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깨닫고 난 후 한동안 보리수나무 아래 머물며 삼매에 들어 있었다.
삼매에 든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으신 내용이 매우 심오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하며 설하기 주저하고 있었다.
당시 부처님의 심정을 전하는<상응부경전>에는 ‘고생 끝에
겨우 얻은 이것을 또 남들에게 어떻게 설해야 하는가?
탐욕과 노여움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이 법을 알리기란 쉽지 않구나’ 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탐욕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지혜의 길로 이끌기 위해
부처님은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기로 결정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낡은 마음을 버려라”
이런 결심을 한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알리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다를 생각하여 그들을 찾아보았으나 이미 그들은 세상에
세상을 떠난 것을 알게 되었고, 다시 설산에서 함께 수행하던
다섯 수행자를 기억해내고 그들을 찾아 녹야원으로 갔다.
다섯 수행자는 부처님에게 고행을 포기한 타락한 사문이라고 비난한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그들을 향해 깨달음을 정하였다.
최초로 설하신 것은 중도(中道), 사성제(四聲諦),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이었다.
설법과 대화, 토론을 통해 맨 처음으로 교진 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나머지 수행자도 모두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들이 최초의 비구인 것이다.
초전법륜(初轉法輪)이 있은 후 부처님께서는 야사를 비롯한
60명의 젊은이들에게 법을 설하여 제자로 삼았다.
이런 사건들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들을 사람들은 부처님과 다섯 비구를
아라한(阿羅漢)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들은 함께 다니면서 많은 출가 수행자들과
재가신도(在家信徒)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부처님은 이들에게 각 지방으로 가서 진리의 가르침을 전할 것을 권유하면서
“비구들이여, 자! 전도(傳道)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하라.
사람 중에는 마음의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거니와 법을 듣지 못하면 그들도 악에 떨어지고 말리라.
들으면 법을 깨달을 것이 아닌가. 비구들이여!
나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로 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전도선언(傳道宣言)이다.
자신의 깨달음으로 타인과 함께 하려는 노력이 부처님의 전도선언에서 나타나 있으며
그들을 떠나보내기 전에 하신 다음과 같은 당부는 깨달음의 실천적인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수행자들이여, 출가한 사람으로서 법을 펼 때, 남의 존경을 받겠다는 생각을 내서는 안 된다.
남을 도울 줄 모르고 법을 위하여 먹고살려 하는 자는 ‘법을 먹는 아귀’와 같은 자다.
또 너희가 전하는 법을 듣고 사람들을 기뻐할 것이고 그럴 때 너희들은 교만해지기 쉽다.
사람들이 법을 듣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자기의 공덕으로 생각하면
그는 벌써 법을 먹고사는 아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법을 먹고사는 아귀가 되지 않도록 항상 겸손해야 한다.”
부처님은 우루벨라로 가서 당시 가장 이름 있는 종교가였던 가섭 삼형제를
교화하여 가섭 삼형제와 그들의 제자 1,000명을 부처님의 제자로 받아들였다.
왕사성의 종교가를 모두 교화한 이 사건은 국왕과 백성을 모두 놀라게 하였고,
국왕인 빔비사라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게 되었다.
특히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이 우기(雨期) 동안 머무르시며 가르침을 펴실 수 있는
사원을 기증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이다.
부처님이 최초의 설법을 하시고 승단이 만들어졌던 당시에 부처님과 제자들은
아무 곳이나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면 나무 밑이나 동굴, 계곡 등 바깥에서 기거하였다.
이는 출가 수행자들이 안주할 수 있는 집을 갖지 않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우기를 베나레스에서 지낸 후부터는 빔비사라 왕이
기증한 죽림정사에서 우기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라자가하의 유복한 상인이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이
기거할 수 있는 승원을 기증하겠다고 부처님의 동의를 구하였다.
그들은 단 하루 동안 죽림공원에 집을 지었고,
그 다음날 부처님과 제자들을 공양에 초대하였다.
그리고 그 집을 승단에 기증하였다.
그 날, 상인의 누이동생의 남편인 수단타가 일 때문에 라자가하에 왔다가
상인의 집에 들렀지만, 부처님과 제자들을 모실 준비로 분주한 상인의 집에서는
아무도 수닷타를 맞이하는 사람이 없었다.
수닷타가 이에 불만을 품고 있을 때, 상인이 부처님과 제자들을
모실 준비를 끝내고 수닷타에게 다가와 이유를 설명하였다.
호기심이 생긴 수닷타가 그 다음날 아침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죽림정사를
찾아갔을 때 부처님은 밖에서 산책 중이셨는데 수닷타를 보고
그의 이름을 친히 부르시자 이에 감격한 수닷타는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 발밑에 엎드려
가르침을 받고 재가신도(在家信徒)가 되었다.
부처님께 자신의 마을에서 다음 우기를 보내시라고 청한 수닷타는
자신의 마을인 사밧데이로 돌아와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실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이상적인 장소를 찾아내었으나 그 장소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제다 왕자였다.
제다 왕자는 자신의 공원에 금화로 융단을 깔아 놓은 것처럼
해 놓으면 공원을 수닷타에게 팔겠다고 하였다.
수닷타는 자신의 하인들을 시켜 공원을 금화로
깔았으나 문 가까이에 조그만 공간이 남게 되었다.
이에 금화를 가져오게 하였고, 제다 왕자는 자신의 계약 조건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나머지 토지를 기증하였으며, 그 곳에 벚꽃 문을 만들게 하였고,
수닷타는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물 수 있도록 건물과 그 이외의 시설물들을 세웠다.
이곳을 젯다바나 승원, 즉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 하였고
그 후에 이곳이 부처님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0대 제자의 한 분인 사리불과 목련건이 제자 250인과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과 마하가섭이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으며,
왕사성의 죽림정사는 사위성의 기원정사와 함께 전도의 양대 거점이 되었다.
부처님은 성도하신지 몇 년 후에 고향인 카필라국에 가서 부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여 역시 10대 제자의 하나인 아난과 라훌라,
아니롯다, 우바리 등의 제자를 출가시켰다.