 상황(situation)을 제시하고 그 작품의 주된 화제를 제시하는 순서로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떤 방법으로던지 그 작품의 첫머리에서 <언제→어디에서→누가>를 밝히지 않으면 독자들은 작중의 상황을 짐작하며 읽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 다음 <주된 화제 → 그에 대한 또 다른 생각 →주된 화제>의 틀을 유지해지 않으면 그 작품의 주제가 부각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동안 읽은 작품들의 상당수는 이런 배려가 없이 정서의 흐름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다섯째로, 자기 작품이 'A=B'로 <치환(置換)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가, 'A=A''라고 <설명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어쩌면 이 문제는 굳이 나무랄 일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시는 산문 쪽으로, 산문은 시 쪽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명적 구조를 취할 경우 다른 층위에서 이른바 '시적'인 징표를 강화하지 않으면 어색한 산문 토막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렇다. 시란 정서의 산물임이 분명하다. 설혹 <지적>이고 <논리적>인 화제라고 해도 그것은 결국 좀 더 특수한 정서를 환기시킬 것을 목적으로 채택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정서를 설명하려 들 경우에는 동어반복(同語反復)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장르적 특질이 어느 쪽으로 이동하던 시의 본질은 로 바꾸는 치환 은유적 구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국면에서 한 가지 더 따져볼 것이 있다. 그것은 원관념(原觀念)과 보조관념(補助觀念) 얼마나 '낯설은가', 어느 한 부분을 치환했는가 전체를 치환했는가 하는 점이다. 다 같이 은유 구조를 취한 작품이라고 해도 두 관념이 너무 유사하거나, 어느 한 부분만을 은유하면 설명의 상태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가 독자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표현하려는 <경제적 양식>이 아니라, 언뜻 들어서는 알 수 없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도록 만드는 <비경제적인 양식>으로서, <원활한 독서>보다 <지체(遲滯)의 독서>를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처녀=꽃'이라는 은유적 표현만 해도 그렇다. 그런 표현에 너무 자주 접한 현대 독자들은 자동적(自動的)으로 원관념을 떠올릴 수밖에 없지만, '처녀'의 속성을 잘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왜 처녀를 꽃이라고 했을까? 처녀는 사람이고, 꽃은 식물인데…'라는 의문을 자아내어 곰곰이 생각해 보도록 유도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따라서, ①이미 관습화된 비유 ②별다른 노력없이 원관념을 떠올릴 수 있는 비유 ③어느 한 구절을 구체화하기 위한 비유 등은 '산문적인 비유(prosodic metaphor)' 또는 '죽은 비유(dead metaphor)'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섯째로, 자기 작품 가운데 <전경화(foregrounding)>된 부분이 있는가, 그리고 그런 부분이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자아내는가를 살펴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전경화(前景化)란 의미든 표현이던 또는 형태든 다른 부분에 비하여 이질적인 부분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와 같이 유사 자질(A) 속에 이질적인 자질(B)을 배치했을 때 얻어진다. 다시 말해, 유사 자질들은 배경화(背景化)되고, 이질적인 자질들은 전경화된다.
물론, '수수한 시'를 지향하는 시인들은 이런 기법을 못마땅해 할 것이다. 그러나, 전경화된 부분이 없는 작품들은 밋밋하여 구조를 형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적 긴장이 떨어지고 만다. 그리고 이질적인 요소들을 불규칙하게 배치할 경우에는 원활한 독서가 이뤄질 수가 없다. 구조(structure)란 돌출한 부분과 물러나는 부분이 있어야 형성되고, 긴장(tension)은 서로 다른 요소들끼리 대결을 벌일 때 발생하며, 원활(圓滑)한 독서는 규칙적인 곳에서, 지체(遲滯)의 독서는 전체 질서에서 일탈(逸脫)하는 곳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경화는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미적 구조를 획득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제 다시 <조직적(texture) 국면>으로 옮기어 질문해 보기로 하자. 앞의 번호를 이어 받아
일곱째로, <언어의 질감(質感)과 뉘앙스>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가를 검토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모든 시인들은 자신을 언어의 마술사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잠시 그런 욕망을 덮어두고 우선 언어를 <사물>로 보는가, 자기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보는가를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언어를 존재체(存在體)로 본다는 사람들은 어떤 표제어(標題語) 하나를 선택하고, 그에 따른 하위 의미를 나타내는 말들을 열거한 다음 그 말들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배경>을 거느리고 태어났으며, 그 말을 제시했을 때 그 옆에 어떤 사물들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가, 그리고 그런 풍경 속에 그 말이 지시하는 사물들이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가를 생각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가령 '길'이라는 어휘만 해도 그렇다. '길'의 종(種)을 나타내는 어휘로는 '도로', '신작로', '아스팔트 길', '인도(人道)', '차도(車道)', '페이브먼트'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다 같이 길을 지시하는 말이라도 탄생된 배경과 거느리고 있는 풍경이 다르다.
'길'이란 '산'이나 '언덕' 또는 '골짜기' 같은 것들과 구별하기 위한 표제어이고, 아마 언어의 탄생과 함께 사용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난 통로를 말한다. 이에 비하여 '도로'는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통로이고, '신작로'는 우리 나라의 경우 일제시대 만들어진 길로서 굵은 자갈이 깔려 먼지가 풀석풀석 나는 길이고, '아스팔트'는 60년대 이후 포장된 길이고, '인도나 '차도'는 도시의 소음을 거느리고 있으며, '페이브먼트'는 화강암을 네모나게 잘라 깐 서양의 중세 도시 감각을 지닌 어휘이다.
그런데, 이런 어휘에 다시 <시간>과 <공간>, 그리고 <화자의 심리 상태>를 첨가하면 또 달라진다. 다 같은 '아스팔트'라고 해도 비오는 날과 햇살이 쨍쨍 내려쬐는 8월 한낮의 아스팔트가 다르고, 비오는 날의 아스팔트도 무더위 끝에 소나기가 한 줄금 쏟아지는 아스팔트와 비에 젖은 가로수 이파리들이 쓸쓸하게 구르는 아스팔트가 다르고, 또 애인을 만나러 갈 때와 그로부터 헤어지자는 제안을 받고 돌아설 때의 아스팔트가 다르다. 그런데, 대부분의 시인들은 표제어나 종(種) 또는 유(類) 개념의 어휘를 구사하는 데 그치고 있기에 질문해 본 것이다.
여덟째로, 우리말에서 <리듬의 자질>이 무엇인가, 또 자기 시에서 <행(行)과 연(聯)>은 어떤 기준으로 나누어 왔는가를 생각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우선 우리말에서 리듬의 자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사람들은 흔히 리듬은 운율(韻律)을 좀 풀어헤친 '내재율(內在律)'이라고(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기로 하자. '내재율'이란 무엇인가? 아마 이쯤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답이 막힐 것이다. 하지만, 리듬이란 '운'이나 '율'과 같은 물리적 음성 현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현상으로서, 텍스트의 조직에 참여하는 모든 요소들, 그러니까, <의미론적>·<통사론적>·<어휘론적>·<음운론적> 층위들을 비롯하여, 형태적 자질들이 이루어내는 질서감을 말한다. 그러므로, 운율의 입장에서 따지려는 것은 음운과 통사의 두 층위만을 염두에 둔 정형율적 발상이고, 내재율이라는 설명은 동어 반복에 불과하다.
그 다음, 연과 행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연의 유형은 <비연시(非聯詩)>와 <연시(聯詩)>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행의 유형은 ①<시행(詩行)=율행(律行)>, ②<시행≤율행>, ③<시행≥율행>, ④<산문시행>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와 같은 유형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시를 쓸 때, 화제에 따라 유형을 달리 선택하는가, 언제나 같은 유형을 선택하는가를 따져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화제에 따라 달리 선택한다면, 각 유형에 따라 채택했던 화제의 성질을 말씀해 보시기 바란다.
아마 대부분의 시인들은 머뭇거리면서 '시란 이론으로 쓰는 게 아니야. 그냥 그때 기분에 따라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연과 행은 기분에 따라 자의적으로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어조와 리듬을 형성하는 장치로서, 숙고(熟考)되었거나 의미 단락이 여러 개로 나누어지는 화제일 경우에는 연시 형식을, 순간적으로 떠올랐거나 비일상적인 정서를 나타내는 화제일 경우에는 비연시로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고, 행의 설정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시행=율행>으로 나눌 경우에는 시행대로 읽는 것이 곧 율행대로 읽는 것이 되어 원활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시행≤율행>은 율행대로 읽으려는 관성으로 인하여 다음 시행의 일부를 끌어올리려 읽기 때문에 빠른 느낌을 주고, <시행≥율행>은 율행만큼 읽고 나머지는 끊어 읽기 때문에 치드런거리는 느낌을 준다. 또, 우리말은 음보(音步)와 음보의 대응(對應)에서 임의적 강약율이 형성되고, 제1음보의 마지막 음절과 제2음보의 첫음절에 임의적 악센트가(를) 부여된다. 그러므로, 둔중하고도 우울한 정서를 표현하려 할 때에는 말을 질질 끌 듯이 시행도 율행보다 크게 잡아야 하며, 원활한 정서를 표현하려 할 때에는 균등하게 잡고, 경쾌한 정서를 표현하려 할 때에는 짧게 잡는 것이 훨씬 어울릴 것이다. 그리고, 다급하고 혼란스러운 정서를 표현하려 할 때에는 불규칙하게 잡고, 제시한 어휘나 구절을 강조하려 할 때에는 강조할 말에 악센트가 가도록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학 작품은 어느 한 요소가 탁월하다고 해서 그 작품이 탁월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완벽한 구조와 조직을 갖춘 작품을 써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시인으로 존재하는 목적을 다 완수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므로, 다음 두 가지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홉째로, 이런 점을 고려하여 쓴 작품이 과연 유기적(有機的)인가를 따져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유기적'이라는 말은 영미 신비평(新批評)에서는 '생명체'와 동의어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나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은 '시스템(system)'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느 치차(齒車) 하나가 돌아가면 나머지 치차가 돌아가듯이, 또는 손톱 밑에 가시가 들면 겨드랑이 밑 임파선이 부어 오르듯이, 어떤 어휘를 택하면 그에 따라 문장도 단락도 플롯도 인물도 바뀌어야 하고, 반대로 어떤 인물을 선택하면 그를 둘러싼 배경과 상황에서부터 음운조직까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념적인 기준으로는 따지기 어려우니 자기 작품에 등장하는 화자를 중심으로 화자와 화제에 어울리는 배경과 상황을 부여했는가, 그런 상황에 부딪힌 화자가 무엇부터 말하고 싶어할 것인가, 그에 어울리는 비유적 구조를 취했는가, 화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전경화시켰는가, 그에 어울리는 어휘를 선택했는가, 그 어휘의 의미와 뉘앙스가 일치하는 음운조직인가를 살펴보는 방법을 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 열 번째로 내 작품이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검토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물론 '나는 커다란 야심이 없이 쓰는 것이 즐거워 그냥 쓰여지는 대로 쓸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이 질문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작품을 쓰고, 발표하는 행위는 <공적이며 사회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고 혼자 읽거나 같은 수준의 사람들끼리 동인회를 조직해서 돌려 읽을 게 아니라면 통시적(通時的)으로 그리고 공시적(共時的)으로 자기 작품이 어떤 변별성을 지녔는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 시인들 전체는 세계 문학 가운데 우리 시가 어떤 독자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위치가 어디쯤인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아마, 이 열 가지 문제를 검토해본 시인들은, 그렇다면 시란 시론을 공부한 사람만 쓰란 말이냐고 이의를 제기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네 시 수준은 어느 정도인데, 그렇게 건방을 떠느냐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첫 번째 이의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리고, 두 번째 질책에 대해서는 '죄송스럽습니다' 이다.
그렇다고 새삼스레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가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선대와 동시대의 작품들을 꼼꼼히 읽어 보고, 그 작품이 좋다면 왜 좋은가를 생각해 보고, 받아들일 것이 있으면 받아들이고, 못마땅한 것이 있으면 자기 작품에는 그런 것이 없나를 살펴보면서, 자기의 감수성과 문학관을 경신하라는 권유일 뿐이다.
문학 작품은 이론대로는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론은 자기 작품 가운데에 어떤 요소가 모자라고 과잉되었는가를 분석하고 가다듬도록 안내하는 길잡이가 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일정 기간 시를 쓴 사람들은 자기 작품을 재검토하고 또 새로운 시학의 수립에 전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못마땅하신 분들이 있다면 용서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